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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운전사 보고 왔습니다.(어머니가 해주신 5.18 이야기)

어릴적 5월이 되면
어머니는 항상 저를 데리고
망월동 5.18 묘역에 가셨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둘러보시고 나서야
묘역을 내려오시곤 했습니다.
5.18 당시 저희 어머니는 20살이셨고
광주직업전문학교 교환원이셨답니다.
계림동 광주고 근처에서 이모와 삼촌들을 데리고
자취를 하고 계셨었는데
5.18 이 일어났고 어머니도 매일 도청앞에 나가
시위에 참가하셨답니다.
그리고 5월21일
그날도 역시 교환으로 같이 일하던 언니와 함께
도청 앞에서 시위 군중사이에 있었고
애국가가 울려퍼지기에 그곳을 향하고 있던 찰나
총소리가 났답니다.
순간 너무 놀라 무작정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전일빌딩 골목(현재의 학원가)으로
꺾어들어간 뒤 어떤 상회로 무작정 들어가셨답니다.
그리곤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덮어쓴채 벌벌 떨고 있는데
얼마뒤 계엄군들이 상회로 들이닥쳐 아주머니께
시위대들 어디 갔냐고 물었고 아주머니가 무슨 소리냐고
우리딸이 간호산데 어제 날새고 일하고와서 자고 있다고
빨리 나가라고 해서 위기를 모면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새벽에 아주머니께서
계림동 집에까지 데려다 주셔서 무사히
집에 가셨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5월27일 항쟁이 끝나고
다시 출근을 했는데 시위에 함께 가셨던 언니분이
안보이시더랍니다. 아무리 백방으로 찾고 해봐도
연락이 안되시더랍니다. 얼마후 외할아버지께서
세상이 하도 흉흉해서 안되겠다고 자식들을 다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하셨고
어머니는 서울에서 제 아버지를 만나 결혼해 사시다가
제가 12살때 아버지 고향인 광주로 다시 내려올때까지
그날의 광주를 잊고 사셨다고 했습니다.
아니 잊고 살려고 노력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좀 컸을 무렵엔 더이상 망월동 구 묘역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신 묘역으로 이장하면서 국립묘지로 승격도 됐고
그날의 억울함도 비참함도 많이 알려지고 명예회복이
됐으니 그걸로 이제 조금은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게 됐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구 묘역을 찾으셨었는지 이유도
알려주셨습니다.
혹시 그 언니가 망월동에 묻혀 계실까봐 매번 찾으셨다고
합니다.
당시만해도 구 묘역에는 5.18 당시 희생하신분들
뿐만아니라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다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도 매년 늘어나 안장되시고는 했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광주로 돌아온 이후 매년 찾으셨다고.
이게 제가 어머니로부터 들은 5.18 이야기 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제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주말에 어머니 모시고 다시 한번 봐야겠습니다.
(핸드폰 작성이라 행간이 고르지 못한점 죄송합니다)

댓글
  • mecca0629 2017/08/16 23:42

    https://youtu.be/wqmPL34Bh8M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거리에도 산비탈에도 너희집 마당가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엔 아직도
    칸나보다 봉숭아보다 더욱 붉은 저 꽃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그 꽃들 베어진날에 아아 빛나던 별들
    송정리 기지촌너머 스러지던 햇살에
    떠오르는 헬리콥터 날개 노을도 찢고
    붉게!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의 행진 소릴 들었소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소년들의 무덤앞에 그 훈장을 묻기전 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위에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릴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여기 망월동 언덕배기에 노여움으로 말하네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같은 주검과 훈장
    너희들의 무덤앞에 그 훈장을 묻기전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태극기아래 시신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절규하는 통곡 소릴 들었소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같은 주검과 훈장
    소년들의 무덤앞에 그 훈장을 묻기전 까지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

    (HPtdAJ)

  • 스톰뿡루퍼 2017/08/17 02:11

    어릴때부터 가족들 손에 이끌려 망월동을 찾았고
    중학교 개교기념일이 5.18이라 매년 망월동을 찾았습니다.
    매년 같은 영상과 사진을 보는데도 제가 성장하고있는터라 감회가 매 회 달라지더라구요 ...
    화려한 휴가때도 그랬지만 ... 정말 보면서 엄청 울었습니다 ㅠㅠ

    (HPtdAJ)

  • 깔방알라 2017/08/17 02:59

    광주는 치유하기에 너무 큰 비극입니다 세대가 바뀌어도 잊혀질까요? 대부분의 타지방이 그러하듯 우리 아버지는 경북사람인데 대학가를 지나다가 전시해놓은 그 끔찍한 사진들을 보고 알았답니다. 총칼에 통제된 사회가 어떻게 국민들을 속여먹고 개돼지처럼 부릴 수 있는지 눈뜨게 해주어 민주화쟁취의 거름이 된것이죠. 근데 그 희생과 트라우마가 너무 컸습니다. 문명사회에서 자국민을 어떻게 저렇게 뭉게버릴수 있습니까

    (HPtdAJ)

  • 나비태풍 2017/08/17 03:17

    92년 1월.
    경상도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던 우리들은
    광주에 갔었어요.
    경상도 시골 읍내만한 광주 시가지를 보며 놀라며
    물어물어 망월동 묘역에 갔었어요.
    황량한 묘지는 공동묘지라는 말처럼 넓었고
    5.18묘역은 초라하기만 했었죠
    그 여행에서 광주가 얼마나 홀대받는지
    그 억울한 죽음을 얼마나 묻어버리려 하는지
    그 어떤 말도 필요없이 온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죠.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된 빛바랜 사진들
    우리 또래의 청년들이 박재된 사진들
    그 허무함과 슬픔은 한숨조차도 쉴 수 없을 정도였죠.
    시간이 흘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한 달 넘게 제대로 일도 못하며
    경찰에 짓밟힌 분향소에 분노할 때
    그 황량하고 초라하고 낡아 있던 광주가 생각났어요.
    정의를 위해 노력하다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챙기지 않는다면
    앞으로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이번 문 님의 행적은 우리나라의 새 길을 여는
    첫발입니다

    (HPtdAJ)

  • 바람핀왼손 2017/08/17 06:31

    다른 나라 몇백년 걸릴것을 한국은 몇십년이 걸렸기때문에 흘린 피다라는 말을 들은것같은데
    그렇게 치부해버리기엔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가슴아픈 일이고 겨우 37년밖에 되질 않았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한국전쟁과는 30년밖에 나지않는 차이
    유시민작가님의 말씀이 정말 맞습니다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어요
    '우리는 광주사람들에게 큰 빚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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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영동코렁탕 2017/08/17 07:54

    저도 광주출신인데 우리 아버지도 5.18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광주 화정동에서 개인의원을 운영하시는 내과의사였습니다.
    그런데 개업하신지 한달만에 광주항쟁이 일어났고
    시내 대형병원에 사상자가 들어오고 광주의 의사, 간호사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아버지는 전남대병원에서 일손을 도왔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총상환자가 들어오고 이웃병원에서는 병원에도 총탄이 날아들었고 전남대 병원에도
    총탄이 날아들자 엄청난 공포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대학생이었던 작은아버지는 어머니와 간난이였던 제 형을 데리고 걸어서 광주를 빠져나와
    고향인 장흥으로 내려가셨으며, 고향에 도착하자 마자 작은아버지는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어 항쟁이 끝날 때 까지 구금되어 있다가 데모하지 않겠다 라는 각서를 쓰고 풀려나셨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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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팔 2017/08/17 08:16

    서울 수도권 먹물대학생들이 서울역회군만 안했어도 광주는 비극을 비켜나갔을텐데~~ 전두환 개애새애끼는 능지처참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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