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퀴즈 한번 내보겠습니다. 이 사람 이름이 뭔지 아쉽니까?
아마도 100에 99에 해당하는 분들은 "지금 장난하나... 장제스(장개석) 모르는 사람 어딨나." 하실 겁니다. 맞습니다. 이 인물은 장제스인데, 그런데 굳이 억지 부려 보자면 "틀렸다." 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장제스 본명은 장제스가 아니니까요.
장개석의 본명은 장중정(蔣中正) 입니다. 장제스(蔣介石)라는 건 자를 붙여서 호칭 한것으로, 엄밀히 따지면 유비 관우 대신 '유현덕' '관운장' '조자룡' 같은 식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자 입니다. 서양권에서도 Chiang Kai-shek으로 알려졌으니 그냥 그 쪽이 다들 쓰는 이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없긴 합니다.
이 사람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바로 쑨원(손문) 입니다.
앞의 내용과 이어지고 있으니, 흐름을 타자면 "쑨원 역시 본명이 쑨원 아닌건가."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쑨원 본명은 쑨원이 맞습니다. 아니, 호적으로 들어가면 쑨원도 손덕명(孫德明)이라는 이름이었다고 하는데 거의 의미는 없습니다. 최소한 장제스의 '중정' 은 대만에서 '중정기념당' 이니 하는 식으로 중정이라는 이름은 잊혀지지 않고 자주 사용되지만 누구도 손덕명 기념관 같은건 만들지 않으니...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에게나 중국 사람에게나 대만 사람에게나 일본 사람에게나 쑨원은 그냥 쑨원 입니다. 다른 표현을 쓴다면 보통 중산(中山)이 쓰입니다. 한국 같은 곳에서는 거의 안 쓰이고 중화권에서 경칭하는 의미로 '손중산 선생' '중산 선생' 이런 식으로 쓰이곤 하는데, 아무튼 중산이라고 해도 쑨원이라는 걸 잊지는 않습니다. 즉 백범 김구, 우남 이승만 같은 느낌이지 '장제스' 같은 느김까진 아닙니다.
쑨원이 한동안 사용하던 '호' 에는 일선(逸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손일선' 인데,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도 쑨원을 손일선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걸 떠나서 '중산' 정도는 들어봤어도 일선은 아예 못 들어본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런데 앞서 재밌다고 한건, 영문 위키백과 등에서 쑨원은 바로 'Sun Yat-sen' 이라는 이름으로 항목이 만들어져 있다는 부분 입니다.
'쑨얏센' 은 '손일선' 을 광동음으로 읽은 겁니다. 영어 위키백과 같은것을 보면 쑨원은 쑨얏센으로 항목이 만들어졌고, 관련 내용도 전부 '쑨얏센은 이러저러했다' 고 표현되어 있으며, 영어권 독자들의 참조 문헌 제목들도 전부 '쑨얏센의 어쩌구저쩌구' 같은 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영어권, 서양권에서 쑨원은 쑨얏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들 쑨얏센이라고 하니 반대로 '쑨원' 은 잘 안 쓰이고, 거의 장제스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어째서 쑨원은 서양권에 쑨얏센으로 알려져 있을까? 만약 쑨원이 중국인들 대다수에게 존경받는 '중산 선생' 으로서 외국에 이름이 널러 펴졌으면 지금하곤 다를 수도 있습니다. SūnZhōngshān이라는 항목이 되었을 수도 있겠죠. 즉 쑨원이 손일선이라는 호를 주로 쓰고 다닐때 서양인들에게 이름이 갑자기 널리 알려진 탓에 이렇게 되었는데, 이 과정이 상당히 드라마틱 합니다.
쑨원과 함께 무장봉기를 모의했던 20대 후반의 청년 육호동(陸皓東)
10대 시절 하와이에서 생활하며 선진 문물을 맛 보고 낡고 병든 청나라를 타도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쑨원은 젊은 나이부터 혁명 운동에 매진했습니다. 광동에서 동지인 육호동과 함께 사람을 모으고 혁명 의식을 전파하는 한편, 주위의 천지회(天地會) 등 비밀결사와의 연계 역시 적극적으로 꿰했습니다.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이 시도는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600자루 권총을 준비해서 광저우 안 쪽으로 숨겨오고, 홍콩에 모인 수백명이 배를 타고 광저우에 온 뒤 무장하는게 계획이었는데, 사정이 생기다보니 이게 며칠 연기되었고 일이 시간이 걸리자 불안해진 배신자에 의해서 내용이 전부 밀고 된 겁니다.
육호동은 도주하던 중 미처 당원 명부를 처리하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미쳐 돌아와서 동지들에 대해 위협이 될 수 있는 당원 명부를 모두 없애버리는 와중 체포 되어 고문 받고 사망했습니다. 쑨원은 아슬아슬하게 마카오로 도망친 후 "홍콩의 동지들은 출발하지 말아라." 라는 전보를 쳤지만 이미 늦었고, 70명 정도를 태운 배는 이미 출발해서 광저우에 도착한 뒤 동지들은 고문 당하고 사망했습니다.
쑨원을 여러번 살린 은인, 제임스 켄틀리
쑨원은 곧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옮겨갔지만, 청나라 정부는 쑨원의 목에 현상금 천원을 걸고 그를 추격해서 죽이려 했습니다. 이때 쑨원은 자기가 홍콩의 의학교를 다니던 시절 스승인 켄틀리 박사를 만나 조언을 듣고, 켄틀리 박사의 도움을 통해 일본으로 옮겨갔습니다.
아직 변발을 하던 시절의 쑨원
일본 생활을 하면서 변발도 자르고 수염도 기르며 우리가 아는 그 모습으로 변하는 쑨원. 변발을 자르면서 청나라에 저항하는 의미도 되고, 추적을 뿌리치며 변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워낙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는 몸이라 변장까지 하면서 조심을 하던 쑨원은 이후 일본에서 하와이로 건너갔고, 여기서 홍콩 근무를 끝내고 태평양을 건너 영국으로 돌아가는 스승 켄틀리 박사를 다시 한번 만나게 됩니다. 변발을 자른 쑨원이 워낙 느낌이 많이 달라져서, 켄틀리 박사는 처음에 머리를 자른 쑨원이 말을 걸어도 누구인지 몰랐다고 합니다. 여기서 켄틀리 박사는 "혹시라도 영국에 올 일이 있으면, 나를 만나러 오라." 면서 쑨원에게 자신의 주소를 알려줬습니다.
당시 미국 본토나 하와이에는 중국인이 꽤나 많이 건너갔었기 때문에, 쑨원은 이들을 설득해서 혁명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머나먼 땅까지 와서 타지에 자리 잡고 온갖 고생을 하여 드디어 생활이 좀 안정화된 이들이 굳이 혁명 같은 일에 끼어들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쑨원의 행보는 별로 소득이 없었습니다.
1890년대 뉴욕
별 소득이 없던 쑨원의 활동은, 반대로 오히려 쑨원에게 더 큰 위협만을 안겨주었습니다. 해외의 중국인 커뮤니티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혁명하자" "청나라 타도하자" 고 하는 위험인물이야 당연하게도 눈에 잘 뛸 수 밖에 없었으니 말입니다. 청나라 정부는 '선동가가 해외자금에 의지하여 반란의 불을 지피고 있다' 라고 판단하여 쑨원의 활동을 실제보다도 더 위험하게 바라보았고,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전세계의 청나라 외교관들에게 쑨원을 잡으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이 당시 미국에서 쑨원은 주로 뉴욕에 있었는데, 청나라의 미국 공사관은 워싱턴에 있어서, 타국에서 인력의 부족 문제도 있고 직접적인 활동 대신 쑨원의 행보를 조용히 지켜만 보았습니다. 하지만 워싱턴 공사관에서는 직접 달려들지는 않는다고 해도 쑨원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찍은 사진까지 입수해가며 첩보 활동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다가 쑨원이 1896년 9월 23일, 뉴욕을 떠나 리버풀, 즉 영국으로 향하자 청나라는 이 '반역자' 를 처치할 절호의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쑨원이 영국으로 향했다는 정보를 포착한 청나라의 미국 공사는 즉시 이 소식을 런던에 알렸고, '반역자' 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청나라 런던 공사는 영국의 외무성에 "쑨원이 도착하는 즉시 잡아다 청나라에 송환할 수 있는가." 에 대해 여부를 물었으나, 영국 외무성에서는 곤란하다는 대답을 보내왔습니다.
이 당시 유럽은 미국 등에 비해 중국인의 숫자가 적었기에, 쑨원의 유럽행은 혁명 활동의 일환이라기보다는 부족한 공부를 더 하고 이론을 좀 더 탄탄하게 하자는 유학에 가까웠습니다. 런던에 도착한 쑨원은 당연히 켄틀리 박사를 만났고, 박사는 반갑게 쑨원을 환영했습니다.
패트릭 맨슨(Patrick Manson)
쑨원은 여기서 '기생충학' 의 권위자이자 '열대 의학' 분야의 창시자인, 동시에 자신의 또다른 스승인 패트릭 맨슨 박사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맨슨 박사도 쑨원을 환영했고, 쑨원은 두 스승의 도움을 받아 매일같이 대영박물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독서 삼매경에 여념이 없었고, 그 외에는 런던의 명승지를 구경하면서 한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목가적인 생활이었지만, 이때 맨슨 박사는 쑨원에게 경고했습니다.
"가까운 곳에 청나라 공사관이 있는데,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주의하는게 좋을걸세."
하지만 쑨원은 런던 지리에 어둡기도 하고, 설마 이 먼 이역만리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랴 하고 좀 방심을 한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 쑨원은 실제로는 이미 목에 올가미가 씌어진 셈이나 다름 없었던 상태였습니다.
이 당시 청나라 공사관에서는 쑨원의 모든 행보,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공사관에서는 Slater 사립탐정소에 의뢰해서 쑨원의 뒤를 계속 밞게 하면서 정보와 자료를 모으고 있었고, 좋은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까짓거 괴한을 시켜 쑨원을 납치하자고 하면 지금도 못할 게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 '런던 한 복판에서 타국 정부의 민간인 납치' 로 국제문제로 일이 커질 수 있고 했기 때문에, 좀 더 주도면밀한 계획이 필요했던 차였습니다.
10월 11일 일요일, 기독교도인 쑨원은 스승 캔틀리 박사와 함께 교회에 갈 생각으로 숙소를 떠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쑨원에게 말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중국말, 그것도 광동어였습니다. 본래 광동어 사용자인 쑨원은 이 먼 타국에서 원래 말이 통하던 사람을 만나자 반가웠는지 다소 안일하게 한참을 이야기했고, 그 사람이 가자는대로 따라가다 보니 어떤 건물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제야 정신을 차려보니 그곳은 청나라의 영사관이었습니다.
쑨원이 머물던 Gray 's Inn 부근. 사실 쑨원이 숙소에서 나와 그날 지나간 길 주변에 바로 공사관이 있었습니다.
쑨원은 그대로 2층 방에 감금되었습니다. 창문에는 쇠창살이 박혀 있었고 외부와의 연락은 전부 차단되었습니다.
만약 쑨원이 그냥 모든걸 알면서도 제발로 공사관에 갔다면 모를까, 이건 명백한 속임수였고 감금에 이르러서는 명백히 불법적인 일이었기에 국제법 상으로 따져볼만 했습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모든걸 따지려면 우선 영국의 관계기관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야 따지는게 가능했는데, 감금된 쑨원은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차단 된 상태였습니다. 쑨원은 스스로 능지처참 될 것이라고 여기면서 두려워 했습니다.
쑨원을 사지로 몬 홀리데이 매카트니
이 당시 공사관의 책임자는 '공조원' 이라는 중국인 책임자가 따로 있었지만 실제로는 매카트니라는 서기가 실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2차 아편전쟁 무렵부터 중국에 들어가 중국에서 마격리(馬格裏)라는 이름도 얻고, 태평천국의 난 진압과정에서 결성된 영국인 + 중국인 혼성된 상승군(常勝軍) 소속으로도 활동하고, 이홍장의 외국인 측근으로서 활약한 뒤 고국에 돌아간 뒤에도 '중국통' 으로 활동해 영국 내에서 중국 정부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던 친중파 입니다. 그런 매카트니에게 있어 쑨원은 제거해야할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쑨원을 사로잡은 뒤 매카트니는 중국으로 한 명의 '미친 사람'을 실어갈 배를 구하기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일단 중국 땅에 쑨원을 보내기만 하면야 그 뒤에 중국 정부에서 쑨원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었습니다.
갇혀 있는 쑨원도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고, 어떻게든 외부와 연락해보려고 안간힘이었습니다. 쑨원은 식사를 나르는 영국인 급사에게 쪽지나 손수건 자락에 쓴 연락문을 건네고 "켄틀리 박사에게 보내달라." 고 요청했지만, 용의주도한 매카트니는 이를 모두 중간에서 차단 했습니다.
갇힌 채 시름에 잠겨 있는 상태의 쑨원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으로 쑨원을 유인 해 온 광동어 사용자였는데, 그는 자기 이름이 '당' 이라고 밝혔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의 원인 제공자인 셈이지만, 당은 그래도 비교적 친근하게 말을 걸며 쑨원을 다독였습니다. 당은 쑨원이 조만간 영국 배에 실려서 영국 땅을 떠난 뒤, 홍콩 항구 근처에서 중국 배에 옮겨진 다음 광동으로 끌려갈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는 공사관이 전세 내었으며 매카트니와 깊은 관계가 있으므로 일단 배에 들어가면 무엇도 할 수 없을테고, 배는 지금 화물을 옮기는 중이라 다음 주 정도에 출발할 예정이라는 사실 같은것도 전부 알려주었습니다.
이런 말을 듣게 되자 쑨원은 당연히 몹시 불안했을텐데, 당은 친절한 어조로 "공사는 전혀 실권이 없다. 굳이 부탁한다면, 매카트니에게 편지를 보내서 부탁해보는 것이 좋다." 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당은 쑨원과 함께 매카트니에게 보낼 문장을 같이 생각해주었고, 당의 제안으로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끼워졌습니다.
"내가 공사관을 방문한 것은, 무죄임을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쑨원은 이 문장을 그대로 적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쑨원은 매카트니의 책략에 그대로 말려들었습니다. 쑨원은 끌려온 것이 아니라, 제 발로 공사관에 찾아온 것이 된 겁니다.
이제 쑨원은 끝장난 셈이었습니다. 거의 미쳐버릴 것 같은 상황이었는데, 뜻밖에도 구원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왠만한 사람들은 전부 매카트니의 엄명 때문에 절대 쑨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테지만, 공사관에 근무하는 한 늙고 선량한 사환(使喚)이 쑨원을 도와준 것입니다.
이 사환의 이름은 '콜' 이었습니다. 쑨원은 콜이 비교적 선량하고 독실한 신앙심을 가졌다는 것을 파악하고, 이 '신앙심' 에 호소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그는 자신은 기독교도고, 청나라 황제가 기독교도를 못마땅하게 여겨서 자신을 소환하여 죽이려 한다고 콜을 설득했습니다. 쑨원은 콜에게 "많은 것이 필요없고, 단지 지인에게 연락을 해서 소환되어 처형되지 않게끔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동시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20파운드를 주고, 만약 일이 잘 되면 1000파운드를 주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이때가 10월 16일로, 쑨원이 감금된지 정확히 5일 째 된 날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콜은 방에 석탄을 가지고 왔고, 이를 옮기면서 쑨원에게 조용히 종이 쪽지를 건넸습니다. 쪽지에는 연락을 승낙한다는 말과 함께 '감시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열쇠 구멍으로 지켜보고 있으니, 침대에 누워서 글을 쓰라.' 는 말이 같이 있었습니다. 쑨원은 콜의 도움으로 겨우 외부에 자신의 상황을 알릴 수 있었습니다.
콜은 공사관의 영국인 여자 관리인에게 이를 전해주었고, 관리인은 익명으로 쪽지를 캔틀리 박사의 우편함에 집어 넣었습니다. 마침 두 명도 쑨원이 갑자기 보이지 않자 크게 걱정하면서 찾아보던 와중이었는데, 10월 18일 한편의 쪽찌를 발견했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저는 지난 일요일 중국 공사관 안으로 납치되어 갔습니다. 이제 영국에서 중국으로 몰래 보내질 형편인데, 이렇게 되면 저는 죽습니다. 빨리 저를 구출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저를 중국으로 실어나를 배가 벌써 중국 공사관의 명의로 계약되었고, 저는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도록 감금되어 있습니다. ……아아, 저는 너무나 비참한 상황입니다."
쪽지를 통해 쑨원의 상황을 알게 된 켄틀리와 맨슨은 즉시 제자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일단 먼저 경찰청에 갔습니다. 그러나 경찰청은 내용을 듣더니 "이건 외국 공사관 문제다." 라며 몸을 빼고 손을 쓰려고 하질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외무부에 갔습니다. 하지만 마침 일요일이라 외무부에는 당직 직원만 있었고, 직원도 공무원 마인드로 반신반의 하며 "일단 내일 보고 해보겠다." 라는 말만 할 뿐이었습니다. 내일까지 기다리다가 지금 당장이라도 쑨원이 배로 신병이 옮겨지면 끝이었기에 두 사람은 도저히 기다릴 수 없었고, 결국 직접 청나라 공사관으로 달려가 문들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고 나온 건 당이었습니다. 당은 두 사람의 추궁을 일체 부인했지만, 맨슨은 "이미 쑨원의 불법 감금은 영국 당국이 모두 탐지했다." 고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켄틀리 등은 사립탐정에게 의뢰해서 혹시라도 청나라 공사관 주변에서 급하게 빠져나가는 신병이 있는지 감시하도록 했습니다. 어이가 없게도 이 탐정 사무소는 청나라 공사관의 의뢰로 쑨원을 감시하던 그곳이었습니다.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된 셈입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두 사람은 사람 한 명을 살리기 위해 엄청난 행동력을 발휘, 런던 타임사 사를 방문해서 이 모든 일의 자초지종을 알렸습니다. 이런 놀랍고 흥미진진한 특종 보도를 언론사가 지면에 쓰지 않을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결국 19일 저녁 즈음이 되자 런던 경찰국도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 경관과 사복 형사를 파견해 공사관을 포위하고, 템즈 강 주변에서도 경찰들이 중국으로 떠나는 배를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온 각 신문사들도 앞다투어 취재를 시작하고 지면에 대문짝하게 기사를 썻서 청나라 공사관의 불법 감금을 비난했습니다. 공사관의 현관 앞에는 구경꾼들이 엄청나게 모려들어서 비밀리에 쑨원을 중국으로 빼돌리기란 이제 완전히 불가능해졌습니다.
23일 무렵이 되자 글로브(Globe) 지에서도 관련 소식은 대문짝하게 다뤄젔습니다. 글로브 지는 쑨원의 피랍문제를 대서 특필했고, 기자들과 구경꾼들은 공사관 앞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외무부는 런던의 한복판에서 동양의 기분 나쁜 음모가 드러났다는 사실에 당황해서 즉시 이 문제를 해결하게 만들었고, 청나라 공사관도 결국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캔틀리 박사와 외무부 및 런던경찰국의 관리들은 구경꾼 사이를 헤집고 쑨원을 데려와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청나라 정부는 쑨원을 잡아다 능지처참을 주는 대신에, 오히려 전세계의 주목대상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조국에서 혁명을 일으키려던 젊은이가, 멀고 먼 런던까지 와서 소설에서나 볼법한 음모의 희생양이 될 뻔하다. 누구라도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결국 쑨원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전세계에 이름을 널려 떨쳤습니다. 그리고 당시 쑨원이 쓰던 호가 바로 일산 입니다. 아직 중산 선생도 아니었고, 혹은 고국에서 큰소리를 뻥뻥 치는 쑨원에게 사람들이 다소 짓궃게 붙인 '손대포' 로 불리던 떄도 아니었습니다. 이떄 쑨원은 '손일선' 으로 불리고 있었기에, 전세계 사람들은 젊은 혁명가 "쑨얏센" 의 이름을 들었고 'Kidnapped in London-Sun Yat-sen' 은 여러 팜플렛으로 사람들에게 읽혀져 그의 명성을 높여주었습니다.
이전까지 쑨원은 자기가 이런 사람이고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 한다고 설명을 구구절절하게 해야 했지만, 이제 어딜 가서 "내가 쑨얏센이다." 라고 한 마디만 하면 "아, 바로 그 사람!" 이라는 상황이 된 겁니다.
[리플수정]언제나 흥미있는 글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타이완과 중국본토에는 손문이 세운 대학이 있습니다 (본토가 오리지널). 한자로는 中山大学이라고 쓰면서 영문으로는 Sun Yat-sen University로 표기하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만 본문을 읽어보니 그게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김대중 대통령의 상황과도 비슷하네요.
대만 중정기념관이 자가 아니라 이름이었군요.
알고 있던 얘기지만, 다시 읽어도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저 중산(中山)이란 이름은 일본 망명 시절 변장을 위해 쓴 가명 나카야마 쇼(中山 樵)에서 나온 거지요.
영화 황비홍2에 육호동과 손문의 에피소드가 나오죠. 잘봤습니다.
매번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닉값 잘하신다는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장대인 특집도 한번 보고 싶은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면 한번 소개해주시면 어떨까요?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