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 말엽, 어느 해안 곶. 아마 선박등을 감시하기 위해 세워진 망루로 추정된다. 이러한 성이 실존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망루 요새'설을 기반으로 작성한다.
9세기의 무기나 용병술은 단순한 벽 정도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나, 벽에 쉽게 접근하는것을 막기 위해 해자를 파두었다. 해자를 파내는것 만으로도 사다리와 밧줄을 동원한 침입은 힘들게 되었다. 물이 차있지 않은 그저 구덩이일 뿐인 해자여도, 벽면만 달랑 있는것보다는 훨씬 긴 사다리를 요구한다. 사다리가 길면 올라오는데 시간이 걸리고, 그만큼 더 오래 궁사들에게 노출된다. 단순한 도적떼 수준에서는 이미 난공 불락의 성이다.
10세기 말. 군사적 요충지로 격상되어서 발전한 형태로 예상된다. 이제서야 요새 티가 난다.
단순한 군사 주둔지에서 이제 장기간 거주 가능한 주둔지로 변화한것을 석조 성채와 우물을 통해 볼 수 있다. 유럽의 지하수는 석회질이 많은게 단점이나, 외부에서 물을 공급해오는 것 보다는 내부에서 자급 가능한 수원지를 확보해 두는것이 보급상 이점이 크다. 밖에서 물을 떠와 봐야 석회질 투성이인건 비슷하기도 하고. 성채에는 깃발이 걸려있으며, 이 깃발은 요새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리는 수단이다. 근대전에 돌입하기 전까지 병사들은 은밀 기동보다는 피아의 식별이 용이해야 했다.
해안선 상륙을 막기 위해 말뚝을 박아두었다. 보병은 스파이크 사이로 들어갈 수 있지만, 보병을 막으려고 해놓은 것이 아니다. 사다리가 들어가기엔 여전히 거슬리고, 기병도 접근하기가 힘들어진다.
12세기 초. 지속적으로 침략을 받은 요새는 점점 더 견고하고 거대해져간다. 첨탑에서 향후 300년간 서부 유럽에서 유행할 건축양식의 초기 형태를 엿볼 수 있다.
종교의 발달이 해안가 가까이 위치한 회당을 통해 엿보인다. 그리스도교는 중세시대 유럽인 대부분을 지배한 가장 강력한 사상이었다. 그리고 교회당은 종교시설일 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의료시설이자 교육시설이기도 했다. 모르는게 있으면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한 가장 현명한 사람을 찾아가며, 중세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그 현명한 사람은 수사나 목회자 등의 종교인이었다.
발전한 축성술의 영향으로 돌이나 진흙으로 만든 벽돌로 지은 성벽에 바닷물이 흐르는 거대한 해자와 도개교까지 설치가 되었다.
투석기와 화공술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는 시기인지라 나무 성벽만으로는 더 버티기가 힘들었다. 석조 성벽은 오래 유지가 되고, 일부분이 부서져도 교체하기가 쉬웠으며 화재와 흰개미로부터도 비교적 안전했다. 이런 장점을 가진 석조 성벽을 이제서야 짓는게 의문이겠지만, 10세기 말의 성채를 보다시피 석조 성벽이란게 이때부터 나타난건 아니다. 단지 기원전 청동기 황금시대나 7~800년 전 로마 시대급의 생산력을 훨씬 상회하게 된게 이때쯤의 이야기일 뿐이다. 물론 가성비의 문제도 있다. 아마 화공술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무 성벽은 조금 더 오래 명맥을 유지했을 것이다.
해자의 경우 바다로 통하는 해자는 따로 물을 채울 필요 없이 계속 유지가 될 뿐 아니라, 요새에서 나오는 생활폐수를 전부 해자에 버리면 따로 처리하는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다. 생활폐기물을 한곳에 모아두면 질병의 원인이 되므로, 해자에 처리하는것은 성채 내부의 위생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 굳이 위생상의 문제가 아니라도 바닷물은 마실수도 농업용수로도 쓸 수 없는 물인데다 바다로 연결만 되어 있다면 가뭄이 들어도 계속 채워지기 때문에 기존의 물을 떠와서 채워넣는 해자보다 더 전술적으로는 유용하다. 물론 공성탑이나 사다리 등 해자를 극복할만한 물건은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자는 아직도 유효한 방어수단이다.
13세기 초.
고딕 양식의 첨탑을 통해서 이곳이 대충 서부 유럽 어딘가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동부 유럽은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을 위시로 한 비잔티움 양식의 돔형 지붕이 유행이었고, 남부 유럽은 고대 그리스 신전에서 이어져서 바실리카 양식을 거쳐 발전한 로마네스크 양식이 유행이었다. 고딕이라는 이름은 '로마의 문화를 이어받은' 남부 유럽인들이 프랑크에서 발달한 독자적 건축양식을 폄훼하기 위해 붙인 이름으로, '고쓰족 야만인들의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잔티움 제국을 위시로한 비잔티움 양식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1215년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1204년때 십자군을 쳐맞고 라틴 제국, 니케아 제국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적이 완전히 진입하는것을 막기 위해 성벽 내부에 격벽을 세우고, 헤자 바깥에 외성을 따로 구축했다. 외부에서 성을 장악하기 위해 진입하는건 더더욱 힘들어졌다. 성의 일부분이 파괴되거나 장악당하더라도, 남아있는 병사들은 격벽으로 분리된 구획으로 들어가 지속적으로 농성을 이어 갈 수 있다. 내부로 땅굴을 파거나 해서 침투하거나 세작을 통해 선동을 하고 분란을 일으키는것 또한 마찬가지로 힘든 일이 된 것이다. 분란이 주도적으로 일어난 구획만 분리하면 되니.
성의 각 모서리 부분에 위치한 탑들은 망루와 포루의 역활을 수행 할 수 있다. 석궁병이 보편화되며 성벽은 매우 유용한 시설이 되었는데, 포구에 석궁을 손쉽게 거치함으로서 사수의 전투 수행시 피로를 극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물론 피로가 줄어든 만큼 전시에는 활을 더 많이 쏴야 했기 때문에 석궁병이 농땡이 피울 일은 없었다.
아직 화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시기이기 때문에, 포루에는 대포 대신에 트레뷰셋 투석기가 올라와 있다. 성의 외부에 밀집한 병력이 있다면 위력적인 저지수단이 된다.
15세기 초. 위의 년도에서 25년 뒤, 비잔티움 제국으로 명맥을 잇던 로마 제국의 역사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동유럽은 정교회가, 중동은 이슬람과 정교회 등이 양분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화약과 대포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포방부 수준으로 배치된 화포들은 죄다 수성용이다. 아직 공성목적으로 화포는 그닥 쓸만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위력적인터라 외성의 성벽 또한 두터워졌다. 수성 목적으로 배치된 화포들은 목표물이 공성탑과 사다리 등등의 목조 건축물들이기에 인력으로도 이동시킬 수 있는 경량형 대포로도 충분히 제 몫을 하지만, 공성 목적의 화포는 이런 두터운 성벽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2마리에서 많게는 10마리의 황소가 견인하는 수준의 대형 사석포를 사용해야 했다. 화포들의 등장으로 인해 점차적으로 공성탑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된다.
대부분의 공사는 기중기를 동원한 대규모 토목공사로 변화하였다. 성벽도 건축물도 보다 손쉽게 쌓고, 땅도 빠르게 파낸다. 실용적 목적을 충분히 넘어서 심미성까지 발전한 성곽의 형태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물론 그만큼 더 부려먹기 마련이다. 본디 하나였던 해자가 이중 해자로 바뀌었고, 외성이었던 부분은 아예 요새 외부에 별도로 건축된 이중 성벽으로 발전했다. 건축업계 노동자들의 헬지구를 한탄하는 ㅅㅇ소리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6세기 중. 드디어 깃발이 바뀌었다. 유럽 어느 가문의 깃발이 아닌, 신성 로마 제국의 깃발이다. 이 시기 서부 유럽은 독일 일대와 스페인을 통틀어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1세가 이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재패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흔히 보방식이라고 부르는 성형(星形) 요새들이 보편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병사들을 보면 알겠지만 죄다 머스킷병이다. 불꽃과 화약의 시대이다.
무식하게 굵고 커다랗고 아름다운 화포들이 등장해서 성벽을 마구 뚫어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15세기에 쓰던 대형 사석포보다 크기는 작고, 포탄의 무게는 더 무거운 금속 포환을 사용하는 컬버린 포가 유행이었고, 고밀도 고중량의 금속 포환은 어지간한 성벽으로는 막기 힘들었다. 물론 아직도 대형 사석포는 현역이었다. 심지어 포환까지 금속이던 컬버린보다 조금 저렴했다. 이러한 강력한 화포들 앞에서 기존의 무슨 막같이 얇고 높은 성벽은 적을 내부에 허락하기 십상이었다.
대신에 대부분의 화포가 멍텅구리탄을 쏘는 직사 사석포들이었다. 컬버린 포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를 노려서 직각으로 맞으면 박히거나 튕겨나가고, 고각으로 쏘면 빗나가는 지옥의 이지선다를 강요하는 극한의 두께를 자랑하는 벽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벽은 300년동안 수성계의 교과서로 자리잡았으며, 19세기 무렵에 고폭탄과 곡사포가 등장하며 외부에서 내부의 보병들을 요격할 수 있게 될때까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지상측의 벽 뿐만 아니라 해안가의 벽도 많이 두꺼워진 것을 볼 수 있다. 화포는 지상에서만 쓰는것이 아니다. 범선들 또한 컬버린 포를 싣고 다녔으며, 용도는 제한적일 지언정 상황에 따라 기동성은 지상 화포보다도 우월했다. 따라서 해안가의 성벽또한 두터워야 했으며, 이러한 선박에 대항해서 대포를 배치해야했다. 유럽 뿐만 아니라 이미 이때는 유럽에서부터 동쪽 머나먼 곳의 영국만한 크기의 나라에서도 어느 괴물같은 장군이 해상에서 미친듯이 대포를 쏘아제끼고 있었다. 말 그대로 전 세계가 화약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왜냐면 높이 지을수록 맞추기 쉬운 표적이 되기 때문이지
그래서 벽들이 대부분 엄청나게 두껍고 높이는 되려 낮아짐
마치 현대의 벙커나 참호처럼 말이여
화살부대를 이끌고 접근하기에는 대포가 너무 위력적이고 16세기부터는 주력 무기산업으로 머스킷이 떠오르는 시기여서 활이 도태되고 머스킷과 대포를 운용하기 시작해서 그래
한 몇년 걸려서 활쏘는걸 훈련시켜야 병사 한명이 생기는 궁수보다 총기 관리법, 장전하고 조준하고 쏘는것만 가르치면 되는 머스킷병 양성이 훨씬 빠르고 활보다 살상력도 좋았음
그리고 성은 몰락했지만 인류는 마법의 철근 콘크리트를 발명해서 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옹오오오오오오올라 두껍고 튼튼한 요새를 만들었답니다.
부연설명을 더 덧붙이자면 이렇게 다들 총들고 다니니까 생긴문제가 "엇 쉬발 곡사무기는 하나도 없네"였고, 그렇다고 활이랑 투석기를 도로 끌고오면 머나먼 거리에서 대포로 작살나는 문제가 있음
그래서 저 투박하게 생긴 성형요새가 19세기까지 현역으로 먹고 살 수 있었지
곡사포에서 유탄을 발사하기 전까지는...
보방식 요새에 설명이 좀 덜나온것 같은데 성벽 앞쪽까지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을 만들어서 외부에서는 성벽이 잘 안보이고 어느 순간 해자와 성벽아 딱 나타나게 설계 됐음. 그래서 공격측의 대포는 성벽을 공략하기 어렵고 방어측의 포화는 집중 시킬 수 있게 만듬. 이건 유튜브나 그림으로 설명된걸 보면 편함
왜 16세기가 15세기보다 더 퇴화한 것 같냐
왜냐면 높이 지을수록 맞추기 쉬운 표적이 되기 때문이지
그래서 벽들이 대부분 엄청나게 두껍고 높이는 되려 낮아짐
마치 현대의 벙커나 참호처럼 말이여
투석기나 공성추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높이가 낮으면 반대로 화살세례에 심하게 노출되지 않음?
오히려 병사 많이 끌고 다니던 저 시절엔 그냥 활 존나 퍼부었을 것 같은데.
화살부대를 이끌고 접근하기에는 대포가 너무 위력적이고 16세기부터는 주력 무기산업으로 머스킷이 떠오르는 시기여서 활이 도태되고 머스킷과 대포를 운용하기 시작해서 그래
한 몇년 걸려서 활쏘는걸 훈련시켜야 병사 한명이 생기는 궁수보다 총기 관리법, 장전하고 조준하고 쏘는것만 가르치면 되는 머스킷병 양성이 훨씬 빠르고 활보다 살상력도 좋았음
부연설명을 더 덧붙이자면 이렇게 다들 총들고 다니니까 생긴문제가 "엇 쉬발 곡사무기는 하나도 없네"였고, 그렇다고 활이랑 투석기를 도로 끌고오면 머나먼 거리에서 대포로 작살나는 문제가 있음
그래서 저 투박하게 생긴 성형요새가 19세기까지 현역으로 먹고 살 수 있었지
곡사포에서 유탄을 발사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성은 몰락했지만 인류는 마법의 철근 콘크리트를 발명해서 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옹오오오오오오올라 두껍고 튼튼한 요새를 만들었답니다.
작은 소년까지 나설 필요가 있나, 이 톨보이님이 처리해주마
폭탄!! 더큰 폭탄
이런 정보는 추천이야
보방식 요새에 설명이 좀 덜나온것 같은데 성벽 앞쪽까지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을 만들어서 외부에서는 성벽이 잘 안보이고 어느 순간 해자와 성벽아 딱 나타나게 설계 됐음. 그래서 공격측의 대포는 성벽을 공략하기 어렵고 방어측의 포화는 집중 시킬 수 있게 만듬. 이건 유튜브나 그림으로 설명된걸 보면 편함
요즘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