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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딸) [괴문서] 맨하탄 카페의 그런 날


말딸) [괴문서] 맨하탄 카페의 그런 날_1.jpg

 

 

 가끔, 그런 날이 있다.



 평소처럼 트레이닝을 마친 후, 맨하탄 카페는 샤워실에서 간단하게 땀을 씻어내곤, 예의 귀찮음 가득한 표정으로 터벅터벅, 아그네스 타키온의 실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딱히 그녀의 실험실에 볼일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다. 그냥, 편하니까. 그곳이 편하니까. 집착과 광기에 물들어 연구 노트를 휘갈기는 아그네스 타키온을 보며, 직접 내린 커피를 홀짝이는 것에서 심신의 안정을 찾으니까.



 물론, 아그네스 타키온 같은 것보다 더욱,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 주는 사람이 그곳에 있으니까. 실험실의 맞은편, 그의 개인 사무실에 있으니까.



 그러니, 평소같이 그 사람을 만끽하며, 트레이닝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커피와 함께 치유할 것이다. 그것이 매일같이 반복되는 맨하탄 카페의, 소중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뭐라고 확신할 수도, 단언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오늘은 평소와 뭔가 다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 뭔가, 가만히 있질 못하겠다.



 맨하탄 카페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차분함, 진중함, 그러면서도 차가운 매력의 우마무스메일 터. 뜨거운 에스프레소 한 잔을 음미하며 그녀가 넘고자 하는 가깝고도 거대한 산, 그것을 부수기 위해 사색에 빠지는, 그런 우마무스메다.



 아그네스 타키온이 그런 맨하탄 카페의 생각을 읽었다면, ‘머릿속에서 트레이너 군이랑 뾰이할 생각만 가득 찬 자네가?’라며―그리곤 맨하탄 카페에게 팔과 다리가 묶인 채로 실험실 문 앞의 테루테루보즈 행이 되겠지만―핀잔을 놓았으리라.



 아무튼, 평상시의 그런 차분한 맨하탄 카페가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몸이 따뜻하다, 움직여야만 할 것 같다, 달아오른다…라고 하면 조금 비슷할 정도로.



 그리고 그것은, 아그네스 타키온의 실험실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강렬하게 그녀의 몸을 지배하려 들고 있었다.



 마치, 맨하탄 카페의 몸이 그녀에게 뭔가를 바라듯이.



 그곳에 있는 무언가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뭔가를 바라듯이.



 원하는 것이 있다고, 귓가에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친구…인가, 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이 친구는 예전에 맨하탄 카페의 담당 트레이너 씨에게 물리적으로 된통 당한 뒤로, 어지간하면 실험실과 사무실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친구’의 목소리라면, 맨하탄 카페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도 없다. 이렇게 맨하탄 카페의 신체에 영향을 끼치려 들지도 않는다.



 즉, 이건 맨하탄 카페 본인의 문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불쾌할 정도로 몸이 간질간질 따뜻해진다. 트레이닝을 할 때도 뭔가 이상하다, 는 것은 느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상태라면 오늘은 아무것도 못 할지도 모른다. 트레이너 씨를 만나기도 조금 어렵겠다,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



 그날인가. 속으로 중얼거린다. 히토미미 여자아이처럼 우마무스메 또한 마법에 걸리는 날이 있기에,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매달 오는 마법의 날을 맨하탄 카페가 모를 리 없다. 아직 주기도 아닐뿐더러 전조도 없었다. 애초에 이런 느낌도 아니다. 다른 의미로 엄청나게 힘드니까, 잘 알고 있다.



 “……으.”



 최근에 조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걸까,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아그네스 타키온이 사고를 치고, 아그네스 타키온이 사고를 치고, 아그네스 타키온이 사고를 쳤다. 그걸 말리고 제어해야 할 트레이너 씨도 같이 사고를 치고…마지막엔 결국 아그네스 타키온을 뜯어말리긴 했지만, 아무튼 맨하탄 카페의 입장에서는 짜증이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평소에도 제법 자주 있는 일이다. 맨하탄 카페에게 스트레스라고 하기엔, 너무 자극이 적다.



 그게 아니라면, 짐작이 가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어쨌든 아그네스 타키온이다. 늦은 밤, 트레이너 씨의 사무실에서 그녀와 트레이너 씨가 서로를 탐하는―라기엔 아그네스 타키온의 일방적인 어리광이었지만―것을 목격해서일까.



 “아니…겠죠.”



 당연히, 그것 또한 평소와 다름없는 일이다. 아그네스 타키온이 본인의 넘쳐흐르는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면, 트레이너 씨에게 가서 매달리는 일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 트레이너 씨가 싫은 기색이 없다곤 하지만, 곤란해하는 것은 틀림없다.



 “…….”



 그렇다면 역시, 짐작 가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



 이 바보 멍청이 둔탱이 겁쟁이 쓰레기 트레이너 씨가 저지른 일. 그를 사이에 두고 아그네스 타키온과 가까스로 서로가 한 걸음 물러나 작은 협정을 맺자마자, 다른 우마무스메를, 그것도 두 명이나 데리고 와버린, 그 머저리 같은 트레이너 씨.



 정글 포켓은 괜찮다. 적어도 아직은 트레이너 씨에 대해 코치 이상의 감정은 없는 것 같으니까.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괜찮다.



 다만, 다른 쪽의 우마무스메가 걱정이다.



 얼굴도 반반한데 청순하고, 의외로 귀티도 나며, 키도 꽤 크고 비율도 좋다. 성격도 사글사글한데다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가슴도 크고 골반도 엉덩이도 여자…아니, 암컷이라고 주장하는 듯이 풍만하다.



 뭐, 몸매야 그럴 수 있다. 비록 맨하탄 카페가 납작하고 평평한 육신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맨하탄 카페는 그런 자신을 사랑한다. 딱히 그 음란한 암소 같은 우마무스메―단츠 플레임―에게 질투하거나 그러지 않는다.



 그런 것보다, 오히려 단츠 플레임이 트레이너 씨에게 너무 달라붙는다는 점이 걱정이다. 아니, 단순히 걱정에서 끝나지 않는다. 스트레스다. 단츠 플레임이 트레이너 씨에게 여우짓을 할 때마다 위가 쓰려올 정도로 부아가 치밀어오른다.



 내가 먼저 입찰한 트레이너 씨, 상위입찰은 하지 말았으면 싶을 정도다. 아그네스 타키온이라면 받아들…이진 못해도 연적으로서 인정할 수 있는데, 단츠 플레임은 아니다.



 고작 3개월도 안 된 주제에 트레이너 씨의 정실이라도 되는 양 그 사람의 옆에 딱 붙어서 다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치밀어오르는 것은 필연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런 순진무구 청순한 얼굴로, 역겨울 정도로 커다란 지방 덩어리를 트레이너 씨의 팔에 밀착하고 슬쩍슬쩍 비비는 꼴이란. 몇 번 보았던 광경을 떠올리니, 몸이 조금은 차분해지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 커다랗고 쓸모없는 지방이 출렁출렁 흔들릴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맨하탄 카페야 그깟 가슴, 있으나 없으나 신경도 안 쓴다지만, 트레이너 씨가…하필이면 트레이너 씨는 큰 쪽을 선호한다.



 아그네스 타키온에겐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겠지만, 맨하탄 카페에겐 치명적이다.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맨하탄 카페가 기죽거나 하진 않는다. 자신에게는 그런 더러운 지방종 같은 것 말고도, 여성으로서의 뛰어난 무기들이 많이 있으니까.



 결국에는, 커피의 맛과 향으로 트레이너 씨를 물들일 자신이 있으니까.



 다만, 맨하탄 카페의 숨결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이, 이 자리에 없는 단츠 플레임 때문은 아닐 것이다.



 “타키온…씨, 있나요.”



 어느새 실험실 앞에 도착해서, 천천히 문을 열어젖힌다. 오늘은 상태가 조금 이상하니, 대충 인사만 하고 기숙사에 가서 쉬든가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그네스 타키온을 찾는다.



 “……?”



 하지만, 실험실 어디를 둘러봐도 아그네스 타키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오오, 카페, 왔는가! 내 회심의 역작을 한번 마셔 보게!’라며 성분도 알 수 없는 물약을 들이댔을 우마무스메인데, 오늘은 실험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아그네스 타키온의 자리에는 그녀의 실험복만이 덩그러니 의자에 걸쳐져 있었고, 실험대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에…….”



 잘못 본 걸까, 눈을 몇 번 끔뻑인 뒤에 다시 그녀의 실험대를 보았지만, 분명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그럴 리 없는데.



 맨하탄 카페가 아는 아그네스 타키온이라면, 청소는커녕 폐수조차 미루고 미루다가 버릴 정도로 모아두는 우마무스메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맨하탄 카페의 머릿속에서는 두 가지의 당연한 결론이 나왔다.



 단순한 부재일 수 있다. 다만, 평소보다 조금, 장기간의 부재. 미국이라도 다녀온다면 자리 정도는 청소하고 갔을 수 있다. 아그네스 타키온이 내팽개치고 가려 했더라도, 트레이너 씨가 조인트를 까서라도 청소를 시켰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결국, 제적…된 건가요.”



 “아니야, 아닐세. 아니라네. 그렇게 섣불리 단정 짓지 말게, 카페.”



 “깜짝 놀랐잖아요…타키온, 씨.”



 하지만 어디에선가 나타난 아그네스 타키온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거짓말하지 말게. 전혀 놀라지 않았으면서.”



 “…….”



 맨하탄 카페의 검은 꼬리가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고, 귀도 평소처럼 쫑긋거리며 우마무스메의 귀임을 주장하고 있었고, 애초에 놀란 사람의 말투조차 아니었으니까.



 “어디 있었던…건가요. 타키온 씨…답지 않게, 청소까지…해 놓고.”



 “오늘은 어쩐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아서 말이네.”



 “타키온 씨답지…않은, 말이네요.”



 “아무리 나라도 청소는 한다네.”



 “트레이너 씨가, 해 주신 건…아니고요?”



 맨하탄 카페의 날카로운 질문에, 아그네스 타키온이 살짝 움찔한다. 하지만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의자에서 그녀의 실험복을 집어 든다.



 “그게, 트레이너 군이 한 소리 해서.”



 “……과연.”



 제아무리 제멋대로인 아그네스 타키온이라 해도, 트레이너 씨 앞에서는 한 마리의 순한 양이 되는 것이다. 물론 어지간한 가사 전반을 트레이너 씨에게 맡겨두긴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트레이너 씨의 말에 힘이 더해지는 것이다.



 트레이너 씨가 진심으로, 아그네스 타키온에게 청소를 지시하면, 그녀는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단순히 좋은 말로 타이르기…따위는 아닐 것이니.



 뭐, 그런 제반 사정 같은 건 맨하탄 카페의 알 바는 아니다. 아그네스 타키온과 트레이너 씨 사이의 일이니까. 맨하탄 카페로서는 속속들이 알 이유도 필요도 없거니와,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트레이너 씨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그네스 타키온과의 사이에서 분명 뭔가 트러블이 있었기에, 그녀에게 청소하라고 잔소리를 했으리라 추측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트레이너 씨의 좋지 않은 기분을, 맨하탄 카페가 구태여 마주할 필요는 없다. 물론 트레이너 씨를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만, 오늘 몸 상태도 이상하거니와, 굳이 기분이 안 좋을 것이 뻔한 트레이너 씨를 자극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 거라면…인사도 했으니 이만, 기숙사로 복귀…해야겠네요, 저는.”



 “음? 아아, 그렇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데…어떤가, 내가 최근에 만든 신약이―”



 “트레이너 씨가…함부로 임상실험, 하지 말라고…하지 않았나요.”



 “에잉…카페, 자네는 너무 고지식해서 탈이야.”



 “트레이너 씨도…저와 같은 생각, 일 텐데요.”



 맨하탄 카페의 작은 도발과도 같은 그 말에, 아그네스 타키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트레이너 군은 말이야, 카페 자네보다 내 쪽에 더 가까운 부류라네. 알잖는가. 트레이너 군의 학구적 공격성은 나보다도 더 강하다는 것을. 그저, 트레이너 군은 나보다 조금 더 책임에 대한 ‘교육’을 받았을 뿐이라네.”



 “그런 책임감이야말로…타키온 씨 보다, 제 쪽에 더 가깝다고…할 수 있는데요.”



 물론 그런 도발에 응수하지 않을 맨하탄 카페가 아니다. 곧바로 눈살을 찌푸리며 아그네스 타키온의 말을 반박한다.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공기가 축축해진다. 홍차와 커피, 두 개의 진한 향기가 실험실에 가득 차오른다.



 “…어디까지나 ‘교육’받은 책임감이라는 뜻이네. 트레이너 군의 본성은 알다시피 거칠고 공격적이지, 마치 내 연구방식처럼.”



 “타키온 씨도…아실 텐데요. 거칠고 공격적인 본성…은, 타키온 씨보다 제 쪽에…가깝다는 것을, 요.”



 “트레이너 군에게 제대로 들이댈 용기도 없는 자네에게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다만.”



 “……하?”



 “아차차, 정곡을 찔렀나? 하기야, 단츠 군이 트레이너 군과 데이트 계획이라도 잡을 동안, 카페 자네는 트레이너 군에게 커피나 내려주는 게 전부, 아니었나?”



 “……타키온, 씨.”



 으르렁대듯, 경고의 의미로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른다. 그만하라고, 더 이상 지껄이면 정말로 화를 낼 거라고.



 하지만 아그네스 타키온은 맨하탄 카페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잇는다.



 “오늘도, 트레이너 군은 안 보고 기숙사로 복귀할 생각이었지?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야.”



 “그건…….”



 “맨하탄 카페.”



 정곡을 찔린 그녀가 뭔가 변명이라도 하려 입을 여는 순간, 드물게도, 아그네스 타키온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읊조린다. 순간, 맨하탄 카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그네스 타키온의 입술이 씰룩이는 것이, 뭔가 더 말을 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고민이 끝난 것인지, 아그네스 타키온은 한숨을 한번 내쉰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트레이너 군의 사무실에, 단츠 군이 있다는 건 알고 있나?”



 “…….”



 “트레이닝 이야기인지, 레이스 이야기인지, 아니면 다른 상담인지 모르겠지만…벌써 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다네. 사무실에서, 단둘이, 한 시간 넘게. 이대로라면 두 시간, 세 시간, 아니면…밤을 넘어갈지도 모르겠군.”



 왜 그런 이야기를 맨하탄 카페에게 하는지, 그 저의를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맨하탄 카페는 순진한 우마무스메가 아니다. 하지만, 아그네스 타키온의 그 꼬임에 넘어가지 않을 수도 없다.



 맨하탄 카페와 아그네스 타키온의 목적이 일치했으니까. 박힌 돌끼리 경쟁하기도 벅찬데, 굴러들어온 돌까지 신경 쓸 수는 없으니까.



 “직접…가지, 그래요.”



 “이런이런, 아무래도 트레이너 군에게 한 소리 들은 게 공교롭게도 한 시간쯤 전이라서.”



 눈치가 보인다네,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 눈을 찡긋, 맨하탄 카페에게 대놓고 신호를 보낸다.



 결국 이 우마무스메가 맨하탄 카페를 도발한 것도, 그녀의 작은 역린을 살살 건드린 것도, 아그네스 타키온 본인이 손을 쓰기 어려우니까 그런 것이다. 그래, 그녀 대신에 물어뜯어 줄, 사냥개가 필요한 것이겠지.



 그렇다면 더더욱, 맨하탄 카페가 그녀의 장단에 어울려 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이렇게 묘한 몸 상태로 트레이너 씨를 마주하게 된다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억제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러느니, 아그네스 타키온의 저질스러운 도발을 모른 척하며 기숙사로 복귀―



 “그리고 자네 또한 나와 동류니까. 내가 아는 맨하탄 카페라면, 곧바로 트레이너 군의 사무실로 달려갈 거라, 그리 믿고 있다네.”



 “……역겹네요, 능구렁이…같아서.”



 “하지만, 정답이겠지.”



 ―할 생각은 당연히 없다. 아그네스 타키온의 말마따나, 그녀의 속내가 훤히 보이는 것 따윈 부차적인 문제다. 이용당하는 것이라 해도 관계없다. 맨하탄 카페로서도 단츠 플레임이 트레이너 씨의 사무실에 단둘이 오래 있는 상황은 절대로, 싫으니까.



 그러니, 맨하탄 카페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천천히 일어난다. 승부복이라도 꺼내 입고 가고 싶었지만, 중앙 트레센의 교복 또한 맵시가 나쁘지 않다.



 “타키온, 씨. 당신 때문은…아니에요.”



 “그럼, 그럼. 물론이지. 자네의 행동은 자네의 자유의지라네. 그리고 카페 자네에게도 기회는 있어야 공평하지 않겠나.”



 “그거참…고맙네요, 정말로.”



 맨하탄 카페의 조소 섞인 빈정거림에, 아그네스 타키온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실험복을 대충 걸쳐 입는다. 그리곤 실험대 위에 있는 라텍스 글러브를 손에 끼운다.



 “아무렴. 나는 이제 해야 할 실험들이 있어서 말이네. 부탁하지, 카페.”



 “…….”



 대꾸하지 않고, 맨하탄 카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실험실 문 쪽으로 걸어간다.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민다. 금속의 차가운 느낌이 그녀의 몸을 살짝 떨도록 만든다.



 “카페.”



 아그네스 타키온이 맨하탄 카페를 부른다. 실험실 밖으로 내민 발을 멈춘다. 아그네스 타키온이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한다.



 “자네는 내 연적이라네. 그러니까, 내가 실망하지 않도록, 전력으로 덤비게.”



 그 진심에, 맨하탄 카페가 해 줄 답은, 하나뿐이었다.



 “후회…하지, 마세요.”



 실험실의 문이 닫혔다.




 *  *  *  *  *  *  *  *  *  *




 트레이너 사무실의 문 앞에서 맨하탄 카페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그네스 타키온이 말했던 대로, 아직 사무실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음탕한 암소의 냄새가 풀풀 풍겨왔다.



 단츠 플레임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그렇게 느껴진다. 음란하고, 천박한, 도둑고양이, 암소. 그 커다란 두 덩어리를 푸릉푸릉 흔들어대며 트레이너 씨를 유혹하려는, 여우 같은 우마무스메.



 사무실 문을 열어젖힌다. 평소처럼 노크, 그런 것 따윈 하지 않는다. 트레이너 씨의 얼굴이 보인다. 소파에 앉아 에헤헤 순진하게 웃고 있는 단츠 플레임의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그 순진무구해 보이는 눈동자 깊은 곳에, 우마무스메의 강한 욕망이 깃들어 있음을, 맨하탄 카페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트레이너 씨는 모르겠지. 트레이너 씨만 모르겠지.



 그러니, 맨하탄 카페가, 트레이너 씨를 지켜야 한다. 단츠 플레임으로부터, 그리고…아그네스 타키온으로부터.



 “트레이너, 씨.”



 “아, 카페구나. 오늘 자율 트레이닝이었지? 문제는 없었어?”



 “잠시, 이야기…괜찮을, 까요.”



 “지금 단츠랑 이야기 중이니까, 한 십여 분 후에 괜찮을까?”



 트레이너 씨의 말에 단츠 플레임이 미안한 듯이 멋쩍게 웃는다. 하지만 그녀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지금부터 맨하탄 카페가, 단츠 플레임이 미안해하지 않도록 할 테니까.



 “지금 바로…이야기를 좀, 하고…싶은데요.”



 “지금은 단츠랑 이야기를―”



 “한 시간도…넘게 이야기, 하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래도 상담이니 마무리는 해야지.”



 정론이다. 맨하탄 카페가 뭐라고 더 할 말은 없다. 얌전히 물러나 십수 분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아니요, 지금 당장, 부탁…드려요.”



 천천히 트레이너 씨에게로 다가가, 그의 책상에 손을 올려놓으며 차분히 그를 응시한다. 트레이너 씨가 살짝 당황한다. 소파에 앉아 있던 단츠 플레임 또한 곤란한 얼굴로 맨하탄 카페와 트레이너 씨를 번갈아 바라본다.



 알고 있다. 본인의 행동이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트레이너 씨가 화를 내신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아니, 오히려 화를 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것 또한, 맨하탄 카페에게 향하는 트레이너 씨의 애정과 관심이기에.



 하지만, 맨하탄 카페의 생각과는 달리, 트레이너 씨는 이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다. 그러더니 미안한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단츠 플레임에게 말한다.



 “미안, 단츠. 다음에 더 이야기하자.”



 “네, 네에…알겠습니다. 그……미안해, 카페 쨩.”



 왜 사과를 하는 걸까. 사과해야 할 쪽은 맨하탄 카페인데. 마음에도 없는 사과일까. 아니면 그냥 착해빠진 것일까. 마음에 안 든다. 굴러온 돌이잖아. 굴러온 돌답게 더 표독하고 비정해지라고. 눈앞에 있는 우마무스메는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적이라고.



 그래서, 단츠 플레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차가울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 던진다.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에헤헤, 그렇지. ……미안.”



 “…….”



 끝까지, 사과하고 나간다. 살짝 두통이 일어나는 느낌이다. 하지만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퍼뜩 제정신을 차린다. 트레이너 씨를 본다. 이번에야말로 화가 나셨겠지. 단츠 플레임을 대하는 태도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악의적이었으니까.



 “맨하탄 카페.”



 역시나.



 단츠 플레임이 문을 나서자마자, 조용히, 차분하게, 맨하탄 카페의 이름을 부른다. 평소처럼 카페, 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풀네임. 트레이너 씨에게 풀네임을 들어보는 것도 제법 오랜만이다.



 너무 심했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트레이너 씨에게 얌전히 혼나기 위해 다시 트레이너 씨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



 예상과는 달리, 능글맞게 웃고 있는 트레이너 씨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이리 와서, 앉으렴.”



 트레이너 씨가 그의 옆에 있던 작은 의자를 끌어와, 맨하탄 카페에게 자리를 만들어 준다. 그러나 평소처럼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는 것이 아니다. 트레이너 씨의 바로 옆, 그의 가장 가까운 자리.



 왜, 평상시와는 다르게, 그의 바로 앞에 앉으라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맨하탄 카페의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얌전히 트레이너 씨의 말에 따라 착석,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트레이너 씨를 올려다본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 안에서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켜버린다.



 그래도, 한마디 하고 싶다. 우유부단하게 망설이기보다는, 에둘러 표현하기보다는, 맨하탄 카페답게 직설적으로, 둔탱이 같은 트레이너 씨가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도록, 조금 더 맨하탄 카페를―



 “요즘에 카페 너한테 조금 소홀했던 거 같아서, 미안해.”



 “아…….”



 ―신경 써 주길 바라요, 그렇게 말하려던 입이 반쯤 벌어진 채로 멈춰버린다. 천천히, 트레이너 씨의 커다란 손이, 맨하탄 카페의 머리에 닿는다. 반사적으로 몸을 살짝 움츠리지만, 이내 트레이너 씨가 쓰다듬는 손길에 머리를 내맡긴다.



 신경 써 주길 바란다, 그 뒤에 뭐라고 말하려 했더라. 트레이너 씨에게 어떤 불만을 토로하려고 했던가. 단츠 플레임? 정글 포켓?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씨와 우마…뾰이? 레이스? 친구? 서로의 미래? 아이의 이름?



 아무것도,



 그 어떠한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트레이너 씨의 따스하고 안심되는 부드러운 손길이, 맨하탄 카페의 칠흑보다 더 검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는 것이, 뭔가…뭔가 트레이너 씨에게 보호받으면서도 범해지는 것 같아서―



 “트레이너, 씨…….”



 평소와 다른, 오늘의 이 기분이, 맨하탄 카페에게 속삭이듯 유혹하는 이 몸의 간질간질하면서 따스한 느낌의 이유를, 맨하탄 카페는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 단순한 것이었다. 그저, 트레이너 씨를 보고 싶었을 뿐이다. 트레이너 씨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맨하탄 카페에게 향하는 트레이너 씨의 시선, 관심, 손짓, 행동, 그런 것들…그런 모든 것들을 원하는 기분.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육욕이 없냐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만큼은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폭신폭신 둥실둥실 떠오르는 기분. 자연스레 트레이너 씨의 손길을 따라, 그의 품속으로 천천히 파고든다.



 “카페?”



 “왜 화를…내지 않으시나요.”



 맨하탄 카페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타키온이 이렇게 행동했다면 아마 화를 냈겠지. 아그네스 타키온을 단츠 플레임보다 소홀히 대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러면 저는, 소홀히 대했다고…생각, 하시는 건가요.”



 “실제로 최근에 많이 못 챙겨주기도 했고. 오늘도 자율 트레이닝이었고.”



 그래서 맨하탄 카페에게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다고 자백하는 것이다. 평소의 맨하탄 카페라면 그걸 또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트레이너 씨에게 살짝 토라져, 트레이너 씨의 커피에 설탕을 압수했겠지만…오늘은 그런 기분이 아니니까.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그런 자잘한 것쯤은 날려버릴 수 있는 기분이니까. 아그네스 타키온이라면 그 붉고 질척이는 독점력이 발동했을 법한 일이지만, 맨하탄 카페는 아그네스 타키온이 아니니까.



 트레이너 씨를 받아들이고, 트레이너 씨를 이해하는, 그런 야마토 나데시코인 우마무스메, 이니까.



 “……그렇게 미안하시다면, 조금…이대로, 계속 손을 움직여…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트레이너 씨가 쓰다듬기 쉽도록 그의 허벅지 위에 살포시 앉는다. 그리곤 상체에 힘을 쭉 빼며, 자연스레 트레이너 씨의 가슴팍에 등과 머리를 기댄다.



 트레이너 씨의 손이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포기라도 하셨는지, 다시금 천천히 맨하탄 카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진다. 눈이 스르르 감긴다. 하지만, 트레이너 씨에게 한 마디, 해야 할 말이 있다.



 “머리만…쓰다듬으시나요?”



 “그래그래. 맨하탄 카페가, 오늘따라 왜 이럴까.”



 쓴웃음을 짓는 트레이너 씨의 얼굴이,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트레이너 씨의 다부진 손이, 맨하탄 카페의 머리를 지나 우마미미로, 뺨으로, 목덜미로, 턱으로…고양이의 턱을 다루듯 맨하탄 카페의 턱을 톡톡 쓰다듬는다.



 이대로 트레이너 씨가 가슴으로, 허리로, 배로, 엉덩이로, 허벅지와 다리, 무릎, 발까지. 온몸을 쓰다듬어 주신다면 좋겠지만…거기까지 바라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만족하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충분할 만큼 만족스럽다.



 창밖에서 햇살이 맨하탄 카페의 뺨을 간질인다. 트레이너 씨의 따스한 손길이 턱을 살살 긁어준다. 맨하탄 카페의 칠흑빛 꼬리가, 트레이너 씨의 다리를 살그머니 감싸 안는다.



 하늘은 높고 우마무스메는 잠드는, 중앙 트레센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  *  *  *  *  *  *  *  *  *




 한 시간 뒤, 트레이너 씨는 ‘어떻게 이런 분위기에서 손을 안 대느냐’, 라는 말과 함께 우마뾰이 사냥개의 본성을 드러내는 맨하탄 카페에게 힘으로 짓눌릴 뻔했지만, 예상이라도 한 듯이 사무실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온 아그네스 타키온에 의해 제지, 뺨을 퉁퉁하게 부풀린 채로 아그네스 타키온의 실험실 청소를 돕게 되었다.



 그리고 아그네스 타키온에게 볼멘소리로 전력으로 덤비라고 했으면서 왜 방해하느냐, 라고 투덜거린 맨하탄 카페는, ‘나도 전력을 다할 거다만’이라는 아그네스 타키온의 말에 한 달 정도 그녀의 홍차에 차가운 물을 타기로 마음먹었다.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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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마장(아님) 순애(아님)

댓글
  • KaidoHKS 2025/11/01 01:01

    이제 포켓까지 뛰어들면......!

    (IiNA9a)

(IiNA9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