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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내가 가장 좋아하는 유아인의 글.txt(필력주의)

'공짜,엄마'라는 글인데 데이즈드&컨퓨즈드 잡지(2012)에 실렸었음. 웬만한 팬들은 읽어봤을테지만 못본 분들을 위해 갖고왔어요 ㅎㅎ  
[공짜,엄마] 압구정에 엄마밥상이란 한식당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가끔 가부좌를 틀고 이름 모를 계모의 밥상을 받았다. 뜨끈한 온돌에 엉덩이를 지지며 잠시나마 기름진 손맛을 느끼는 일은 혈혈단신의 타향살이에 크나큰 위로였다.
물론 그 온정에는 대가가 따른다. 갈비찜으로 사치하지 않으면 1인분 가격이 1만원 조금 넘었다.
 '진짜 엄마'의 밥상을 걷어차고 상경한 이후 서울에서 때운 모든 내 끼니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쓸쓸한 허기에 모정을 찾아 비집고 들어간 백반집은 물론이고, 바깥 밥이 입에 물려 어설픈 솜씨로 요리를 하겠다고 들락날락한 마트장 보따리에도 여지없이 계산서가 끊어진다.
그나마 친구에게 덤터기 씌워 해결한 끼니 후에는 커피 한 잔으로라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성가신 염치가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계산서로 손에 들린다.
만약 지금까지 엄마의 집에 얹혀살았다면 종량제 쓰레기 봉투의 규격별 가격이나 대파 한 단의 가격은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내 나이 스물하난가 스물둘인가 할 때, 자동차 부품 공장지대 한복판에 있던 10평 남짓한 오피스텔에 살았다.
바람 심한 날이면 쇳가루가 동향의 창문을 때리며 기괴한 소음을 만드는 방이었는데, 그나마도 월세를 미루기 일쑤였다.
편의점에서 냉동 만두를 사다 튀겨 먹으며 '오대수'로 1년 가까이를 거기서 살았다.
높은 데 올라가서 보면 빌딩숲이 우거져 도시에 여백이라곤 없는데 내 베개를 놓을 한 뼘의 그늘을 갖고 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값을 정당히 치르며 타지에서 살아가려면 수도 없이 더러운 꼴을 견디며 비참해지기를 감수해야 한다.
만기가 끝난 후에 친구 두 놈이 사는 방 두 칸짜리 집으로 빈대 붙어 이사를 갔는데 그것은 한참 동안이나 내 마음의 빚이었다. 만약 지금까지 엄마의 집에 얹혀살았다면 나는 훨씬 낭만적인 청년이 되었으리라.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그 말은 절대적인 사실의 생존 지침이고 나는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도시는 삭막하다. 서울의 밤은 꽤나 화끈해졌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치열하고 도무지 내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식당 아줌마의 계란 프라이 서비스가 기적처럼 느껴지는 이 땅에 정말로 공짜는 없는 것일까.
구경만 하면 주겠다는 화장품 샘플이나 잡지에 딸려 나오는 별책 부록을 진짜 공짜라고 믿으며 마음 달래야 하는 것일까.
 불필요하게 벌여놓은 집이나 사치스러운 식탁은 고사하고 친구의 호의나 연인의 정열에도 그만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떳떳하기 어렵다. 어떤 친구에게 술을 사는 횟수가 일방적으로 늘어나자 나는 내가 산 술병을 일일이 되짚어 세기에 이른다.
순수한 내 호의를 계산하게 만든 건 저쪽이지만 어쨌든 나는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지난 내 연인은 자기의 사랑 빼기 내 사랑을 하고 남은 것을 세며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나라는 이름 너라는 이름으로 덩어리진 사랑을 주고받고 나서도 더 준 것에 이를 갈고 덜 준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우리는 그렇게 산다.
 학창 시절에는 엄마가 지금 쓰는 휴대폰 알람의 대신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이면 알아서 깨워주고 밥 먹여주고 용돈 쥐여 엉덩이 두드리며 투정쟁이 아들을 학교에 보냈다.
나는 그 용돈을 택시비로 쓰고 학교에 가서는 친구에게 빌붙어 딸기 우유를 마셨다.
엄마가 내게 제공한 집과 밥과 온갖 금품과 용역은 모두 다 공짜였다. 그때는 공짜인지도 몰랐다.
감사한지도 몰랐고 그래서 더 뻔뻔스럽게 일방적으로 누리던 사랑이었다.
내게 공짜를 주는 것은 엄마밖에 없다. 공짜가 공짜인 줄 모르고 살다가 엄마의 공짜 밥상이 1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이제 와 감격스러워지자 모정이 부채가 되어 뒤통수를 때린다.
내가 아는 세상의 마지막 공짜도 이렇듯 철인지 나이인지 내게 찾아온 불편한 세월 앞에 매진되었다.
세상에 진입해 얼추 어깨를 펴고 선 이제부터는 하루하루 그녀의 은혜를 갚으며 살아야겠지.
그 손길이 아무리 완전무결한 사랑일지라도 그것은 상환 불가능한 자식의 빚이다.   매 순간 지갑을 열어야 살아지는 삶을 지극히 당연하게 느끼다가도 타인과 나 사이의 빗금 위로 주고받는 것들이 우리를 계산적으로 만드는 사실에 씁쓸해진다.
엄마의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듯 하염없이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대는 로또를 손에 쥐고 토요일 저녁을 기다리는 일처럼 무모할지라도.
 엄마가 나 몰래 숨겨놓은 땅 한 무더기가 어딘가 있지 않을까. 빈 반찬통을 가득 채워 가지고 온 친구의 마음을 계산서로 끊어 하루 빨리 결제해야 하는 것일까.
이 바쁜 세상의 그늘 아래에 쉬어가면서 마음의 거래로 너무 분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친구의 외상 장부에 내게 얼마짜리 밥을 몇 번 샀는지 따위의 기록은 없었으면 좋겠다.
내가 준 생일 선물이 숫자로 환산되어 응당한 대가로 돌아오지 않아도 서운치 않았으면 좋겠고, 지인의 결혼식에 낸 축의금의 숫자가 내 마음의 크기를 대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여나 내가 낸 10만원짜리 봉투가 마이너스로 돌아오더라도 괘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친과 사별한 또 다른 친구가 장례식에 오지 않은 지인들을 일일이 데스 노트에 적으며 자신이 그들에게 준 것들을 세고는 배신감에 치를 떨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내게 반쯤 얹혀사는 친구가 그 어떤 부채 의식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친구는 10평 오피스텔로부터 도망갔던 투룸 집 안방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전쟁 같은 세상 속에서 절실한 동지애 이상의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정도는 어수룩한 낭만을 품는다.
 고된 촬영이 끝나고 돌아온 부산 중앙동의 호텔방, 1200원짜리 컵라면에 눈물인지 뭔지 뜨거운 것을 붓는다. 시야를 가리는 수증기 사이로 진한 강된장이 놓인 엄마의 공짜 밥상이 스친다--------
  저는 예전부터 유아인팬이었고 육룡방워니때가 최애 정점이었음
ㅇㅇ 요즘 욕도 많이 먹고있어서 안타깝기도하고 한편으론 아슬아슬해서 걱정도 살짝 되지만.. 기우겠져
 ㅎㅎ 무튼 이런 따뜻한 글도 많은 분들이 봐줬으면 하는 맘에서 들고왔네요. 저는 이글 처음읽고 엄청 울컥했으뮤ㅠㅜㅠ

댓글
  • 돼재앙 2017/11/28 15:43

    이대은2017-11-27 06:28IP: 114.207.*.8
    2012년, 그러니까 유아인이 27살때 저 잡지에서 6개월간 칼럼을 썼었는데 그때 글들중에 마음에 드는게 참 많네여
    작성자님의 댓글도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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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돼재앙 2017/11/28 15:44

    처음본글인데 너무 잘써서 놀랐습니다;;;;
    많은 분들 보시라고 퍼왔어요
    대체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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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och 2017/11/28 16:46

    트윗은 너무 현학적인거같았는데 이거 보니까 너무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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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바리바식 2017/11/29 12:51

    와.... 글 진짜 잘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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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louette 2017/11/29 13:04

    흉내내지 않은 글과 행동은 그 사람이 가진 사상의 지평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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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다나 2017/11/29 13:05

    배우라는 생각을 잠시 잊고 읽었습니다.
    노련한 글 작가가 쓴것처럼  훌륭한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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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mpostela 2017/11/29 13:26

    욕 먹을 이유가 하등 없는데...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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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로하지마 2017/11/29 14:40

    정말 글 잘쓰시네요
    한글자 한글자 빼놓지않고 성인이 된 후 제가느낀 감정을 곱씹으며 읽었습니다.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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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Sims3 2017/11/29 14:43

    이 글 참 좋네요. 요즘엔 긴 글을 읽을일도 별로 없고
    쓸일은 더더욱 없는지라 이런 긴글 읽는거 오랜만인데
    따뜻하고 좋은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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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oubi2627 2017/11/29 14:52

    와.... 읽으면서 소름 돋았어요... 정말 놀랍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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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믱믱이 2017/11/29 18:28

    댓가없는 정에 대한 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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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구절절콘 2017/11/29 18:30

    마음을 울리는 글이네요
    낭만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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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텅장요정 2017/11/29 18:32

    칼럼을 썼었군요 그것도 27살에...
    언젠가 꼭 수필집이나 책한권 내줬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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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퍼스원+ 2017/11/29 18:34

    유아인 글 잘 쓰네요. 쉽게 휘리릭 읽히고 감성이 잘 전달됩니다. 트윗 말고 에세이 많이 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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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똥같은소리 2017/11/29 18:36


    한세주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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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빵깨두무구 2017/11/29 18:40

    이 정도의 필력을 감추고 있었으니 3류 평론가란 놈이 멋모르고 덤볐다가 글날에 썰린거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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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암반수 2017/11/29 18:43

    글을 좋아하는게 느껴져요 문체가 굉장히 담담하지만 따뜻한거같아요. 확실히 어떤걸 추구하는지 알거같네요...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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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무관랄프 2017/11/29 18:55

    헐...동생이지만 형이라고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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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온하제7 2017/11/29 18:59

    이런 감성 자극하는 글 좋아요. 본인들은 얼마나 필력이 대단하기에 비웃는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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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이어맛쥬스 2017/11/29 19:01

    글을 읽으며 느낀건
    유아인이란 사람은 참 따뜻한 사람이구나..라는 것입니다.
    화면으로 보여지는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네요.
    개인적으로 화면을 통해 보여지는 이미지는 사실 좀 차갑고 도시적이며 세련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 최근의 언행을 보니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구나.. 하는 걸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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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닉이없슴 2017/11/29 19:14

    어머나....이 친구 되게 매력적이다...세상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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