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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마술 공연장에서의 이야기

 -마술사의 이야기

안타깝지만, 이번 공연이 내 인생의 마지막 공연이다. 

평생 마술사로 이름을 날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야 겨우 공식적인 첫 공연을 열게 되었는데... 내가 암이라고? 시한부 인생이라고?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내 이름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오늘, 내 이름을 전 세계에 남길 것이다. 나의 시그니처 마술인 인체절단 마술로.
오늘 내가 특별히 준비한 거대한 '작두'는 페이크가 아니다. 나는 오늘, 무대 위에서 실제로 사람을 죽일 것이다.
오늘 이후 내 이름은 영원히 남겠지. 무대 위에서 마술로 관객을 죽인 최초의 마술사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겠지. 

아! 모든 무대 세팅이 끝났다. 기대에 찬 관객들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 미소를 띠고, 관객들을 둘러보자. 누구? 누구를?
그래, 저기 하얀 원피스. 앞자리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좋겠다. 그녀로 하자.

" 거기 계신 여성분, 무대 위로 올라와 주시겠습니까?  "


 -남편의 이야기

이 여자와 결혼한 것이, 내 인생 최악의 실수였다.

얼굴만 보고 결혼하지 말라던 부모님 말씀을 들었어야 했다.
도대체 내가 왜 경제권을 너에게 맡겼을까? 머저리! 병신! 돌아이! 
너는 지금, 우리가 이런 공연을 보러 오는 것조차 얼마나 사치인지 알고 있을까?
너의 허영심, 욕심, 질투, 모든 것이 다 증오스럽다. 너 때문에 난 파산까지 했는데, 넌 오늘도 명품 원피스를 입고 나왔구나.
내일이면 집까지 넘어갈 텐데, 그때도 네가 과연 내 옆에 있을까? 빈털터리인 내 곁에 있으려고 할까?

어림없는 소리! 아마 너의 그 잘난 어린 남자친구 곁으로 가겠지! 쌍년!

그럴 수만 있다면, 너를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고 싶다. 아이만 아니었어도, 백번 천번이고 그렇게 했을 텐데..
제발 누가 나 대신 너를 죽여줬으면 좋겠다. 너를 내 눈앞에서 갈가리 찢어 죽여줬으면!

얼씨구? 이제는 무대 위까지 올라가려고? 그렇게 사람들한테 주목받는 걸 좋아하더니, 아주 신나서 올라가는구나!

하아... 마술처럼 네가 정말로 토막이 나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제발, 그런 기적이 일어났으면...!


 -기자의 이야기

그놈의 특종! 특종! 정말 지긋지긋하다!

누구는 특종을 잡고 싶지 않아서 못 잡나? 특종이 없는 걸 어쩌란 말이야!
빌어먹을! 이제는 후배들까지 나를 무시하고! 
뭐? 나는 그냥 키보드만 대신 쳐주는 매크로라고? 알파고 기술이 발달하면 제일 먼저 잘릴 기자라고?

니들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내가 기삿거리 하나라도 잡으려고 새벽부터 밤까지 얼마나 뛰어다니는지 알아?! 그래도 특종이 안 생기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빌어먹을! 시간이라도 좀 주던가! 나도 특종 기삿거리가 나오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이런 마술 공연장 후기 따위나 쓰려고 기자가 된 게 아니라고! 

제발 특종 하나만 있었으면! 개무시하는 것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그런 특종 하나만 있었으면!

아~ 하늘에서 특종 같은 거 안 떨어지나? 지금 당장 내 눈앞에, 그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으면...!


 -초대가수의 이야기

나는 이제 끝장이다.

한 번쯤 무대 위에 서보고 싶다는 욕심을 부린 것이 실수였다. 늘 하던 대로 음원장사나 해 먹었어야 했다. 
나는 정말로 지독한 음치다. 음색? 고음? 가창력?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그동안 나온 내 음원들은 모두, 컴퓨터가 부른 곡이었다.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음원 깡패니, 차세대 3대 보컬이니 뭐니 떠들어댔지만... 내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내 음악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두렵다. 이제 저 마술이 끝나고 나면, 내 정체가 온 세상에 까발려질 것이다. 

아! 도대체 내가 왜 행사를 잡았을까? 10분 전에 갑자기 립싱크가 안 된다는 건 또 뭔가?
정말 미쳐버리겠다. 팬클럽은 또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플래카드를 흔들고 난리냐. 난 니들이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제발 이 공연이 멈춰졌으면 좋겠다. 이 순간 지구가 멸망해도 좋으니, 제발 이 공연이 당장 멈춰졌으면!

누군가 제발, 기적처럼 나를 구원해주었으면...!


 -예술가의 이야기

이 지독한 슬럼프의 끝이 존재하기는 할까?

너무 큰 상을 받으며 데뷔한 게 화근이었다. 나는 그 상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나 보다. 첫 작품 이후, 벌써 3년째 제대로 된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혹시, 원래 재능 같은 건 아예 없었던 게 아닐까? 우연히 운으로 한번 상을 탔을 뿐인 게 아닐까?
나는 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을까? 나는 왜 예술로 내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을 거란 착각을 했을까? 나는 이대로, 데뷔작 하나로 끝난 사람으로 사라지게 되는 걸까? 나는 정말 재능 따위는 없는 걸까??

...아니야. 나쁜 생각은 지금 내게 필요한 게 아니다. 나를 좀먹는 생각들을 버려야 한다.
나는 분명, 재능이 있을 거다. 재능이 있으니까 상을 탔고, 재능이 있으니까 이 길을 걷고 있는 거다. 지금은 단지 슬럼프를 겪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단 하나의 영감일 뿐이다. 단 하나의 영감만 있으면, 나는 언제라도 내 차기작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마술 공연이라도 보면 무언가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시시할 뿐이었다.

아!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내 영감을 자극해줬으면 좋겠다. 짜릿한, 평생 잊지 못할 그런 사건을 이 두 눈에 담고 싶다.

제발, 내 영감을 자극하는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생겼으면...!


 -몇몇 관객들의 이야기

마술쇼라고 기대하고 왔더니, 이게 뭐야?
너무 뻔하다. 이런 걸 봤다고 올려봤자 SNS 팔로워 수를 늘릴 수도 없겠네.

아~ 제발 저 인체 절단 마술만큼은 내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쇼킹한 마술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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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아름다운 여성분, 이 상자에 누워주시면 됩니다. "

마술사는 웃으며 여인을 커다란 상자로 안내했다. 하얀 원피스의 여인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이 좋은지, 상기된 얼굴로 상자로 걸어가 누웠다.
'끼이익' 마술사의 손으로 상자 문이 닫히고, 여인의 얼굴만이 작은 창으로 노출되어 웃었다.

" 자~ 여러분! 지금부터 제가 이 여인을 이 작두로 두 동강 내보겠습니다! 이번엔 정말 거짓이 아니랍니다? '진짜'입니다. "

마술사는 관객들을 둘러보며 커다란 작두를 꺼내 들었고, 그 날카로운 칼날을 본 사람들은 '오와~' 웅성거리며 기대에 찬 눈빛들을 모았다. 
누구도 저 칼날이 여인을 절단 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어떤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 자~ 그럼! 자릅니다! 이 순간을 절대 놓치지 마세요! "

마술사는 작두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 무서운 모습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표정에는 즐거움이 있었다.

" 그럼 이제... "

작두를 높이 치켜든 마술사의 손이 살짝, 떨렸다. 모두가 숨죽이는 가운데, 쉽사리 내려치지 못하는 마술사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 후우... "

마술사의 눈이 상자 밖으로 드러난 여인의 눈과 마주쳤다. 상기된 얼굴로 기대하고 있는 여인의 얼굴.

" ... "

떨리는 얼굴의 마술사는 곧 이를 악물고-!

' 쾅! '

" 꺄아악-! "

커다란 작두가 큰 소리를 내며 내리쳐졌다! 
비명을 지르는 몇몇 사람들! 한데, 곧 그들의 얼굴이 의아하게 갸우뚱했다.
작두는 세로로 회전하여, 상자 옆의 테이블에 내리쳐져 있었다.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작두를 짚고 멈춰있던 마술사는, 표정을 활짝 반전해서 관객들을 향했다.

" 아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여러분! 메인 마술에 들어가기에 앞서, 준비된 공연 먼저 보시죠! 소개합니다! 초대가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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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이야기

" 그래, 이 세상에 기적 같은 건 없지... "
" 나한테 기적 같은 사건이 벌어질 리가 있나... "
" 나를 구원해줄 기적 같은 건, 이 세상에 없어... "
" 역시, 내 영감을 자극할 기적은 없을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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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이야기

이게 뭐야? 아무 일도 없잖아?
사건이 있어야 이야기가 되지!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니, 정말로 재미가 없군!
댓글
  • 복날은간다 2016/12/16 23:30

    그... 원래 이런 결말 없는 스타일 안 좋아하시는 건 알지만... 쉬어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시길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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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마인 2016/12/16 23:39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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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cary 2016/12/16 23:42

    작두가 빗겨나 저 사람들의 인간다움을 지켜줬네요. 기적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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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죠르노_죠바나 2016/12/17 00:22

    시한부로 곧 죽게 될 마술사...
    그래! 마술사 이름이 김남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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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탐루 2016/12/17 01:23

    엄청기대했는데!!!!
    결말이 진짜 제 머리를 한방치네요 ㅎ
    자극에 중독되었나봐요
    오늘작품도 참 좋네요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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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쟈니♥ 2016/12/17 01:50

    복날님의 글들이 개인적으로 느낌이 다양해서 너무 좋은것같아요 제가느끼기에는 한결같지 않은느낌이어서 신선하다고 해야하나 제목 클릭할때 오늘은 어떤글일까?하고 기대되서 기분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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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irrus 2016/12/17 02:25

    이게 뭐야? 김남우가 안 죽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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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날은간다 2016/12/17 02:37

    아 이런 마음이 찜찜하네요; 혹시나 해서 다른 버전의 결말도 한번...
    마술사는 굳은 얼굴로 작두를 높이 치켜올렸다.
    " 지금, 두 동강 내겠습니다! 모두 이 순간을 절대로 놓치지 마시길! "
    ' 합! ' 기합소리와 함께 있는 힘껏 작두를 내리치는 마술사!
    ' 쾅! '
    " 꺄아악-! "
    거대한 작두가 내리쳐지며, 상자를 반토막 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저게 가능한가? 아무리 마술이라지만 저렇게 사람을 동강 잘라버리는 게 가능하다고?!
    순간, 여인의 남편. 기자, 초대가수, 예술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혹시...?!
    한데 이순간, 그보다 더 놀란 사람이 있었다. 마술사였다.
    " 왜... 왜...왜 피가..왜...? 파란...? "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상자 안에서 웃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보는 마술사.
    여인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생글생글 웃다가, 아뿔사? 점점 표정이 굳어갔다-. . .
    .
    .
    .
    - 여인의 이야기
    정말, 오랜 시간이었다. 이제 더는 이 지긋지긋한 '인간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
    드디어 지구인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판단 결과는 100% 박멸!
    오늘 밤, 내가 수집한 인간들에 대한 정보가 우리 별로 보내지고나면, 지구인들은 모두 파멸을 맞이하리라!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너희 인간들의 미래는 멸망 뿐이다. 정말로,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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