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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이괄의 난과 '치욕' 두번의 호란

살이호의 전투 후. 후금은 명나라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였고 요동, 요서지역의 패자로 등극했습니다. 그런 후금에 대해 광해군은 중립외교로 대처했고 결과적으로 그럭저럭 후금과 큰 대립없이 지낼 수 있었지요.


광해군의 '중립외교' 는 사실 조정대신들에게 전혀 지지받지 못한 정책이었습니다. 당시 주류인 이이첨을 필두로한 대북은 폐모살제라는 유교적 질서에 반하는 행위에 앞장선 것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명과의 사대외교를 앞장서서 부르짖었으니까요.


그나마 소북의 박승종이 소극적이나마 지지했고 오히려 정치적으로 광해의 반대 당파라 할 수 있는 서인계열의 정충신, 윤휘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나마 후금의 누르하치는 '조선 이랑은 원수질 필요 없으니 늘 화친하자' 는 입장을 견지했기에 광해의 중립외교정책이 비록 내부 반발에 부딪혀도 그럭저럭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조.


하지만 누르하치의 죽음으로 황태극이 후금국 칸이 되고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가 쫓겨나자 외교적 상황은 급변하게 되었는데...



청 태종 홍타이지(출처: 나무위키)


애신각라 홍타이지. 흔히 황태극이라 불리는 청 태종은 본래부터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상당히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칸이 되기 이전에도 누르하치에게 몇차레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켜야 한다고 몇번이나 진언했을 정도였조. 


광해군 또한 이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황태극이 칸이 되면 틀림없이 전쟁이 일어날것' 이라며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구요.


그래서 광해군은 정충신 등을 외교사절로 파견할때마다 그를 통해 황태극에게 우호적 제스쳐를 취했고 누르하치의 후계자 경쟁이 치열하고 가장 유력한 것이 황태극이라는 내부사정을 이용해 광해군은 황태극을 지지하고 있다는 아부에 가까운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또한 동시에 이중작전으로 홍타이지의 경쟁자들에게는 황태극과의 내부분란을 부추기기도 하고 정보수집에도 심혈을 기울였조.


이런 작업을 통해 어떻게든 광해는 황태극이 칸이 됨으로서 벌어질 대립과 전쟁을 피할려고 했던 것인데 안타깝게도 인조반정이 터지는 바람에 올 스톱! 게다가 조선은 가뜩이나 부족한 군사력이 턱없이 꺾이게 되는 내부반란에 직면하게 됩니다.



반정이던 쿠데타던 기존 권력을 무력으로 쓸어내고 집권한 세력이 예전 세력에 대한 청소. 즉 숙청작업이 뒤따르는것은 필연이겠지요. 인조의 집권세력도 예외는 아니어서 반정 후 한동안 피바람이 불게 됩니다.


광해의 집권세력인 이이첨 등 대북은 물론이고 광해군 밑에 빌붙어서 악행을 저지른 도사들, 김개시를 비롯한 상궁들 등이 죽는건 크게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폐모살제에 반대했던 소북세력까지 대부분 숙청된것은 당시 영상인 이원익(인조 측이 이원익의 명망을 이용하려고 얼굴마담으로 영상에 앉힌 것.)이 반대했을 정도로 지나친 점이었조.


게다가 숙청에다가 이 와중에 광해를 복권시키거나 내통하려는 소소한 역모들로 인해 피바람이 자꾸 번지다보니 기어이 숙청명단에 이상한 이름이 나옵니다. 반정공신 이괄의 아들이었조.


이괄은 사실 어찌보면 반정의 1등도 부족한 특등공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류나 이귀같은 자들이 소극적인 자세로 뒤꽁무니에 있을때 앞장서서 반정을 지휘한 인물이었으니...하지만 반정후 그는 2등공신으로 밀려서 김류나 이귀의 아들과 그의 친구들(김자점이나 최명길, 이시백, 심기원)과 같은 등급이 되자 크게 불만을 품게됩니다.


게다가 인조 측도 후금을 크게 두려워 했기에 변방에 유능한 장수를 보내야 한다는 여론이 컸고 당시 도원수이던 장만의 "후금을 막을려면 군사 10만 정도면 충분하고 최~소한 5만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부원수로는 이괄이나 이서가 좋겠습니다" 라는 의견을 쫓아 인조는 이괄을 파견하게 됩니다.


공신 이귀는 "이괄은 큰 공신인데 그를 변방에 보내는것은 부당합니다" 라고 했지만 인조는 듣지 않았조.


가뜩이나 2등공신 되서 빡치는데 언제 전쟁터가 될지 모르는 변방으로 가라고 했으니 이괄의 앙심과 분노는 더더욱 업...


그렇게 숙청작업에서 이괄의 아들 이름이 나오자 인조는 경악합니다. 그것도 그럴것이 당시 이괄은 조선 최고의 용장이었고 1만이 넘는 조선 최정예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도원수 장만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병력은 5천이 될까말까 였음)


처음 이괄의 아들이 연루되었다는 말이 나왔을때 인조는 믿지 않았습니다(진심으로 안믿었던 건지 그의 군사력을 의식한 행동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자꾸 주변에서 쑥덕거리자 기어이 이괄의 아들을 잡아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금부도사와 선전관(왕명출납을 담당하는 무관)이 북방으로 파견되어 이 사실을 이괄에게 고했고 이괄은 그야말로 대노하여.


"내 하나뿐인 아들을 잡아간다고? 그럼 아들이 역모로 잡혀가는데 아비가 무사한 경우도 있다더냐?!!!"


라고 말하고 조정에서 파견된 이들을 싹 죽입니다. 사실 이괄 입장에서도 당연한게 대게 이런 경우에 연류되면 이괄까지 숙청당하는건 거의 백퍼였으니까요.


그리고 1만의 군사들과 주둔지였던 영변을 벗어나 한양으로 남진ㄱㄱㄱ


인조는 그제서야 자기가 섣부른 결정을 후회하며 이원익을 총사령관인 도체찰사에 임명하고 장만과 정충신에게 이괄을 잡으라 명을 내렸습니다. 이와중에 숙청작업은 더 빠르게 진행되서 기자헌 처럼 온건했고 전혀 죽을 이유가 없었던(아들이 광해군에게 밀서를 보내는 등 오바를 좀 하긴 했지만 기자헌은 서인과도 가까운 인사였음) 광해때의 중신들이 수십명이나 떼죽음을 당한건 덤.


이괄의 군사들은 신속하고 조용한 진격을 위해 한적한 길만을 이용했고 장만은 대로변만을 감시하는 바람에 이괄군의 진격적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관군은 형세상 이괄의 군사들을 사방에서 포위하는 형국이었지만 현실은 이괄의 군사가 숫적, 질적으로 관군에 비해 매우 월등했기에(충성도는 매우 낮아서 정충신이 앞으로 나서서 반군을 깨우쳐주는 연설을 하자 천명씩 투항했다는게 함정) 이괄 군은 황주와 마탄에서 관군에게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관군의 한양 방어 최후 방어선은 임진강이었는데 여기서도 토벌군 지휘부는 큰 실수를 저지릅니다. 여기저기 요지에 정예병사를 배치한것은 좋았지만 정작 이괄 군이 임진강을 건너려고 도하할만한 나루터에는 약졸들 그것도 쪽수도 얼마 안되는 병사만을 배치한거조;;;


당연히 이괄은 허장성세로 각 요지의 관군들을 묶어놓고 재빨리 임진강을 도강해버렸습니다. 부랴부랴 쫓아온 관군들은 모두 격파되 버렸구요.


이제 한양을 방어할 그 어떤 방법도 없어진 조정은 부랴부랴 한양을 비우고 피난을 떠났고 이괄은 한양에 입성하는데 성공합니다. 당시 한양은 인조의 무리한 숙청에 인심이 사나운 상황이어서 이괄의 군사를 환영했다고 하며 이괄은 북인을 다시 기용하고 창고를 열어 양식을 풀어 민심을 얻으려 하였다고 합니다.


조선 건국~멸망 이래로 내부 반란군에게 한양이 점렴당한건 이괄의 난이 유일함...


인조는 공주를 향해 피난을 떠났는데 흥안군과 인성군(둘다 선조의 아들) 에게 어가를 호종하라 명합니다. 왜냐하면 둘은 광해 시절부터 역모를 꾸몄다고 잡혀온 이들이 항상 왕으로 세울려고 했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인성군은 순순히와 어가를 따랐지만 흥안군은 자신에게 일생일대의 승부가 찾아왔다고 생각하고 한강을 다시 건너 이괄의 진중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는 이괄에 의해 왕이 되지요.


그리고 이괄은 마치 6.25 전쟁때 북한군이 했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한양에 머물러 버린것' 이었조. 이괄의 난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정충신은 이와같이 예견합니다 "이괄이 인조를 뒤쫓아 가면 상책이고 모문룡(명나라 장수로 조선땅인 가도라는 섬에 주둔중 이었음) 과 힘을 합치면 중책이며 한양에 머물면 하책이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에는 이괄을 잡을 군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당장 인조를 쫓아가 죽이거나 폐위해 버리면 모든걸 이괄의 뜻대로 할 수 있었조. 하지만 이괄은 한양에 머무는걸 택했고 덕분에 관군 측은 이괄 군의 허실을 탐지하고 전열을 정비해 이괄을 포위할 시간을 벌게 됩니다.


전열을 정비한 정충신의 관군은 안령(무악재) 높은 고지에 진을 쳤고 이괄은 얼핏 보이는 정충신의 군세가 약한걸 보고 자만해 지형은 전혀 고려하지않고 무작정 진격했습니다.


정충신의 군대는 고작 2천도 채 안되었기에 이괄의 생각이 맞아떨어지는듯 했으나 정충신의 필사적인 저항에 이괄의 군의 피해가 만만찮은 데다가 마침 바람이 거세게 부는걸 보고 관군이 모래를 뿌려 이괄 군은 제대로 고지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수많은 사상자만 내게 되었조.


안령 전투의 패배로 이괄은 관군에 대한 우세를 완전히 상실되었고 한양에서 퇴각하게 됩니다. 관군 측은 즉각 추격하자 주장하는 자도 있었으나 정충신이 "이제 이괄의 목은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라고 말했고 그대로 실현되었조.


앞서 언급한 대로 이괄의 군사는 충성심이 모래알이었습니다. 이제 모든게 틀렸다 생각하자 부장들이 잠자던 이괄을 참살해 그 목을 들고 투항해 왔조. (그 부장들은 반란에 가담했으나 죽지않고 유베형에 쳐해졌는데 훗날 이괄의 난 때 죽었던 관군 장수의 가족들에게 복수당해 죽은 자도 있었다고 함)


이괄의 가문과 그의 부하들, 글리고 이괄에게 붙어 잠시동안 왕이 되었던 흥안군 이제는 모두 목이 잘렸고 이렇게 이괄의 난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이 반란으로 인해 조선의 최정예 병력들이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한윤 등 이괄의 잔당들이 후금으로 투항해버려 이괄의 난때 쓰였던 진격로를 고스란히 알려주었으며 그들은 원한으로 황태극에게 조선 침공을 부추기도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사실 이괄의 군대는 그야말로 최정예중의 정예였고 그 부대의 젊은 장교들 또한 장래가 촉망되는 군부의 인재들이 즐비했다고 하는데 이들이 모두 역모로 몰려 죽거나 후금에 투항해 버렸으니 후유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조.



여담1 이괄의 군사가 그리 용맹했던 데에는 이른바 항왜(임란때 투항한 일분군) 의 역할이 컸다고 합니다. 이들이 100명이 훨신 넘었다고 하는데 전투에서 무지막지한 위력을 보였다고. 오죽하면 피난가는 와중에 인조와 신하들이 동래의 왜관에서 왜병을 천명정도 끌어와 쓰면 어떨까? 라는 의견이 실행 직전까지 갔엇다고 하니...


하지만 이원익이 극구 만류하고 아직도 임란때의 지옥같은 경험이 생생했기에 결국 파토...또한 이괄의 난때 김충선(항복한 항왜중 대표적으로 조선에서 성공한 인물, 일본명은 사야카) 도 조정의 편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역시 최고의 공은 정충신 이겠조? 이 인물도 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충무공 정충신(출처: 나무위키)


정충신은 본관은 금성, 자는 가행, 호는 만운 광주출신이며 조선왕조에서 '충무공' 시호를 받은 9인중 하나인 그는 아버지가 시골 아전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어찌되었건 출신성분은 천민 이었습니다. (노비종모법. 즉 어머니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 탓인듯?)


그는 어려서 권율의 종복으로 들어갔는데 워낙 영민해서 권율이 크게 아낌을 받았으며 당시 벌어지고 있던 임진왜란때 빠르고 정확한 정찰능력을 보였다고 합니다.


당시 권율은 선조에게 보고서를 올려야 했는데 문제는 사방이 왜병에게 포위된 상황. 즉 이 보고서를 가지고갈 전령은 사실상 사지로 들어가는거와 같았는데 권율이 지원자를 뽑으니 유일하게 나선게 정.충.신!


정충신은 수백리의 왜병 점렴지를 단신으로 뚫고가 선조에게 권율의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성공했고 선조는 정충신을 가상하게 여겨 그 자리에서 바로 면천(신분상승) 을 해줍니다. 그리고 평민이된 정충신은 이항복의 막하로 들어가 공부를 해 결국 무과급제를 하게 되지요. 


광해군 시절에는 폐모론에 반대해 유배를 떠나게된 이항복을 수행해 유배지까지 따라갔는데 마침 중풍까지 온 이항복을 정충신은 지극정성으로 간병햇다고 합니다.


후에 관직에 복귀한 정충신은 후금을 오가는 사신으로 활약하며 위에 기술한것 처럼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정충신의 일관된 기조는 "중립을 지키고 후금과 화친한다" 였고 인조반정 이후 친명배금정책(명과 친하고 후금을 멀리한다) 을 강화한 인조에 의해 정충신은 한직을 전전하는 신세가 됩니다. 


당초 도원수 장만, 부원수 이괄, 정충신 이 셋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친한 사이였습니다. 이괄의 난의 원인이 되었던 역모고변에서도 이괄의 아들과 함께 정충신의 이름까지 나왔었조. 어찌보면 이괄과 함께 숙청당할뻔한게 정충신입니다.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와 가까운 곳에 있던 정충신은 가만히 있으면 이괄에게 잡혀 반란에 끌려가거나 죽임을 당할게 분명한 상황. 이러다 이괄-조정 양측에 모두 밉보이게되어 꼼짝없이 죽겠구나 생각한 정충신은 재빨리 성을 버리고 장만에게로가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게 되조.


이런 정충신의 생각은 주효해서 이괄의 난을 일으키자 다급해진 인조는 "안주목사 정충신은 반역에 가담했을리없으니 어서 반란을 토벌하라" 라는 명을 내립니다. 그리하여 멱모에 몰려 죽을뻔한 정충신이 나라를 구하게 되는 거구요.


이괄의 난이 종료된 후 인조는 남이흥과 정충신을 불러 북방 상황과 후금의 전력에 대해 이것저것을 묻습니다. 


정충신은 그 자리에서 병사들을 육성해야 한다는것을 강변하며 이리 말합니다.


 "북방의 각 요충지의 성들 마다 군사력이 본래 있어야할 정원의 반도 안됩니다. 안주성만해도 5~ 6천은 있어야 하는데 2천도 채 안되는데 최소 3~4천은 있어야 막을 수 있습니다."


 "군사의 수도 작은데 훈련조차 없으니 대응하기가 막막합니다"


 "후금군의 강함은 말로 표현할수없고 나가서 싸우면 필패니까 무조건 수성전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후금은 기병만 9만인데 그중 1만필은 명마중의 명마입니다"


이괄의 난으로 병력 소모가 극심한데다가 본래 광해 때부터 후금을 대비해 남쪽지방에서 병사를 징발해 북방 요충지에 보내곤 했는데 인조가 집권하고서는 인심을 얻는다는 이유로 그걸 중단했기 때문에 병력이 크게 부족했던 것이조.남이흥도 이 견해에 매우 동감했구요.


하지만 인조가 말하는게 가관입니다.


"군사의 수가 뭐가 중요함? 장수들의 능력과 투지가 중요한거지!!!" 

"장수들이 싸울 궁리는 안하고 성에 틀어박혀 지킬 궁리만 하다니 에이 한심한!!!"

"누르하치? 그까짓놈이 뭐가? 하찮은 오랑캐가 아닌가?" 


그리고 정충신과 남이흥의 답변


"군사가 없는데 어찌 싸우겠습니까? 솔직히 10만명만 있으면 1~2년 훈련시켜서 요동도 함락할수 있습니다"

"저희가 아무리 무능한 장수라지만 수만의 병력만 가질 수 있다면 공을 세워보겠습니다"


그들의 말에 인조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머쓱해졌다고...하지만 정충신과 남이흥같은 일선 사령관들의 요청에도 병력 충원은 이루어 지지않았고 그에 더해 이괄의 난으로 인해 장수들에 대한 감시까지 더해지는 통해 장수들은 제대로된 군사훈련 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이런 상황속에서 정묘호란을 맡게 됩니다.


호란에 대해서는 이따 자세히 기술할테니 정충신과 남이흥의 이야기만 하자면...


남이흥은 이후 안주를 지키며 후금군에 대적하다가 중과부적의 군세로 인해 성이 함락되기 전 장수들과 화약더미속에서 '자폭' 합니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강한 적을 만나 죽는건 어쩔수 없지만 군사훈련 한번 못해본게 한이다!!!" 였다고 하니 사실상 인조나 서인정권이 죽인거나 마찬가지조.


정충신은 정묘호란때 부원수로서 직무에 충실했고 정묘호란 후 인조의 객기를 말려보려다 파직되어 귀양갔다가 이내 복직됩니다. 하지만 병이 심해져 은퇴 후 병자호란 직전 사망하게 됩니다.


정충신이 살아서 조선군을 이끌었다면 조선이 그런 치욕을 당했을지...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조. 그는 뛰어난 장수이고 외교관이며 참모였습니다.



이괄의 난이 종료된지 불과 3년후. 그동안 아무런 대비책도 세우지 못한 조선은 후금군의 기습을 받게 되니 이것이 '정묘호란' 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황태극은 조선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고 이괄의 잔당으로 투항한 한윤 또한 조선침략을 계속 권유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조선 땅인 가도에서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요동을 수복하자~!' 고 외치는 상황이었고(물론 실제 그럴 의도는 없는 허장성세) 명나라와의 교역이 완전히 끊겨 경제적으로도 후금은 곤란한 상황이었기에 조선을 쳐서 후방도 단단히 하고 전리품과 조공을 받아 해결해보자는 의도였지요.


그리하여 황태극은 자신의 동생 아민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조선으로 출동시킵니다.



두번의 호란



군사수가 3만이면 조선을 정복하기에는 부족한 숫자. 아민은 고립을 우려해 병자호란과 달리 조선의 북방 요충지들을 하나하나 함락시키며 내려왓습니다. 적군이 3만이라 하나 조선의 북방 방어선은 턱없이 헐겁고 부족했기 때문에 아민은 간단히 성들을 함락시키고 빠르게 남하했지요.


안주에서는 앞서 말한대로 남이흥이 분전끝에 전사했고 조선군은 밀리고 밀려서 개성까지 패퇴한 상황이었습니다. 인조는 5년만에 두번의 피난을 하는 진기록을 세우며 강화도로ㅌㅌㅌ 하고 소현세자는 분조(나뉘어진 조정)를 조직해 호남으로 내려갔습니다.(그곳에서 영민함과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 소현세자의 존재감이 처음으로 부각되기 시작함)


평양까지 들어온 아민은 강화도로 튄 인조에게 부장 유계(유해?) 를 보내 후금-조선간의 화친 의사를 타진합니다. 그리고 이때 살이호의 패전때 후금에 투항했던 강홍립, 박난영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언관들은 이들이 나라를 팔아먹었다며 죽여야한다 아우성 쳤지만 인조와 대신들은 그들을 만나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는데 둘은 후금의 전력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며 우선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명나라와 단교하지 않아도 될것같다는 의견을 개진합니다.


후금이 내건 그 조건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명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으며, 후금과 조선이 형제의 나라가 되고, 왕자를 인질로 보낼것 이었기에 조선 입장에서는 당연히 수용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아민은 "이 조건을 안들어주면 우리는 한양으로 들어가 농사지어 군량을 확보해 오랫동안 물러가지 않겠다!" 라고 엄포를 놓자 조선입장에서도 마냥 거부하기는 곤란한 처지.


결국 유계와 조선 조정은 여러번의 협상을 통해 "조선과 후금이 형제국이 되어 교류하되 명과의 교류는 일단 유지해도 좋다" 는 조건으로 합의를 보고 화친의 초안을 잡은 후 유계가 보고를 위해 조선 사신들과 돌아가 아민에게 이 초안을 보여주자 아민은 대노합니다. 


바로 이 초안에 명나라 연호인 '천계' 가 써져있기 때문이조.


"우리는 명나라의 속국이 아닌데 여기 왜 천계 두글자가 써져있는 것이냐!!!" 라며 아민은 초안을 집어뎐졌고 "유계 네놈이 조선에서 뇌물을 받고 일을 그르친것이 틀림없다!" 며 유계를 처벌하려 합니다.


유계는 혼비백산하여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ㅠㅠ" 라며 사정했고 결국 다시 강화도로 돌아갑니다.


자기 목숨이 달린 유계는 명나라 연호를 제외할것과 화친이 맺어진 의미로 백마와 흑마를 잡아 그 피를 마시는 의맹 의식을 조선 왕이 직접 치룰것을 요구합니다.


조선 조정의 대다수는 "이것은 강상이 멸망하는 것이다!" 라며 반발했지만 이귀, 최명길 등 소수는 "고려도 송과 금을 동시에 섬겼고 사서삼경에도 의맹의식이 적혀있는데 안될것 없다" 라는 현실논을 내놓았고 결국 인조는 "어차피 못싸우는데 받아들이는것 말고는 도리가 없지 않은가" 라며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결국 인조5년 3월 3일. 명나라 연호를 뺀 합의문과 인조는 왕실에 초상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향만 피우고 말의 피를 마시는건 신하가 대신한다는 조건하에 후금과 조선간의 화친이 처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정묘화약)


이후 후금과 조선은 국경에 시장을 개설하고(후금 측의 상인들의 편의비용을 전부 조선이 대주는 불평등 무역), 조선이 조공을 바치고 왕실사람인 원창군을 인질로 보내게 되었조. 또한 후금군은 화친이 맺어진 이후에도 바로 철군하지 않아서 조선측이 항의하기도 하구요.


그리하여 어느정도 후방이 단단해진 후금은 본격적으로 몽고 정벌에 나서 결국 몽고는 후금->청과 대대로 혈맹을 맺게되는 관계가 되었으며(청나라 황후중에 몽고 출신이 꽤 됨) 몽고지역을 돌아 명나라의 장성 서쪽으로 진격하는 루트를 이용해 명나라를 전방위적으로 약탈해 식량과 인구문제에 비약적인 개선을 이뤄냅니다.


이 과정에서 계략으로 명나라 최고의 장수 원숭환을 죽이기도 했구요. 그렇게 10여년이 흘럿습니다...



여담2 모문룡은 비록 명나라 장수이지만 정묘호란의 결정적 구실이 된 인물이라 잠시 소개하자면...


모문룡은 요동이 후금에 넘어가자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조선 근처에 와서 명나라 패장병과 백성들을 규합해 군사화합니다. 하지만 아민이 모문룡 토벌을 위해 출전하자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으로 도망쳐 오게 됩니다.


모문룡은 여기서도 명나라 사람들을 규합했고 광해군은 이를 구실로 후금이 쳐들어오기라고 할까봐 모문룡을 내쫓고 싶어햇지만 그래도 모문룡은 상국 명나라의 장수였기에 그러진 못하고 그를 가도라는 섬으로 들어가게 하지요.


모문룡은 명 조정에 후금군에게 승리했다는 거짓보고를 수차레 올려 그때마다 은자를 상으로 받았고 좌도독 직함까지 받습니다. 그리고 이 은을 이용해 조선 인삼등을 이용해 명나라의 세도가들에게 뇌물을 바쳤고 덕분에 더 많은 상금을 받게 되었조. 게다가 모문룡은 자기가 상국의 장수라는 이유로 조선으로부터도 은자를 원조받았으니 양측에서 돈을 받은것...


이와중에 조선에서는 반정이 일어나 인조가 즉위했지요. 


처음 명나라는 인조반정을 탐탁치 않아했습니다. 광해는 파병도 하고 성의를 다했는데 왜 그를 폐위했느냐는 이유였조. 그래서 인조는 명으로부터 책봉고명을 받기까지 2년여가 걸렸습니다. 모문룡은 자기가 인조의 책봉에 힘을 써줬다며 거드름을 피우며 더 많은 지원을 요구했구요.


무엇보다 모문룡이 급했던건 식량이었습니다. 가도는 섬이니 식량조달이 여의치 않았고 육로는 모두 후금이 장악해버려 명으로부터의 수송도 불가능. 명 조정은 모문룡에게 "은을 줄테니 조선에서 사먹어" 라는 식이었구요.


해로 수송은 더 불가능이었던게 신라, 고려와 그시대의 중국인 당, 송, 원은 모두 활발한 대외교역을 했기에 해상항해나 교역에 능했지만 조선과 명은 모두 쇄국정책을 펴는 나라였기에 항해술 또한 매우 퇴보되어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후금이 심양 등 요동을 장악해버리자 명-조선은 서로 오고갈 방법이없어 어쩔 수 없이 해로로 사신이 오가갔는데 난파되어버린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결국 모문룡은 인조에게 은과 식량의 교역을 요구해 승낙받았는데 문제는 그 양이 어마어마 했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군량미중 1/3이 모문룡에게 들어갈 정도였다고 하는군요. 


문제는 은을 얼마를 주던 조선에 흉년이들어 줄 쌀이 없다면? 모문룡은 쫄쫄 굶을 수 밖에 없다는 거조.


조선에서 흉년을 이유로 식량 교역의 수를 확 줄이거나 거부하자 모문룡은 악독한 본성을 드러내어 병사들을 시켜 평안, 황해도 지방의 관아와 민가의 식량을 약탈하고 살인까지 무수히 저지릅니다. 그리고 명 조정에는 후금땅을 노략질했다고 거짓보고 후 상타기 테크...


게다가 쉴새없이 요동을 수복하겠다고 떠들며 후금을 자극했고 결국 그때문에 황태극이 군사를 보내 정묘호란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조. 


그런데 모문룡은 정작 인조가 구원요청을 하자 모문룡은 관망만하다가 후금군이 물러가자 후금에 의해 변발이 된 조선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며 그들의 수급(목) 을 명나라에 보내 "후금 군을 죽여서 수급을 보냅니다" 라고 거짓보고를 하는 지경이었습니다.


이렇게 모문룡이 조선에 끼친 해악은 말도 못할 정도였지만 인조는 상국의 장수라며 빌빌거리기에 일관했으니 백성들만 그저 불쌍할 뿐이조. 조선 장수들은 모문룡에게 아주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고 합니다.


그는 나중에는 은밀히 후금과도 내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는데 후금은 처음에는 의심하다 나중에는 받아들일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명 조정에서는 천계제가 붕어(황제의 죽음) 하고 모문룡의 뒷배를 봐주던 위충현 등이 몰락했습니다.


요동 총 사령관으로 부임한 원숭한은 평소 모문룡의 이런 행태를 비루하게 여기고 있었고 모문룡을 소환하게 되었는데 모문룡도 눈치는 있는 사람이라 안좋은 낌새를 눈치채고 병사를 2만8천이나 끌고 원숭환을 찾아갑니다. 설마 이런 대군을 끌고가는데 자신을 어쩌겠어? 라고 생각한 거조.


하지만 원숭환은 명장 답게 모문룡을 환대하는 척하다 불문곡직 체포해 그의 죄상을 나열하고 바로 베어버립니다. 원숭환의 모문룡 참살은 사실 큰 후유증을 나았는데 뭐 이건 중국 역사니까 넘어가조...


알고싶으신 분은 참고 https://mlbpark.donga.com/mp/b.php?m=search&p=31&b=bullpen&id=201704020001322998&select=swt&query=%EC%9D%80%ED%95%98%EC%88%98&user=&site=donga.com&reply=&source=&sig=h6jzGftgg3aRKfX@hca9RY-Y6hlq



비록 형제국이 된 후금과 조선이었지만 조선 입장에서는 도저히 인정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년 보내는 세폐(=조공)의 양도 갈수록 줄어들었고 품질도 점점 떨어져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었조. 


당시 후금은 그야말로 비약적으로 세를 불리고 있었기에 이런 조선의 행동은 그야말로 대세를 모르는 행위였고 이런 조선에 대한 유감과 불어난 세력으로 인해 황태극은 조선과의 관계를 재조정 하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형제국가에서 -> 군신국가로...


우선 황태극은 조선에서 보내는 조공의 양과 질이 너무 형편없다며 수령을 거부합니다. 당시 인조는 재위 10년을 훌쩍 넘기며 왕권이 공고해진 상태였고 아버지 정원대군의 추승마저 관철해내며 근거없는 자신감이 끝까지 차있는 상태였습니다.


인조는 황태극이 조공 수령을 거부하며 조선을 꾸짖었다는걸 듣자 크게 노해 이참에 후금과 관계를 끊을 결심을 하고 그야말로 선전포고문에 가까운 글을 지어서 황태극에게 보내는것 추진합니다. 


비변사는 경악해서 인조를 말렸지만 인조는 전에없이 강하게 나왔고 어쩔수없이 문서를 만들어 후금으로 보냈는데 북방을 지키던 도원수 김시양, 부원수 정충신이 그 문서의 내용을 보고 인조에게 상소를 합니다.


"장수가 되어 싸움을 부끄러워 하면 안되지만 이 문서가 후금으로 가면 틀림없이 전쟁이나서 조선은 아작날것" 이라는 내용이었조. 


인조는 코웃음을 치며 "장수들 따위가 어찌 조정 대사를 논하는가?" 라며 바로 이 둘을 파면해 귀양보내고 새로운 도원수를 임명했는데 그것이 바로 김.자.점! 그리고 부원수는 윤숙.


게다가 당시 후금은 몽고 지역을 세력권 하에 두었는데 마침 조선의 인열왕후의 상사를 조문하고자 후금은 사신을 용골대, 마부대를 보내면서 이상하게도 몽고의 왕공들을 같이 딸려 보냅니다.


후금 사신과 몽고 왕공들은 "황태극을 황제로 올리려 하니 조선왕도 황제로 추대하는것에 동참해달라" 는 것이 그들의 요구.


그것은 황태극이 황제가 된다는 의미 외에 조선이 황태극의 신하. 즉 군신관계가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군신관계를 맺는다는것은 곧 명나라와 영영 단교한다는 의미였기에 조선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곤란했지요.


오랑캐를 황제로 섬기는 일이므로 당시의 사대부들 입장에서는 절대로 용납될수 없는 일인데다 아직 상당히 강한 세력인 명나라에게 미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조선은 단호히 거부했고 후금 사신과 몽고왕공들은 다음날에 일체의 의전을 거부하고 바로 돌아가버립니다. (돌아가는 사신행렬에 다가 아이들이 돌을 던졌다는 이야기가ㄷㄷㄷ)


조선이 동의하거나 말거나 애초에 한번 떠보려고 한 것이기에 1636년. 황태극은 예정대로 황제로 즉위(청태종 숭덕제) 하고 나라의 이름 또한 '청' 으로 바꿉니다. (이제부터 청나라)  


황태극이 황제로 즉위하자 인조는 예전보다 더 초초초초초강경한 격문을 지어 황태극에게 보내고 전국에 전쟁대비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자뭇 비장하게 "적들이 쳐들어 오면 내가 직접 서북지역으로 친정해 백성들을 위무하겠노라!" 고 선포합니다.


하지만 그 초초초초초강경한 격문을 보고 조정의 외교관리들이나 최명길이 "진짜 이거 보내면 끝장입니다. 님 압록강 물 얼어서 청나라 기병대 쳐들어 오면 어쩔려고 이래요? 감당 가능하시겠어요???" 라고 하자 그제서야 자신의 주제를 파악한 인조는 청으로 가던 격문은 의주근처에 멈추어 두게 하였는데 결국 의주에 와있던 청나라 장수 마부대에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그 격문을 읽은 마무대 왈 "ㅋㅋㅋㅋㅋ우리 폐하께서는 조선을 아녀자의 나라인데 뭐 두려울게 있겠냐고 하셨습니다.이 국서는 정식문서가 아니니 올릴수는 없어요~ 뭐 올리고 싶으면 정식으로 사신단을 통해 올리던가 말던가 하셈ㅋㅋㅋ"


이라 말하며 임경업을 조롱했고 임경업은 심하게 부끄러워 했다고 합니다...


최명길의 간곡한 충언에 그제서야 주제파악이 된 인조는 청과 일전을 불사하자는 언관들을 "젖비린내 나는 연소배들이 나라를 망치려 한다!" 며 크게 꾸짖고(선조 못지않은 태세변환) 청나라에 화해를 구하는 사신을 보내려는 의논을 시작합니다.


이 와중에서도 대신들은 사신을 "보내야 한다." "안보내야 한다." "갈거면 그 위험한 임무를 누구에게 맡기지?" "보내려면 갖출건 다 갖춰서 대규모로 보내 성의를 표해야 한다." "걍 도원수 이름으로나 보내쟈" 등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의논하는데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지요.


뭐 이와중에 조선의 사정을 해명하는 글을 청나라에 여러차레 보냈지만 그때마다 무반응 이었습니다.


이와중에 북방의 사정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는데 "겨울에 강동(조선)으로 가려고 말을 준비시키는 중" 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 조선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그제서야 사신단 구성을 맞춰서 박로를 대표로 보내게 되었는데.


이미 박로가 압록강 근처에 도착할 무렵... '14만의 청군'은 이미 압록강이 건.너.고 있었습니다.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의 항쟁(출처: 나무위키)


14만의 청군은 그야말로 전광석화 처럼 내려왔습니다. 정묘호란때의 아민은 3만이라는 별동대를 이끌고 왔기에 고립을 피하기 위해 요소요소의 성들을 점렴하며 내려왔지만 병자호란때의 청군은 워낙 대군이었기에 고립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4만이라는 숫자는 청나라로서는 명나라를 견제하기위한 병력을 제외하고 거의 전 병력이나 다름없었던데다가 당시 농업정책에서 연거푸 실패해 경제와 식량상황의 위기가 심했던 청군으로서는 그야말로 속전속결이 전략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청군은 임경업의 백마산성을 비롯한 조선군 주요 북방 거점들을 우회해 빠르게 남하했고 꼭 필요한곳은 일정 벙사를 떼어서 견제하게 하는 전술을 폈습니다. 그래서 안주, 평양, 개성만 일부러 점렴했고 나머지는 그냥 우회했조.


그래서 청군의 진격속도는 전광석화. 한양의 인조에게 전해진 청군의 첫 소식은 이것이었습니다.


"적군이 송도에 이르렀다" 


의주도, 안주도, 황주도, 평양도 아닌 송도 즉 개성까지 적들이 왔다는 이야기였조. 이건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인조는 정묘호란때처럼 강화도로 가기로하고 먼저 왕실 식구들과 종묘의 신주들을 먼저 떠내보내고 자신 또한 부랴부랴 출발해 남대문까지 왔는데 다시 들어온 적들의 소식.


"적들이 양철평까지 왔나이다!!!"


양철평은 지금의 불광동 입니다. 즉 코앞까지 왔다는 의미...인조와 신하들은 그야말로 아연실색해서 "종사가 오늘로 끝나는구나ㅠㅠ" 라며 울며불며 두려워하는 사람들 뿐. 이대로 가다가는 청나라 기병대에 바로 습격당해 그자리에서 나라가 끝장날 위기였조.


이때 나선 사람이 바로 최명길.


최명길은 "제가 청군의 진중으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라며 단신으로 청군 진영으로가 저들의 의도를 물으며 진격을 지연시켰고 이 사이에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워낙 청군이 가까운데다가 청군이 이미 김포 지역을 점렴해 강화도로 가는게 불가능했음)


하지만 남한산성은 적의 대군을 막아내기 어려웠기에 김류 등은 강화도로 가야한다 역설했고 인조는 다시 강화도로 가려 했지만 불행하게도 한창 겨울때라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에 얼마 가지도 못하고 다시 남한산성으로 백백;;;


그리고 곧바로 도착한 청군에 의해 남한산성은 포위되 버립니다.


사실 병자호란은 많은 군사가 동원되었지만 그리 큰 교전은 없었습니다. 남한산성에서의 농성 초기 신경진이나 원두표 등이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꼴랑 적병 수십명을 죽인게 다였을뿐 대세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조.


황태극은 곧 인조와 조선 백성에게 조서를 내립니다.


to 인조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유시(좋게 타이른다는 의미) 하노라. 너희는 예전 명나라를 도와 우리에게 해를 끼쳤다. 정묘년에 너희를 벌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중략) 이번 전쟁의 원인은 진실로 너희에게 있다. (중략) 너에게 권유했던 몽고왕공들은 모두 원나라의 후예들인데 그들이 어찌 너만 못하겠느냐? 너희는 과거에 원나라에 공물을 바쳤으면서 하루아침에 변했단 말이냐? (중략)


내가 너를 아우로 여겼는데 넌 어찌 나를 배역(은혜를 저버림) 하느냐? (중략) 너희는 정묘년의 치욕을 씻는다면서 어찌 아녀자처럼 성곽에 틀어박혀 있느냐? 너는 그 성안에서 구차하게 살길 바라겠지만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하고 그대로 두겠느냐? (중략)


너희가 명나라만을 섬기고 우리를 해치려 함은 무슨 까닭인가? 이제 내가 너희 8도를 무찌르려고 하는데 명나라가 어디 너희를 어떻게 돕나 한번 보자 (중략)"


백성들에게는 "이게 다 너희나라 왕 탓이니까 그냥 집에서 있고 농사나 지어 그럼 안건들게" 라는 뉘앙스의 내용이었구요.


이때부터 조선과 청 간에는 수없는 외교전이 진행됩니다. 우선 인조는 "왕제(왕의 형제)를 보낼테니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ㅠㅠ" 라고 할 요량으로 박난영을 보냈는데 청군 장수 용골대는 쿨하게 박난영의 목을 베어 버립니다.(박난영은 청에 오랫동안 체류했기에 안면이 있는 사이였는데도...)


그리고 인조는 좀 잘보여볼까 하는 생각으로 수레에 술과 소, 돼지고기를 잔뜩 실어 보냈는데 청군 장수들은


"ㅋㅋㅋ이미 8도의 주육(술, 고기)를 모두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이런건 왜 가져오셨나? 댁들은 추운 날씨에 성에 갇혀서 모두가 굶주릴텐데 다시 가져가서 배고픈 군사나 백성들에게나 나눠 주셔~ㅋㅋㅋㅋㅋ"


라며 조롱합니다. 이와중에 최명길은 이리저리 뛰며 청과 교섭에 나오지만 청군 측은 "이미 우리 황제께서 직접 오셨으니 너희들 왕이 성을 나와 황제에게 예를 표하고 왕의 아들을 보내야 한다" 라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황태극이 직접 왔다는 말에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 때보다 훨신 힘든 협상이 될거라는걸 깨닫게 되지요.


물론 조선군이 구경만 하고 있었던건 아닙니다. 


인조도 자기 딴에는 반정이후 후금을 대비하기 위해 준비를 경주하여 조선에는 중앙에 상비군4~5만, 속오군(농사짓다가 전쟁나면 징발되는 지방의 예비군) 8만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괄의 난으로 인해 중앙군 중 반이 소멸되었고 속오군은 훈련이 거의 안된 오합지졸들 이었조.


그래도 10만이라는 적지않은 숫자가 조선의 군사였지만 문제는 이를 지휘할 컨트롤 타워가 부재했습니다. 


조선군 전체를 지휘할 군 통수권자인 인조와 대신들은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외부 군대와 전혀 연락하질 못했습니다. 삼남(충청, 전라, 경상) 지방의 근왕군이 왔지만 제대로된 연락도 못하고 불화살로 신호를 보내는게 전부...


이런 상황에서 최고지휘자 역할을 해줘야할 북도 도원수 김자점은 당시 함경도의 정예군사 2만을 이끌고 관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김지점이 능동적으로 적들의 뒤를 끊었다면? 식량문제가 컸던 당시 청나라의 현실상 청군은 퇴각할수밖에 없었을 거고 화친을 했더라도 최소한 삼전도의 치욕같은 능욕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당시 임경업이 의주 근처에 주둔하고는 있었는데 그는 요동 일대를 급습해 적을 회군시키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수하 병력은 수백에 지나지 않았고 주변의 군사를 합쳐봐야 3천이 채 안되는 실정이니 시도를 할래야 할수가 없었조. 이래서 김자점의 죄가 아주 큰 것이구요.


컨트롤 타워가 부재한 상황에서 삼남지방의 근왕병은 협공을 한다거나 그런 시도는 꿈도 못꿨고 그나마 제대로된 전술을 사용한 장수도 없었는데 조선은 보병이 주축이었으니 응당 험한 지세를 먼저 점유해야 함에도 멍청하게도 평지에서 적들과 맞붙어서 전멸을 당하지 않나, 오히려 청군이 험한 지역에 매복하고 있다가 조선군을 덮치질 않나, 청군을 신나게 도발하다가 무관심으로 일관하자 지쳐서 돌아가는 길에 청나라 기병대에게 뒷덜미를 잡혀 당하질 않나...


아무튼 총체적 개판이었조. 오죽하면 인조가 "적들의 형세를 알지도 못하고 무턱대고 공격하니 망하지 않고 배기겠냐?' 라며 한심해 했다고...


각지의 근왕병이 왔다는 소식에 용기백배해 항전태세를 고취하기도한 인조였으니 그나마저도 물거품이 되자 다시 청군과의 협상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최명길은 어떻게든 인조의 출성(성을 나감)만을 면하려고 애를 썻지만 소용없는일. 황태극은 "니네 왕이 성을 안나올거면 차라리 한판 붙자. 하늘이 결말을 내줄것!" 이라며 위협을 가해 왔습니다. 게다가 남한산성의 식량으로는 고작 50일분에 불과했기 때문에 버티기도 민망한 상황.


이제 항복은 피할 수 없는 대세였고 김상헌이나 정온, 언관들만이 결사항전을 외치고 있었는데 최명길이 언관들꾸짖으며


"그대들이 매번 조금한 문구를 가지고 다투느라 시기를 놓쳐 일이 이지경에 이르렀다. 너희들은 문구의 가부만 논하면 될뿐 (황태극에게) 서신을 보내는것은 너희같은 연소자들이 알바가 아니란 말이다!"


라고 말해 언관들을 호통쳤고 "거짓항복으로 사태를 모면하자" 는 주장에 대해서는 "지금이 어느때인데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처리한단 말입니까!' 라고 말했다고...


그러며 다시한번 황태극에게 애원하는 서신을 보내니 청나라 장수들이 왠 서신들을 보여줍니다. 바로 봉림대군이 보낸 편지...이 말인 즉슨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뜻!


강화도는 황태극의 동생 도르곤이 홍이포를 동원한 압도적 화력과 강화도검찰사 김경징의 임진왜란때의 신립못지않은 삽질로 함락된것.


김경징은 반정공신 중에서도 핵심인 김류의 아들이었고 당시 한성판윤(서울시장) 이었습니다. 병자호란이 터지자 강화도를 지키는 강도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강화도로 가기위해 강을 건널때 백성들을 아무도 태워주지 않았다고 합니다(심지어 세자빈도 안태워주려 했다고함;;;)


강화도에 와서도 해안 초소에 경계병 하나 안세워 뒀고 "설마 쟤네들이 바다를 건너서 오겠어?ㅋ" 라고 방심하며 술만 퍼마셨는데 김상용(김상헌의 형)이 그를 꾸짖자 "늙은것이 뭔데 참견질이야!" 라며 큰소리를 쳤다고;;;


청군이 도강하려 하는데도 술만 퍼마시다가 도르곤이 홍이포 포격을 개시하자 그제서야 ㄷㄷㄷ 떨며 지 가족들까지 버리고 땟목타고 혼자 토꼈음;;; 봉림대군은 결사대 조직해서 어떻게든 해보려 했지만 뭐 화력차이가 워낙 압도적이라 답이 없었조.


김상용은 화약더미에 불을 질러 자폭했고 여러 충직한 관리들이 그 불길에 뛰어들어 분신하거나 목을 메어 죽는 관리도 많았다 합니다.


봉림대군과 대신 윤방은 먼저 나가 도르곤에게 투항의사를 타진했고 받아들인 도르곤은 강화성에 입성합니다. 그후의 강화에있는 백성들. 특히 처자들이 어떤 봉변을 당했는지는 차마...강화도의 함락으로 왕족들과 선왕들의 신주들까지 전부 넘어갔고 이것은 인조의 항전의지를 꺾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청나라는 자신들과 싸우자고 주장했던 척화신 들을 먼저 보낼것을 요구했는데 인조는 차마 못할짓이라며 망설입니다. 하지만 안보낼래야 안보낼수가 없었조. 일단 청나라 때문인것도 있지만...


'조선군 장수들' 이 모두 척화신들을 청나라 진영으로 보내 죽여야 한다고 시위를 벌였기 때문입니다. 경기도 지역 지휘관들, 중앙군의 훈련도감, 어영청, 수어청등의 지휘관들이 전부 들고일어나


 "장수들이 전쟁하면 이꼴난다고 그리 말했는데 이게 대체 뭐냐 이게 다 상황파악 못하고 싸우자고 주장한 척화신들 때문이다! 저들을 성에서 내보내 청군진영으로 보내 죽게하라!!!" 라고 요구했습니다.


전쟁상황에서 장수들이 시위를 한다는건 사실상 쿠데타나 진배 없조. 장수들의 군심이 이러하니 안보낼래야 안보낼수가...


언관들은 너나 할거없이 "제가 청과 싸우자 주장했으니 절 보내어 죽게 하소서" 라고 했고 대신인 정온 또한 "제가 화의를 주장한 최명길을 비판했으니 저를 보내어 죽게 하십시요" 라 했으며. 소현세자 또한 "나에겐 동생들이있으니 나하나 없다고 생각없다. 내가 인질로 가겠으니 조치해달" 고 대신들에게 요구합니다.


결국 윤집과 오달제를 보내기로 했고 인조는 "미안하다 너희들의 부모와 처자는 마땅히 돌보아 주겠다" 라며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청나라 진중으로 압송했습니다. 이들과 평양 서윤(평??

댓글
  • LG사랑 2017/08/06 17:45

    추천했습니다. 말머리 역시->역사 수정하는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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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ighyama 2017/08/06 17:59

    잘봤습니다. 차라리 이 때 멸망하고 새나라가 들어서는게 나았을텐데 인물이 없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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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수찬 2017/08/06 18:31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시대상을 냉철하게 바라본다면 척화파의 논리가 그리 흐리멍텅한 건 아닙니다. 명나라가 버젓이 중원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 후금에 굴복하고 군신관계를 맺고난 이후 명나라가 후금을 격파했다면 당연히, 명나라 조정에선 조선 정부를 취조할 것입니다. 임란당시, 요동에 있던 기병과 물자를 탈탈 털어 조선을 구원해주었는데 명나라를 배반하고 후금에 붙어버린 건 현대의 시선에서 봐도 배은망덕한 일인건 분명합니다. 화의파 최명길조차, 명나라 관료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죠. 눈치 빠르고 두뇌 회전이 좋은 최명길 역시, 명나라와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명나라가 그렇게 허망하게 멸망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을 했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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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수찬 2017/08/06 18:32

    홍익한, 윤집, 오달제 삼학사의 경우도 무능하고 어리석고 대명의리로 똘똘뭉친 척화파라고 치부하긴 그렇습니다. 이들은 명나라와의 외교전략에 있어 인조에게 좋은 패를 쥐어준 사람들입니다. 후금이 조선을 정벌하면서 전망한 병력은 장교급이 300명, 사병급이 3000명이었습니다. 홍타이지 입장에선 이들을 위로할 필요가 있어서 목을 베어 민심을 진정시킬 제물로 척화신을 보내라고 조선정부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인조가 망설이고 있던 차에 윤집,오달제라는 젊은 언관 둘이 자진해서 나섭니다. 그들 나이 겨우 30살, 29살이었습니다. 게다가 오달제는 장원급제한 엘리트 관료로 조선 입장에선 아까운 인재였죠. 인조도 이들이 후금으로 가면 살아오지 못할 걸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분명 이들은 후금정부의 민심진정용 제물로 쓰일 게 뻔했죠. 가장 강직한 언관 2명 그리고 홍익한이 또 나서서 이 3명의 학사가 후금에 끌려가 결국 목이 잘리고, 시신은 서문밖에 버려져 고향에 돌아오지도 못합니다. 이들 노력덕분에 명나라 숭정제는 조선에 대한 서운함도 조금 풀리기도 했고 후금 홍타이지는 삼학사를 위해 커다란 비석도 세워줍니다. 삼한산두비라고 해서 조선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는 비였죠. 게다가 명나라를 배신하고 후금에 붙은 명나라 관리들도 삼학사를 보고 너무나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들었다는 이야기는 끝이 없이 전해지기도 하죠. 조선 정부 입장에선 삼학사의 충절은 명과의 외교전략에 있어 하나의 명분이 될 수 있는 중요한 패였고 그들이 자진해서 목숨을 내놓은 건 정말 나라를 위한 현명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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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기도둑 2017/08/06 18:36

    재밌게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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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시조치 2017/08/06 18:57

    박난영 부분은....
    http://cafe.daum.net/myojy/6MKD/2527?q=%B9%DA%B3%AD%BF%B5
    [그는 인조(仁祖) 초 후금과의 관계가 복잡할 때 회답관, 선위사, 춘추신사 등으로 활약했다. 심양을 왕래하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청장 마부대 용골대 등과 휴전 교섭을 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청(淸)나라와 화의하기 위하여 능봉군(綾峯君)과 심집(沈輯)을 왕자(王子)와 대신(大臣)으로 변장시켜 보냈다.
    이때 청나라의 진영에서는 서기 1617년 10월 강홍립(姜弘立) 도원수를 따라 명(明)나라 원병으로 출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머물러 있던 박난영에게 이들이 정말로 왕자와 대신이냐고 물었다. 이때 박공은 왕자가 아님을 알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사실이라고 말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박난영의 말을 믿으려 했으나, 병자호란시 통역관으로 만행을 저지른 정명수가 주장하기를, "거짓말 같으니 조선에 다시 확인하여 보자."하였다.
    그리하여 거짓이 탄로나 청(淸)이 대노하면서도 비록 적국의 신하이지만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살고져 하면 그대로 앉어있고 죽고져 하면 일어나라"하니 공이 혼연이 일어나는지라 역관이 하도 딱하여 울며 청하기를 한마디 말이라도 "호(胡)를 대접해 주면 후일을 기약할수 있다"하니 공이 분연이 꾸짖어 말하기를 "군왕(君王)께서 곤욕을 받으면 신하된 사람은 죽음으로 막을 뿐이다. 어찌 살길만을 도모하랴"라고 했다. 남한산성 쪽을 향해 사배(四拜)하고 의젓이 참형(慘刑)을 받아 최후를 마치니 향년(享年) 62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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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ngsik 2017/08/07 04:57

    많은 이야길 하고 싶지만 글이 길어 이괄에 관련된 이야기만 좀 해보자면..
    이괄이 1등공신이 아니라 하지만 사실 2등공신중 첫번째이고 그가 정말 행논공상에 불만을 품었는지에 대해서도 근거가 굉장히 부족합니다. 이괄이 본인의 공신책봉에 불만을 가졌다는 기록은 실록엔 전무하고 승정원일기에서 처음 나오는데, 이게 명나라에 이괄의 난에 대해 보고를 할 때 난을 왜 일으켰는지에 대해 설명키 힘들어 그냥 행논공상에 불만을 품어 난을 일으켰다라는 식으로 보고했고 그게 나중에 이야기가 퍼져 정설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또 정말 북방으로 갔을 당시 이괄이 그렇게 불만이 컸나에 대한 부분도 의심스러운데, 북방으로 갔을 때 이괄은 인조에게 이런저런 요청을 하고 이걸 인조는 가능한 부분에서 최대한 들어주어 기록상으로는 두 사람이 '협력'을 한 흔적이 굉장히 많이 보인다는 거죠.
    게다가 이괄 자체가 원래 무장입니다. 게다가 함경도에서 현감까지 지내서 북방에 대해 능통했던 인물로 여겨져 실제 북병사로 임명한 것도 광해군이었죠. 북방이 위험한 것을 감지하는데, 어중이 떠중이를 보낼 수 없으니 인조 입장에선 가장 믿을만한 장수를 보낸 것에 가깝고, 이건 마치 임진왜란이 일어날 거 같은데 이순신을 전라도로 보냈는데 불만을 가졌다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정말 불만을 가졌다 하더라도 애당초 이괄 이외에 당시 조정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자체가 별로 없었어요.
    이괄에 대한 인조의 가장 큰 실수는 이괄을 너무 믿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실제 이괄이 도성에서 포도대장으로 있을 때 이괄의 명으로 포도청 군관들이 사대부 집에서 난동을 피웠을 때도 국문을 하려 했으나 인조의 명으로 중단됩니다. 이괄의 아들이 반역이 의심되어 모든 대신들이 잡아오라고 할 때도 그걸 가장 적극적으로 변호했던 것이 인조입니다. 본문처럼 단순히 안 믿었다 정도가 아니라 이귀가 당장 잡아들이라고 했을 때도 '누가 그대가 반역한다고 말한다면 내가 그걸 믿겠느냐. 이것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식으로 반론하죠. 이귀마저도 그를 국문해야한다 했을 때도 이괄을 믿었던 게 인조였습니다.
    인조가 말을 안 듣자 사헌부와 사간원이 같이 이괄을 국문 해야한다고 할 때도 인조는 여전히 이괄을 믿었고, 그래서 타협을 해서 이괄의 아들만 잡아오라고 한 것에 대해 이괄이 분노하여 반역을 했던 겁니다. 실제 이정도로 인조는 이괄을 믿었었고, 그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가장 충격을 받았을 사람 역시 인조였을 겁니다. 그 배신감 때문인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애당초 법전에도 없던 역적의 처를 참형하는 것까지 강행하여 이괄의 처와 동생을 죽여버리죠..
    실제 인조와 이괄의 케이스는 선조와 이순신의 케이스의 딱 반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괄이 속이 어쨌든 인조 입장에서 가장 신뢰하고 끝까지 믿으려 했던 게 이괄이었고 그걸 배신한 게 이괄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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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퀸프레디 2017/08/07 09:14

    만약 이괄의 난이 발생하지 않고 김자점이 제대로 군사를 이끌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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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지대 2017/08/07 09:43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인조는 우리 나라의 왕이 남의 나라 왕 앞에서 치욕을 당했는데도, 뭔가 후련함을 주는 매력적인 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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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한맨 2017/08/07 10:29

    능양군 버러지는 왕되자마자 죽고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어야했는데
    참... 버러지는 오래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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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hnexen 2017/08/07 12:53

    최고위권자가 무능하면 고생은 민초가 한다는 교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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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G사랑 2017/08/07 13:06

    인조도 인조인데 그 밑에 신하들도 무능 그 자체였는듯 하네요
    뒷일은 아예 생각도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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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요뜨 2017/08/07 14:38

    너무 인조의 안좋은 면만 부각해서 쓴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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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한맨 2017/08/07 15:11

    [리플수정]능양군이 버러지니까 신하도 버러지만 모이는거죠
    능양군은 잘한거 하나도없고 범죄만 저지른 인간말종입니다.
    자기자식 며느리 손자 까지 죽인 패륜아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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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한맨 2017/08/07 15:12

    선조는 능양군에 비하면 세종대왕급 명군입니다.
    임란에 대비해서 방어체계는 갖춰놨어요
    예상보다 너무나 압도적인 숫자가 몰려와서 그런거지 어느정도 핑계는 댈수있는 사람입니다.
    국제 정치질도 잘해놔서 만력형님 헬프도 빨리 받아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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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olbase 2017/08/07 15:45

    우리야 실제 역사를 아니까 청한테 굽히고 들어가는게 맞았다고 알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죠. 당장 청이 산해관도 자력으로 넘어간 게 아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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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apet 2017/08/07 17:18

    좋은 글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만 문장 끝에 '조'는 '죠'로 표기를 좀 해 주셨으면...
    중간중간 집중력이 하락해서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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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뢰성제로 2017/08/07 17:25

    이괄을 믿든 안 믿든 인조가 이괄의 아들을 압송하라고 명령한 이상 이괄이 난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괄의 말이 맞죠. 역모로 아들이 압송되는데 아버지가 멀쩡하겠냐고. 조선 시스템에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괄을 믿었다는 것도 좀 그런게, 본문에도 나오지만 인조는 이괄을 믿었다기 보단 상황상 믿는 것말곤 방법이 없었습니다. 조선 최정예 북방군이 반란을 일으킨다? 막을 방법이 없죠. 그래서 이괄이 난을 일으키지 않는게 최선의 정답이고, 그래야만 했고, 그래서 그렇게 움직인 겁니다. 이괄을 달래야만 했죠.
    실제 이괄이 한성 점령 후 인조를 추격했으면 인조는 거기서 끝났습니다. 이괄의 난이 실패한 이유는 명분론에서 밀려서 군사들을 결집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직속병사들마저 역도라는 명분때문에 사기가 떨어졌고 많이 투항했는데 인조를 조기에 처단했다면? 왕이 바뀌는거죠. 정권교체에 성공하는거고, 거기서 명분은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사례죠. 왕을 잡으면 끝나는 게임입니다.
    그리고 인조의 무능은 다른게 문제가 아닙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꼭 조선이 아니라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후금조차도 그것에 못마땅해했으니까요. 그런데 인조는 대놓고 후금의 어그로를 끌었고, 그러면서 대비도 제대로 안했습니다. 장군 인선부터 최악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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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ighyama 2017/08/07 17:48

    아들을 반역죄 혐의로 압송해가는데 죄가 없으면 풀려날거다라고 믿고 가만히 있을바에야 그냥 들보에 목매는게 낫죠. 일본이 정명가도를 요구할 때 아 명나라 치러가는거니까 우리는 상관없네라고 생각하는거랑 똑같으건데. 인조가 진짜 이괄을 믿었으면 끝까지 이괄아들을 소환하지 말았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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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가 2017/08/07 17:55

    인조가 이괄의 난과 그 사후 차리에서 큰 삽질을 한 건 맞지만 인조의 대청 정책을 병자호란의 주 원인으로 보는 시각은 그리 올바르다고 보지 않습니다. 특히 당시 명-청의 상황을 고려하면 말이죠. 지금 길게 쓸 수 짧게 얘기하자면 당시 명의 상황은 후대에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풍전등화 몰락 직전은 절대 아니었고 오히려 당시 청이 명과의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명과의 교역이 전면 중단되어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된 상태였죠. 오죽하면 명과의 협상때 원래 조건의 절반반 받을테니 제발 화친해 달라고 애걸할 정도였죠. 따라서 당시 홍타이지는 내부 단속과 식량 확보 등의 이유로 군사 행동이 필요했고 그 타겟이 원래부터 눈에 가시였던 조선이 된 것이며 조선의 대청정책 변화는 마이너 요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최근 학설입니다. 일부에서는 아예 병자호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청조 칭제 인정 교서 자체가 명분쌓기용 낚시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명과 조선의 특수한 사정을 감안해서 양다리를 허용항다는 게 정묘호란때 합의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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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가 2017/08/07 18:05

    병자호란때 인조의 가장 큰 잘못은 일단 이괄의 난을 일어나도록 만든 점, 그리고 그 사후 처리때 북방 방어 시스템 재구축보다 재발 방지쪽에만 신경써서 김자점이나 김경징같은 무능한 인물들을 군사 요직에 앉히고 정충신이나 남이홍같은 능력자들을 반란 감시용으로만 써먹었다는 거죠. 이 부분은 확실히 조선 최대의 암군 후보로 자주 오르내리는 선조보다 못한 최악의 행동이죠. 적어도 선조는 임란 전에 권율이나 이순신같은 무장들을 제대로 키워주기는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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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의은하수 2017/08/07 20:23

    허걱 댓글이 이리 많이 달린줄 몰랐네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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