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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사랑없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3)

 


 



 강릉 경포대 바닷가의 모텔에는 파도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반쯤 열린 창문 밖에는 잠시도 쉬지 않는 바다가 있었다. 그리고 파도처럼 드나드는 그 덕분에 내뱉은 거친 숨소리들이 파도소리를 삼켰다.



 남자친구랑 모텔에서 나오다가 소꿉친구를 만났다.


 내가 가장 오래 알고 지냈던 남자애가, 입은 반쯤 벌리고 눈꺼풀을 쉴 새 없이 깜빡이며 나와 내 남자친구를 돌아보다 말했다.



 “아.......여긴 우리 편집부 선생님........”



 이제 내가 입을 반쯤 벌리고 눈꺼풀을 쉴 새 없이 깜빡일 차례였다. 내 소꿉친구가 자신의 곁에 있는 키 큰 여자를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라고 소개했다. 모텔 앞에서 서로를 소개하는 일 자체가 믿기지 않았으니까, 그 여자가 녀석의 선생님이라는 충격은 조금 늦게 받았다. 


 여기가 모텔 앞이라는 사실과 녀석의 곁에 여자가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더해지니까, 어쩐지 나도 내 남자친구를 소개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어.......여긴 내 남자친구.........안녕하세요?”



 선생님이라니까, 인사를 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막상 인사를 하고 나니까 더더욱 어색해졌다. 내 남자친구도 조금은 당황한 표정으로 인사했는데, 내 소꿉친구의 선생님이라는 여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자신의 학생과 모텔에서 나오면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선생님. 아니, 그 여자 덕분에 나도 가까스로 침착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소꿉친구의 앞이긴 하지만, 나는 내 남자친구와 모텔에서 나오는 것이고 저쪽은 교사와 제자의 관계이니까, 내가 조금 더 당당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대한 당당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려했다.



 “어~ 그러니까. 두 사람은~ 두 분은? 음.......어떤? 사이.......요?”



 실패했다. 내 목소리는 잘 봐줘도 자다가 방금 일어나자마자 전화 받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울면서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나 않았으면 다행이겠다. 초여름 햇살이 반짝이는 경포대 해변의 모텔 앞에서 어울리는 질문이길 바랐다.


 그래도 내 질문에 소꿉친구 녀석이 조금 당황하는 표정을 보였지만, 녀석의 선생님이라는 여자는 오히려 조금 미소지어보이며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는 표정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나는 매우 무례한 철부지가 된 기분이 들었는데, 그 여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혹시. 민아 씨 맞나요. 아. 역시 그럴 것 같았어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완전히 당했다. 그 여자는 선생님이라면서도 내게 존대하며 또 내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소꿉친구 녀석을 노려봤더니, 녀석은 혼이 나간 사람 같아보였다. 나를 돕기는커녕 도무지 나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내 남자친구란 인간은 이 상황이 흥미진진한 것 같아 보였다. 


 이 상황은 분명히 혼자 타개해야 하는 게 맞겠는데, 딱히 꺼낼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을 꺼내도 질 수밖에 없겠다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자였던 남학생과 지난밤에 좋은 시간을 보내셨냐고 질문할 수 있다면 상당히 성공적이겠고, 어쩌다 영계가 취향이 되셨냐고 물어볼 수 있다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자폭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한다. 지금은 퇴로를 찾아야만 했다. 


 그 순간, 내 남자친구가 나섰다. 다행히 나도 혼자가 아니었다.



 “혹시 아침 드셨어요? 안 먹었으면 같이 먹으러 갈래요?”



 당연한 얘기지만, 차라리 혼자인 게 나았겠다.



 차라리 혼자인 게 낫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아니다. 내 평생에 유일했던 남자친구와 사귀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몇 번이나 했었는지 셀 수도 없다. 


 박해진.


 이 오빠를 처음 만난 건 중학생 때였다. 당시 여중을 다니던 발랄한 내 주변에 남자라고는 여드름으로 얼굴의 대부분을 채우기 시작한 소꿉친구뿐이었다. 단지 지루하다는 이유만 가지고도 목조를 수 있었으며, 서로의 엉덩이를 발로 차줄 수 있는 소꿉친구를 절대로 남자로 보기는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학원에서 만난 해진이 오빠는 인기인이었다. 큰 키에 맑은 피부를 가진 해진이 오빠는 학원의 여고생들뿐만 아니라 여중생들에게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훌륭한 외모를 가졌는데 아무하고도 그 어떤 썸도 없다는 사실은 하루하루 인기를 더해줬다.


 게다가 공부도 잘하고 교우관계도 좋은데다 정의롭기까지 하다는 평판은 뭇 여학생들의 가슴을 떨리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학원의 중학생 자습실은 고등학생 자습실과 마주보고 있었는데, 중학생 자습실에서 애들이 소란스럽게 굴면 언제나 찾아와 조용히 시키는 사람은 해진이 오빠였다. 중학생 남자애들은 해진이 오빠에게 감히 대들 생각을 못했고, 여학생들은 남자애들이 떠들어서 해진이 오빠가 자습실에 찾아오길 기대하는 게 일상이었다. 일부러 남자애들이 좋아할만한 게임이나 스포츠에 대한 얘기를 꺼내주고 슬쩍 빠져주면 해진이 오빠가 찾아와 조용히 하라고 했었다.


 별로 큰 소리로 고함을 치지 않았고,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지도 않았다. 해진이 오빠는 살짝 인상을 쓰면서 조용히 좀 하라는 말을 하고는 자습실을 나갔다. 그럼 여자애들은 해진이 오빠의 인상 쓴 모습에 감탄하며, 다른 표정들도 보고 싶다는 잡담을 나누곤 했다. 


 그런 해진이 오빠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송민아. 네가 송민아지? 이 필통 네 거야?”



 난리가 났다. 해진이 오빠가 내 잃어버린 필통을 찾아준 사건은 삽시간에 학원 전체에 소문이 났다. 여고생 언니들 몇몇이 찾아와 일부러 필통을 흘린 건 아니냐는 추궁을 했었고, 내 친한 친구들마저 보기보다 여우 짓을 할 줄 안다며 나를 칭찬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도 채 지나기 전에 해진이 오빠가 내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 뭔가 찾아주면 말이야. 약간의 고마움을 표시하는 게 보통이라더라.”



 많은 여학생들은 그들이 보고 싶었던 해진이 오빠의 다른 표정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분노했다. 해진이 오빠는 평소 절대로 볼 수 없었던 매우 어색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참을 수 없었고,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제가 밥이라도 살까요?”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대신에 해진이 오빠는 내 남자친구가 되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자주 만나기는 어려웠다. 어쩌다 시간이 생기면 간신히 만나서 군것질을 같이 하고 영화를 보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도 그 순간순간이 행복했고 해진이 오빠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들이 소중했다.


 그러던 중에 내 소꿉친구 유성현이 내 학원친구의 친구에게 고백을 했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남녀공학에 다니던 여드름이 바글바글한 소꿉친구 유성현이 여자애에게 고백을 했다는 얘기에 너무 놀랍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그래서 놀리기로 했다.



 “있잖아. 내 친구의 친구 중에 한 아이가 이미 남자친구가 있는데, 어떤 귀여운 남자애가 고백을 했다더라? 아~ 물론 외모가 귀여웠다는 건 아니고~ 남자친구가 있는지 어떤지도 확인도 안한데다가 더듬더듬 거리는 목소리로 시간 좀 있냐고 했데~ 시간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니? 웃기지? 시간이야 어차피 있는 건데 뭘 어쩌겠다는 건지 너무 귀여웠다더라고~”


 “그 형은 너한테 뭐라고 해서 사귀기로 한 건데?”


 “형? 아. 해진이 오빠? 어~ 너? 알아? 알고 있었어?”


 “잘나가는 고등학생이 여우같은 여중생에 홀려서 사귀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어.”



 본전도 찾지 못했다. 어릴 때 나한테 맞아서 코피를 흘렸던 것으로 놀려도 끄떡없었던 소꿉친구 유성현이었는데, 나랑 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가시 돋친 대답을 했다. 성현이가 그러는 건 평생 처음 봤다. 그 날 이후로도 본적이 없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연애에 관한 것으로 놀려서는 안 되는 모양이다. 남자애도 마찬가진 줄 알았다. 마음의 상처가 꽤나 큰 줄 알았는데, 나중엔 성현이가 먼저 내가 해진이 오빠랑 사귀는 걸 가지고 놀리곤 했다. 단지 처음만 어려웠다. 처음이라는 것들이 대체로 그렇다.


 이상하게 내가 더 불편했다. 성현이는 내가 놀려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는데, 나는 성현이가 놀리는 게 점점 더 불편해졌다. 해진이 오빠랑 더 가까워질수록 성현이가 해진이 오빠를 언급하는 게 싫었다.



 해진이 오빠랑 영화를 보러 가다가 친구들과 있는 성현이를 봤었다. 성현이를 보고 인사하기 어색했는데, 성현이가 나를 보고 무시하고 지나는 모습은 신경 쓰였다. 성현이가 내게 인사했어도 불편했겠지만, 그래도 인사를 받지 못한 건 섭섭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해진이 오빠는 평소처럼 우리 집 앞 놀이터까지 데려다줬었다. 나란히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대화가 끊겼었다. 갑자기 할 말이 별로 떠오르지 않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해진이 오빠가 내 손을 잡았다. 사실 평소에 기대했던 일이었는데, 성현이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아서 손을 뺐더니 오빠가 말했다.



 “우리 아직 손도 못 잡는 거니?”



 겨우 손을 잡지 못했다는 걸로, 해진이 오빠가 그렇게 정색할 줄은 몰랐다. 오빠는 매우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잘 들어가라는 말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순간 눈물이 나올 것 같을 정도로 억울했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해지고 어이도 없고 화도 나려했다. 가슴에 뭐가 탁 막힌 것 같아 차라리 울어버릴까 생각하는데........



 “어~이. 남자친구도 있는 여자가 왜 혼자서 청승이야~”



 유성현이었다. 이런 순간에 또 만났다. 사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거나 마찬가진데 창피했다.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현이가 앉아있는 내 앞으로 다가와 계속 말했다. 



 “야. 나 pc방에서 돈을 다 써버렸거든? 그런데 떡볶이가 먹고 싶어.”


 “어쩌라고”


 “사달라고~”



 나는 유성현의 복부에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이제 막 성현이가 내 키를 겨우 추월했을 때였다. 성현이를 쓰러뜨리고 나니까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성현이는 ㅅㅇ하며 떡볶이를 외쳤고, 그 간곡함에 떡볶이를 사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아직 어렸다.



 이번엔 겨우 손만 잡고 그런 게 아니었다. 해진이 오빠는 모텔에서 밤새 나를 괴롭혔었다. 불과 한 시간 전에도, 자다 일어난 해진 오빠가 내 안에 있었다. 어릴 때처럼 울고 싶었던 기분도 아니었다.


 그래도 유성현의 복부에 있는 힘껏 주먹을 날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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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씁니다. 계속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내일 또 이어 쓰겠습니다.

댓글
  • 윤하짱 2018/09/10 13:15

    첫댓글의 영광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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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하하하핫 2018/09/10 13:16

    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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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자봉중근 2018/09/10 13:25

    잘읽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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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8/09/10 13:26

    새로운 시도라 걱정했는데, 님들 덕분에 계속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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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aipan 2018/09/10 13:37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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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인구 2018/09/10 14:24

    북풍님이 오신걸 보니 가을이 오긴 왔군요.
    업무중이라 이따가 몰아서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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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Justice 2018/09/10 14:57

    오 3탄부터는 시점이 바뀌는 군요 새로운 접근 신선하네요. 2탄이랑 시점이 달라져서 적응하는데 살짝 시간이 걸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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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쫌쫌 2018/09/10 15:11

    4편도 오늘 연재 하시나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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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개그 2018/09/10 15:28

    어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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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 웬리 2018/09/10 15:54

    아..확실히 북풍님 글 읽으니 가을이 왔다라는 느낌이 물씬 드네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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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8/09/10 16:10

    역시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군요. 앞으로도 자주 시점을 바꿀 생각이라 걱정이네요.
    제 이야기를 읽으면 그냥 가을이 왔다는 느낌이 아니라, 또 가을이 왔다는 느낌일 겁니다.
    별 일 아니에요. 또 한 해가 끝나간다는 얘기니까요.
    곧. 우리 모두 한 살 더 먹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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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리스타 2018/09/10 21:12

    북풍님 글 오랜만이네요.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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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코칩파리 2018/09/11 05:13

    읽다가 아이디보니 북풍님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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