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왜 여기에 계신 거죠?”
“제가 유성현과 민효정의 교사였어요.”
“.......그 친구들이 교사의 도움을 받을 청소년으로 보이진 않았는데요.”
“지금은 그냥 친구라도 해두죠.”
“굉장한 인연이네요.”
“만나는 모두가 그렇죠.”
“어떻게 된 상황인가요?”
“당신이 죽도록 맞았고, 유성현은 유치장에, 민효정은 집에, 당신은 병원에 있어요. 유성현이 제게 연락을 했고, 전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되었네요.”
“별로 놀랍지 않은 것 같네요?”
“지금 당신의 얼굴 모양은 놀랍네요. 사람 얼굴이 그렇게 될 수도 있군요.”
“그렇게 끔찍한가요?”
“당신을 다시 만난 것만큼은 아니에요.”
“졸리네요.”
“약 때문일 거예요. 좀 더 쉬세요.”
내가 왜 차준호를 죽이려 했을까. 그가 잘못한 게 뭘까. 차준호는 단지 형보다 늦게 태어났을 뿐이다. 차준호는 단지 형보다 늦게 나를 만났을 뿐이다. 그게 그의 잘못이다.
그가 형보다 나를 먼저 만났더라면, 내가 유성현과 자는 일이 생기지 않았겠지. 유성현은 송민아와 잘 될 수도 있었겠지. 아니, 박해진이 계속 송민아와 잘 지냈을지도 모른다. 민효정은 지금도 유성현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고, 난 차준호와 결혼하지 않았을까.
모르는 일이다. 나와 결혼한 차준호가 민효정과 바람을 피워서 이혼했을 수도 있다. 박해진과 결혼한 송민아가 유성현을 잊지 못해 파국으로 치달았을 가능성도 높다. 아니, 누구라도 서로 사랑했었더라면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아무도 서로 사랑하지 못했다.
차준호 때문이다. 정확히 따지자면 차준호 형 때문이라고 해야겠지만, 한 여자와 관계한 형제에게 공동의 책임을 물리는 게 부당하지는 않겠다. 아무라도 서로 사랑할 기회가 있었고 계속 사랑할 수 있었는데, 차준호와 나의 관계가 끝나며 모든 게 망가졌다.
나 때문인 걸까.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워 차준호를 죽이고 싶었던 걸까.
나 때문이라고? 아니야. 난 삼촌에게 당한 기억 때문에 그 아이를 만났어.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고. 어른에 대한 두려움을 지우려고 그 아이를 만났는데, 그 아이의 형에게 당한 거잖아. 내가 술에 취하긴 했어도 그 아이의 형에게서 꼼짝도 하지 못한 건, 삼촌의 기억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이었던 거잖아. 내 잘못이 아니라고, 나도 평범하게 연애하고 싶었어. 나름 노력도 했는데, 차준호의 형을 만났고, 학생주임의 앞에서 꼼짝하지 못했던 거라고. 내가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내가 원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믿고 싶었다는 말이야.
삼촌도 죽고, 학생주임도 죽었다. 그 아이와 수위아저씨가 죽는 건 예상 할 수 없었는데, 바꿀 수 없는 과거를 잊게 해줬다. 내가 그들을 죽였을까? 어쩌면 맞는 말이겠지만, 내가 살인자라는 건 인정할 수 없다. 정당방위였다.
차준호가 죽었다면, 아니 없어진다면 잊을 수 있는 과거가 되겠다.
“변호사가 왔는데요.”
내가 잠든 차준호를 바라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일어나 차준호의 목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다행히 간호사는 내가 차준호의 담요를 정리해주는 걸로 보였나보다.
변호사를 만났다.
“어. 그러니까. 한수진 씨가 피해자 차준호 씨의 옛 애인이며 보호자라는 말씀이시죠?”
“네”
“그리도 동시에 가해자 유성현의 변호인을 신청하셨고요?”
“네”
“......유성현 씨와는 어떤?”
“성현이 고등학교 교사에요.”
“졸업한지는 한참 지난 걸로 아는데요.”
“친구이기도 해요.”
“아.......네. 우리 법률사무소에 여성 변호사를 불러드릴까요?”
“괜찮아요. 성현이를 만날 수 있나요”
유성현을 만났다.
“왜 그랬니.”
“그러게요.”
“그럴 것 까지는 없었잖아.”
“민아를 만났어요.”
“그래. 그 회사에 송민아도 다니지.”
“그날 박해진도 만났어요.”
“그랬구나.”
“관리인으로 일하기에 너무 젊은 사람이라 금방 알아볼 수 있었어요. 박해진도 나를 알아보더군요.”
“무슨 얘길 했니.”
“제게 화를 내더군요.”
유성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더 말하기 곤란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면회실에서 나눌만한 대화가 아니라면, 박해진이 꽤나 많은 것들을 떠들었던 모양이다.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걸 말했다.
“네가 두 여자를 구했구나.”
“셋이 아니라면 한 명이겠죠.”
“왜 그렇게 생각하니.”
“박해진도 민아를 만났더군요. 그러니 셋이겠고, 그게 아니라면 한 명을 구한 거예요.”
“나”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었어요. 왜 그랬을까. 물론, 제가 아니라요. 왜 이러는 걸까.”
“그래서”
“미칠 것 같더군요. 내가 생각한 것들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어요. 우리가 그 정도로 복잡하게 엮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차준호 씨가 선생님이 결혼할 뻔 했었다는 그 남자가 아니라면 말이죠.”
“그래서 정의의 사도가 되기로 한 거니.”
“아뇨. 좀 지겨워서요.”
“뭐가”
“음. 가시덤불에도 벌레나 새들이 숨어 살고 있잖아요? 아니, 꽤 끔찍한 도시들로 알려진 곳에서도 사람들은 살고 있잖아요? 뭐 멕시코나 아프리카의 어떤? 그런 곳들이 있잖아요. 그래도 다들 살아가거든요. 벗어나려 애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냥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우린 왜 그러지 못할까요?”
면회실에서의 대화라, 유성현이 직접적인 표현을 삼가는 건 알겠다. 내 생각엔 별로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한데, 대부분의 일들에 조심스러운 유성현다웠다. 워낙 조심스러운 아이라 차준호도 죽지 않을 정도로 정성껏 묵사발을 만들어놓은 모양이다. 조금만 조심성이 없었어도 난 지금 살인용의자를 면회하고 있었겠지.
유성현이 면회실 내부를 둘러보고 다시 말했다.
“비가 내리면 좀 맞아보자고요. 아니, 우산을 펴는 정도라면 이해하겠어요. 비 내리는 하늘 전부를 가릴 수는 없잖아요. 아니, 구름을 치워버리려는 건 좀 과하잖아요.”
“그래서 차준호를 부셔놨니.”
“그 사람은 좀 어때요?”
“시간이 좀 지나면 멀쩡해질 거야.”
“미안하다고 전해줘요.”
“위로가 되겠네.”
“이제 어쩌실 생각이에요.”
“네가 마무리하지 못한 걸 내가 마무리할까 생각하고 있었어.”
오랜만에 유성현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유성현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담배 좀 필 수 있어요?”
“너도 담배 피우니?”
“선생님도 피우잖아요. 들어올 때부터 냄새 났어요.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오래 피우지 못했다는 얘기에요.”
면회실을 지키는 사람에게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살짝 끄덕여줬다. 유성현에게 담배와 라이터를 건넸다. 유성현이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의외네요. 꽤 독한 담배를 피우시네요?”
“그래? 아. 어쩐지......”
“선생님.”
“응”
“변호사 선임해주셔서 고마워요.”
이번엔 내가 웃었다.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다. 내가 웃으니 유성현도 웃다가 다시 말했다.
“참고 견디란 얘기가 아니에요. 그냥 좀 살아봐요. 사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거든요. 이유와 원인을 찾고 해결하려고 하지 마요. 비가 내리는데 꼭 이유가 필요하겠어요?”
“이제 나한테 조언도 해주는구나.”
“예전에도 그랬어요. 선생님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죠.”
집에 들렀다가 병원으로 돌아갔더니, 아는 사람이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박 부장님?”
“아. 별로 안녕하진 않지만. 한수진 씨. 오랜만이에요.”
“우리 엄마는 어떻게 지내요?”
“재밌는 인사네요. 잘 지내시고 있어요. 이러다 정계에 진출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러진 않을 거예요. 그냥 외로워서 사람들 만나는 게 좋은 거겠죠. 무슨 욕심이 있지는 않을 걸요.”
“그 속을 누가 알겠어요. 그리고 정치는 하고 싶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이 하더군요.”
“그렇겠네요. 하진 저도 엄마를 잘 몰라요.”
“그나저나 차 과장이랑은 얼마나 알고 지낸 거예요?”
“그냥. 옛날 친구에요.”
“훗. 그래요? 꽤 못된 친구를 두셨네요?”
“나쁜 남자가 인기라잖아요.”
“사실. 내가 한수진 씨 어머님은 오래 알아왔지만, 한수진 씨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게다가 한수진 씨가 차 과장을 알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네요. 매력적인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세상이 따로 있나 봐요?”
“차준호가 매력 있는 사람인가요?”
“끔찍할 정도죠. 이 꼴을 봐요. 이 정도로 박살날 수 있는 남자들 중에 별 볼일 없는 남자는 없을 걸요?”
“그런가요. 그럼 이제 어떻게 되나요.”
“퇴원하면 밀린 일들을 해야겠죠.”
“그 뿐인가요? 다른 친구들은.”
“팀장이 없으니까. 다시 인사이동이 필요하겠네요. 다른 건 제 소관이 아니에요. 아마도 한수진 씨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은데요.”
“맞아요.”
“참 차준호 씨를 저희 회사와 협약이 된 병원으로 옮겨도 될까요? 임원용 병실을 쓸 수 있어요. 임원들 중에 아픈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요.”
박 부장이 그렇게 말하며 빙긋이 웃었다.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미소였지만, 아무 것도 모르더라도 그렇게 웃는 게 직업인 사람이다.
그녀를 배웅하고 돌아왔더니, 차준호가 내게 말했다.
“굉장하네.”
“세상은 원래 신기하고 놀라운 일들로 가득해요. 살아 있어서 다행인가요?”
“한수진 씨.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글쎄요.”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회복하면 돌아가서 밀린 일을 하게 된다더군요.”
“아니, 저를 어쩔 거예요?”
“아무것도.”
“그런가요?”
“그 꼴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프네요. 그래서 충분하단 생각을 했어요.”
“전부 당신 짓인 거야?”
“그럴 리가요. 약간은 알고 있었고 조금 개입한 정도였어요. 제가 다녀온 사이에 많은 생각을 하셨나 보네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죠?”
“송민아가 면회 왔었어요.”
“......송민아는 얼마나 알고 있나요.”
“제가 아는 만큼.”
“그렇군요. 그럼 이제 제가 당신에게 물을 차례군요. 유성현을 어떻게 하길 원하나요.”
“당신 뜻대로 하세요.”
“네. 고마워요. 내일 변호사가 찾아올 테니까. 적절한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세요. 유성현이 나오면 당신도 퇴원할 수 있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오려 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유성현의 말처럼 이제 난 가시덤불에서 사는 벌레가 될 생각이다. 이제 모두가 서로의 사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겠지만, 문제가 뭔지는 알게 해줄 것이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날도 언젠가 오겠지.
“수진 씨!”
“네.”
“잘 살아요.”
“웃기네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우린 또 만날 거예요.”
“그렇겠군요.”
병실을 나가려다 문을 걸어 잠그고 돌아왔다. 의아해하는 차준호에게 말했다.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그냥 하고 싶은 거예요.”
“전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인데요.”
“참아 봐요.”
그가 고통과 쾌락 중에 어떤 걸 더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둘 다 내가 주던 것들이다.
계속.
으으...기나긴 대장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을 지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ㅎㅎ 하지만 즐거운 주말 되시죠
4Justice// 감사합니다. 참. 그런데 급하게 글을 등록하느라 쓰지 못했는데요. 제가 다음 주 월요일에는 글을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불안한 건 그 이후에도 잠시 연재를 멈춰야 할지도 몰라요.
부디. 다음 주에도 이야기를 계속 할 수 있길 바랍니다.
항상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다음 주에 연재를 좀(?) 멈추더라도, 늘 기다리겠습니다. ㅎㅎ
평안한 주말 되십시요~! ^^
오늘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우리 차과장 절대 버리지 마시고 잘 길들여 주세요!
북풍님, 잘 읽었습니다~ 별일 없으셨으면 좋겠네요. ㅎㅎ
줄거운 주말 되세요.
한수진과 형의 과거를 알면서도 차과장이 그녀를 품었다면 어떤 결과로 이루어졌을지 궁금해지네요!
오늘 이야기를 쓰다보니 우리도 참 멀리 왔네요
오늘도 잘 보았습니다. 연재에 대한 부담감 내려놓으시고 편하실때 글 올려주세요.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차준호 형이 학생주임이고, 학생주임은 죽은게 맞는거죠?
학생주임이 죽은 이유가 나왔었나요? 이야기가 방대해져서 이제 기억이 잘...ㅠㅠ
민효정과 송민아, 박해진, 유성현...이 4명이... 차준호 근무 회사랑 엮어진게 한수진의 힘이였던건가요?...한수진 엄마가 회사 오너인거고...한수진도 회사내에 인사이동 압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위치인건지...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건 아닌지...
이제 각 주인공들의 사정과 사연에 대해 막바지에 이른거 같네요. 근데 끝장 보스는 아직 안 나온거 같은데.. 차선생은 머하고 있을까요?
늘 잘 보고 있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내킬 때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