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천국 코하비닷컴
https://cohabe.com/sisa/768846

19금사랑없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16)

 


 



 내 몸에 닿는 시선들을 느낄 수 있다.


 다른 여자애들처럼 교복치마를 많이 줄이지 않았어도, 상의를 타이트하게 입지 않아도 남자애들의 힐끗거리는 시선들을 느낄 수 있다. 거리를 지나다 마주치는 아저씨들처럼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건 아니었어도, 남자애들의 시선들이 내 몸에 멈추는 순간들을 알고 있다.


 언제부터였더라.

 

 아는 사람들은 아는 비밀의 시간에 가지고 있던 마법을 잃었다. 미래를 보거나 시간을 멈추게 하던 능력을 잃고 영원한 시간에 갇혔다. 절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영원해질 순간이 준비되었다. 간혹 보였던 미래가 보이지 않았고, 때때로 멈추던 시간들이 더 이상 멈추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모자라보였던 남자애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른들의 시선에선 다른 걸 느낄 수 있었고, 남자들이 내게 원하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끔 미래를 볼 수 있었다.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간혹 먼 미래부터 바로 앞의 순간들까지도 보이곤 했다. 고백해봐야 변하는 건 없다는 걸 알기에 보이는 미래를 외면했다. 보였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소녀는 마녀가 되거나 정신병을 얻는 게 보통이다. 


 시간을 멈출 수 있었다. 영원을 준비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멈춰진 시간 속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아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멈춘 시간의 고요와 공포를 알고 있었다. 멈춘 시간 속에서 자유로웠던 소녀는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다. 


 여자들에게만 오는 비밀의 시간을 마법이라 부르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 시간부터 마법을 잃게 되었는데, 여자들의 그날을 마법이라 불렀다.



 마법이 멈춘 그날이니까, 그렇게 불러도 괜찮은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한 녀석이 내 뒤에 바짝 붙었다. 매점에서 줄을 서고 있었는데 뒤에 있던 녀석이 내 엉덩이를 건드렸다. 실수인척 건드렸지만, 절대로 실수가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내가 신경질적으로 녀석을 밀었더니 주절거렸다.



 “민효정! 생리 하냐? 나도 밀린 거잖아! 아~ 짜증나네.”



 사실이긴 한데, 내 엉덩이를 건들 정도로 밀리지도 않았겠고 밀고 지나간 녀석도 한패거리다. 너무 뻔하고 한심한 수준이라 장난보다 성추행으로 느껴졌다. 


 붐비는 매점에서 남자애들이 이런 장난을 치는 건, 중학교 때도 비난받을 짓이다. 초등학교 때나 두들겨 맞을 걸 각오하고 하던 장난이었다. 고등학교에서 이런 짓을 하는 건 몹시 한심하다는 걸 본인들도 아니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혼자가 아니었고, 주변의 여자애들이 모여들었다. 같은 학교의 여자애들에게 매장당하지 않으려면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맞을 텐데, 이런 놈들과 어울리는 여자애들이 문제였다.



 “민효정 뭐야? 왜 그렇게 까칠해? 사고잖아. 얘가 너 일부러 만졌어?”



 이렇게 말하고 여럿이 깔깔거리며 웃어버리니, 나만 바보 꼴이 되었다. 내 편을 들어주려던 여자애들도 날라리들에게 맞설 생각은 별로 없어보였고, 남자애들까지 같이 있으니 여기에서 싸우면 꼴이 우스워질 상황이었다.


 일부러 내게 시비를 걸었다는 걸 알겠다. 남자애들이 문제가 아니라, 같이 있는 여자애들이 문제였다. 어디 한번 나대보라는 듯 나를 노려보고 있는 여자애가 있었다. 걔는 나랑 같은 중학교를 나온 여자앤데, 내 과거를 알고 있어서 저러는 것이다.




 중학교 때 날라리들에게 몇 번의 고백을 받고도 아무하고도 사귀지 않았더니, 몇몇 날라리 같은 여자애들이 시비를 걸곤 했었다. 남자애들의 사주를 받고 그랬다는 걸 알게 되었고, 걔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던 나는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괴롭히는 쪽을 선택했었다.


 일부러 담배를 배웠고, 남자애들에게 욕을 하고 시비가 붙은 여자애의 머리카락을 왕창 뽑아버렸다. 뺨에 칼 맞을 각오를 하니까 모든 게 쉬웠다. 담배를 피우다 선생님에게 걸려서 혼나는 일이나, 나를 노려본 날라리에게 의자를 집어던졌다가 엄마가 학교에 불려오는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편했다. 사고만 치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았고, 대부분의 애들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떤 선생님과 가까워지면서 더더욱 나를 건드는 애들은 없었다.



 “그러니까.......슬리퍼를 민경이 입에 넣었다고?”


 “헛소리를 못하게 하려고 그랬어요.”


 “.......전에는 의자를 던졌잖아.”


 “의자를 던져도 입은 계속 떠들더라고요. 또 엄마 불러야 하나요?”


 “어머님이 오시려면 일을 빠져야 하잖아. 힘들지 않겠니. 민경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겠어?”


 “그러면 또 저를 만만하게 보고 괴롭힐 거예요. 이미 악순환이죠.”


 “아니. 네가 사과하면 내가 널 책임지고 지켜줄게.”



 그런 게 가능하겠냐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일단 불쌍한 우리엄마를 부르지 않겠다는 말에 선생님의 말을 듣기로 했다. 난 민경이에게 사과했고, 그런 나를 비웃던 민경이는 선생님과 따로 상담했다. 그리고 우리엄마 대신에 민경의 엄마가 학교에 불려왔었다. 다른 날라리들의 엄마들도 줄줄이 학교로 불려왔고, 선생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어느새 우리학교 날라리들이 정리되었다.


 너무 궁금해서 선생님께 물어봤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너 따라 해봤어.”


 “저를요?”


 “칼 맞을 각오하면 모든 게 쉽다며? 교사 그만둘 생각하니까 쉽더라.”


 “그래도 그게.......그렇지 않잖아요?”


 “너도 진짜 칼 맞을 생각을 한 건 아니잖아? 그보다 너 말이야. 성적이 왜 이 모양이냐?”


 “예?” 



 인문계로 진학할 생각이라면, 지금 성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했다. 머리는 좋아 보이는데 왜 공부를 안 하냐는 흔한 얘길 했다. 학원은커녕 학습지도 마음껏 구입하기 힘든 내 사정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스트레스 받을 일이 줄었으니, 공부에도 신경을 쓰겠다고 했다.


 선생님이 그런 내게 학습지를 골라주셨고, 나를 따로 불러서 진도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렇게 젊은 남자선생님과 너무 가까워지는 건 불편한 소문을 만들었다.



 “선생님. 요즘 우리가 사귄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그런 거 신경 쓰는 타입이었어?”


 “근거가 약하면 금방 사그라지는 게 소문이죠.”


 “똘똘하네. 신경 쓸 필요 없어. 참. 너희 어머니 주말에도 일 나가시지? 주말에 집에서 혼자 뭐하니?”


 “.......공부하죠.”


 “웃기시네. tv만 볼 생각하지 말고 도서관이라도 가”


 “도서관에 어떤 중학생들이 모여 있는지 전혀 모르시는구나.”


 “그 정도니? 하긴, 뭐 우리 때도.......그럼 우리 집에 와서 공부해”


 “선생님 집이요? 제가 선생님 집까지 들락거리면, 근거가 생기는 건데요?”


 “나는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 괜찮아.”



 선생님이 혼자 사는 게 아닌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선생님 댁에 갔을 때마다 혼자 계셨다는 게 문제였다. 거의 단 둘이 있었고, 어른들이 남녀가 한방에 단둘이 있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선생님을 사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미 관계를 가진 이후에 내가 사랑한다고 믿으려 애쓰기는 했었다. 나를 돌봐주는 남자에 대한 고마움에 가까운 감정이었겠지만, 호감이나 사랑과 별로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어차피 죄다 잘 모르는 감정들이다.


 첫 경험 이후로 대부분의 시간에 관계를 공부했지만, 인문계 고등학교는 진학할 수 있었다. 다행히 서로가 지저분해지기 전에 헤어졌고, 이별에 대한 슬픔보다는 나를 돌봐주던 남자가 사라졌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나에 대한 소문은 장난 아니게 더러워져 있었다. 내가 선생님과 학교에서 하는 걸 봤다는 소문은 애교였고, 내가 선생님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낙태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다행히 실존하는 목격자도 그럴싸한 근거도 없는 소문이라 점점 사그라지긴 했지만, 나를 보는 시선들은 바뀌지 않았다.


 알만한 남자애들은 죄다 나를 그렇게 봤다. 고교진학 전 겨울방학 내내 날라리 놈들의 연락을 받았다. 집에 혼자 있지 않으냐며 놀러오겠다는 놈도 있었다. 더러웠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런 놈들을 만날 이유가 없었다. 


 노는 놈들에게 나는 꽤나 그럴듯한 트로피 정도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나를 가지면 그 바닥에서 상당히 인정받겠다는 소문이 돌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시기라 다행이었다.




 몇몇 날라리들이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그래도 중학교 때처럼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 애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다. 시간이 좀 지나니까, 마음잡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내가 편집부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사실이 고까웠던 것 같다. 그냥 조용히 공부만 하고 지냈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어떻게든 겪고 넘어가야 할 일이긴 했다. 고개를 숙이고 죽어지내거나, 다시 의자라도 던져야 했다. 


 이미 알만한 애들은 죄다 내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중학교 때처럼 볼펜이라도 이마에 박아줘서 쉽게 건들지 못할 여자애가 되거나, 고등학생답게 참고 이해하며 피할지 선택해야했다.


 날라리 계집애가 다시 입을 놀렸다.



 “왜? 남자들이 죄다 널 만지고 싶은 거 같아?”



 내가 노려보고 있는데도 다시 입을 놀리는 걸 보니, 중학교 때 기억은 죄다 잊은 모양이다. 아니면, 고등학생이니까 내가 중학교 때처럼 그러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지금 이 순간 저 애의 입을 찢어버리기라도 한다면, 편집부활동은 더 이상 하지 못할 것이고 또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지들끼리 깔깔거리며 나를 조롱하는 꼴을 더 보기 힘들었다.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태도를 부숴버리고 싶었다.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아주 더러운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날라리들이 아니라 내게서 나는 냄새 같다. 


 어쩔 수 없었다. 쓰레기에 파리가 꼬이는 법이다. 내가 쓰레기인 모양이다. 그래도 파리는 죽여야 한다. 저 입을 찢어줄 생각을 하는데.......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같은 편집부의 유성현이었다. 별로 백마 탄 왕자처럼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을 잔뜩 데리고 나타난 유성현이 다가와 나를 구했다. 아니, 저 날라리를 구했다. 유성현은 능글맞게 웃으며 두리번거리고는 다시 말했다.



 “아~ 줄이 너무 기네. 효정아 너 지금 여기 줄 선 거지? 부탁 좀 하자. 초콜릿 5개만 같이 좀 사줘. 여기 돈.”


 “야. 유성현. 뭐야~ 줄 서”



 내가 대답한 건 아니다. 내 편을 들어주지 못해서 눈치만 보던 여자애들 중에 하나가 말했다. 유성현은 미안하다며 내 손에 돈을 쥐어주고 능글맞게 웃으며 물러났다. 양아치들도 유성현에게 함부로 굴지는 못했다. 정말 거친 녀석들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오질 못했다. 공부도 싸움도 어정쩡한 놈들이 친구가 많은 유성현에게 시비를 걸진 못했다.


 양아치들이 내게 한 번씩 눈길을 주며 물러났고, 유성현은 그런 내게 손을 흔들어주며 멍청한 웃음을 보였다. 난 초콜릿 5개 대신에 소시지 5개를 사서 유성현에게 건넸다. 유성현의 친구들이 입술을 삐쭉거렸지만, 유성현이 내게 또 손을 흔들었다. 좀 있다가 편집부실에서 보자고 했다.



 편집부회의에 일찍 갔고, 유성현도 일찍 나와 있었다. 유성현이 또 멍청하게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중학교 때 친구들이 좀 별로네?”


 “.......너도 내 소문 알지.”


 “어~ 뭐. 글쎄~ 너 같은 애들한테는 원래 좀 그런 헛소문이 도는 편이잖아?”


 “나 같은 애가 어떤 앤데?”


 “성격은 까칠한데 외모는 베이글녀?”



 유성현이 자신의 가슴을 들어 올리는 포즈를 취하기에, 유성현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려고 했다. 유성현은 그럴 줄 알았다며 잽싸게 피하며 다시 말했다.



 “너가 그렇게 진지하니까 더 그러는 거 아니야. 비웃어주고 넘겨”


 “웃어? 그런 걸 웃으라고?”


 “흠.......그냥 웃어넘기기엔 너한테 좀 야한냄새가 많이 나는 편이긴 하지.”



 턱에 손가락을 괴며 말하던 유성현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이번엔 유성현이 피하지 못했고, 유성현이 아파하는 동안 내 표정을 감출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정말 냄새가 날까.






 계속.




-----------------------------------------------------------------------------

 지저분한 이야기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 주에 쓰겠습니다.

댓글
  • HandG 2018/10/04 13:12

    감사합니다;

    (xH9t5h)

  • NorthWind 2018/10/04 13:19

    HandG// 제가 감사합니다. ㅎㅎ

    (xH9t5h)

  • 노우리플레이 2018/10/04 13:25

    항상 잘 읽고있습니다~
    북풍님 글은 항상 재밌는 냄새가 나네요 ㅎㅎ

    (xH9t5h)

  • Justone~ 2018/10/04 17:50

    등장인물들 관계가 한번 더 엮이네요. 저 남자선생은 도대체 ....ㅋㅋㅋ
    항상 감사드립니다. 꾸벅.

    (xH9t5h)

  • Shy  2018/10/04 20:43

    킹성현 ㄷㄷㄷㄷㄷㄷ
    그리고 저 선생님은 설마

    (xH9t5h)

  • 4Justice 2018/10/05 07:47

    민효정과 갓성현이 이렇게 만난거군요 오호 ㅎㅎㅎㅎㅎㅎㅎ
    이번 편 흥미진진하네요

    (xH9t5h)

(xH9t5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