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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나는 정말 끔찍한 새끼다

" 아 맞다, 너 장진주 기억하지? 나 마트 갔다가 만났잖아! 히야~ 예뻐졌던데? "
" 장진주...? 장진주...? "

귀 뒤에서부터 미친 듯한 열기가 올라왔다. 장진주? 장진주라고? 장진주? 

" 근처로 이사 왔다더라고~ 응? 남우야? 너 갑자기 얼굴이 왜 그래? "

나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식은땀이 흐르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녀석이 뭐라고 떠드는지 들리지도 않고, 내 심장 뛰는 소리만 들렸다.
마치 20년 전, 그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20년 전의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장진주가 서럽게 울던 모습도, 장진주의 어머니가 맨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지르며 울던 모습도, 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겁에 질려 울던 모습도.

20년 전, 내가 장진주의 아버지를 죽였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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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나는 정말 끔찍한 새끼였다.
그때 난 아파트 옥상에서 바닥을 향해 잡동사니들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도대체 그게 뭐가 재미있었을까?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건, 잡동사니 중에 '쇠구슬'이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내 손을 떠난 쇠구슬은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려, 아파트에서 나오던 한 아저씨의 머리 위를 때렸다. 
아저씨는 마치 장난감처럼 그 자리에 픽 쓰러져버렸고, 그 모습을 본 나는 깜짝 놀라, 당장 집으로 도망쳐 숨었다.
당장에라도 저 아저씨가 일어나서 옥상까지 날 잡으러 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럴 일은 없었다. 아저씨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 난 방에 숨어서 들킬까 봐 걱정이나 하고 있었다. 미친 새끼. 
다음날이 되어서야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장진주가 결석했고, 그 이유가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라는 소문. 게다가 그 아버지는 옥상에서 떨어진 쇠구슬을 맞고 죽었다는 이야기.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 아저씨가 죽었다고? 내가 쇠구슬을 떨어뜨려서 그 아저씨가 죽었다고?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파트는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아줌마가 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아 오열하고 있었고, 장진주는 그런 아줌마 곁에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나는 도망쳤다. 집으로 도망쳤고, 내 방으로 도망쳤고, 이불 속으로 도망쳤다. 
너무 겁이 났다. 토악질이 밀려왔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머릿속에서 장진주와 아줌마의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그들이 내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들을 그렇게 슬퍼하게 만든 사람이 나란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두려웠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두려웠다. 나는 며칠간 입을 굳게 다물고, 횡설수설 거짓말을 하고, 집 밖을 나가지도 않았다. 

나는 정말 끔찍한 새끼였다.
며칠 뒤에 장진주네는 이사를 갔고, 그 사건은 쉬쉬하며 잊혀갔다. 그 사건으로 바뀐 조치라고는, 아파트 옥상 문이 잠기는 것 정도였다. 
장진주가 이사를 갔어도, 내 두려움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평생 죄책감 속에서 살인자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 누구도 모를지라도, 나만은 내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5년, 10년, 20년... 언제 잊어버렸을까? 언제부터 내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잊고 편하게 살았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데 이젠,

" 아 맞다! 장진주가 네 이름도 기억하던데? 먼저 말하더라고! 내가 너 아직도 이 동네 산다고 말해줬지~ "
" 내, 내 이름을...? "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나를 기억하고 있다고? 장진주가 나를 기억한다고?
왜지? 20년 전에 나를 의심하고 있었나? 그래서 기억하고 있는 걸까? 왜지? 왜 여기로 다시 이사온 거지? 나를 찾아 온걸까? 
두려웠다. 20년 전처럼 집으로 도망쳐, 이불 속으로 숨고만 싶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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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다. 20년이 지났지만, 한눈에 알아보겠다. 장진주다.

" 저기요! 혹시... 김남우? "
" 어, 어...? "

마트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가던 장진주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 맞구나~! 나야 나! 장진주! 나 기억하지? 우리 같은 아파트 살았었잖아! "
" 어, 어어...! "

목에서 바보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지금 이렇게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장진주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가장했다.

" 바, 반갑다! 장진주! 이야~ 너 진짜 예뻐졌다! 성형했어? "
" 성향? 뭐야~! 성형은 무슨! "

깔깔거리는 장진주의 모습이 자연스럽다. 그래. 장진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알 리가 없지. 

" 이야~ 남우 너도 진짜 얼굴이 그대로다~! 20년 전에 너~. . . "

장진주와 난 오랜만에 만난 절친한 친구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장진주는 쾌활했고, 에너지가 넘쳐보였다.
재수 없는 생각이지만, 나는 장진주의 모습에 안심했다. 내 기억 속에 장진주는 항상 서럽게 울던 그 모습뿐이었는데, 지금의 밝은 모습을 보니 너무나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 남우야 너 전화번호 좀 줘봐! 나 이번에 이사 오면서 근처에 친구가 한 명도 없어!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다 야~ "
" 어, 어? 그래.. "

장진주는 나와 번호를 교환한 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앞으로 자주 연락하고 그러자! 어? 같이 밥도 좀 먹고~ "
" 그, 그래.. "

장진주는 계속 쇼핑을 하러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 아참! 너 그거 모르지? 초등학교 때... 내가 너 좋아했었던 거! "
" ... "

장진주는 얄궂게 웃으며 가버렸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제 자리에 멈춰, 움직일 수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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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점심이 지나 걸려온 장진주의 전화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여보세요? 남우야! 너 바빠? ]
" 아..아니, 괜찮아. 왜...? "
[ 어, 그러면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냉장고를 밖에 내놔야 하는데, 엄마랑 나랑 도저히 들 수가 없어서!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연락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 부탁해! ]
" ...알았어. "

장진주의 부탁이라면.
나는 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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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라 입구에서 장진주를 기다리면서, 나는 약간 두려웠다. 장진주를 보는 것도 괴로웠는데, 내가 그 어머니를 보고 괜찮을 수 있을까?
아파트 입구에 주저앉아, 오열하던 아주머니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 우리 남편 살려내! 우리 남편 살려내라고-! ]

" ... "

일순간, 현기증이 날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 남우야! "
" 아... "

장진주가 환하게 웃으며 내려왔다.

" 고마워 고마워! 와~ 내가 진짜, 이 동네에서 급할 때 연락할 사람이 너밖에 없더라! "
" 어어.. "
" 가자! 우리 집 2층! "

나는 앞장서는 장진주를 따라 빌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가니, 2층 어느 현관문 밖에 냉장고가 나와 있었다.

" 엄마랑 나랑 여기까진 뺐는데.. 도저히 계단을 내려갈 수가 없더라고! "
" 어어.. "

내가 냉장고로 다가가 둘러보는 사이, 현관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이고~ 왔어요? 고마워라~ "
" ! "

나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아주머니를 돌아보았다. 
나보다 먼저 나를 소개하는 장진주,

" 엄마 기억나? 나랑 같은 반이었던 김남우! 우리 아파트 살았던 애 있잖아! "

'우리 아파트 살았던 애'라는 말에, 나는 순간 심장이 멈추는 느낌이었다. 
떨리는 눈동자로 아주머니를 살폈는데,

" 어머~ 세상에! 계속 이 동네 살았었나 봐~! "
" 네, 네네! "
" 다행이네~ 우리 진주가 친구도 한 명 없어서 어쩌나 걱정했는데~ "

아주머니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반가워했다. 온전하게 호감으로 가득 찬 웃음이었다.

" ... "

끔찍하다. 나는 정말 끔찍한 새끼다.

.
.
.

" 고마워 남우야! 너 없었으면 정말 엄마랑 나랑 어쨌을지~ 어휴! "
" 아니야.. "
" 밥은? 밥 먹고 갈래? "
" 어? 어어, 아니 먹었어. 괜찮아! "
" 그럼 국수? 국수라도 먹어! 엄마~ 국수 먹자 우리! "
" 그래~ 거실에서 기다려~ "
" 아... "

아주머니가 곧장 주방으로 향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거실 소파로 가 앉았다.
원래 성격이 이랬었을까? 장진주는 가까운 거리에서 곧장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 초등학교 때 애들 중에 연락하는 사람 있어? 아직도 이 동네 사는 애들 있어? 전에 치열이는 마트에서 만났었는데~. . . "

나는 어색하지 않으려 애써서 말을 맞춰주었다. 새삼, 이렇게 밝은 모습이 믿겨지지 않았다.
지난 20년간 내 상상 속에서 장진주는, 나 때문에 인생이 망가져서 한없이 힘들고 어두운 나날을 보냈을 그런 아이였었다.
아주머니도 마찬가지다. 매일 밤 눈물로 지새우며 웃음 한점 없는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을 줄만 알았는데, 지금 주방에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아주머니의 모습은 예상 밖의 모습이었다.
안심되면서도, 이런 걸 안심하는 내가 끔찍했다.

" 난 그동안 이사를 하도 많이 다녀가지고~ 제대로 된 친구가 별로 없어~ "
" 그래..? "
" 아~ 나도 이 동네를 안 떠났으면 좋았을 텐데. 애들이랑 같은 중학교도 갔을테고... "

일순간 장진주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나는 저절로 눈치를 봤다.
장진주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 알지? 우리 아빠... "
" 어? 어어... "

심장이 쿵쾅거렸다. 귀 뒤에서부터 올라온 열기로 내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 우리 아빠 그렇게 되고 나서 엄마가 좀... 매일 같이 동네 돌아다니면서 그랬잖아...? 기억하지? "
" 아..아어... "
" 그래서 우리 삼촌이,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서 이사시킨 거야.. 그래도 엄마가 너무 힘들어해서..에휴~! 아빠 죽고 몇 년 동안은 정말 엄마도, 나도, 너무 힘들었어.. "
" ... "

나는 도저히, 무슨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지금 내 표정이 너무 끔찍해 보였을까? 장진주가 밝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 아, 야야! 지금은 괜찮아! 아빠가 하늘에서 잘 보살펴주고 있는 건지~ 뭐, 하는 일도 잘 풀리고~ 하하하. 아참, 넌 뭐해? 직장 다녀? "
" 어? 어어. 그냥 평범한 회사. "
" 그래? 나도 그냥 평범한 회사-. . . "

쾌활하게 얘기하는 장진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경이 복잡했다.
지금 밝은 모습의 장진주를 보며 내가 느끼는 감정은 어쩌면, 일종의 감동에 가까운 기분일지도 몰랐다. 평생 나를 짓누르던 죄책감에서 조금쯤은 구원을 받은 기분 같기도 했다.
나는 정말 끔찍한 새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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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룩. 후룩. 후루룩.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릇에 머리를 처박고 국수만 먹었다. 먹는 것이 멈추면 말이라도 걸어올까 봐, 게걸스럽게 국수를 먹었다.

" 밥 막었다더니, 배가 많이 고팠나 봐? "
" 우, 우움... "

옆자리 장진주가 말을 걸어와도, 나는 제대로 된 대답도 않고 하지 않고 그릇에 다시 고개를 처 박았다. 맞은편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칠까 봐 겁이 났다.

" 잘 먹네~ 더 먹을래? "
" 우움, 아, 아뇨! 괜찮습니다! "

아주머니의 질문에 급히 대답한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방금 아주머니의 시선을 피했던 내 눈초리가 의심스러웠을까? 부자연스러울까? 어떤 생각이 들게 하였을까?

" 아이고~ 복스럽게 잘 먹네! 나는 잘 먹는 사람이 좋더라! "
" ... "

아주머니는 여전히 호감 가득한 말투로 나를 칭찬했다.

" 우리 진주가 친구도 없이 이사 와서 걱정이었는데,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앞으로도 우리 진주랑 친하게 지내줘야 돼~ "
" 엄마아~! 무슨 유치원생 딸내미 친구 꼬셔? 무슨 멘트야 그게~ "
" 어머 그랬니? "

모녀는 깔깔대며 쾌활하게 웃었다. 

" ... "

나는 국수라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국수가 아니었다면 목이 메 제대로 넘길 수가 없었을 것만 같았다.

.
.
.

네가 우리 아빠 죽였지?! 
어, 어..?
김남우! 네가 우리 남편을 죽였구나!
아아...!
우리 아빠 살려내-! 널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우리 남편 살려내-! 우리 남편 대신 너가 죽었어야 해!
아아아-아-! 

" ...! "

오랜만에 다시 '그 꿈'을 꿨다. 장진주와 아주머니가 피눈물을 흘리며 내게 달려드는 그 꿈. 
예전과 달라진 것이라면, 꿈속의 그들이 현실의 나이를 먹었다는 점이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괴롭다. 어쩔 수 없다. 나는 평생 이 꿈에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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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대리! 요즘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
[ 남우 이새끼, 너 무슨 고민 있냐? ]
[ 아들! 뭐 안 좋은 일 있어? ]

" ... "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에게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20년 만에 장진주를 만난 이후, 하루하루 20년 전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만약 20년 전 그날, 내가 솔직하게 고백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주머니와 장진주 앞에 나서서, 내가 쇠구슬을 떨어뜨려서 아저씨를 죽였다고 고백했다면?
누군가 원망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때의 그녀들에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가장을 잃었다는 억울함이나마 없앨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마땅히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정말 끔찍한 새끼였고,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녀들의 서러운 울음 앞에 설 자신이 없었고, 우리 가족들에게 미움받을 자신이 없었고, 친구들과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며칠째 장진주와의 만남을 이런저런 핑계로 피했다.

[ 밥 한번 먹자니까 뭐가 그렇게 바빠~ 우리 엄마가 나랑 친하게 지내라고 한 거 못 들었어? ㅋㅋㅋ ]

장진주는 정말로 이 동네에 유일한 친구가 나뿐인지, 자주 연락해왔다. 
차라리 차갑게 대해서 앞으로 모른 척 지낼까도 싶었지만, 내가 장진주에게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장진주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장진주 몰래 어떻게든 죄를 갚으며 살까? 그런다고 내 죄책감이 덜어질까?
평생 친구로 지내며 죽을 때까지 내 죄책감을 되새기며 살까? 내가 견딜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해야 될지 알 수가 없었지만, 적어도 20년 전처럼 도망치고 싶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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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 나 진짜 오랜만에 영화 보는 거야! 얼마 만이야 정말~! 혼자서 영화 보러 갈 수가 있어야지 원! "
" 그래? "

영화관 좌석에 앉아, 기대에 찬 얼굴로 떠드는 장진주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장진주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하자. 그것만이 내가 속죄하는 길이라고, 그렇게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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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요즘 왜 이렇게 애가...웃질 않니? "
" 뭐? "

거실에서 TV를 보다가 갑자기 엄마에게 지적당했다. 

" 요즘 무슨 일 있지? 너 혹시 어디 아프니? "
" ... "

걱정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나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단어들을 골랐다.

" 그냥.. 아니, 내가 뭐가? 그냥, 회사에서 좀 일이 힘들어서 그래. "
" 그래? "

엄마는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보았지만, 나는 무심한 척 TV로 시선을 돌렸다.
20년 전에 내가 다시 편하게 웃기까지 몇 년이 걸렸었을까? 지금은 또 몇 년이 걸릴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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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우야~! 좀 나와줄 수 있어? 우리 엄마 지금 술 먹고 난리 나서~! ]

늦은 밤, 장진주의 전화를 받고 한달음에 호프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주머니와 곁에서 난감해하는 장진주의 모습이 있었다.

" 어~ 남우야! "

달려온 나를 돌아본 장진주에게서도 꽤 술 냄새가 많이 풍겼다. 

" 아~정말! 우리 엄만 술도 못 먹으면서...! 좀 도와줘~! "
" 어어. "

장진주와 함께 인사불성의 아주머니를 부축하고 술집을 나섰다. 
차가운 밤공기 속을 걸어가면서, 장진주가 미안한 듯 말했다.

" 원래 우리 엄마 이렇게 술 먹고 그러는 사람 아닌데.. 미안해 밤늦게~ "
" 아니야 괜찮아.. "
" 어휴~ 1년에 한 번씩 꼭 이런다니까! "

다음 순간, 별 생각 없이 말하는 장진주의 말에 내 걸음이 우뚝 멈추고 말았다.

" 우리 아빠 기일이잖아 오늘이~ 꼭 오늘만 되면 이렇게-. . . "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져 모든 사고가 정지되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무색하게, 식은땀이 흘렀다.

" 응? 남우야? 왜? 남우야? "
" 어...어?? "

이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장진주. 그 얼굴과 마주하자마자, 속이 울렁거렸다. 

" 왜 그래? "
" 아, 아니... "

겨우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들킬까 봐. 내 어색함이 들켜서 장진주가 이상한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겁이 나서.
나는 정말 끔찍한 새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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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머니를 부축하고 빌라 계단을 오르는 내 기분은 처참했다.

" 진주 아빠~아! 그렇게 죽으면 나 혼자 어떻게 살라고~! "

집으로 향하는 길, 어느새인가부터 아주머니는 오열했고, 아주머니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처참하게 짓눌렀다. 그녀의 지독한 슬픔이 나 때문이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어, 온 정신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 으이구~ 엄마 좀! "

오열하는 아주머니를 겨우 침대까지 부축해서 눕힌 후, 장진주는 한숨을 쉬었다.
장진주는 잠시 안타까운 얼굴로 아주머니를 내려다보다가, 나를 돌아보며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 진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

나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멍청하게도 겨우 꺼낼 할 수 있었던 말이라는 게,

" 아직도 잊지 못하셨구나... "

장진주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우리 아빠가 어떻게 죽었는데... "
" ... "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장진주는 침묵했고, 나도 멀뚱히 서서 침묵했다. 그 무거운 1초 1초가 견디기가 힘들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숨긴 채, 그것도 위로랍시고 나는 말했다.

" 어머니가 다 잊을 수 있기를 바래.. "

순간, 장진주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갔다.

" 잊어? 다 잊으라고? 어떻게 잊어? 너라면 잊을 수 있겠어? "

날카로워지는 장진주의 목소리 톤에 나는 당황했다. 

" 우리 아빠가 어떻게 죽었는데! 그걸 어떻게 잊어! "
" 아... 나, 나는 그냥 괴로워하시지 않기를... "
" 무슨 상관이야?! 괴로워도 기억하는 게 나아! 엄마랑 나는 죽을 때까지 절대 못 잊어! "

눈시울이 뜨거워져 소리치는 장진주의 모습에 나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 우리가 20년 만에 왜 다시 여기로 돌아왔을 거라고 생각해? 혹시라도 길 가다가 그놈이 우리 얼굴이라도 볼까 봐! 그러면 그새끼 발 뻗고 편하게 자지는 못할까봐! 그런 심정으로 돌아온 거야! 우리는 절대...! 죽어도 못 잊어...! "
" ... "

눈물을 흘리며 소리치는 장진주의 두 눈이, 나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절대 도망만은 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 나, 나 그만 갈게.. 쉬어..! "

나는 떨리는 몸을 돌려 현관문으로 향했다. 후들거리는 발을 신발에 억지로 구겨 신고 문을 여는데, 어느새 다가온 장진주가 말했다.

" 너 그거 알아? 20년 전에 너네 엄마랑 우리 엄마랑 엄청 싸웠었는데... "
" ! "

우리 엄마가 아주머니랑? 20년 전에? 왜?? 20년 전에 왜??
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런 나를 담담한 얼굴로 바라보던 장진주가 말했다.

" ...잘가. "
" ... "

현관문이 닫혔지만, 나는 잘 갈 수 없었다. 수없이 많은 생각들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
.
.

" 엄마... "
" 어 왜? "

나는 심각한 얼굴로 엄마를 불렀지만,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 왜? 뭔 일인데? "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는 엄마. 나는 힘들게 말을 꺼냈다.

" 혹시... 장진주라고 기억해? "
" 장진주? "

미간을 좁히는 엄마는 기억이 안 나는 듯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 옛날에 우리 아파트에서... 쇠구슬 맞고 죽은 아저씨 있잖아. "
" ! "

엄마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 갔고, 그 모습은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 ...그 집 아줌마랑 딸이 근처에 이사 왔어. "
" 뭐, 뭐? "

엄마의 음성과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결심하고, 물었다.

" 엄마... 20년 전에 그 집 아줌마랑 왜 싸웠어? "
" ... "

말이 없던 엄마는 대답을 피했다.

" 글쎄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

흘리듯 말하며 주방으로 향하는 엄마. 나는 이를 악물고 그 뒤를 따랐다.

" 뭐가 기억이 안 나? 엄마 그집 아줌마랑 싸웠잖아. 왜 싸운 건데? "
" 몰라. "
" 뭐가 몰라?! 엄마랑 그 아줌마랑 싸웠잖아! 20년 전에!! "

나도 모르게 내 톤이 높아진 순간, 엄마가 뒤돌아 소리쳤다!

" 모른다니까!! "
" ... "

나는 가만히 엄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인상을 찡그리던 엄마는 버럭! 

" 그래 싸웠어! 그 아줌마가, 너를 의심하길래! 네가 옥상에서 쇠구슬로 놀다가 그 집 아저씨를 죽였냐고 의심하길래! 그래서 싸웠어! 왜?! "
" ... "
" 자기 아들을 살인자로 의심하는데, 어떤 엄마가 안 싸워?! 그래서 싸운 거야! 어?! "

엄마는 소리치고 또 내 앞에서 피해, 거실로 향했다.
나는 주방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끔찍했다. 내가 정말 끔찍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 ...내가 그랬어. "

나는 거실 소파의 엄마에게 들릴 정도로 말했다.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 내가 그랬다고. "

나는 조금 더 크게 말했다.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 내가 20년 전 그날! 옥상에서 놀다가 쇠구슬을 떨어뜨렸다고! "

나는 집안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돌아봤다. 엄마는 시뻘게진 눈으로 TV만 보고 있었다.
나는 눈물이 나왔다. 엄마에게 달려갔다.

" 내가 죽였어! 내가 그날 장진주네 아버지를 죽였다고! 내가 죽였어 내가!! "
" ... "

엄마가 나를 돌아보았다. 엄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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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나 이제 어떡하지? "
" 이미 다 지난 일이야. 아주 오래전 일이잖니. 20년 세월이면 다 잊혀질 일이야. "

엄마는 내가 몰래 생각만 했던 것을 말로 대신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 하나도 안 잊었어. 20년간 하나도 안 잊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어... 만약에, 지금이라도 가서 내가 그랬다고 사과하면 용서해줄까? "
"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이미 다 지난 일이라니까? 가서 고백하면 뭐 할 건데? 뭐가 달라져? 그 사람들도 힘들어지고, 너도 힘들어질 뿐이야!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하고 사는 게 그 사람들을 위한 일이야! "

내 말에 흥분한 엄마는, 역시 내가 몰래 생각만 했던 것을. 말로 대신해주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 근데... 내가 너무 괴로워. 평생 이 마음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어. "
"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니까! "

엄마는 버럭 소리치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네가 그랬다고 고백하면? 그럼 어떻게 될 것 같아? 네가 그들의 원망과 분노를 온전히 받아낼 수 있을까? 아버지와 남편의 원수를 그들이 어떻게 대할 것 같아? "
" ... "
" 사람들이 너를 살인자라고 부르는 건 어때? 네가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네 친구들이, 직장동료들이, 동네 사람들이 너를 두고 수군거리고 너를 꺼리면! "
" ... "
" 우리 가족은? 아들이 살인마라고 소문이 나면, 우리 가족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어? 이번엔 그들이 아닌 우리가 이사를 해야 하겠지! "
" ... "

엄마의 말이 모두 맞았다. 내가 고백을 한다면 그렇게 될 것 같았다.

" 너는 사람의 원망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네가 고백을 하는 순간, 그들이 너를 어떻게 할까? 너에게 무슨 말들을 쏟아낼지 상상은 해봤어? 그들이 너를 어떻게 할지 상상은 해봤어? 너는 몰라. 너는 정말... 몰라. "
" ... "

엄마의 말이 모두 맞았다. 모두 구구절절 맞는 말이고, 나는 분명, 엄마 말대로 무엇하나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엄마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 엄마 만약에 있잖아... 20년 전에 죽은 사람이 그 아저씨가 아니라 나였다면 어땠을 것 같아? 엄마는 지금 다, 잊었을 것 같아? "
" ... "

엄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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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고민했다.
이미 내가 저지른 죄를 용서받을 방법은 없다. 내가 장진주에게 모든 걸 바쳐 잘해주더라도, 갚을 수 없었다. 이제 와 모든 걸 고백하고 용서를 빈다 해도, 그럴 수 없었다.
나는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쓰레기인 자신을 자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게 유일한 벌이다.

" ... "

나는 너무 끔직한 새끼다. 너무 끔찍한 새끼라서, 평생을 그렇게 살아갈 용기가 없었다. 
결국, 끔찍한 나는 또 한번 뻔뻔해지고 말았다. 내 이기심으로, 내 죄책감을 덜고자, 여기에 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벨을 눌렀다.

' 딩동- '
[ 누구세요? ]

" 나야... 김남우. "

현관문이 열리며 장진주가 놀란 얼굴로 맞이해왔다.

" 어머? 무슨 일이야 갑자기? "

나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 할 말이 있어서... 들어가도 돼? "
" 할 말? 뭐야? 들어와~ "

장진주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나를 들여보냈다. 나는 거실에 아주머니를 발견하고 꾸벅 인사했다. 

" 어머~ 남우 왔니? "

웃으며 반가워해 주는 아주머니를 본 나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곧장 다가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엄머? "
" 야? "

그들의 얼굴에 놀람이 번질 때,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뜨며, 입을 열었다.

" 20년 전에... 저는 아파트 옥상에 있었습니다. "
" ! "
" ! "

아주머니와 장진주의 얼굴이 빠르게 굳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고백을 이었다.

" 저는... 아파트 난간에 서서... "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목이 메어왔다.

" 아, 아래를 바라보며 장난감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
" ... "

그녀들의 얼굴이 시뻘게져 가는 모습이 보였다.
내 목소리는 이제, 울음이 되어 있었다.

" 장난감 중에는... 따조가 있었고... 딱지가 있었고... 유리구슬이 있었고... "

그녀들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막힌 것 같은 목구멍을 겨우 움직여 말했다.

" 쇠구슬이 있었습니다... "

입을 틀어막는 장진주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보던 아주머니의 시뻘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더 이상의 말은 할 수가 없어, 벌써 사과를 해버렸다.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 ... "

장진주의 흐느낌이 들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아주머니의 몸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아주머니의 얼굴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끔찍한 새끼라도, 여기서까지 도망칠 순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주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20년 전에 내가 들었어야 할 그 말들을 기다렸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아주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 고맙다... "

" ...! "

" 고맙다... 고맙다... "

아주머니는 나를 보며 그 말만을 되풀이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 울어버렸다.
나는 정말, 끔직한 새끼였다.
댓글
  • 복날은간다 2016/12/24 23:32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고작 이 이야기 하나 쓰는데 이틀이나 걸렸어요; 여태 그런적이 거의 없었는데;
    다 감정 때문이에요; 감정이 너무 어렵습니다; 글 쓰시는분들 정말 존경합니다; 감정... 으아 감정;
    아무리 이 이야기를 붙잡고 있어봐야 더는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고 해서, 이틀만에 포기하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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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rcurius 2016/12/24 23:55

    하....감탄하고 갑니다.
    이번이야기는 그냥 복잡하게생각하게 됩니다.
    그냥 잘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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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날은간다 2016/12/25 00:03

    아차!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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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월호기억해 2016/12/25 00:43

    복날님이 원하신 그 감정 정말 잘 나타난 것 같아요. 이번 이야기도 너무 좋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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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탐루 2016/12/25 00:50

    다읽으니 눈물이 나네요
    이번이야기도 참 좋아요
    매번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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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여사 2016/12/25 01:28

    매번 잘 읽고나서  응원댓글 감사댓글 한번 제대로 못달고 추천만 했는데요 이제야 댓글 답니다.
    항상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메리크리스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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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내 2016/12/25 01:29

    첫댓글 달아보네요!
    성향? 뭐야~! 성형은 무슨!
    오타났어요 작가님 ㅠㅠㅠ
    메리크리스마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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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미그달라 2016/12/25 01:38

    정말,  정말로 글 잘쓰십니다.
    배우 얼굴까지 매칭해가며 읽을정도로...
    매번 퀄리티 있는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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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띵철 2016/12/25 01:56

    마지막에 울컥했네요..
    고맙다라니..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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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급열차 2016/12/25 02:12

    내가 다 고맙네요
    진심으로 사과해줘서
    사과를 받아줘서
    이런세상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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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기미 2016/12/25 03:15

    고작이라뇨! 흐어 괜히 울컥하게되네요ㅜ 잘 읽었습니다 메리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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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낭니 2016/12/25 03:29

    김남우의 감정에 완전몰입하게되네요.. 마지막의 고맙다는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네요.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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