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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일본군 有

종전후..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추구하는데,,,
무기가 필요했고,,항복했던 일본군에 무기를 요구했다.
물론 연합국은 이를 금지했지만..
스마란 사건 같은 인도네시아 무장 독립 세력과
무기 인도를 거부하던 일본군 사이의 충돌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측을 제압했지만 억류되어 있던
다수의 민간인들이 살해 당하는등의 피해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으로 부터 독립세력에 묵인하에 무기가 흘러가는 경우도
있었고 또한 무장 세력에 가담하는 일본군도 있어 당시 일본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였다.
자료에 따라선 수백에서 수천명의 일본군이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도네시아 반군 세력에
가담해 네덜란드와 싸웠다.
이들이 인도네시아 독립 투쟁에 가담한 이유는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본의 동아해방,,아시아공영권 같은 구상을 쫓아 가담한 자도 있겠고..
전범으로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해 남아 싸운자도 있었고..
그들이 훈련 시키던 인도네시아인들의 교관으로서 그대로 참전한 자도 있었다.
이유야 무엇이든 상당수 일본군이 무장 인도네시아인들을 이끌고 싸웠고 인도네시아
독립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수백명의 일본군이 전사하거나 처형되어 인도네시아 여기저기의 국립묘지에
독립 영웅 으로서 안장되어 있다.
그중의 한명...
梁川七星 야나가와 시치세이
인도네시아 이름..Komarudin,
한국명은 양칠성,
1919년 전라북도 전주군 삼례면 삼례리(현 완주군 삼례읍)출생,
42년 일본 남방군에 들어가 45년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종전을 맞는다.
그가 귀국하지 않은 이유는 많은 일본군들의 사연처럼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그는 인도네시아에 남는 편을 선택했다.
게릴라 활동을 벌이던 그는 1948년 11월 네덜란드군에 체포되어
49년 8월 총살되었다.
그의 존재는 한 일본인 여성이 3명의 일본인이 독립영웅으로 추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유해를 찾아가는 가족도 없고 유족에 연락도 없는 사실..
梁川七星 야나가와 시치세이 라는 이름에 주목해 그를 추적하게 되는 과정에
그가 조선인 양칠성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의 노력으로 양칠성의 가족도 늦게 나마 그의 죽음을 알게되었다.
야나가와 시치세이란 그의 묘비명도 양칠성이란 본명으로 바뀌게 된다.
그녀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는 일본인 야나가와 시치세이로
영원히 한국에선 잊혀진 존재가 되었을것이다...
하긴,,지금도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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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전의 양칠성,,,맨왼쪽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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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RE003 2017/01/29 22:04

    딱히 우리가 기억할 필요는 전혀 없는 인물인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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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lina 2017/01/29 22:06

    이런역사도 있었군요 역사는 알면알수록 정말 재미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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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르페디엠™ 2017/01/29 22:07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싸운 것도 아닌데 굳이 기억해야 할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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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dari 2017/01/29 22:12

    친일 분자로 일본군을 위해 싸웟다가 돌아가면 전범으로 처형 될거 같자
    인도네시아를 위해 싸우다 잡혀서 총살 당한 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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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methyst 2017/01/29 22:16

    양칠성을 기억하자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면서
    이상하게 결론을 맺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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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orowitz™ 2017/01/29 22:20

    막판에 네덜란드 편에 섰다면 인상적이었을듯.
    아마 그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 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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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tm 2017/01/29 22:27

    난 또 먼가 대단하다 싶은 인물인줄 알앗네..
    근데 왜 올린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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