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또 시작됐습니다.
추위는 잊은 지 오래고 따스한 봄날은 언제 찾아왔었는지도 모르게 지나쳐버렸습니다. 거리의 아스팔트가 끓어오르고, 도심의 수많은 에어컨들이 일제히 가동을 시작했어요. 길을 오가는 행인들의 이마에는 땀이 맺히고, 무거운 더위의 침묵이 세상을 내리누르는 것 같습니다.
아직 장마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덥다면, 이번 여름의 더위는 꽤나 기대가 되겠습니다. 저와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겠지만요.
전 그럭저럭 규모 있는 회사의 본사건물 관리자입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 보내는 편이고, 사실 창문도 없는 사무실이라 밖의 사정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일 년 내내 거의 비슷한 기온이 유지되는 사무실이거든요. 각종 전자 장비들의 성능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답니다.
더위나 추위는 저와 별 상관이 없습니다. 뜨거운 사랑이나 차가운 이별이 저와 별 상관이 없는 것과 같아요. 제가 일하는 공간이 제 현실입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혼자 시간을 보내며 모니터로 사람들을 관찰합니다.
다른 관리직원들과의 관계가 있지 않느냐고요? 사실 제가 낙하산이거든요.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긴 했는데, 적지에 떨어진 낙하산입니다. 저를 인정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제 자리가 언제까지 보장될지도 전혀 알 수 없는 낙하산이거든요. 대부분의 다른 직원들은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합니다. 차라리 제가 말단으로 들어왔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박해진 씨.”
“네”
“점심 먹고 오셔야죠.”
“네”
저를 부른 사람은 사실 저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직원입니다. 저보다 4살인가 많은 보안업체 출신 직원인데, 제가 오는 덕에 당분간 진급이 막혀버린 사람이에요. 당연히 저를 싫어하죠. 그래서 일부러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제 사무실에 찾아와 저렇게 놀립니다.
제가 구내식당에 가지도 않고, 밖에 나가서 점심을 먹지 않는다는 걸 알거든요. 전 이 회사에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절대로 사무실을 나가지 않아요. 출근할 때 준비해온 샌드위치나 간식거리로 간단히 요기를 합니다.
왜 이러고 사냐고요? 제가 사실 대학중퇴에 전과자라서요. 이 직장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여길 떠나면 반드시 힘들어지니까요. 얼핏 감옥 같아도 퇴근은 할 수 있잖아요. 여기에서 조금 더 버텨볼 생각입니다.
모니터들을 관찰합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적절한 관리직원을 호출해 해결하게 하는 게 제 일입니다. 회사 내부뿐만 아니라, 회사근처의 도로와 골목에 연결된 cctv도 확인합니다. 정말 할 일이 별로 없다는 얘기입니다. 매우 심심하죠.
가끔 찾아보는 녹화영상이 있습니다. 유성현이라는 녀석이 차준호라는 과장을 두들겨 패는 영상인데, 그냥 보고 있으면 시원합니다. 원래는 허가 없이 시청할 수 없는 게 원칙이지만, 저는 매우 한가하다고 했잖아요. 방법을 찾아내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영상을 볼 때마다 민아가 떠오른다는 게 문제이긴 한데, 덕분에 통쾌함도 더 커지니까 상관없어요. 유성현과 차준호의 역할이 바뀌어도 좋았겠지만, 지금의 영상도 나쁘지 않아요. 두 남자 모두가 송민아와 영원히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송민아와의 관계라면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아졌잖아요.
“삐익! 삐익! 삐익! 삐이이이익!”
이 놈의 호출소리 좀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뭔가 신경을 거스르는 호출소리에 놀라서 영상을 끄고 인터폰을 받았습니다.
[박 팀장. 뭐해요? 정문 앞 좀 확인해줘요]
[네]
문제가 발생하면 저를 팀장으로 부릅니다. 자기들이 해결하기 귀찮은 일이라는 얘기죠. 저는 당연히 그들에게 일을 시킬 권한이 있습니다만, 지금 제가 모니터로 보니까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니네요.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거대한 쓰레기가 나타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작은 구식 승합차가 회사 정문 앞에 서 있습니다. 보안직원들을 보내서 해결해도 괜찮겠는데, 가만 보니까 이미 보안직원들이 도착해 있더군요. 보안직원들의 권한으로 해결하기 곤란한 일인 모양입니다.
출근해서 화장실을 다녀오는 걸 제외하곤 처음으로 사무실을 나왔습니다. 게다가 건물 밖으로 나오기까지 했네요. 아직 장마가 오기 전이라 건조하고 따가운 햇살이 저를 후려칩니다. 저절로 미간을 잔뜩 찌푸리게 되네요. 귀찮고 짜증나서 그런 게 아닙니다.
“무슨 일이시죠?”
“죄송합니다. 저희 차가 고장이 났는데, 아픈 친구가 있거든요. 앰뷸런스랑 보험회사에서 올 때까지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차가 고장 난 장소가 하필 우리 회사 건물 앞이었고, 아픈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앰뷸런스와 보험회사가 도착하면 해결될 일이겠는데, 하필 회사 vip진입로입니다. 임원들 중에 누구라도 지금 도착한다면, 우리와 함께 차를 견인해줄 보험회사를 기다려야겠네요.
저를 부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결하는지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혹시라도 임원이 도착했을 때 저와 마주치게 하고 싶기도 했겠죠. 일단 사설견인업체를 불러서 차를 빼게 했습니다. 보험회사보다는 훨씬 빠르니까요. 진입로를 확보했으니까 제 할 일은 끝난 줄 알았어요. 그분들이 수녀들만 아니라면 말이죠.
아프다는 분이 차에서 내리질 못하더군요. 얼핏 보니까 상당히 고통스러워 보였어요.
“괜찮으세요?”
그 수녀분이 대답대신 피를 토했습니다. 그 순간 상무님의 차가 진입하고 있었어요. 상무님이 무슨 일이냐고 하시기에, 차 좀 빌리자고 했습니다.
“뭐?”
“수녀님이 아픈데, 지금 당장 병원에 가야겠어요. 앰뷸런스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차 써~”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합니다.”
“아이~ 씨. 뭐냐 너?”
투덜거리면서도 상무님이 내렸습니다. 수녀님들을 차에 태우고 기사님에게 출발하자고 했어요. 기사님이 상무님의 눈치를 보니까, 상무님이 손을 휘휘 저으며 가보라고 했습니다. 일단 출발하니까, 기사님이 운전 실력을 보여주시더군요.
“꽉 잡으세요.”
대낮의 도심을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사님이 왜 상무님의 전용기사 노릇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어요. 레이서가 적성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놀라운 질주였습니다. 비상깜박이를 켜고 눈앞의 모든 차들을 추월하며 달렸습니다.
“기사님 이래도 괜찮은 거예요?”
“우리 뒷자리에 피를 토한 수녀분이 계시죠?”
“네”
“누가 우릴 막을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 제게 이런 기회가 올 줄 알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경찰차가 뒤에 따라붙었지만, 기사님은 응급실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응급실 앞에 도착해서는 제가 피를 토한 수녀님을 들쳐 업고 달렸습니다. 기사님은 도착한 경찰에게 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더군요.
피를 토한 수녀님이라는 게 상당히 충격적인 모습이었나 봅니다. 그 복잡한 응급실에서도 모두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어요. 간호사와 의사가 그렇게 빨리 달려오는 건 처음 봤습니다. 침대에 눕힌 수녀님을 확인한 의사가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수술실 잡으라고 외치는 것도 실제로는 처음 봤어요.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닌 모양이네요.
몇몇 사람들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더군요. 저는 수녀님이 토한 피를 잔뜩 묻힌 채, 또 땀을 뻘뻘 흘리며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사람을 죽여 달라는 사주를 받았던 제가, 수녀님을 구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모든 언론에서 저를 다뤘고, 차를 빌려준 상무님도 인터뷰에서 저를 칭찬했습니다.
“원래 믿고 있던 직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차를 달라고 요구했을 때.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죠. 제 차에 수녀님의 피가 좀 묻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성스러운 희생입니까.”
상무님이 저를 알았을 리도 없고, 그 때 상당히 투덜거렸다는 건 비밀이 되었습니다. 우리 관리팀의 다른 직원들도 인터뷰를 했더군요.
“좋은 사람이에요. 항상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분이시죠. 어린 나이에 관리 팀장이 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죠. 우리 회사의 관리팀은 언제나 회사의 보안보다 사회와의 상생을 우선으로 생각한다고 말씀하신 분입니다.”
아마도 누군가 대신 인터뷰 내용을 써 준 것 같습니다. 제가 저런 말을 한 기억도 없을뿐더러, 인터뷰한 그 직원과는 1분 이상 대화를 나눠볼 기회도 없었습니다.
영웅이 된다는 건 꽤 좋은 일입니다.
“관리 책임자가 하루 종일 모니터를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교대 인원을 새로 채용하고 우리 박해진 팀장은 관리를 하세요. 관리자 아닙니까?”
“아니. 부장님. 전 괜찮은데요.”
“어차피 용역업체와 계약이 곧 끝납니다. 정규직이 몇 명 더 늘어날 뿐이에요. 결국 관리인원은 전과 같아질 겁니다. 그냥 그렇게 하세요.”
인사팀의 박 부장님이 직접 찾아와 신규인력을 충원하라고 했습니다. 좋은 일이에요. 제가 직접 사람을 뽑아 쓰라고 했거든요. 이제 아무도 저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참. 박 팀장님. 팀장님이 구한 우리 수녀님을 병문안 가셔야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잘 회복하고 있다고 합니다. 가능하면 회사로고가 박힌 유니폼을 입고 가셨으면 좋겠는데.......유니폼을 새로 준비하라고 할게요. 아니. 아니에요. 그 유니폼은 어쩐지 느슨한 느낌이 드니까 몸에 딱 맞는 옷으로 맞춰 봅시다.”
“유니폼을 맞춰서 입는다고요?”
“네. 미용실을 하나 소개해 줄 테니까 꼭 들렀다가 가시고, 차는 그때 그 상무님의 차를 그대로 사용하도록 합시다. 일단은 언론을 피해 조용한 만남을 진행한다고 소문을 내겠습니다.”
“언론을 피해 소문을 낸다는 말이 무슨?”
“업계용어에요. 좋은 일은 엉성하게. 나쁜 일은 더 나쁘게. 애매하면 꼼꼼하게”
“아. 네. 뭐. 모르겠네요.”
박 부장님에게는 아쉬운 일이겠지만, 수녀회의 요구로 우리는 정말 조용한 만남을 가져야 했습니다. 굉장히 보수적인 수녀회라는데, 카르멜인가 가르멜인가? 전 잘 모르겠습니다. 얼핏 듣기로 외부와의 만남을 완전히 차단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한답니다. 저런 미녀가 그런 수녀님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였어요.
“안녕하세요. 수녀님.”
“저를 구해주신 영웅이시라더군요.”
“아뇨. 뭐. 누구라도 그랬겠죠. 수녀님이 괜찮으셔서 다행입니다.”
“사실. 전 아직 수녀가 아니에요. 서원하기 전입니다.”
“그게 뭐가 다른지 전 잘 몰라요.”
“평생 주님의 종이 되기로 결정하기 전이라는 말이에요.”
“역시 잘 모르는 얘기지만, 뭔가 대단한 일이겠네요. 평생이라니.”
“잘 모르시는 군요.”
“네. 뭐~ 제가 지금 수녀님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몰라요. 저도 최근 사람들과 거의 차단 된 삶을 살고 있거든요. 물론, 수녀님을 구한 덕분에 이젠 그러지 않겠지만.”
“그렇군요. 저 그때 당신의 등에 업혀 있을 때도 의식이 있었어요.”
“그랬던 것 같아요. 수녀님이 제 목을 감아주셔서 쉽게 달릴 수 있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저를 보면 왜 수녀가 될 생각인지 궁금해 하던데, 영웅께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네요.”
“아. 뭔가 대단한 일이 있었던 거 아닐까요? 신을 만났다던가하는 특별한 경험을 해야 그렇게 종교에 귀의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수녀님 같은 미인이라면 특히나 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전 수녀가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왜요?”
“글쎄요.”
제가 물을 수 있는 질문도 아니었지만, 수녀님이 제게 그런 말을 해주는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간단히 안부 인사나 나누게 될 줄 알았는데, 굉장히 어색해져버렸습니다. 수녀님이 창밖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말했어요.
“영웅님. 우리 이제 기자님들에게도 기회를 줘야겠죠?”
“제 이름은 박해진이에요.”
“알아요. 영웅님.”
기자들이 들어와 사진을 찍게 허락했어요. 우리가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누진 못했습니다. 이제 그걸로 제 영웅 놀이는 끝난 줄 알았어요. 약간의 표창장을 받고 모든 일들이 마무리 될 줄 알았습니다.
장마가 시작된 첫 주말이었습니다. 누가 찾아와서 문을 열어줬더니, 제가 구한 수녀님이네요.
“안녕하세요. 영웅님?”
“네?”
“제가 수녀가 되려고 했던 이유를 말해주고 싶었어요.”
“아....... 왜요?”
“영웅이 하셔야 할 일이에요.”
이제 정말 여름이 시작되고 있어요.
계속.
이 수녀분은 과연 누구실까요?
잘 보고 있습니다.
해피엔딩으로 갈리가 없으니 저 예비수녀님은 예전 박해진이 건드린 여자일꺼 같네요 ㅋㅋ 그 군대있을 때 후임 여친 정도면 적당하겠네요 ㅋ
영웅호걸박해진...
수녀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오늘밤 잠못이를듯 하네요.
수녀가 누구인지 진짜 궁금하네요. 군대 후임 여친같기도 한데 그정도면 못알아봤을리 없을테고...
와 상무랑 관리팀 직원 인터뷰에서 한 말 진짜 기가 막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러분들의 댓글을 읽으니, 제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쓰고 있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네버엔딩스토리가 아닙니다. ㅎㅎ
[리플수정]작가님 바쁘신가 보네요. 무리하지 마세요. 기다릴 수 있습니다.
바쁘시구나 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