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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과 우금치 그리고 그곳에 남은 유신의 향기

 
 
 
 
 
지난 7월 7일 방영된 알...6- 공주편에서 유시민 작가가 했던 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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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은 박정희 정부 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에서 소외되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동학농민운동-혹자는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전쟁이라 부르는, 한국 근현대사의 대사건은 그동안 대중들에게서 잊혀져가던 사건일 뿐이었습니다또한 그동안 군부독재하에서 이 운동은 그리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으로 보면 유시민작가의 말은 틀립니다.
 
 
 
왜냐하면 박정희정권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사람들에게 잊혀졌었던, 역사 속에 파묻혀 있던, 동학농민운동을 양지로 발굴해 낸 1등공신이기도 하거든요아이러니하게도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말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던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정권도 박정희 정권입니다.
 
1026일부터 1111일까지 공주에서 치러졌던 우금치 전투 123주년을 맞아 한번 이에 대한 글을 써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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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현재 공주 우금치 전적의 사진입니다혹자는 우금티, 우금치 고개, 우금고개라 부르는 이곳의 정식명칭은 '사적 제387호 공주 우금치 전적'입니다.
 
현재 우금치에는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전투 당시에는 아주 험준한 고개였고 공주시내로 넘어가는 길목이자 더 나아가 남도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지만 2000년 우금티터널 공사 이후 당시의 지형보다 대폭 낮아져 지금은 부여와 공주를 넘나드는 길목이 되었을 뿐입니다.
 
알쓸신잡에 잠시 모습을 비췄던 그 광활한 들판은 바로 우금티터널 위 들판입니다당시 지형훼손을 최소한으로 하기위해 터널을 공사한 뒤 흙을 다시 덮는 형식으로 공사가 진행되었고 원형보다 10M가량 낮아졌지만 어쨋던 능선의 연결은 어찌어찌 지켜냈습니다.
 
 
이 들판을 가로지르다 보면, 공주쪽 길목에 시멘트로 지어진 황량한 위령탑이 하나 서있습니다.
 
 
바로 1973년 지어진 "동학혁명군위령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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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금치를 방문하는 많은 이들이 이 위령탑앞에 서서 123년전 우금치에서 수없이 스러져 갔던 동학농민군의 영령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이 탑은 그 나이에 걸맞게 세월의 풍파를 맞아 곳곳이 균열이 가있고 벽체가 떨어지고 색이 바랬습니다마치 우금치의 역사를 처음부터 함께 한 마냥 서있습니다.
 
하지만, 이 탑에는 불편하디 불편한 역사가 하나 숨어있습니다. 이 부분이 제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네요.
 
 
 
바로 이 탑은 박정희정권에 의해 지어진 탑이란 사실입니다. 서두에서 말했던 "유시민작가의 말이 틀렸다"라는 말은 이 점에 근거합니다왜냐, 박정희 정권은 동학농민운동을 매우 신경썼기 때문이죠.
 
앞에서 잠시 언급하고 넘어갔던 "동학농민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는 매우 많다"라는 점을 다시 한번 본다면, "동학혁명"이라는 용어가 과연 어디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이 들 수 있습니다.
 
불편하게도 동학혁명이란 용어는(동학농민혁명이 아닙니다-이 점은 뒤에서 설명드립니다) 박정희정권에 의해 널리 퍼뜨려지고 사용됩니다. (혁명이라는 지칭은 사실 천도교계에서 제일 먼저 사용한 용어입니다.)  어째서 박정희 정권은 동학농민운동을 그렇게 기념했을까요?
 
이 시기 1973-.  그동안 그냥 방치되었던 우금치에도 뭔가 변화가 생깁니다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한 지 어언 팔십여년만에 위령탑이 들어서게 된 것이죠.
 
그 위령탑이 바로 지금 우금치에 홀로 서있는 동학혁명군위령탑입니다.  
 
혹시나 위령탑을 보신 분이 있으시다면또한 눈썰미가 좋은 분이 있으시다면 이 위령탑에는 한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위령탑의 전면하단과 후면하단의 흑석에 새겨진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는 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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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을 두고 우금치에 다녀간 여행자들은 이따금씩 블로그에 전적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며 탄식의 글을 남기곤 합니다. 그런 글을 이제까지 수십여건 봤습니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왜 훼손되었는가에 대해 알 수도 있지 않을까요? 비문을 좀 더 자세히 바라보면 뭔가 특징을 잡아 낼 수 있습니다
 
훼손은 어떤 단어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유신", "박정희", "각하"등이죠네 맞습니다박정희정권은 동학농민운동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1973년당시 유신헌법아래 독재정권을 이어가던 박정희정권은 동학농민운동을 이용했습니다
 
여기서 비문의 내용을 한번 읽어보자면,
  
 
... (중략)... 그러나 님들이 가진지 80. 5.16 혁명(훼손됨)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이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시월 유신(훼손됨)의 한 돐을 보내게 된만큼 우리 모두가 피어린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이 탑을 세우노니 오가는 천만대의 후손들이여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   서기 1973.11.11 제자 대통령 박정희(훼손됨)...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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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사진입니다. 화질이 안좋네요. 죄송합니다. )
 
이 훼손은 1985 시퍼런 군부독재하의 암울한 시기속에 이뤄집니다. 바로 "충남민주운동연합"이라는 단체에 소속되었던 대학생들이 벌인 일입니다. 당시 이들은 이 훼손을 기념하며 사진도 찍었고 그 사진은 바로 이겁니다. ('공주와 동학농민혁명-정선원·박맹수 '에서 발췌) 일설에 의하면 그들은 당시 이 훼손을 하며 수감될 위험성을 감수했다고 합니다. 그 용감성에 잠시 경의를 표합니다.
 
 
 
박정희정권은 당시 유신헌법 개정을 통해 역사적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이 잊혀졌던 동학농민운동-혁명-이었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다분히 불순했고 동학농민군이 희망했던 그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요.
 
그전까지 학계에서 아주 미미하게 다뤄졌던 동학농민운동은 이때 바로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폭발적으로 다뤄집니다. 바로 이렇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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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따로 작성한 과제용 레포트에서 따왔습니다. 보시면 위령탑이 건설된 71~75년경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논문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이후 서서히 관련 논문수가 증가하는데, 이는 우리나라 학술여건이 좋아짐에 따른 것입니다. 94년도의 경우에도 폭발적으로 그 수가 증가하는데, 이는 그때가 동학농민운동 100주년이라서 그렇습니다.) 
 
 
물론 많은 학자들이 논저에서 입을 맞춘듯이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박정희정권이 탑을 세우기 전까지 동학농민운동을 지칭하던 용어는 대부분 "동비(東匪)의 난()", "동학란"이었다는 점은 씁쓸함을 남깁니다.
 
우금치의 정신은 훼손되었습니다. 그 높다란 "위령탑"에 의해 우금치는 유신헌법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사적 하나정도로 추락해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이때의 "동학혁명"이란 용어의 등장은, 그리고 우금치에 세워졌던 그 위령탑은 오히려 우리 사회가 동학농민운동에 주목하게 되는 아이러니함을 낳았습니다
 
그 후 우리는 동학농민운동을 "동학교도들이 일으킨 반란"이 아닌, 평등사회 실천을 꿈꾸던 이들의 "숭고한 혁명"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훌륭한 민주정권을 달성한 현재는 이제 유신정권은 공개적으로 비판받고, 그 때의 말과 사상들은 대중적으로 수용되지 않습니다. (태극기 흔드시는 분들은 제외하구요.)
 
우금치를 이용하려 했던 자들은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그 시도는 우리가 우금치를 알게된 중요한 변혁점이 되었죠.
 
하지만
 
우금치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위령탑을 보며 이 탑에 역사의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저 또한 처음 이 탑을 보았을 땐 그저 슬픔만을 느꼈을 뿐이었으니까요.
 
어떻게”, “누가에 대한 질문은 이제 시간의 흐름앞에서 씻겨졌습니다. 건립당시 온갖 불순한 의도로 점철되었던 그 시멘트덩어리는 이제 그저 수많은 영령을 위로하는 곳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설령 그들의 의도는 잊혀지고 실패했더라도, 탑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
내가 이제까지 진리라고 믿던 그 해석이 어쩌면 다른 의도로 시작된 해석일지 모른다는 것.
 
우리가 그저 비판없이 역사를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동조자가 되어버립니다.
 
 
저는 그러한 동조자로 역사에 남고 싶지 않기에 이렇게 글을 써봅니다.
 
다행히도 저는 수많은 민주화투사들의 노력덕에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러한 왜곡과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러한 노력이 없었더라면, 혹은 제가 그 해석을 제일 먼저 맞닥뜨렸다면 저는 과연 이렇게 그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이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모르죠. 동학농민운동을 동학혁명이라 부르며 그것을 부를 때마다 다른 한편으로 유신의 혁명정신
댓글
  • 대기업씨이오 2017/11/03 01:48

    베오베까지 갈 글입니다.

    (JiYGI2)

  • 난누구냐? 2017/11/03 20:02

    이런글은 그냥 추천

    (JiYGI2)

  • 죽이는비율 2017/11/03 20:09

    좋은 연구네요. 하지만, 삽입된 통계표는 해당 주제를 다룬 논문이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보기 보다는 저정도 기간이면 사실 다른 모든 논문도 늘었났을
    기간이라고 추측되네요. (게다가 년도상으로 봤을때 문민정부 하에서 가장 발표연구량이 많은거 같구요.)
    보수정권에서 역사 교육적 측면에서 중세시대의 동학혁명과 같은 민주주의적, 민족주의적 운동을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지금 나온 교과서들 출판사별로 비교해봐도 아는 사실)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독재자 혹은 근대 지배계층들 (친일파들)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상징하는 처절한 사건들을 학교에서 교육할리가 없죠.
    제 생각에도 군사시절 당시까지는 동학혁명에 관한 내용이 교육과정에 문민정부 이후의 지금처럼 많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JiYGI2)

  • 인생귀찮다... 2017/11/03 20:30

    자세히는 모르지만 박정희가 처음 남로당에서 활동한 것과 관련해 박정희의 조부가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다는 가족사가 얼핏 언급된 기억이 납니다.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을 신경쓴 것 등등 박정희 가정사와 좌익시절을 들여다 볼 필요도 있을 듯 합니다.
    배경이야 어쨌든 동학농민혁명을 유신을 정당화하고 516쿠데타 미화에 쓴 것 나쁜짓입니다.

    (JiYGI2)

  • 토마스반 2017/11/03 20:45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JiYGI2)

  • 애슐리안나 2017/11/03 21:56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JiYGI2)

  • 야쏘 2017/11/03 22:03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JiYGI2)

  • 나의이스마엘 2017/11/03 22:11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기독교의 주기도문에 해당하는 주문으로 이 주문을 군가처럼 부르며 전투하였다고 하죠.
    짧고 빠르게 읊으면 군가같고,
    느리게 부르면 무척 슬픈 가락이 됩니다.

    (JiYGI2)

(JiYGI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