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부산 용두산 대화재
당시 용두산 아래 피란민 판자촌에서 시작한 화재로
집100동과 인근 학교가 소실, 이재민 8,000여명 발생 등 큰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이 화재의 진짜 피해는
전쟁을 피해서 급히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송시킨
궁중문화재를 보관하던 당시 재무부 소속의 관재청 창고
이 창고에는 조선시대 궁중일기, 역대왕의 어진(초상화),
재상들의 초상화, 어필, 제기, 악보, 악기, 도자기, 서적 등
4,000여점 유물을 보관했으며 그 중 3,400여점이 화재로 소실
특히 어진 46축 중 35축이 소실되었고, 그나마 남은 손상된 11축 중에서도 2축은 복구에 실패하였다
거기다가 손실된 3,400여점의 유물목록은 현재로썬 전혀 파악할 수 없다
당시 근무 중이던 관재청 직원들은 창고열쇠가 없어 유물을 꺼낼 수 없었다고 증언했으며,
관재청, 문교부,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시대 유물의 관리권이 있던 구황실은
서로에게 열쇠소유문제를 두고 책임을 전가했다
아직까지도 수 많은 국내 사학자들이 통탄을 금치못하는,
한 마디로 조선왕조 500년이 통째로 불탄 화재사고였다
저거 때문에 어진이 죄다 날아갔으니...
관재청 창고에 보관했으면 관재정 잘못이지 뭐. 저 때도 물고 늘어지기 엄청나네
난 이런거보면 너무 안타까워...
1954년
3400점이면 허미 스파 진짜 어마어마하게 날라갔네
저거 때문에 어진이 죄다 날아갔으니...
허미;;
사진으로 백업을 안해놨나 ㄷㄷ
1954년
저거 1954년도 사건임 사진 존나 귀하던시절
일반인 기준으로 카메라가 귀한거지 저건 국가소유니까 사진 못찍을건 없지만서도 애초에 전시에 헐레벌떡 옮겨놓은거라 그런 생각 자체를 안했다고 보는게 맞을듯
전쟁 끝나고 1년도 더 지났는데 그동안 뭐한겨.. ㅠㅠ
ㄷㄷ
난 이런거보면 너무 안타까워...
3400점이면 허미 스파 진짜 어마어마하게 날라갔네
현 국립중앙박물관이 12000여점 전시중이라니까, 그중 1/3이 불타버렸다고 생각하면... ㅎㄷㄷ
이게 다 초를 켜놓고 청소하던 여자 때문이다…
아 화재원인이 초래?
1954년이면 창고에다가 전등같은거 안달았을뜻..전력낭비라고..
전력낭비 이전에 당시 한반도 전기공급은 현재 북한땅에 있는 발전소가 메인이던 시절이라 달아봐야 쓰지도 못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그렇구나
뭐래 ㅋㅋ그 여자분이 켜 놓고 싶어서 켜 놨나 ?제대로된 지원과 교육 없이 시킨 놈들이 잘못이지 ㅋㅋ
설마 흡연충이 불냈나
판자촌 주민이 추워서 촛불켜고 자다가 불남
ㄴㄴ. 청소하던 식모가 초를 넘어뜨려서…
안타깝네...
그 식모 이름이 안순자였지 아마?
그 식모도 뭐 알고 한거 아니니깐 불쌍하다. 그리고 저런 화재에 대처도 못하는 한국의 당시 국력을 생각하면 안타까울뿐
관재청 창고에 보관했으면 관재정 잘못이지 뭐. 저 때도 물고 늘어지기 엄청나네
소실된 유물 중에서 도난 당한 유물도 꽤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 과할까?
하긴 자기들도 다 파악이 안된다 했으니 뭐가 뭔지 모르는 걸 감안하면 씹가능
문혁보다 더 빨랐군.
자진해서 지들 문화재 부순 문혁과 비교하면 안되지
사고랑 자진은 다르지
6.25 전쟁통에 유물들 부산으로 빼놨는데. 빼논 와중에도 도난도 엄청 많았고 유실도 됐는데 그중 조선 왕들 어진(초상)도 다타버렸음.
그리고 몇십년뒤 브라질도 화재사건으로 브라질 전통 문화재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엄청 큰 화재지. 몇달전에 있었잖아
'창고열쇠가 없어 유물을 꺼낼 수 없었다'아니 왜;;;;'서로에게 열쇠소유문제를 두고 책임을 전가했다'(혈압이 올라 사망)
문을 부숴 멍청한 쉐끼더라!!!
광복이후 최대 문화사고가 아닌가 싶네
아이고야 54년이면 정리고 데이터화고 안됐을때네.요새는 사실 원본 소실되도 사학과입장에선 데이터만 남아있으면 장땡이긴 함.
그건 아니지 않나? 규장각이 보존 논문을 일년에 수십편씩쏟아내는데.
헛소리 자제 좀실물 그 자체로도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니 세계 각국이 보존노력에 애쓰는건데 디지털화만 하면 실물은 없어도 장땡이라니
그게 일단 사학하고도 관계있긴 한데 고고학에 가까운 부분이고 사학 자체는 소스만 있으면 논리와 해석의 영역이라 물질 자체는 그 물질에 대한 역사만 남아있으면 장땡임
무엇보다 실물자료에서 놓친 게 얼마나 많은데. 아직 복제광선은 개발도 안 됏음. 서간문만 해도 어느 붓인가, 종이 질은 어던가, 먹은 어느 것인가, 획순은 어떤가, 이 편지가 어떻게 전달이 되었는가 연구할 게 산더민데 데이터요? 진짜 사학과 맞음?
그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사학 그 자체하곤 거리가 먼 부분인데. 특히 목조건물이 많은 동양에서 물질 그 자체의 역사적 연속성은 그 자체로는 역사의 기록성을 합치하지 못한다. 사학과에서 알려주는 내용임
네 말대로면 모든 역사적 해는 물질적 논리에서 입증해야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그건 고고햑의 영역이지 사학의 역역과는 조금 떨어자 부분인데
사학이 소스에 대한 논리와 해석의 영역이라, 사학은 논리와 해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부적절한데 무슨 소리임? 자료의 신빙성도 없음, 자료가 논리적으로 객관적으로 구성되지도 않았음. 자신이 손에 든 자료가 과연 원 시대의 자료인지 후대의 복사본인지도 모름. 이런 상황에서 더듬는 게 사학일 텐데? 그리고 사학과 고고학을 분류하는 건 섣부른 이야기지. 서울대학교 사학과에서 금석문 분석이랑 규장각 떼놓고 이여기하고, 동대 사학에서 동대 고고학 때놓고 이야기하는 거 봤음?
일단 너는 무슨학과길래 자신만만하게 논리와 해석을 부정하고 앉았음? 사학이 걕관적이고 절대적 사실기반이다 이딴 소리하는거 아니지?
역사가 객관적으로 박제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건 극히 최근에 데이터베이스 수집이 극적으로 발전되면서 겨우 이야기 나오는 건데 역사를 그렇게 논리학이라고 포장하는 건, 다른 학과에서 웃음벨 소리 듣습니다? 언어학의 해는 당연히 혀와 뇌의 물리/전기/화학적 기작에서 입증해야죠.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언어가 완벽하게 보존되었다고 실 사용 인구가 사라진 절멸된 언어는 의미있는 연구 결과가 절멸되지 않은 언어보다 안 나와요. 자연계 이론물리학이 아 실험물리학은 물리학이 아닙니다 하는 거 봤음? 이론경제학이 실물경제학은 경제학으로써 올바른 해를 얻지 않앗으므로 그건 경제학의 리에서 벗어납니다 하는 건? 지금까지 그런 주장을 하는 학과는 법학과밖에 못 본 거 같은데.
그게 아닌데 논리적인 해 하면서 아 고고학은 우리가 아닙니다 하는 게 웃겨서 그렇죠. 세상에 실물 다루는 학과와 이론 다루는 학과를 격리시키려는 이상한 학과가 어딨음? 그 폐쇄성 높은 국문과도 실제언어사용과 박제된 문법언어간의 비교를 기본으로 깔고들어가는데, 고고학과 사학을 칼로 자르듯 자르는 게 말이 된다고 보심? 저는 음성 데이터베이스로 인공지능 구축하는 쪽 연구하고 있는데요, 지금까지 인문 교수 중에 그런 이야기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사학과 수업은 4학년 수업까지 취미로 들었는데 마찬가지로 못 들었구요.
왜 고고학을 사학이랑 분리해욧! 이소리같은데 엄밀히말해 고고학은 증명이고 사학은 그 해석인데 사학은 역사성에 대한 입증만 되면 정보로서의 사료가 필요한거지 원본의 고증이 완벽한가를 따라가지도 않고 따라가서도 안되는 학문인데문화재로서의 가치=/=사료로서의 가치그래서 넌 무슨학관데?
일단 사학이 뭐하는 학문인데.
그리고 최근와서 객관적으로 박제됐다? 어느 교수가 그딴소리하는데 ㅋㅋ 교수 이름 불러봐. 국정교과서 지지자나 할법한 헛소리를
제가 학부 사학만 들었는데요, 학부 사학에서도 교수가 고고학 없이 사학은 성립 안 한다, 단일 사료도 그 사료가 언제 채집되고 언제 무슨 이유로 보관되었나를 무시할 수 없다고 배웟습니다. 제가 서양사는 배영수 교수님께 사사받았습니다.
작년에 명예퇴직하셨는데요, 2016년 가을 학기에 사사받았습니다. 사료로써의 가치가 텍스트 데이터만으로 끝나는 게 아닐 텐데, 그 사료의 제작년도, 제작과정, 제작 동기에 관한 자료는 사료가 아닌가요? 현재 고고학의 소재에 관한 조사가 이런 걸 전부 박제할 정도로 완벽한 상황이 아닌데 사료의 원본이 없어도 역사에 문제가 없다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기록된 데이터는 아무리 그 기록이 다방면이고 다양해도 raw 데이터에는 절대 근접도 못하는 법인데, 원본이 사라져도 문제가 없다는 건 재현도와 해상도가 낮은 자료만으로 역사를 분석하겠다는 오만한 태도 아닌가요?지금 현 환경에서 분석해낸 원본의 data가 후대에 개찬되었지만 그걸 확인하지 못했을 경우 오염된 데이터가 되죠. 그 데이터가 오염되었는지 계속 확인하고 점검해야 하는 게 학문으로써 기초적인 자세일 터인데, 지금 자료가 있다고 원본이 필요없다? 어느 학문이 그렇습니까? 역사학에서 재입증 가능하고 언제나 제3자에 의한 객관적 접근이 가능한 매체가 자료 원본 외에 존재합니까?
네가 말하는건 현실적으로 고고학이랑 분리하기 힘들다는 소리지 분리했다는 가정 하에 사료의 역사성이 증명된다면 연구가 가능하다는 말의 부정은 안되잖아. 그 이전에 연속성만 보장할거면 썩고 삭아서 사라지게 내버려두는게 맞는거 아님? 보존은 왜하는데? 1800년의 숭례문을 연구하는데 2019년의 숭례문을 참고할수는 있지. 이 둘은 다르거든? 미시사에야 안타까운 일이지만 거시사가 역사의 큰 줄기라는걸 상기할때 물질적 증거 자체가 역사의 사실을 보장하나? 서양사 교수 아래서 사사받았으면 서양은 더더욱 고건물 개조해서 쓰는데 그 문제는 왜 빼놓고 언급하시나?
근세사야 사료가 많고 정확하니까 물질적 사료에 많이 의존하고 고대사에 사료는 사금같은 존재지만결정적으로 부족해.그럼 고대사는 성립하지 않나? 해석이 갈리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건가? 부정확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 역사인가?
글고 진짜 궁금한게 객관적, 박제됐다. 라는 단어는 님 선택임 아님 배우길 글케 배운거임
배우기 그렇게 배웟습니다. 서양사 현대연구에서 객관적 박제가 가능해지면서 기존의 농업의 종심구조이론과 상업의 일반적 전파가 아프리카 연구를 통해 부정되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2010년대의 역사는 이제 시대별로 데이터베이스화되고 박제된 정보를 가지고 분석하기 때문에, 고고학의 역할을 데이터베이스 구조론이 대신할 거라고 하셨고요.
그 예시로 든 게 건축물의 3d 스캔이셨고요. 이제 우리는 모든 건물의 역사를 원하는 타임 스팬으로 원하는 대로 측정할 수 있다. 이론상 철저하게 박제 가능한 것. 그러나 그 박제된 정보의 부정확성 때문에 유물과 사료의 원본 보존에 힘을 써야 한다고 하셨구요.제가 들은 마지막 강연이라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인증좀 해줘요 님 사학관련된 사람 맞아요?님이 하는 말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데요
기후학이니 하는 다른 영역들하고 접점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서(현재건 과거건간에) 고고학이 이전만큼의 입지를 가지진 못하게 된건 사실일 거지만, 데이터베이스 구조론으로 대체하기엔 아직 촘.....2010년대 끝나가는데 아직도 이 빌어먹을 세상엔 데이터베이스에 안올라가고 굴러간 일이 꽤 있어서 연구하기 성기같은 부분이 있음.2010년대가 역사로 다루어지기 시작할 때 쯤 되야 당대의 대부분의 정보가 데이터베이스에 올라가지 않을까 함.
그럼 이제 결론 낼수 있겠는데. 그 객관성이라는건 사료 그 자체, 혹은 역사의 객관성이 아닌, 채집 혹은 채집자의 객관성이고 그것도 교수니까 쓸수있는 과감한 워딩인것 같음. 고고학이 사학의 요람이요 형제임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사학=고고학은 아니고 고고학의 시녀도 아님. 사학은 현재와 과거 자체로 존재하는 학문.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집필한것처럼. 물론 학술적으로 고고학은 필요 불가결하지만 기술의 발달로 완벽에 가까운 데이터베이스화가 가능하게 되면서 데이터가 역사성을 보장한다면 원본이 소실하더라도 연구와 해석이 가능함
완벽에 가까운 모사품이 원본이냐 하는것도 나름 다루어볼만한 일이지만, 기술의 발달은 데이터베이스를 완벽하게 할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변조할 수도 있게 해준다는 문제가 있음...
그런일이 생긴다면 가슴아픈 일이지만그와는 별개로 1차사료도 훼손 가능하고 더욱이 1차사료 자체가 오염된 경우도 이미 있음
별 미친 헛소리를 다 보겠네좀 배웠다는 사람이 이딴 소리나 하고배운 시간이 아깝네
사료에 대해서 해볼 수 있는 검증의 일부는 데이터에 대해선 못하니까.연대측정 이런 쪽 검증이 데이터공학으로 얼마나 매워지느냐가 영향을 줄거 같음.뭐 일단 데이터화라도 상당히 진행된 다음에 할수 있는 이야기긴 하지만 말야. 비밀문서 이딴건 접어두고서라도 데이터 자체를 안만드는 과정으로(회의록 없는 회의 같은거...) 결정되는 일이 꽤 많어서 데이터화된 사료가 아니라 증언 막 이런거에 의존하는 현상은 당분간 유지될듯.....
고고학의 시녀가 사학인 게 아니라, 사학의 감시자가 고고학인 것 아닌가요? 사학의 자료가 절대적 객관성을 가지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사학은 감시자인 고고학 없이 독주할 경우 그 완전성을 보장받지 못할 텐데요. 실험적 학문은 이론적 학문을 길잡이로써, 이론적 학문은 실험적 학문을 감시자로써 상호작용하는 거라서, 그렇게 사학을 아예 고고학에서 잘라내는 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발상이네요.
아니 그걸 왜 님이 이해하고 말고를 논하는지 모르겠는데 사료가 사라지면 과거가 증발함? 나는 위에 시작할때 분명 '데이터화가 되면'이라는 전제를 깔았는데 그건 왜 무시됐는지도 모르겠고. 두번째로 관념론적인 사학개념에서 고고학이 절대적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데 님은 주구장창 현실적으로 어떻다 하는 이유가 뭐임? 현실적으로 사료 있으면 좋은거 누가 모름?근데 사료의 소실은 정보의 부족을 야기하는거지 사학 그 자체의 본질적인 오염을 야기하지는 않음.근데 님이 하는 이야기는 계속 현실적으로~그러니까 데이터화 된 상태면 학술적으로 상관없다는 이야기 하는거잖음. 사료가 중요하긴 하니까.근데 사료는 항상, 항상 부족하고 그 결손은 객관적 사실로서의 사료가 메울수도 없고 메워서도 안된다는 이야긴데
솔직히 말해 현대적인 고고학이 제대로 사학을 감시하게 된지 얼마나 됐을것같음? 100년? 200년? 그 전의 사학은 그럼 역사연구를 어떻게 했나?사학의 본질은 해석에 있다는 이야기를 주구장창 하는것같은데 사학에 논리와 해석이 부적절한 단어면 서양사 교수님한테 사사받았다더니 유물론적 사관 빼고는 그냥 존재하질 않는거야 뭐야
근근웹 닉값한다 ㅋㅋㅋ 과거 사료 원본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연구 가치가 높은건데 실물은 없어도 장땡이라고 문화대혁명 일으킬 소리나 하고 자빠졌네
허술한 열쇠관리에 책임전가 하는 꼬라지 보면 홍위병 욕할 처지도 못되네 씨1발
신빙성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릴때 읽은 역사책에서 저거 화재 진압을 이승만 똘마니중 하나인 김종원이 막았다고 하는 말도...(어차피 판자촌 철거해야 한다고...)
우리나라는 셀프 문화대혁명을 하네....
요즘같으면 문화재 빼돌려팔고 증거인멸하려고 마지막에 화재냈다고 생각할텐데
저 시기면 굶어죽는 사람 엄청 많은 엄청 낙후된 시기 아닌가
븅신들은 구제가 안돼.
54년도면 아직 전쟁중이지?
종전한 후일걸.
저 사건은 다시 봐도 너무 안타까운 사건임.ㅠㅠ
저거 때문에 철종인가 어진은 반타서 왼쪽만있나 그럼 딱 3점 건졌던가...
나한테는 숭례문 전소가 제일 기억에 남았음국보 1호가 이렇게 손쉽게 사라졌다는게 너무 허무하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었음
음.. 저때 당시에 창고에 얼마나 튼튼하고 강력한 자물쇠를 사용했던건지 궁금해지네...주위에 함마같은거 있었다면 열수 있었지 않았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네..
김정일만 없었으면 저 꼴은 안 났을 텐데
김정일이 41년생이라...김일성이것지.
앗...
이글보고 김일성 더 미워졌다..
빼돌렸을가능성
사실 어진탄건 고려왕조의 저주라는 말도 있을정도로 절묘하게 타서.....세종이 전국에 있는 고려왕 어진과 석상 동상을 모조리 태우고 부셨으니.....
그 놈의 저주는 참 질기게도 600년 가까이나 흐른 뒤에 발동하는군요...
정확히는 세종이 고려 멸망후 40년쯤 지나서 어진 소각했고.조선도 어진도 대한제국 망하고 정확히 43년 지나서 불탄거니 이런 도시전설이 돌수 밖에 없지.
조선이 망하기만을 600년 가까이 기다려온 고려 망령들 참 징해요...중국에 뿌리를 둔 왕씨라서 그런가?
창고 열쇠가 없어서 못 꺼냈다는 건 엉뚱한 변명이고 자리 지키고 있는 사람이 아예 없던 거 아냐?문을 못 열면 인부들 데려다가 문을 부수거나 절단해서라도 꺼냈어야지...
이거 보면.. 간송 전형필 선생이 엄청 대단한거야. 전 재산을 처분해서 국내외 문화재 사온 것 뿐만 아니라 전쟁통에서도 저렇게 불 안태우고 꽉 붙들어서 보관했잖어.... 그 당시에 저 사건 알고 나서 엄청 개탄하셨을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