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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30년 만에 갚는 채무, 30년 만에 목놓아 부르는 진혼곡.. 영화 "1987"을 보고... (스포 포함 장문)
영화 "1987 (1987: When the day comes)"을
보았습니다.
'지구를 지켜라',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로
이미 그 비범한 재능을 입증한 '장준환' 감독의
4년 만의 신작입니다.
사건과 관련된 대부분의 인물들이 생존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대사,
게다가 상당수의 관객들이
스스로 체험했거나 너무도 잘 알고있는
인물들과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기에
기획, 제작 단계부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죠.
우선...
이 리뷰를 쓰고있는, 휴대폰 자판 위의
제 손이 떨리고 있음부터 고백합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간절히 기다렸던 영화이기에
영화를 보기 전 두려움부터 앞섰습니다.
그 두려움은 장준환 감독이
이 작품을 만들기로 마음먹었을 때의 두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팩트와 픽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누구를 중심으로, 누구의 시선으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
쉽게 휘발되는 감동이 아니라
온 몸이 느끼는 감동을 어떻게 축조할 것인가.
거부감 없이 어떻게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가...
이러한 고민은,
우리의 역사, 근현대사를 소재로 했던
그 수많은 영화들이
그 선택과 집중에 성공하지 못했거나
작품성과 상업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시도에서 만족스럽지 못했던
경험에서 비롯됐겠죠.
관객들은 불만족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 정도라도 이야기해주는 게 어디야.'
라는 심경으로 응원을 하곤 했습니다.
제 두려움은
이 영화마저 그런 부류에 포함되면 어쩌지..였고,
제 소망은
하고싶은 이야기를 멋지게 말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한 수 접어준 상태로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영화의 밀도부터...
139분의 러닝타임 내내
단 1초도 시간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강약과 완급의 조절이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덜어냈으면 하는 씬이 한 씬도 없으며
한 마디 대사도 허투루 쓰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재미있고
긴장감을 쌓아가는 방식이 치밀합니다.
이한열 열사의 유품을 찍은 사진에서 발견된
'타이거' 운동화를 매개로 이어나가는
감정과 정서의 연결도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영화의 중심이 여러 인물들에게 분산되어
'산만하다'라는 비판이 가능하겠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1987년 6월 항쟁이
한 명의 영웅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박종철' 열사에게서 '이한열' 열사에게로,
'최검사'에게서 '연희'에게로,
마치 계주경기에서
이전 주자에게 받은 바톤을 손에 쥐고
전력질주해서는
다음 주자에게 그 바톤을 넘겨주는 식으로
영화의 주인공이 계속해서 바뀌어가는,
그리고 마침내 그들 모두가 주인공이었음을 깨닫는,
희한한 체험을 하게 합니다.
게다가 그 체험은 역사적 진실과도
일치하는 것 아닐까요.
반대로 악의 축은 '박처장'에게로 집중시키죠.
왜곡된 신념으로 무장한 채
부정하고 부패한 권력의 개가 되어
부하들에게 명을 받들게 강요하는 박처장은,
저항과 투쟁의 목표점을
수렴시키고 수렴시킨 인물입니다.
이렇게 영화의 중심을 분산시키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내노라하는 주조연배우들은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충분하게 납득한 것으로 보이며
거대한 돌탑에 작은 돌 하나를 쌓아 올리는,
자신의 몫을 다한 채 묵묵히 퇴장합니다.
수천개의 점이 찍혀져 완성되는 점묘화처럼...
수십개의 악기가 모여 완성되는 교향곡처럼...
시대적 고증, 미장센, 조명, 촬영...
역시 빼어납니다.
몇몇 장면들은 감탄스럽기까지 합니다.
특히,
박종철 열사의 시신을 화장한 후
유족들이 그 재를 강에 뿌리러 가는 과정에서
수직의 부감으로 여러 갈래 길을 보여주는 씬,
얼어붙은 강에서 차마 떠나가지 못하는
재를 놓아주려 아버지가 강으로 뛰어드는 씬은
아마 수백번을 다시 보게될 것 같습니다.
연희가 잿빛 의복으로 도배된 무채색의 거리를
헤드폰을 쓰고 빨간 코트를 입고 무심하게 지나치는 씬은
'쉰들러 리스트'의 소녀와 중첩되어 보이고,
연세대 앞 백골단을 상대로 하는 데모씬은
웬만한 전쟁영화의 전투씬보다
더 처절하고 장엄합니다.
다음은 연기에 대한 평가입니다.
우선 '김윤석'...
상투적이다,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기존의 비난을 거두어 주시길...
'타짜', '추격자', '황해'의 그를,
추월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던 자기 자신을
멋지게 넘어섭니다.
배역에 대한 헌신과 몰입은 물론,
박처장이라는 한 인간의 내면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다음 '하정우'...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묘한 여유와 낙관의 분위기입니다.
엄혹한 현실 앞에서 그가 내뿜는 낙관의 공기는
때론 울분의 분출보다 더 통쾌하죠.
'김태리'...
전작 '아가씨'에서
될 성부른 나무의 떡잎을 보여주었던 그녀는
어느새 제법 큰 나무로 자랐습니다.
연희의 무관심과 냉소와 외면이
뜨거운 동참으로 이어지는
그 감정의 결을, 그 각성의 과정을
훌륭하게 담아냅니다.
설경구, 유해진, 박희순, 이희준, 강동원, 김종수, 박경혜...
심지어 이름 모르는 단역 배우들까지 포함해서
배우들 모두 다 칭찬해드리고 싶지만
이 정도로 줄임을 용서해주시길..
메시지...
영화 "1987"이 전달하고자했던 메시지는
역사적 진실과 정의에 대한 갈구입니다.
그 메시지가 응답받는 데
무려 30년, 한 세대가 흘러갔습니다.
그 사이의 시간은 어쩌면
진실과 정의가 진공된 시대였습니다.
먹고 살아가는 데 치였다는 핑계로,
반복되는 실패에 좌절했다는 변명으로,
또는 무지와 판단착오로
우리들 대부분은 진실과 정의를 외면했고
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게다가 일부는 뻔뻔하게 변절함으로써
쓰디 쓴 배신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87년 6월 항쟁이 점화시킨 불씨는
다행히도 완전히 꺼지지 않았습니다.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촛불혁명으로
우리는 비로소
자랑스럽고 떳떳한 지도자를 가지게 되었고
나라다운 나라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비로소
양어깨에 짊어졌던 역사적 부채와 죄책감을
조금은 덜어낸 채
1987년을 돌이켜보게 된 것은 아닐까요.
최소한도 제가 이 영화를
그리도 간절하게 기다렸던 이유는 그렇습니다
엔딩씬...
모두가 힘을 합쳐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목놓아 외치는
항쟁의 찬가는, 그리하여...
30년 전, 아니 그 이전부터
이 땅의 독립과 민주화와 정의를 위해
비참하게 희생된 그 숭고한 영혼들을 기리는 진혼곡으로,
동시에, 1987년과 2017년이라는 두 시대가
역사의 강을 마주한 채
서로에게 불러주는 위무의 노래로 들렸습니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물론, 아직 '그 날'이 온전하게 오지 않았음을 압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그 영혼들이 남겨준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그 날을 제대로 만들어보자고,
다시 한 번 힘을 내
함께 살아가자고, 버텨내자고,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장준환 감독과 모든 배우들, 스태프에게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면서...
이 영화 "1987"의 울림이
더 멀리, 더 깊게 퍼져나가길 소망합니다.
나는
이 영화가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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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림푸스 처음왔습니다.펜5 사용에 대한 몇가지 질문있어요. [4]
- 닥터마리오 | 2017/12/28 01:00 | 5671
하악 닉부터 예사롭지 않으십니다
잘 읽고 갑니다
park61// 추천 감사드립니다. 닉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어느 영화의 제목일 뿐입니다.^^
아..예전부터 영화관련글은 잘 읽고 있습니다
이번 영화와 유난히 더 어울리는듯 해서 ㅎㅎ
park61// 그럴 수 있겠네요. ^^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리플수정]오늘 영화를 보고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심정을 글로 표현해 주셨네요
스크랩 해놓고 가끔씩 읽어볼게요
감사합니다~
싸와디// 공감해주시니 기분 좋습니다.^^
글 너무나도 기다렸습니다!!
저도 어제 조조로보고 그냥 제가 느낀 감정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적어주셨네요!!
다시한번 감사드려요...첨부터 끝까지 그냥 다 팍팍 와닿네요
"너무도 오랫동안 간절히 기다렸던 영화이기에 영화를 보기 전 두려움부터 앞섰습니다"
이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정말 너무나도 잘 알고있습니다..저역시 똑같은 감정이었습니다..
택시운전사가 개봉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어요..ㅎㅎ
"관객들은 불만족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 정도라도 이야기해주는 게 어디야.
라는 심경으로 응원을 하곤 했습니다.
제 두려움은 이 영화마저 그런 부류에 포함되면 어쩌지..였고,
제 소망은 하고싶은 이야기를 멋지게 말해주었으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짜 캐공감합니다...저역시도 이러한 근현대사를 다루는 영화들이 제작된다는 소식을 들을때 가장 걱정되는 두려움입니다!!!
타이거 운동화를 매개로 이어나가는감정과 정서의 연결과 박종철님의 아버님께서 강에서 떠나지못하는 재를 다시 보내려는 그 장면...
하...진짜 너무나도 통곡하면서 봤어요..ㅠㅠ
오늘은 혁명전야님의 글을 복사해서 저의 감정을 부연설명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그냥 저의 감정을 하나하나 다 꿰뚫어보시는 듯한 완벽하게 저의 감정을 고대로 들킨 것 같은 느낌의 글이어서요..
영화감상한지 하루밖에 안지났으며 글을 읽고있음에도 그냥 가슴이 먹먹하고 울컥합니다!!
영화못지않게 이렇게 글만으로도 생생한 기억을 되살려주신거에 대해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글 너무나 기다렸는데 어떤 영화로 돌아오실지 기대했는데
1987을 들고오셔서 다시 함 넘 고맙습니다!!^^
안녕요정// 안녕하셨죠 요정님...^^ 어제 저녁 8시에 목욕재계하고 무슨 중요한 의식이라도 거행하는 심경으로 영화관에 입장했답니다. 제발 멋지게 뽑힌 영화이길 빌면서... 영화 시작 십분만에 걱정은 사라졌고 몰입해서 즐겼습니다.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 박종철, 이한열 두 열사의 죽음과 관년된 것이었죠. 눈물을 쥐어짜지 않고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안녕요정// 먼저 박종철 열사의 부검, 화장, 재 뿌리기...게다가 "종철아, 아부지는 할 말이 없대이."라는 그 유명한 대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재빛 하늘, 흩날리는 눈, 얼음 위에 달라붙어버린 재를 손으로 떼내면서 오열하는 아버지...김종수 배우죠. 아...어떻게 이런 묘사를 생각했을까..존경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표현이었고 미학적으로도 너무나 훌륭하더군요.
안녕요정// 이한열 열사의 죽음장면에서의 촬영도 대한민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을 수준의 훌륭한 촬영이었네요. 엔딩씬에서 축적된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내공도 어마무시했구요. 감독이 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배려와 정성은 별 다섯개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7~8000편의 영화를 보면서 별 다섯개를 준 영화가 50편이 안됐는데...1987에 드리고 싶네요. 메시지와 주제의식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영화적 완성도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