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은
그 조직들이
유럽의 지도자들을 속인 결과라는 거군..........
독일이
지들이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무서운 존재라는 뻥카에
감쪽같이 속았다라..........
거기에 그 괴벨스를 도와주는 것들이
그 조직이라........."
히틀러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말하자
신이치의 할아버지는
당연한 거 아니야?
하는 그런 얼굴로
"괴벨스 그 친구가
똑똑한 친구이기도 하고
선전전 부분에서는 타고난 천재기는 하지만
본인 혼자서
그런 엄청난 전략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
당연히
뒤에서 누가 지도해주는 세력이 있으니
가능하지.
너는 설마
괴벨스가
유럽의 모든 정보망을 다 속이고
지 선전을 그대로 믿게 만드는 그런 능력까지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모든 국가의 정보망에
거짓 정보를 심어서
그들 모두를 조종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아?"
라며 툴툴거리자
히틀러 뿐만 아니라
처칠조차도
그 네빌 체임벌린도 속여넘긴 그 모든 것이
괴벨스의 선전전이 아닌
정체불명의 그 조직들이라는 것에
자신도 모르게
입에 문 시거를 떨어뜨릴 뻔 하고
히틀러도
처칠이 시거를 물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으니..............
(실제 히틀러는 담배를 엄청 싫어해서
세계 최초로 금연법까지 만들었음.)
그리고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신이치의 할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면서
처칠이 가져온 조약문을 집어들더니
천천히 읽어보면서
"이 정도급이면
진짜 엄청난 양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군요.
저희 쪽에서
일급 정보를 알려드리는 댓가로 따지자면
거의 윈윈 급 거래기는 하지만............
이 정도의 양보라면
거의 미국도
이 정도 급으로 영국이 양보를 해 준다면
단번에 받아들일 것 같네요.......
그런데
이런 조건을 먼저 우리에게 하는 이유가
미국이
이번 전쟁에 참전할지 안할지가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아서인가요?
지금 미국은
ABCD 포위망에 환장해서
최우선적으로
일본을 조지자에 집중하고 있어서요?"
그 말에
처칠은
총통경호실장 이전에
그......가 이끄는 조직의 핵심인사라는 것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 있는 미국의 내부사정조차도
마치 손금보듯이 훤한
쿠도 신이치의 할아버지의 정보력에
진심으로 놀란 얼굴을 하고
히틀러조차도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신이치의 할아버지는
처칠이 가져온 비밀조약문을 히틀러에게 건내면서
"일단은......
검토를 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지만
아직까지는 공식적으로 확정짓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 양계장 주인(하인리히 히믈러)과
삼림 감시원 (헤르만 괴링) 이
이 사실을 알면 동네방네 떠들 것이 뻔하니까.
거기에......
괴벨스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고
루돌프 헤스(그 당시 부총통, 나치당의 2인자임)조차도 의심스러운 상황이니...........
나치당 이너서클 내부에서는
지금 누구도 신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거기에.......
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게슈타포를 만든 인물이자 나치당 3인자)가
그 조직의 조직원으로 확인된 상황에서는
누구에게도 이 조약부분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나을 것 같아.
일단은
자네들 두 사람과 나만이 아는 구두약속으로 취급하기로 하지.
동의하나?"
하고 물으니
그 비밀조약문을 읽어보던 히틀러는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처칠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런 두 사람을 보던
신이치의 할아버지는
손짓으로 그 조약문을 달라고 한 뒤
다시 봉투에 넣은 뒤에
그 봉투를 자신의 품 속에 넣은 뒤에
아 깜박했네.
하는 얼굴로
히틀러를 보면서
"그리고
마침 처칠 경이 이곳에 있는 상황이니까
하나 더
동의를 구하기로 하지
만약이지만
이 전쟁이
그 조직의 뜻과는 다르게
그래도 원만하게 끝나면
아돌프 자네만은
내가 직접 책임지고
독일에서 탈출시켜서 안전한 성역으로 옮겨주지.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은 처칠 경이 이 곳에 있으니까
동의를 구하고
나중에 스탈린에게도
내가 직접 요청을 해서 동의를 구해주지.
이거는
1차대전 당시
자네가 내 목숨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구해준
보답이니까."
라고 말하면서
처칠을 돌아보자
처칠은
그 정도는 동의할 수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 모습을 본
폰 슈트라임 장군 (쿠도 신이치의 할아버지) 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지고
히틀러도
그나마 전쟁에서 패해도
내 목숨과 재산은 구할 수 있는 보장을 받았다는 기쁨으로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게
세 사람이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특히
히틀러는
처칠에게 편히 시거를 피우시라는 몸짓까지 할 정도로
굉장히 기분이 좋은 모습을 보이고
처칠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는
보장 하나를 얻었다는 기쁨에
입에 물고만 있던
시거에 불을 붙이고는
마음껏 연기를 뿜어대는
그런 편한 모습을 하고
그런 둘의 모습을
다정한 눈으로 보고 있던
신이치의 할아버지는
문득
시계를 보면서
아직 비행기가 준비되려면
20분 정도 남았네
뭐하면서 기다릴까 하는 얼굴을 하다가
문득
시거를 피우던 처칠이
고개를 갸우둥 거리는 모습을 보자
잡담이라도 나누려는 얼굴로
"뭐 궁금하신 거라도?"
하고 물으니까
처칠은
"아까 전에
저 쪽의 성에서 교향곡이 흘러나오는 것 같던데
무슨 오케스트라 공연이라도 해 주려고 준비를 해 준 건가?
뭐 그렇게까지 환대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하고 묻고
히틀러도
무슨 축제 여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준비할 필요가 있냐는 듯한
눈으로
폰 슈트라임 장군을 바라보자
장군은
좀 난감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거는 아니고.......
스당에서 위문공연을 하던
일본의 JOAK 교향악단이
어쩌다가 우리 쪽에 잡혀서......
그렇다고 풀어주기에도 뭐해서 지금 억류중인데요......"
그 말에
클래식은
바그너 말고는 관심도 없는 히틀러와는 틀리게
처칠은 흥미가 돈다는 얼굴로
"JOAK 교향악단?
그 친구들은 동양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클래식을 연주할 줄 아는
그런 친구들이라고 들었는데
그럼 지휘자도 그 분이 오신건가?"
하면서
히틀러가
유태인이라면 벌레보다 더 싫어한다는 것을 감안해
일부러
그 분이라는 표현을 써서 물어보자
장군은
고개를 내저으면서
"그 분은
지금 일본에 계시고
그 분을 대신해서
모리 유키 그 분이
지금 임시로 지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분 만은 못해도
꽤 실력이 있는 분이지요."
그 말에
처칠은
그 분이 아닌
듣도 보도 못한 그런 일본인이 지휘를 한다고?
하는 듯한
실망에 찬 얼굴을 하면서
신이치의 할아버지의 말을 시큰둥하게 듣다가
문득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모리 유키?
모리 유키.........
꽤 낮익은 이름인데.......
클래식 계통에서 들은 이름은 아니지만........
어디선가 들어는 봤는데?"
하면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하다가
아 그 친구
하는 얼굴로
"어디서 들어봤나 했더니
그 맨스필드 스미스-커밍 해군대령의 수제자 중에서
거의 양자로 삼고 싶다고
극찬을 했던
그 친구군.
그 스미스-커밍 대령이
그 친구가
일본인이라는 것이 진짜 아쉽다고
나와 술 마실 때
그런 말을 했었거든
일본인이 아닌 영국인이었다면
자신의 후계자로서
차기
MI6의 부장을 맡길 정도급으로
진짜....... 키우고 싶다고 할 정도로
아주 뛰어난 정보장교라고 말이야."
윈스턴 처칠의
그 말에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던
히틀러의 얼굴이
순식간에
마치 돌처럼 굳어지고
폰 슈트라임 장군(쿠도 신이치의 할아버지)조차도
그 모리 유키가
영국정보부 MI6를 만든
맨스필드 스미스-커밍 대령의 수제자였다는 것에
히틀러처럼 얼굴이 굳어지다가
히틀러가
처칠과 그를 바라보면서
".....그 말은
지금 저 곳에.........
일본 최고의 정보장교가 있다는 건데...........
설마............
이 회담을 염탐하기 위해서 온 건가?"
하고 묻자
장군은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얼굴을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말아.
아돌프.
지금 나누는 이 회담과
일본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
게다가
이 회담 자체를 직접 계획하고
장소까지 선정한 사람이 난데
그럼.....
내가 실수를 했다는 건가?"
하면서
불쾌감을 표시하자
히틀러는 진정하라는 손짓을 하고
처칠도
진정하라는 얼굴을 하자
폰 슈트라임 장군은
간신히 성질을 눌러 참은 뒤
시계를 보고 나서
"그런 친구라면
적어도 여기에 누가 왔는지는 파악을 했을 테니
일단은 빨리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라고 말한 뒤
일어서서
벙커 문 쪽으로 걸어간 뒤
벙커 문을 열고 나서
자신이 지시한 대로
벙커 바로 앞에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다가
벙커 문 밖의 땅에
희미한 발자국을 확인하고는
누가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누구일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그 발자국이
장교용 가죽장화인 것을 눈치채고는
누구인지 알겠다 하는 얼굴로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감돌더니
곧 벙커 안에 있던
두 사람에게
말없이
바깥으로 나오라고 손짓을 한 뒤
곧바로
윈스턴 처칠과 아돌프 히틀러가 벙커에서 나오자
신이치의 할아버지는
말없이
이제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눈짓을 하고
그런 신이치의 할아버지의 모습에
곧 두 사람은
자신들의 전용기로 바쁘게 걸어간 뒤
곧
두 대의 비행기는
그 자리를 이륙해서 어디론가로 날아가고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신이치의 할아버지는
곧 고개를 돌려서
성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런 난리 아닌 난리가
서서히 끝나갈 무렵
모리 유키와 JOAK 교향악단은
그 성에서 탈출하기 위한 탈출작전을 계획하기 시작했으니............
맨스필드 스미스-커밍(모리 코고로의 아버지인 모리 유키의 후견인이자 스승)
맨스필드 조지 스미스커밍
Sir Mansfield George Smith-Cumming
KCMG CB
Mansfield Smith-...
출생
1859년 4월 1일
영국 켄트 주 리
사망
1923년 6월 14일 (항년 64세)
영국 런던
국적
영국 국기
영국
학력
셰필드 대학교
직업
군인
최종 계급
대령
서훈 내역
1. 개요
2. 상세
2.1. SIS
3. 대중매체
1. 개요[편집]
영국의 군인으로 SIS의 창설자이다. 최종 계급은 해군 대령.
2. 상세[편집]
맨스필드 조지 스미스-커밍은 1859년 4월 1일 남해 회사와 동인도 회사의 이사이자 은행가였던 아벨 스미스(Abel Smith)의 차남이자 저명한 상인이었던 존 스미스(John Smith)의 증손자로 태어났다.
1872년, 13세의 나이에 해군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한 스미스는 1877년부터 HMS 벨레로폰에서 말레이 해적 소탕 임무에 투입되었고, 1878년 임시 소위로 임명되었다. 1883년 이집트에서 근무했던 스미스는 배멀미로 인해 복무 부적격 명단에 올라갔고,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스미스는 예비역 장교로서 강안 방어 임무에 종사했으며, 1906년 예비역 해군 중령으로 승진했다.
스미스는 1889년 레슬리 마리안 발리언트-커밍(Leslie Marian Valiant-Cumming)과 결혼한 후부터 스미스-커밍이라는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1. SIS[편집]
1909년 영국 정부는 통합적인 정보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비밀임무국(Secret Service Bureau)를 창설하고 초대 국장으로 당시 해군정보국장이었던 알렉산더 베델 소장의 추천을 받아 스미스-커밍을 국장으로 임명했다. 창설 당시 비밀임무국은 독일 제국의 동향을 감시하기 위한 해군성과 전쟁성의 합동 조직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스미스-커밍은 보안정보국장 버논 켈 육군소령과 특별 부서의 바질 톰슨 경과 함께 영국 국내의 독일 스파이 22명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전쟁 기간동안 비밀임무국은 현재도 유명한 별칭인 군사정보부 제6실(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6)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전쟁 당시 중립국, 점령지, 러시아의 네트워크를 통해 군사 및 상업 정보를 수집해 독일의 정보를 분석해온 MI6와 커밍은 전쟁이 끝난 후, 지원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무부와의 협조로 MI6 요원들에 대한 여권 심사를 면제시킬 수 있었다.
전쟁 당시에는 전쟁성의 통제를 받았던 MI6였으나, 전쟁이 끝난 뒤 외무부의 통제로 넘어간 후에도 소련에 대한 첩보전을 지속해 스파이계의 에이스로 불리게 되는 시드니 라일리와 브루스 록하트가 블라디미르 레닌의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이외에도 조지 힐 육군대위를 중심으로 소련에서 지속적인 첩보전을 벌였다.
MI6은 창설 당시 해군정보국이 상급 조직이나 마찬가지였으나, 1923년 6월 14일에 스미스-커밍이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해군정보국장 휴 싱클레어 소장이 부임하게 될 정도로 조직의 위상이 높아지게 된다.
3. 대중매체[편집]
스미스-커밍은 자신의 성 중 스미스를 떼어낸 다음 커밍의 앞 글자인 C를 자신의 서명으로 사용했고, 이는 존 르카레의 소설 속 컨트롤이나 이안 플레밍의 소설 속 M의 모델이 된다.
조커 게임에서도 언급된다.
ABCD 포위망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Arcadian ABCD en...
ABCD Encirclement
ABCD 포위망은 일본 제국이 남방 진출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선전한 프로파간다로, 미국(American), 영국(British), 중화민국(Chinese), 네덜란드(Dutch)의 국호 두문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일본 제국은 자신이 연속적인 침략 전쟁을 일으키고 국제 연맹을 이탈하는 도발로 제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서구 선발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본을 포위하여 고립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또 더 나아가 이를 백인 권력에 저항하는 아시아인이라는 인종적 구도로 묘사하여, 대동아공영권 구상과도 연관시켰다.
2. 상세[편집]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에서 일본은 금 해금 정책의 실패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많은 식민지와 이권을 갖고 있던 서구 열강들은 블록경제를 형성하였지만,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 같은 국가는 이러한 상황에 대처할 카드가 없었다.
당시 상황을 보자면 일본령 영토이던 조선은 자원이 별로 없었고, 대만도 사탕수수가 고작이었다. 절대적인 식민지의 양 자체도 서구에 비해 너무나 적었다. 거기다 일본의 식민 통치는 자원만을 조달하는 것이 목표인 서구와는 성격 자체가 달랐는데,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현지인을 동화시켜 일본 국민으로 써먹는데 중점을 뒀다는 것이다. 내선일체나 내대융합(내지와 대만의 융합) 등을 내세우면서 본토로 못을 막으려 했던 것도 다 그 연장선상이었다. 이렇다 보니 일본에 있어 피지배민은 일본인으로 동화시킬 대상이었으며, 그렇기에 현지인의 제국에 대한 지지도 어느 정도는 뒷받침 되어야만 했다. 식민지에 인프라를 깔고 근대화를 시키는 대가로 조선에선 쌀을, 대만에선 사탕수수를 공수해 오던, 일본 시장 내에 이들을 통합시키는 식의 통치였다.[1]
이것이 소위 '선발제국주의와 후발제국주의 간의 대립'을 2차 대전의 원인으로 보는 주류 학설인데, 이는 유럽사에서는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으나 일본의 경우에 있어서는 정확한 설명이다. 일본은 결국 군부의 폭주와 수상 암살로 정당정치가 붕괴하였으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이들은 중국 대륙을 사실상의 병참 기지로 만들어 국가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일본은 군부의 뜻에 따라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벌이며 국제연맹을 탈퇴, 철저한 고립 노선으로 회귀하였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당초 계획 이상으로 장기화되면서, 일본은 중국에 대한 연합국들의 원조 루트인 남방을 차단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천연자원을 확보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최소 1939년부터 일본은 미국, 영국, 네덜란드가 이권을 쥐고 있는 동남아시아로의 무력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0년 나치 독일의 공격으로 프랑스 본토가 함락되자 일본은 비시 프랑스를 협박하여 베트남에 일본군을 주둔시키는 방식으로 인도차이나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네덜란드도 나치에 항복하였고 일본은 독일의 동맹임을 이용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압박하여 동남아시아로 가는 물자의 90퍼센트를 독점하고자 하였다. 영국의 경우에는 한때 동맹이었으나 이제는 국민들 사이에 반일 감정이 횡행한 데다 일본이 추축 삼국 동맹에 들어가 있어 사실상 독일과 같은 적국이었고, 미국은 추축 삼국 동맹의 창 끝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고 있기에 일본의 팽창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2]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시행된 1939년 6월 여론 조사에서, 미국 시민의 7할이 "어째서 가상 적국인 일본에 전략 물자를 수출하느냐?" 고 반대하는 의견을 보였다. 결국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 조치와 철강 수출 제한 조치가 타결되었으며, 1941년 7월 26일부로 미국법을 적용받는 지역 내의 모든 일본 자산이 동결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전쟁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물자 보급에 치명타를 입는다. 이미 전선이 예상보다 넓어진 데다 기간도 훨씬 길어졌기 때문에, 1941년 9월에 열린 어전회의에서 영국과 미국과의 교섭을 진행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1941년 11월에 미국에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미국은 첫 번째 제안에서 일부러 무리한 요구를 제시하는데, 중국 대륙 철수와 삼국 동맹 조약 폐기,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인 충칭 국민정부 이외의 정권을 승인하지 말라는 것 등이었다. 하지만 잘못 번역된 문서를 보고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는 협상을 포기하고 진주만 공습을 준비하게 된다.
[1] 현실은 산미증식계획 문서에서 보다시피 대다수의 식민지인들은 일제의 수탈과 친일 지주들이 악화시킨 소작제로 인해 더욱 굶주리게 되어 일제에 대한 반발만 커지게 되었으며 이렇게 수탈된 쌀은 일본 본토의 농가들을 몰락시켰다.
[2] 본래 이전에 있던 방공 협정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함이었지만 이때의 삼국 동맹 조약은 미국과 영국이 견제 대상임이 뻔히 보였다.
ABCD가 제일 특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