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중공업 주주총회가 열리고 있는 도쿄 시내에서 주주들을 상대로 전단지를 배포
1944년 미쓰비시에 동원된 여자근로정신대원들. 겨우 10대 초중반의 나이 어린 소녀들이었다.
다카하시 마코토 대표가1988년 지진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 건립에 앞서 나주에서 동원돼 숨진 고 최정례의 유족을 수소문하기 위해 한국을 첫 방문해 이동련할머니를 만나는 모습. 40대 청년 교사시절
다카하시 마코토 공동대표가 1988년 제주를 찾아 1944년 도난카이 지진에 숨진 고 김순례(광주 수창초교 졸업후 동원) 유족 김중곤, 근로정신대 동원 피해 김복례씨를 찾아 당시 사진을 보여주며 경위를 조사하고 있는 모습.
도난카이 지진(1944.12.7)에 숨진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추모비 제막식에 참석한 피해자 유가족들이 추모비를 쓰다듬으며 통곡하고 있다. (1988년 12월)
피해 할머니들과 일본정부와 미쓰비시를 상대로 소장을 접수하기 위해 나란히 손을 잡고 나고야지방재판소로 향하는 모습.(1999년 3월 1일)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는 원들들을 마중하기 위해 공항에 나온 일본 시민단체 회원들.
'나고야 소송 지원회' 회원들이 2007년 7월부터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매주 금요 원정시위(일명 금요행동)를 갖고 미쓰비시 측의 자발적 해결을 촉구
"가해국의 시민으로서 '원고에게 웃음'을 되찾아 드리는 것은 우리들의 책무입니다.
우리의 투쟁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상식을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독도영유권 주장, 야스쿠니 신사참배, 정치 지도자들의 실언이 벌어질 때마다 일본의 행태를 지적하는 목소리들이 높다.
하지만, 정작 "너희가 일본 사람들이냐. 한국 사람들이냐? 한국이 좋으면 한국에 가서 살아라"는 조롱까지 들으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양심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일본 내 시민사회를 주목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미쓰비시로 동원된 여자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31년째 활동해 온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광주광역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수여받기로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이하 '나고야 소송지원회')의 다카하시 마코토(高橋 信.75) 공동대표와 고이데 유타카(小出 裕.76) 사무국장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할 예정.
다카하시 마코토 대표와 고이데 유타카 사무국장이 근로정신대 문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86년.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가르치던 다카하시 마코토 교사와 고이데 유타카씨 등은 군수공업의 중심지였던 아이치현 지역의 조선인 강제연행 실태와 미군의 공습 피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여자근로정신대'의 존재와 피해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저에게도 당시 근로정신대 소녀들과 같은 나이인 14세의 딸이 있었습니다. 만약 내 딸이 같은 피해를 입는다면 '아버지로서 어떤 생각이 들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습니다. 교사의 양심으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엔 불쾌했었죠. 이미 몇 십 년이 지났는데 느닷없이 일본 사람이 찾아온다고 하니까 또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무릎을 꿇더니, 잘못했다고 사죄하는 거예요" (고 최정례의 유족 이경자 어르신)
"사실 소송 이상으로 훨씬 힘들었어요. '전시에 고생한 사람이 한국사람 뿐이냐. 우리가(일본) 훨씬 더 고생한 것은 왜 모르느냐?'는 항의 전화를 받은 것은 이루 셀 수도 없습니다."
"광주는 저에게 마음의 고향입니다. 제가 죽게 되면 제 몸의 절반은 광주에 묻고 싶습니다.
제가 죽으면 화장해서 뼈의 반(유분)은 광주 무등산에 뿌리고 싶습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11097183
아베가 강제징용 없었다는 것에 올해 9월에도 전면 반박하고 나서심
행동하는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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