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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대단한 빌머 이야기

뱀에 물려 혼수상태에 빠진 '빌머'는 꿈속에서 사신을 만났다.

[ 나이 마흔이면 많이 살았지? 이제 가자. ]

빌머는 갑작스러운 죽음이 너무나 억울했다. 누군들 그러하지 않겠느냐마는, 자신은 더 그랬다.
그는 어려서부터 뭐하나 빠지는 게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지능, 건강, 외모, 매력 모든 게 그랬다.
정식으로 풋볼 경기를 뛰기도 했고, 하버드대 수석이기도 했다.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뒤에는, 언젠가 노벨상을 탈 것 같은 사람으로 언제나 그 이름이 거론되곤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고작 뱀에 물려 죽다니?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빌머에게, 사신이 말했다.

[ 좋다. 네가 그렇게 스스로 특별하다면, 한 가지 방법은 있지. ]

사신은 도서관에 있는 어떤 청년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빌머가 전혀 모르는 청년이었다.

[ 다른 인간의 목숨 하나를 희생해서 네 목숨을 구하겠느냐? 그러겠다면 저 청년의 목숨을 대신 가져가겠다. ]

빌머는 청년의 얼굴을 보며 난감해졌다. 너무나 어렸다. 미래가 창창해 보였다.
그렇지만 죽기는 싫었다. 
빌머는 자기도 모르게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사신은 웃으며 청년에게로 사라졌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빌머의 주변에서 '기적'이라는 말들이 쏟아졌다.
빌머는 인상을 찌푸렸다. 기적이 아니라 거래였다. 추악한 거래!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이후, 빌머의 인생관이 달라졌다. 그렇게 거들먹거리던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알게 되었다.
자신이 과연 그 청년보다 가치 있을까? 주변에서 대단하다고 띄워준들, 죽음 앞에서 다 똑같은 것을.

하루하루가 새삼스러워진 빌머는 당장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억울하게 죽은 청년을 생각하면, 자신은 꼭 특별한 사람이어야 했다. 세상을 바꿀만한 업적을 남겨야만 했다.
그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이를 악물었다. 그동안 진행하던 느슨한 연구들을 모두 때려치우고, 힘들고 어려운 연구에 몰두했다.

거의 24시간 사생활도 없이 연구에만 매달려 산 생활이 한 달. 도저히 피곤을 참지 못하고 잠이 든 빌머는 까무라칠 뻔 했다. 
사신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 한 달이 지났군. 목숨을 거둬가야겠는데. ]

빌머는 항의했지만, 사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했다.

[ 네 수명은 원래 그게 끝이었는데 미뤄준 거다. 한 달이나 지났으니 '연체료'를 받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자, 선택해. 이번에도 다른 인간의 목숨 하나를 희생해서 네 목숨을 구하겠느냐? ]

사신은 계단에 기대어 담배를 피는 청년 하나를 보여주었다.
빌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그의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사신은 웃으며 청년에게로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빌머는 허탈했다. 죄책감과 피로가 몰려왔다.
연체료라니? 자신은 평생 몇 명을 죽여야 할까? 한 달에 한 명씩만 잡아도 수십 명이다. 평생 그 죄책감을 겪으며 살기는 싫고, 그것에 익숙해져서 무감각해지는 것도 싫었다.
세상에 업적을 남긴다는 것도 회의감이 들었다. 그냥 자기변명이 아닌가? 살아야 할 당위성을 스스로 부여한 것 아닌가?

빌머는 모든 게 무기력해졌다. 연구도 시들해졌다. 
그는 죽음을 너무 알게 되었다. 앞날이 너무 뻔해지자, 다른 욕망이 솟구쳤다. 
아무것도 아닌 고작 하나의 인간 빌머는,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싶어졌다. 그것은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이었다.

내 아이를 남기고 싶다.

본능에 가까운 그 감정이 들고서 10분 안에, 빌머는 여자친구에게 청혼했다.
빌머의 마음가짐이 다르니, 결혼 진행에 막힘이 없었다. 빌머는 모두가 놀랄 만큼 빠르게 결혼식을 올렸다.

물론, 그 사이에도 사신은 찾아왔다.

[ 한 달이 지났군. 연체료를 받으러 왔다. 이번에도 다른 인간의 목숨 하나를 희생해서 네 목숨을 구하겠느냐? ]

악마는 TV를 보고 있는 청년 하나를 보여주었다.
빌머는 그 청년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괴로웠지만, 아직 죽을 수 없었다.
빌머는 고개를 끄덕였고. 사신은 웃으며 청년에게로 사라졌다.

한 달의 시간을 더 얻은 빌머는 운 좋게도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때 그가 받은 감동은 대단했다.
자신이 한때 독신주의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왜 이런 진짜 삶을 몰라보고 겉멋으로만 인생을 살았을까. 

임신으로 기뻐하던 와중에도 사신은 찾아왔다.

[ 한 달이 지났군. 연체료를 받아야지. 이번에도 다른 인간의 목숨 하나를 희생해서 네 목숨을 구하겠느냐? ]

악마는 스쿨버스에 올라타는 소년 하나를 보여주었다.
빌머는 너무 어린 소년의 모습에 가슴이 덜컹했다. 저 아이가 죽는다면 그 부모는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빌머는 고민했다. 이미 자신의 분신인 아이가 태동했다. 그렇다면 이제 죽어도 되지 않을까? 굳이 저 어린아이를 희생시켜야 할까?

[ 호오. 이번에는 다른가? ]

빌머는 정말 괴로웠지만, 아직은 죽을 수 없었다. 태어날 아이의 얼굴을 꼭 한번은 보고 싶었다. 
결국, 빌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신은 웃으며 소년에게로 사라졌다.

깨어난 빌머는 어마어마한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은 쓰레기였다. 하지만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태어날 아이를 한번은 보고 싶었다. 
그 후로도 한 달에 한 번씩 사신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빌머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만이란 자기변명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빌머에게는 천만다행이게도, 여섯 명째에서 사신의 방문은 끝났다. 한 달이 지나도 사신은 나타나지 않았고, 빌머가 죽지도 않았다.
빌머는 자신이 좋을 대로 사정을 이해했다. 사신이 원한 숫자는 여섯이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그 예상처럼 사신은 계속 나타나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아기가 태어난, 감동적인 그날 밤까진 말이다.

[ 연체료를 받아야지. 이번에도 다른 인간의 목숨 하나를 희생해서 네 목숨을 구하겠느냐? ]

몇 달 만에 나타난 사신은 빌머의 아기를 보여주었다.
빌머는 소리 지르며 발광했다. 이러려고 그동안 안 나타난 거냐며, 악마라고 울부짖었다. 왜 하필 자신의 아이냐며 울먹였다.
사신은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 말했다.

[ 네 목숨을 구하는데 아무 인간이나 쓸 수 있겠느냐? 당연한 것을 말이야. ]

빌머는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런 미래가 예정되어 있었다면 자신은 차라리 죽었을 것이었다고, 왜 청년들을 계속 죽이게 만들었냐며 악을 썼다.
그러자 악마는 웃었다.

[ 바른 치열. 건강한 신체. 잘생긴 외모. 하버드대 수석. 너는 제법 인기가 많았어. 대학교 때 정자기증을 한 적이 있지 빌머? ]

순간, 빌머의 부릅뜬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 그동안 네가 희생시킨 아이들도 다 네 아이였다. 뭐가 다르다고 생각했나 빌머? 다르지 않아. 다르지 않다고 빌머. ]

빌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댓글
  • 복날은간다 2017/12/10 22:28

    일요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월요일 힘내세요! 기운 팍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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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채호빵! 2017/12/10 22:30


    아아닛 첫댓글이라니!선추천 후감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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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넌내게참달아 2017/12/10 22:31

    그렇죠 목숨은 다 똑같이 소중하죠.
    빌머입장에서 읽다가 출처보고 .. 새삼 멍해졌네요.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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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곧♡ 2017/12/10 23:16

    추천드리고 싶은데 이용시간이 짧대요ㅠㅠ 일단을 댓글 먼저..♡
    남의 아이라면 죄책감을 느끼는게 전부지만 나 아이라면 달라지는.....
    빌머를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라서 더 충격적이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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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이지카라멜 2017/12/10 23:16

    오...저는 태어날 자기 자식의 수명을 깎아 먹은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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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도소년 2017/12/10 23:47

    지난주에 복날은간다 작가님 글 전부 정주행하고, 이제는 새로운 이야기 즐겁게 기다리는 팬입니다.
    정말 미세한 태클해서 죄송해요. “하버드대 수석”-> “하버드대 수석 졸업” 이 조금 더 자연스러운거 같아요. 숨마쿰라우데 요.  스펙 강조할 때 하도 수석 졸업. 수석 졸업 그래서 두 단어가 세트 같아서ㅠ
    그나저나 빌머는 어떤선택을 했으려나요. 잠시의 충격을 뒤로하고 빠르게 자기합리화를 한 뒤, 자신의 수명을 더더욱 연장하기 위해 정자은행에 가는 뒷모습을 상상해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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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solet 2017/12/10 23:52

    전 처음에 보고 희생된 청년들이 미래의 자신의 자식들인줄 알았어요..ㅋㅋ
    자식이 생기고 그 자식들이 커서.. 영문도 모른채 죽는 ..ㅋㅋ 근데 6명이나 되길래
    아 다른건가보다 했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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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영사랑해 2017/12/11 00:10

    와... 역시 복날님!!
    반전에 반전!!! ㄷ ㄷ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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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ROLINE 2017/12/11 03:16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만 오랜만에 감상 남겨요
    또 오늘 이야기는 흐름이 이해하기 쉽고
    메시지는 묵직해서 더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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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치열 2017/12/11 09:47

    와 정자은행이란 소재를 이렇게... 소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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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세마왕강림 2017/12/11 09:55

    분명 아이중 한명의 이름이 김남우일거야...(자기위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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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nisonote 2017/12/11 10:15

    항상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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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yess 2017/12/11 10:22

    빌머라는 이름에도 비밀이 있을 것 같은데..
    빌어머글 빌머놈의 약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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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굼시기 2017/12/11 10:32

    그저께 교통사고가 났는데요..
    목숨에 대해 새삼스레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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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빛바다 2017/12/11 10:33

    저는 청년이 곧 태어날 자식들의 미래 모습이라고 생각했었어요.
    태어난 자식이 처음에는 30살에 죽는건데 그다음엔 25살 이런식으로 점점 죽는 기간이 짧아지는걸로 생각했었어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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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1자 2017/12/11 11:16

    '빌머 남우 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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