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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사랑없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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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일 아침의 사무실 분위기는 큰 훈련을 기다리는 군인들로 가득한 내무반 같았다. 보통은 그랬다. 지루하고 답답한 기운으로 가득하며 약간의 긴장감이 감도는 게 일반적이었다. 


 오늘은 마치 소풍을 떠나기 직전의 초등학교 교실 같다. 제일 먼저 출근한 송민아가 도착하는 모두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미소를 보였고, 상준이는 밖에서 커피를 잔뜩 사와서 돌렸다. 박 대리는 서류철을 펼치며 뭔가 노랠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박 대리가 함지혜라는 여자애와 꽤 잘된 모양이다. 박 대리는 이해할 수 있겠는데, 송민아와 상준이는 왜 저럴까? 설마 둘 사이가?


 송민아가 상준이에게 커피를 받으며 말했다.



 “선배 어제 잘 들어갔어요? 전 온몸이 쑤셔서 죽는 줄 알았어요.”



 흥얼거리던 박 대리도, 그들을 지켜보던 나도 깜짝 놀랐다. 칸막이 너머의 다른 팀원도 놀라 고개를 내밀 정도였다. 당연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더라도, 관심이 생긴다.


 송민아도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배시시 웃으며 어제 상준이랑 놀이공원에 갔다고 했다. 



 “뭐야 너희 둘이 사귀냐?”


 “네? 아니요?”


 “사귀지도 않는 남녀가 어떻게 같이 놀이공원에 갈 수 있지?”


 “꼭 사귀고 있어야 같이 놀이공원에 같이 가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는 걸까?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가까운 표본들을 사용하기로 했다. 먼저 박 대리에게 물었다.



 “박 대리. 너 몇 명의 여자들과 자봤냐?”


 “예?”


 “아. 월요일 아침에 하긴 불편한 질문이군. 너 여자랑 몇 번 사귀어봤냐?”


 “두.......번?”


 “한 번이군. 그럼 그 여자들 중에 같이 놀이공원 간 여자는 몇이냐?”


 “없는데요?”



 상준이에게 질문하려다 그만두고, 다른 팀의 이 대리에게 물었다.



 “이 대리. 이 대리는 여자들 좀 만났지? 몇이나 사귀어봤어?”


 “뭐~ 흠. 사귀었다는 정의가 뭡니까? 차 과장님?”


 “됐다. 이 대리는 같이 잤던 여자가 열 명은 넘지?”


 “프라이버시입니다. 과장님.”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건 또 뭐냐? 그럼 그 중에 같이 놀이공원 간 여자는?”


 “두~ 명? 아. 세 명? 놀이공원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질문에만 대답해라. 오케이~ 알았어. 음 그럼?”



 다른 남자직원에게 질문하려다가, 최미영 씨와 눈이 마주쳤다.



 “미영 씨?”


 “세 명이요! 놀이공원은 두 명!”


 “아~ 역시 미영 씨는 시원시원해서 좋아. 지금은 만나는 남자 없지?”


 “시끄러워요~”


 “미안.”



 표본을 충분히 얻었으니, 상준에게 말했다.



 “내가 얻은 조사결과에 따르면 너랑 송민아는 잤어야 하는 게 맞다.”


 “예?” “네?”


 “거봐 너한테 말했는데 송민아도 같이 대답하잖아. 호흡이 맞는다는 얘기지. 이 대리! 남녀가 호흡이 맞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듀엣 곡을 같이 불러야죠.”


 “........너 혹시라도 내 밑으로 오면 살해할거야. 어쨌든 논리적으로 상준이랑 송민아는 최소한 사귀기라도 해야 하는 게 맞다. 다들 인정하지?”



 야유를 받았다. 사무실 직원들의 야유에 손을 들어 감사를 표했다. 송민아 이 귀여운 것이 내 질투를 사고 싶은 모양이지만, 내가 민효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난 민효정의 질투를 사기위해 송민아를 이용할 생각이 없다. 


 아무리 분위기가 좋아도 월요일은 피곤하다. 소풍가는 아침 같았던 사무실이 중간고사 이틀 전의 분위기로 바뀌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 대리는 침착하게 상준의 자료를 찢어 쓰레기통에 넣었고, 상준은 송민아에게 설명하다 한숨을 내쉬느라 책상이 꺼지겠다. 송민아는 내 눈치를 보느라 또 일을 배우느라 눈동자가 바빠 보였다.


 적당히 잔소리하고 충분히 일거리를 던져줬다. 팀원들이 지루한 하루를 보내지 않게 하는 게 팀장의 가장 중요한 업무다. 바쁜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이 들만큼 팀원들을 사용하고 마지막에만 사기를 북돋아주면 된다.



 “퇴근들 합시다. 상준아~ 일하는 척하지 말고~ 덮어. 내일 해! 아니, 집에서 해~”



 다들 퇴근을 준비하는 와중에 먼저 일어나 사무실을 나왔다. 시간을 확인하며 민효정이 근무하는 사무실로 향했다. 다행히 민효정도 이제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입사동기인 해외영업팀 팀장이 나를 보고 깜짝 놀라 인사했다.



 “어? 차준호~ 여긴 웬일이야?”


 “응. 민효정 보러 왔어.”


 “헐. 뭐 그렇게 당당하냐. 이러려면 민효정 씨 부서는 왜 옮기게 했어?”


 “아~ 그야. 사랑하면 일을 시키기 불편해지잖아.”



 퇴근을 준비하던 해외영업팀의 팀원들이 모두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소리 없는 환호에 아까 우리 사무실에서처럼 손을 들어 감사를 표하고 싶었지만, 민효정을 생각해 참았다. 아니나 다를까 민효정이 어이가 탈출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난 그런 민효정을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내 친절한 동기는 다른 직원들이 어서 퇴근하도록 독려했다. 해외영업팀이라 당직을 서야하는 인원들까지도 내 동기가 데리고 나갔다. 민효정은 그때까지도 내가 처음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자세로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민효정이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민효정과 눈싸움을 하는 건 부담스러워 창밖을 바라봤다. 빌딩숲 너머로 노을이 생기고 있었다. 빌딩들의 유리창에 하루의 얼룩이 지며 세상이 물들고 있었다.


 다시 바라본 민효정은.......없다. 없네?


 내가 창밖을 바라보는 사이에 민효정이 사무실을 먼저 나갔다. 창밖을 바라보며 폼 좀 잡아보려 했는데, 민효정이 감상할 가치가 없었던 모양이다. 급하게 민효정을 따라 복도로 나갔더니, 민효정이 멀리 가진 못했다. 


 복도에서 우릴 엿보려던 해외영업팀의 팀원들이 삐쭉거리며 달아나고 있었다. 민효정은 자신에게 인사도 없이 퇴근하는 동료들에게 꽤나 섭섭했던 것 같다. 복도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민효정을 불렀다.



 “민효정”


 “네. 차 과장님.”



 민효정이 나를 돌아봤다. 난 여자들의 저런 눈빛이 너무 좋다. 장난꾸러기를 나무라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복잡 미묘하다는 감정이 섞인 저 눈빛이 좋다. 나를 잘 모르겠다는 그 눈빛이 만족스러웠다.



 “같이 저녁 먹자.”


 “뭐 하시는 거죠?”


 “저녁을 같이 먹자는 얘기지. 우리가 계속 여기에서 이러고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아~ 안녕?”



 말이 씨가 되었는지, 다른 사무실의 직원들이 퇴근하며 내게 인사했다. 민효정과도 인사를 나누며 지나는 직원들이 우릴 힐끗거렸고, 민효정이 그들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하기에 나도 따라갔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다른 직원들이 침묵했다. 그 침묵의 이유가 나와 민효정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했다.



 “효정 씨. 우리 저녁 뭐 먹을까?”


 “.......과장님 먹고 싶은 거 먹어요.”


 “진짜? 와~ 이 시간에? 사람들 듣는데 그런 말을 하고 그래~”


 “정말 재미없네요.”



 내 말에 픽~ 하고 웃었던 누군가가 민효정의 대답에 헛기침을 하며 억울해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민효정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고, 난 따라갔다. 같이 엘리베이터에 있던 다른 직원들은 우리의 이야기로 숙덕거릴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아무도 우릴 뒤따르지 않았다.


 회사를 나와서도 민효정은 고속으로 걷고 있었지만, 달린다고 해도 나를 따돌리지는 못할 것이다. 회사에서 충분히 멀어지고 나서야 민효정이 멈춰 서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숨차지? 천천히 걸어.”


 “악! 나한테 왜 그래! 나보고 어쩌라고!”



 민효정의 비명 같은 외침에 주변에 길 가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럴 때 머릴 긁적이는 건 굉장히 없어 보이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는데, 이미 난 머릴 긁적이고 있었다. 민효정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잠시 우릴 관전하고 싶었던 행인들이 다시 제각기 갈 길들을 갈 때까지, 우리는 그대로 서로를 보고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민효정이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이글거리던 민효정의 눈빛은 점점 슬퍼지고 있었다. 민효정이 한숨을 내쉬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자고 싶어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이다. 민효정은 왜 내게 저렇게 말하는 걸까. 이유는 모르겠어도 명치왼편이 저려왔다. 


 이번엔 내가 어금니를 꽉 깨물게 되었다. 민효정을 따라오면서도 숨이 차지 않았는데, 지금 막 숨이 가빠오는 것 같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민효정이 넌더리가 난다는 눈빛으로 외쳤다.



 “나랑 하고 싶냐!”



 다시 지나는 행인들의 발목을 잡았겠지만, 이제 그런 건 상관없었다. 어금니를 어찌나 세게 깨물고 있었는지, 턱이 저려오는 것 같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이런 민효정의 뺨을 후려치고 싶기도 했고, 안아주고 싶기도 하면서, 또 괴로웠다.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밥 먹자. 같이 저녁 먹자. 우리 같이 저녁도 먹고, 놀이공원도 같이 가고 싶어. 너랑 같이”


 “개/새/끼.”



 최근 많이 듣게 된 것 같다. 어릴 때는 흔하게 하던 욕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친한 친구들과도 하지 않게 된 욕이다. 며칠 전 송민아가 날 개 같다고 했었다. 아니, 강아지 같다고 했었는데, 이제야 민효정에게 분명한 의미의 욕을 듣게 되었다. 


 혹시라도 민효정이 눈물을 보이면 안아줘도 괜찮을지 생각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선 그랬던 것 같은데, 내가 그래도 괜찮을지 궁금했다. 


 민효정은 울지 않았다. 멀리 짙어지기 시작한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그러던 민효정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책임져요.”


 “고마워”


 “.......배고파요.”


 “뭐 먹을래?”


 “팀장님?”



 나를 먹겠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민효정이 한 말도 아니다. 나와 민효정은 거리의 한복판에서 영화를 찍고 있었고, 나를 부른 건 상준이었다. 상준이와 송민아가 함께 퇴근하다 우릴 발견한 모양이다. 퇴근도 같이 하나?



 “너희 정말 사귀냐?”


 “아뇨. 미영 선배가 저랑 민아 밥 사준다고 해서요.”


 “아~ 그래? 너희들끼리도 어울리는 구나. 대리들은 안 끼워주고?”


 

 상준이 하고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여직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 같다. 민효정과 송민아가 굉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이 겨울이었나? 심상찮은 분위기를 깨려고 다시 상준에게 말했다.



 “박 대리는?”


 “어? 누구 만나러 간다고 했는데요.”


 “아~ 함지혜? 이름 못 들었어? 내가 지난 주말에 박 대리 소개시켜줬잖아”



 이번엔 내가 관심을 끌었나보다. 민효정이 경악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고, 이제 송민아도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여자들의 시선에 이렇게 오싹해지긴 처음인 것 같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하늘을 바라봤지만, 멀쩡히 노을이 지는 평범한 저녁이었다. 다시 민효정과 송민아를 돌아봤는데, 그녀들은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상준아”


 “네?”


 “우리도 같이 놀까?”



 여자들의 시선들이 비수가 되어 나를 찢는 느낌이 든다.






 계속.


댓글
  • 도쿄금메달 2019/02/12 13:12

    첫댓!

    (gQqhWS)

  • NorthWind 2019/02/12 13:24

    감사합니다. 부디 읽을만도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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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살 2019/02/12 13:42

    소용돌이로 모두들 빨려 들어가네요 ㅋㅋㅋ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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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Torres 2019/02/12 13:50

    술자리 난투극이라도 벌어질 것 같네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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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워니유니31 2019/02/12 14:44

    파닥파닥~ 88부까지 왔네요~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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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Justice 2019/02/12 15:00

    와 민효정과 차과장 거리에서의 씬이 명장면이네요
    소설인데 수준 높은 막장 드라마 보는 것 같은 기분.
    대단한 긴장 상태인데 찬물을 끼얹는 눈치 없는 상준이 또 등장으로 소강상태 ㅋㅋㅋ
    완급조절의 대가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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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9/02/12 15:14

    잘 표현했으면 꽤 괜찮았을 장면인데, 제가 이런 내용을 이야기하는데 서툴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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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쿨케이 2019/02/12 16:03

    '함탁' 에피소드 마치면 송민아 with 함지혜 에피소드 나올 느낌적인 느낌
    늘 잘 보고있습니다~ 응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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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불러용 2019/02/12 18:07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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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뿨킹엠엘비 2019/02/12 23:19

    일한이 소설 잘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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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leax19 2019/02/12 23:56

    솔직히 짜증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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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수 2019/02/13 01:03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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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란제리 2019/02/13 01:06

    효정이가 지혜랑 엮인 얘기는 알고 있어서 저런 제스처를 취하는건 이해가 되는데..
    민아도 지혜 이름을 듣고 저런 반응을 보이는건 먼가 둘 사이에 있나 보네요
    암튼 우리 준호씨에게 효정이만 엮인게 아니라 민아 보람이 지혜까지 엮여있고 그 뒤로 수진이까지 엮일 수 있으니...
    이거 해피엔드죠?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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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9/02/13 09:28

    민아는 그게 아닌데요... 송민아는 그냥 민효정이랑 만나는 차 과장을 본 겁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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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ronawa 2019/02/13 14:35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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