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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착한 사람들이야"

 
남자아이는 활발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41개월,
다행히 어린이집 가는 걸 아주 즐거워 합니다.

하지만 사교적이고 오지랖 넓은 것과는 거리가 먼 엄마, 아빠를 닮아서인지
수줍음도 많고, 적응하는데 시간도 좀 걸리는 편이고, 낯가림도 꽤 있죠.
또 뭔가 낯선 상황이나 위협적인 상황이면 잘 대처를 못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어린이집에서 한 살 어린 동생이 장난으로 밀거나 깨물거나 하면,
자기가 힘이 훨씬 쎈데도 선생님을 빤히 쳐다보다가 울기가 일쑤라고 합니다.
뭔가 억울한 마음이 드는거겠죠.
다른 사람도 아닌 제 유전자를 받은 탓이니 어쩌겠나 하면서
조금 더 크면 제가 그렇듯 이렇게도 불편한 사회생활이지만,
대강 잘 하는 척 흉내내면서 살아가겠거니 하면서 지켜보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부모의 맘이란 건 항상 조바심 덩어리,
아빠된 마음은 그러고도 마음이 안놓여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한 서너달 전의 일인 것 같은데
그날도 퇴근해서 어린이집 선생님을 통해 종종 듣던 아이의 근황을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던 중이었습니다.

"어린이집에서 재혁이 아야 하게 하는 사람 없어요?"
"없어"
"요즘은 정준이 동생이 재혁이 깨물고 그런 일 없어?"
"없어"
"재민이 친구가 재혁이 툭툭 때리고 그러지는 않았나요?"
"아니"

지금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훌륭하신 분들이라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만, 
어린이집에서 일부 선생님들 이야기가 자꾸 나오던 때라 노파심에 그도 한 번 물어봅니다.

"선생님이 재혁이 아야 하게 하는 일은 없나요?"
"없어"

단답형으로 대답을 이어가던 아이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빠가 왜 자꾸 그런 질문을 하는지 눈치를 챘다는건지
마지막 '없어'라는 대답 후에 잠깐 멈추었다가 곧이어 말을 하더군요.

"모두 다 착한 사람들이야"

레고블럭을 계속 하면서 무심한 듯이 툭 던지듯 하는 아이의 대답에서 작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만 세살된 내 아들이 이런 생각과 말을 할 수 있다는데 놀랐고, 기특했습니다.
그리고 40개월도 안된 아이에게서 이미 내가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내가 배운 인생의 지혜 몇 가지는 꼭 전달해줘야겠다,
그러면 행복하게 사는데 분명히 도움이 될거야 라는 생각으로 그런 내용들을 정리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조금은 다른 생각도 하나 머릿 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아이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
이미 아이는 내가 모르는 것들을 알고 또 깨닫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아이라는 이유로 가볍게 간과하지 않으려고 꽤나 노력해야겠다는 점입니다.
그런 노력이 있어야만 제가 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아이와 함께 제대로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를 키울수록 정말 작은 하나의 독립된 우주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는 부모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배우고, 느끼고, 기억합니다.
그래서 나와 가장 가깝고 가장 많이 닮았지만,
분명히 나와는 다른 인격체이고 그에 걸맞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번에는 아이가 또 어떤 대화로 즐겁고 작은 충격을 줄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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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어린이집 다니던 몇 달 전에 써놓았던 글입니다.
올해부터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죠.
몇 달 지났다고 또 기억이 새롭네요.
 
 
댓글
  • 조언수집가 2017/09/08 22:44

    유치원 졸업할 즈음에
    쓴 우유를 마시며
    세월 참 빨라.. 인생 덧없어~

    (36BLcp)

  • 어떤 2017/09/08 23:17

    음 졍말 공감돼요 사람은 어느정도 만들어져서 태어나는것 같아요

    (36BLcp)

  • 하얀콩떡 2017/09/09 00:15

    그 부모에 그 아들
    댁이 훌륭하니 아들이 어찌 어질지 아니한가

    (36BLcp)

  • 라쿨 2017/09/09 00:17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던지요.
    41개월 재혁이의 주변 사람들이 모두 다 착한 사람이어서 감사하고, 모두 다 착한 사람임을 아는 재혁이도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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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뜬금쟁이 2017/09/09 07:30

    만 두 살배기의 아빠가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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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nwood0 2017/09/09 12:17

    예전에 우주문명에 관한 책을 읽은적 있는데, 인상적인게 아이들을 스승으로 여긴다는거
    왜냐하면 이제 막 천계에서 온 존재이기때문에 천성이 오염되지않아 하늘뜻을 배울수 있다는 개념이였죠
    아이를 볼때도 단지 나보다 어린 존재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된 영혼인가
    새로 태어난 몸은 어리지만 오래된 영혼일수록 현명하지요
    거기에 접속되는 부모님을 만나는거고
    현명하지만 어쩔수없게 사람들에 화들짝 놀라는 경우가 있겠죠..
    그럴때 너무 힘들어하지않고 시간을 너무 지체하지 않고..그래서 피해의식 생기지않고..그랬으면 좋겠네요
    부모님이 현명하셔서 다행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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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베루미 2017/09/09 12:32

    원래 애기들은 삼라만상을 다 알고
    태어나는데 말 배우면서 잊어버린대요.
    17개월 조카한테도 많이 배우는 걸 보면
    맞는 말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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