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난 사춘기가 없었다. 열두 살 때 생리를 시작했고, 열세 살 때 삼촌이 잠자고 있던 나를 만졌다.
당시 삼촌은 아빠의 사업을 돕느라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다. 우리 부모님보다 나와 놀아주는 시간이 길었고, 나도 삼촌을 좋아했다. 특히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는 부모님보다 삼촌과 하는 게 편했다. 멍청한 남자애들의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주체하기 어려워진 호르몬 때문에 그 나이의 남자애들이 그 모양이라는 것은 이해했지만, 어른 남자에 대한 위험은 감지하지 못했다. 외삼촌과 거실에서 영화를 보다가 내가 잠들었고, 외삼촌이 내 바지 속으로 손을 넣었다.
여전히 생생히 기억난다. 영화의 내용까지도 기억난다. 난 영화가 지루해서 잠든 척 했었다. 죽은 남자친구와 이름이 같은 여자에게 민폐를 끼치는 영화였다. 영화 내내 추운 풍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아직 진지하게 영화를 감상하기에도 어린 나이였다.
내가 잠들면, 삼촌도 지루해할 줄 알았다. 어린애 같은 사고방식이었지만, 삼촌의 손이 내 바지 속으로 들어오는 게 잘못됐다는 건 알았다. 굉장히 큰 잘못이라는 걸 알았는데, 너무 놀라서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멈추게 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부끄럽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삼촌의 손가락이 깊은 틈까지 파고들고 나서야 삼촌의 손목을 잡았다. 삼촌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제발 멈춰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삼촌의 손목만 잡았다.
전혀 잊지 않았다. 삼촌의 손이 아주 천천히 내 바지 속에서 나오는 그 모든 순간들을 기억한다. 난 여전히 삼촌을 볼 수 없었고, 삼촌은 아무 사과도 없이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내 소중했던 소녀의 시간은 끝났다. 난 더 이상 부모님과 주변의 어른들에게 애교부리는 여자애가 아니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혼자 비밀을 간직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라 힘들었지만 견뎠다.
“형수. 수진이 요즘 사춘기에요? 엄청 까칠해 졌네?”
“나도 모르겠어. 집에만 오면 방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을 안 해”
삼촌이 뻔뻔하게 엄마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나만 빼고 모두 평소와 같다는 게 슬펐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나만 힘들어야 한다는 게 괴로웠다.
결국 엄마에게 털어 놓을 용기를 내기로 했다. 삼촌이 우리 집에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삼촌이 집에 없을 시간에 엄마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아빠가 사업 때문에 출장을 가면 삼촌도 같이 가니까. 그때 말하려 했다.
일단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너무 많이 울게 될 것 같았다. 엄마에게 말하려는 중에, 혹은 말을 하고 나서 삼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삼촌에게 불 같이 화를 내는 모습을 떠올리는 일도 힘들었다.
아빠가 부산으로 2박3일 출장을 다녀온다고 했다. 삼촌도 같이 간다. 난 그날 아침부터 각오를 다지며 엄마에게 말할 준비를 했다. 학교에서 내내 엄마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러다보면 울고 싶어져서 화장실에 다녀왔다. 어떻게 말해야 엄마가 충격 받지 않을지 고민하고 또 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게 미안하고 마음이 아파서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다. 울지는 않았다. 눈물은 털어놓은 뒤로 미뤘다.
학교가 끝나고 학원을 가는 대신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면서부터 눈물이 나려는 걸 애써 참았는데, 현관에 삼촌의 신발이 있다.
“형수. 좀 있으면 수진이 오지 않아?”
“괜찮아. 학원 갔다가 오려면 아직도 두어 시간은 있어야 해. 좀 쉬다가 가”
“쉬는 건 부산가는 기차에서 쉬면되지”
“또 하게?”
그런 말들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거실바닥에 떨어져 있는 삼촌과 엄마의 옷가지들을 보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열린 안방 문틈으로 그 모습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했던 나이였다.
조용히 집을 나와 학원을 갔다. 울음이 나오거나 슬프지도 않았다. 멍하니 앉아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당연히 엄마만 있었다. 엄마가 씻고 밥 먹으라 했지만, 대답하지 않고 방에 들어갔다. 평소의 엄마라면 또 이런저런 잔소리들을 했을 텐데, 그날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엄마가 내게 무슨 일 있냐며 걱정했다. 난 비밀이 두 개로 늘었다.
사람들은 내게 사춘기가 왔다고 했다. 그때 내게 사춘기가 시작된 것이라면, 아직도 끝나지 않았겠다. 난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엄마를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런 감정을 가지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집에서 생긴 외로움은 밖에서 지웠다. 남자애들의 애정공세를 모두 거절하는 대신 모두에게 여지를 줬다. 웃어주지도 않았고, 연애편지는 모두 찢어버리면서도 남자애들과 가까이 지냈다. 중학생 남자애들은 딱히 사귀어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러니 난 어느새 여왕 비슷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수진이? 너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와 이름이 똑같네?”
“흔한 이름이니까요.”
“이야~ 듣던 대로 까칠하구나? 아무하고도 사귀지 않는다며? 왜?”
“별로 맘에 들지 않으니까요.”
“나는 어때?”
“좋아하는 애가 있다면서요.”
“너도 좋아하면 되잖아”
다니는 학원이나 독서실에서 만난 고등학생 오빠들이 내게 말을 걸었다. 길 가다보면 대학생들도 내게 말을 걸었다. 그들 중에는 괜찮은 남자도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애와 내 이름이 똑같다던 그 오빠는 독서실에서 만났다. 외모도 괜찮았고, 듣자하니 공부도 잘한단다.
주위 여자애들의 시기와 질투에 많이 피곤해져 있었다. 적당히 아무하고나 사귄다고 해버리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귄다고 별로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사귄다고 선언해버리는 것 그 이상의 무엇도 할 생각은 없었다.
멍청한 친구들과 수준을 맞춰주려면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애가 있으면서 나도 좋아하겠다는 그 오빠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 오빠와 사귄다고 해버리면 귀찮은 일들이 많이 줄어들 줄 알았다.
“우리 사귀기로 한 거 아니었어? 키스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손은 잡고 있잖아요.”
“수진아. 네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요즘 키스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내 친구는 콘돔도 가지고 다녀”
“아직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럼 다음에 만날 때는 키스 정도는 해줄 생각을 해라”
귀찮은 일이었다. 첫 키스를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는 게 귀찮았을 뿐이었다. 그 오빠는 내가 키스를 해줄 생각이 있을 때까지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난 상관없었다. 그 오빠와 사귀고 있다는 타이틀만 가지고 있어도 괜찮았다. 오히려 귀찮은 일들이 줄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게 다른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내가 차였다는 소문이었다. 내가 듣기엔 웃긴 얘기였는데, 다들 나도 차일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한수진~ 너 차였다며?”
“아. 그래?”
“쿨 한척 하기는? 그럼 자존심이 좀 지켜져?”
더 이상 여왕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여자애들의 시기와 질투는 더 심해졌다. 내가 딱히 남자애들과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아도 남자애들이 먼저 다가왔을 뿐인데, 난 그 오빠에게 차이자마자 남자애들에게 꼬릴 치고 다니는 여자애가 되었다.
바보 같은 수준을 맞춰줘야 했다. 그 오빠에게 전활 걸어 만나자고 했다.
[왜? 이제 키스할 마음이 생겼어?]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럼 넌 뭐가 중요해? 싫으면 그냥 계속 남자들에게 꼬리나 치고 다녀]
키스 정도는 해줄 생각이었다. 그 오빠의 얼굴이라면 참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오빠가 집으로 오라고 했지만, 그건 무서워서 싫었다. 그랬더니 오빠가 나오라고 했다.
그 오빠를 만나러 나가면서도 두 번이나 남자들이 말을 걸어왔다. 토요일 오후였고, 중학생 여자애가 돌아다니기 불편한 거리였다. 약속장소에서 그 오빠를 만났는데, 막상 만나니까 키스할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바보 같은 짓이다. 그 오빠가 노래방을 가자고 했지만, 난 배가 고프다고 했다.
“그래? 뭐 먹을래? 맛있는 거 사줄게”
“아뇨. 오늘은 제가 살게요.”
내가 밥을 사주고 적당한 핑계를 대며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런 날은 오빠가 사는 거야. 응? 뭐 먹고 싶어?”
“아뇨. 항상 오빠가 샀잖아요. 오늘은........”
“왜? 아는 사람이야?”
잘 아는 사람이다. 아주 잘 알지만 또 너무 모르는 사람을 만났다. 아빠가 젊은 여자와 골목을 나오고 있었다. 그 골목 위로 시선을 옮기니 모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흔한 밥집의 간판도 없는 골목이었다. 그 골목에는 모텔과 유흥주점의 간판만 있었다.
아빠도 나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차라리 나를 발견하자마자 인사라도 해줬다면 좋았겠다. 이미 아빠가 나를 반가워할 타이밍을 놓쳤다. 아빠가 나를 모른척하며 젊은 여자와 함께 거리의 군중 사이로 사라졌다.
“오빠.”
“왜?”
“우리 노래방 가자.”
“진짜?”
“혹시 우리 술도 마실 수 있어?”
“술? 그건 여기서 안 돼. 다른데 노래방 가면 술 주는데 있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고 처음으로 키스해봤다. 별로 대단하진 않았다. 생각만큼 더럽지도 않았다. 난 이미 더 더러운 것들을 알고 있었다. 오빠가 키스하며 내 몸의 이곳저곳을 만졌지만, 반사적인 저항을 제외하면 딱히 막지도 않았다.
오빠가 내 브라를 들추고 가슴을 만지는데도 가만히 있으니까, 가랑이 사이로도 손을 넣으려 했다. 거기에 손이 닿으니 삼촌이 그랬던 게 떠올랐다. 오빠의 손목을 붙잡고 울었다.
“야. 너 왜 그래?”
“........”
“알았어. 안할게. 야. 그만 울어”
미안하다는 오빠에게 괜찮다고 했다.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계속 울었다.
오빠가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걸 혼자 가겠다고 했다. 집으로 향하는데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전화는 받지 못했다.
한동안 아빠가 내 눈치를 봤다. 난 또 비밀이 늘었다.
바보 같은 행동으로 귀찮은 일들이 줄어들 줄 알았는데, 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뗐어?”
“무슨 소리야?”
“뭐야~ 소문 다 났어. 너 지지난 주말에 그 오빠랑 노래방 갔다며? 술 주는 노래방 말이야. 거기서 뗀 여자애들이 백 명은 넘을 걸? 아니 천 명? 그 노래방에 가면 한다며?”
“그렇구나.”
난 하지 않았지만, 그냥 인정해버렸다. 그쪽이 편할 거 같았다. 그게 덜 귀찮을 줄 알았는데, 실수였다. 오히려 별 시답잖은 양아치들이 내게 접근해왔다. 그 오빠의 친구들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야. 한수진~ 너 수민이랑 했다며? 우리랑은 언제 하냐?”
“아직 헤어지지 않았는데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우린 수민이 동생도 같이 돌려먹었는데?”
“네?”
그 오빠의 배다른 여동생 이름도 수진이었다.
사랑?
계속.
새로운~ 에피소드의 시작!
쿨케이// 항상 찾아주셔서 고마워요.
잘 보았습니다.
아아.. 갑자기 한수진으로 넘어가는 건가요?
좀 갑작스러워서 읽기 불편하실 수도 있겠네요.
이 글의 시작은 95편의 글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군요. 성폭O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더 자책하는 경우가 많다는 무거운 내용이 들어있네요. 한수진 샘의 성장배경이 항상 궁금했는데 이제야 궁금증이 풀리네요.
뉴 에피소드~!
기대가 큽니다, 북풍님~!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오늘도 잘 보았습니다.~
오늘 글은 저도 경험해 보지 못했고 대다수의 불페너들도 겪어보지 못해서 공감하기 힘들겠지만.. 주변에 미녀라 불리는 여자들은 많이 겪는 얘기네요.
이쁜애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힘든 점을 잘 표현해 주신거 같네요.
수진이에게 침약같은 존재가 나타났으면 좋겠네요 ㅎㅎ
맛깔난 글 항상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잘 보고 갑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