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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의 안타까운 진상썰

겨울방학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편의점 알바를 하기로 결정했다.


중산층 가정에서 경제적 어려움없이 지내고있지만 여름에 해외여행갈 돈이나 모아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알바다.

신도시의 가격대 있는 아파트와 국가임대아파트 사이에 있는 작은 편의점이 집에서 가장 가까웠고 마침 야간알바를

구하고 있었기에 별 생각없이 지원했다. 성격이 유한 아주머니가 사장인데다가 밤에는 인적이 드문 곳이라 별 무리없이

일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 진상을 처음 만난건 두번째날 밤이었다.

"어서오세요"

"담배하나 줘"

"어떤걸로 드릴까요?"

"...디스"

"이거 말씀이신가요?"

"아, 그거 말고! 그 옆에."

술냄새를 풍기며 말하는 뽄새가 아니꼬왔다. 

돈이 매너를 만드는건지 매너가 돈을 만드는건지, 중산층이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오는 사람들은 대개는 최소한의

예절은 차렸지만 담배를 물고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그 할아버지가 향하는 곳은 임대아파트였다.

사장 아주머니 말을 들어보니 자주 술을 먹고 와서는 아주머니 본인이나 여자 알바들에게 성희롱에 가까운 말을

한 일도 있어서 아예 경찰 측에서 편의점 자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한 모양이다. 

사장이나 다른 알바들이 출입을 저지하기에 일부러 내가 일하는 시간대에 오는걸까. 이후로도 거의 매일 들러

디스를 한갑씩, 그리고 유독 추운날에는 쌍화차를 한병씩 사가곤했다. 찍찍 내뱉는 반말정도는 익숙해졌고 애초에

들어오는게 보이면 바로 디스를 꺼내줬기에 말을 섞을 일도 거의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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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답지않게 추위가 잦아들었던 어느날 밤이었다. 어디서 이미 한잔 거하게 했는지 신도시 관공서에서 근무하는

직함깨나 있는 공무원두엇과 젊은 신입공무원 한명이 왁자지껄 들어와서는 술과 안주를 사더니 편의점 앞 노상테이블에서

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직 덜 발전한 신도시라 술집들이 일찍 마감을 하기에 여기로 밀려났지 싶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 진상이 와서 디스를 사가고 잠시 후 고함소리를 듣고 밖을 내다보았다.

시비가 붙어있었다. 연장자 공무원이 진상의 가슴팍을 밀치자 진상이 그에게 달려들었고 다른 공무원 두명이 시비 붙은 둘을

저지하는 찰나에 빈틈을 노린 연장자의 주먹이 진상의 얼굴에 꽂혔다. 벌렁 나자빠진 진상은 취중에도 본인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걸

깨달은건지 이새끼가 사람친다며 경찰에 전화를 한 모양이다. 지구대에서 온 경찰 둘은 진상의 얼굴을 보자마자

헛웃음을 쳤다. 이미 관련 민원이 여러번 들어온적있는 진상의 혀꼬부라진 소리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경찰들은 그 흔한 수첩메모조차

하지않고 공무원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눈치였다. 

이윽고 편의점에 들어와서는 나에게 상황을 목격했냐고 물었지만 난 복잡한일에 휘말리기 싫다는 생각에, pos기를 다루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비겁하게 거짓말을 했다. 

진상의 입술이 터졌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경찰의 주도하에 쌍방과실로 그자리에서 합의가 끝난 것처럼 보였다. 

다음날, 주인 아주머니에게 그 사실을 얘기하자 실제로 누구 잘못인지에 관계없이 진상이 당한 부당대우가 고소하다는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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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디스를 사러온 진상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실제로 할아버지라기보단 고생에 늙은 얼굴이었다. 실제론 나의 아버지정도 나이나 될까..

오히려 그보다 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혈된 눈은 풀려있었고 한쪽 귀는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무슨 연고를 덧칠했는지 희멀건 자국이 입술에

남아있었다. 실밥터지고 때탄 노란색 단추식 깔깔이와 시멘트 얼룩이 떡진 바지도 눈에 들어왔다. 문득 진상과 연장자 공무원, 그리고 나의 아버지의

어린시절 환경이 같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상의 막되먹을 행태를 만드는 교양의 부재가 어쩌면 이 사회의 또하나의 실패가 아닐까. 

디스 계산을 끝내고, 쌍화차 한병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쌍화차를 계산대에 올리고 돈뭉치를 주섬주섬 만지는 굳은살 두터운 그의 손가락을 보며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자주 오시니까 이번에는 쌍화차 그냥 드릴게요."

천원짜리 한장을 뽑아들고 주머니의 동전을 더듬던 그의 손이 멎고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자신이 그런 호의를 받을만한 사람인지 스스로 믿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짧은 순간의 정적 끝에 그가 입을 땠다.

"고맙습니다.."

그가 나가는걸 보고나서 내 지갑을 뒤져 포스기에 집어넣은 천이백원은 지난밤 나의 비겁함의 값으로는 너무나도 저렴한 것이었다.

텅빈 거리를 휘적휘적 걸어가는 그의 손에는 불붙은 디스 한까치가 꽂혀있었다.
댓글
  • sbuy87 2017/01/24 17:17

    이해는 되지만 비겁하네요. 인생 역지사지인거 같아요. 다음에는 그러지 마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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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長門有希 2017/01/24 17:42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기회조차 받아보지 못해 점점 삐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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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조의고수 2017/01/24 23:09

    글 잘쓰시네요...
    마음이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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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낮은자리에서 2017/01/25 02:58

    늘 생각하는거지만...사회가 너무나 각박해졌다고 생각해요.
    세계의 정치들도 완전히 미쳐버렸고...
    사람들 마음속에 사랑이라는게 너무나 많이 사라져버린것같아요.
    서로서로를 사랑만 하고 살기에도 인생은 너무나 짧은데.......내가 너무 늙었나싶고....(저 그렇게 안늙었습니다...;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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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mainJun 2017/01/25 03:09

    글읽다가 빠져서 봤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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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티잉족 2017/01/25 03:15

    짧은 소설 한편 본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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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랑이좋겠군 2017/01/25 03:16

    평소의 업보를 몰아서 받는것으로밖에 안느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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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또맨 2017/01/25 03:25

    그대로 콩트 하나 나온거 같습니다.
    은근한 매력이 있는 필력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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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틀까말까 2017/01/25 03:35

    이거 어디서 본 듯한 기분은 머죠?
    취했나?
    용기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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