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천국 코하비닷컴
https://cohabe.com/sisa/415343

후기유시민의 주례사(+사진)

주말에 후배 결혼식에 다녀왔었는데요. 주례가 무려 유시민 선생이었습니다. 후배가 정의당 의원보좌관 일을 했었고, 신부도 정의당 당직자인지라, 그 인연으로 주례로 모신 듯 하더군요. 그래서 일요일 오전 서울(저는 지방러;;)이라는 영 좋지 않은 시간과 장소였음에도, 설레는 마음으로 다녀왔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부조금 내고 신랑 또는 신부에게 인사하고 바로 밥먹으러 갔을텐데요. 오직 주례사를 듣기 위해 와이프와 함께 앞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그러고보니 결혼식 가서 주례사 다 들어본 게 거의 몇 년만인듯 합니다)  기대대로 쉽고 명징한 문장으로 구성된 주례사였는데, 그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불펜에도 올려볼까 합니다.


"두 사람 오래 준비해왔고, 또 서로 잘 아는 부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먼저 혼인 생활을 했던 사람으로서 몇 가지 팁을 드릴까 합니다.

 

첫 번째는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 노회찬 의원님 어록인데요. 혼인 생활을 가리켜서, ‘차이를 다루는 예술이다’ 이렇게 늘 말씀하십니다. 제가 약간 보충할께요. ‘혼인 생활은 차이와 더불어 변화를 다루는 예술이다’. 서로 잘 알고 사랑해서 부부가 되었지만, 함께 잠들고 또 아침에 함께 눈 뜨고 하다보면 연애할 때는 안 보이던 것을 보게 될 수 있습니다. 또 살다보면 그 전에 없던 게 생길 수도 있고, 바뀌기도 합니다. 그럴 때 좋은 점만 보고 사랑하는데, 그건 누구나 다 하는 겁니다. 부부는 안 그런 것 까지도 개성으로 인정하고, 감싸 안고, 포용하고, 변해가는 모습까지도 받아들여주고, 그러니까 부부죠. 좋은 거 좋아해주고 안 좋은 거 싫어하는 건 그냥 남들끼리 사는 거죠. 이런 차이와 변화에 대해서, 그걸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구요. 그것까지도 껴안아 주십시오.

 

두 번째는 오늘처럼 몸과 마음이 다 매력 있는 연인이 될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부부가 된 후에도 사랑을 표현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해요. 연애할 때는 뭐 이벤트도 하고, 잘해보려고 하다가, 부부가 되고 나면 내 사람, 혼인 신고하면 지가 어디 가겠어?, 말 안 해도 내 마음 알지?, 이거 안 돼요.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안 보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표현하지 않으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는 생물학적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는 가족입니다. 늘 사랑을 확인해야 해요. 남편은 되도록 멋진 남자여야 되고요, 아내는 매력 있는 여자여야 해요. 살다보면 친숙해지는데, 친숙함도 좋지만, 사랑이 있던 자리를 친숙함에게 뺏기면 안 돼요. 그래서 결혼생활은 끊임없는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친숙함과의 투쟁. 두 사람이 서로 언젠지는 모르지만, 호감의 눈빛을 처음으로 맞추었던 순간, 그리고 그런 것들을 서로 알게 했던 순간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거 없이는 오늘 이 자리가 없으니까요. 그 때를 잊지 말고 늘 그런 눈빛, 그런 마음, 그런 감정을 매일 매일 들게 할 수 있도록 서로에게 멋진 연인으로 남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되게 고리타분한 주례사의 주제인데요, 역지사지.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는 겁니다. 살다보면 다투는 날이 오게 돼요. 안 오면 제일 좋지만, 올 수도 있죠. 또는 오게 됩니다. 그럴 때, 그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는 시간을 꼭 가지기 바랍니다. 바꿔놓고 생각하면, “왜 저러지?”하던 것이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이렇게 될 수 있어요. “뭐 그럴 수도 있겠네.”하고 한번 생각하고 대화를 하면, 훨씬 부드러워지죠. 그래서 무슨 문제가 있을 때는 대화를 해야 하는데, 곧바로 대화를 시작하지 말고 한번 입장을 바꿔서, 아내의 입장에서, 남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본 다음에 대화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싸울 일도 줄어들고요. 싸움이 열정으로 가지 않겠고요. 빨리 끝날 수 있습니다. 나 이거 잘 해서 쫓겨나지 않고, 30년째 남편으로서 잘 살고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일차적으로는 신랑과 신부에게 하시는 말씀이셨지만, 결혼 3년차인 저희 부부에게도 느끼게 하는 바가 많은 이야기더군요. 저와 와이프 모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들었습니다. 담론을 다루는 지식인의 모습에만 익숙해있다가,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모습이 새로우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유시민 선생이야 저를 전혀 모르겠지만, 제게 그는 애증이 교차하는 복잡다단한 존재인 듯합니다. 대학 시절 그 유려한 필력에 반해 팬이 되었다가(초창기 팬클럽 시민광장에도 가입했었;;), 직업정치인이 된 이후에는 지지보다는 비판적인 생각이 들 때가 훨씬 더 많았었지만, 글쟁이로 돌아온 지금은 그래도 우리 현실에서 이만한 지식인이 또 어딨겠나 싶거든요. 그래서인지 유시민의 주례사는 여러 모로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글에 빼놓을 수 없는 인증 사진 첨부합니다. 첫번째 사진은 주례하시는 모습을 직접 찍은 것이고요.(신랑 신부가 일반인이지만, 얼굴은 안 나왔으니 상관없겠죠?;;) 두번째 사진은 주례하러 올라가시기 전에 책에 사인받은 것입니다.(근데 당황하셨는지 날짜를 잘못 쓰심ㅋㅋ) 어떤 책을 들고 갈지 결혼식 며칠 전부터 고민했었는데요. 원래 제가 가진 유시민 저서 중 가장 오래된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1988년 초판본을 가져갈까 하다가, 어이없어 하실까봐 '어떻게 살 것인가'로 바꿨습니다. 유시민 선생의 최근작 중 가장 좋아하는 책이기도 하고요. 주례사도 그렇고 친필 사인도 그렇고, 뭔가 귀한 걸 득템한 듯한 기분좋은 하루였습니다ㅎㅎ





댓글
  • 놔드리겠쑤 2017/11/01 02:02

    저런 주례사라면 오래 들어줄 용의가 있네요..

    (Vmt9zS)

  • 하하ㅋ 2017/11/01 02:11

    좋네요^^

    (Vmt9zS)

  • sfactory 2017/11/01 02:33

    올초에 제가 받은 사인은 생각은 힘이 세다 였는데 바뀌었네요.

    (Vmt9zS)

  • 트윈스키드 2017/11/01 02:38

    //sfactory 님,
    그런가요?ㅎㅎ 음 혹시 책에 따라 써주시는 문구도 다른 게 아닐까요? 제가 사인해주십사 부탁한 책이 '어떻게 살 것인가'여서, 그 주제의식에 맞게 저렇게 '자기답게 행복하게'라고 써주신 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왠지 sfactory님이 사인받은 책은 표현의 기술이나 글쓰기 특강이 아니었을까 싶네요ㅎㅎ

    (Vmt9zS)

  • 아이언리거 2017/11/01 03:17

    주례사가 유시민이면 10시간이라도 듣고 싶네요. 부럽습니다.

    (Vmt9zS)

  • 트윈스키드 2017/11/01 03:33

    [리플수정]//아이언리거 님,
    맞습니다. 주례사가 끝나는 게 아쉬웠던 것은 난생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어요ㅎㅎㅎ 주례사 마치고 바로 가실 줄 알았더니, 뷔페에서 하객들이랑 같이 식사도 하시더군요. 솔직히 그닥 맛없는 뷔페 음식이었는데(;;) 접시에 수북이 담아서 맛있게 드시는 모습도 소탈해보였습니다ㅎㅎ

    (Vmt9zS)

  • 2인용소파 2017/11/01 04:15

    조용히 추천..

    (Vmt9zS)

  • 나는나대로 2017/11/01 05:40

    결혼 10년차인 저도 끄덕끄덕하며 읽게 되는 글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Vmt9zS)

  • 4Justice 2017/11/01 08:03

    아.....진정한 주례사네요. 이전 결혼식에서는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조회사 만큼이나 몸이 뒤틀어지게 하는 분들이 많은데 쉽고 간결하지만 의미있는 내용으로 해주시네요. 아무튼 얼굴 모르는 분들이지만 주례사대로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네요.

    (Vmt9zS)

  • 박해일 2017/11/01 08:26

    쉬우면서도 핵심만 담고있는 주례사네요! 글쓴분도 지식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 같네요. 글이 정갈하면서도 정리를 잘 해 주셨네요. 책을 좋아하시나봐요.잘 읽었습니다

    (Vmt9zS)

  • 해탈의경지 2017/11/01 09:01

    남의 결혼 참석 후기에 관심가기는 처음이네요 ^^
    잘 정리된 글 잘 보았습니다. 글정리 참 잘하시네요..

    (Vmt9zS)

  • 토이 2017/11/01 09:25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부럽구요 ~

    (Vmt9zS)

  • 술취한조던 2017/11/01 10:02

    와 부럽네요.

    (Vmt9zS)

  • zardspitz 2017/11/01 10:07

    잘봤습니다.
    유작가님 이야기 한번 들을수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ㅎㅎ

    (Vmt9zS)

  • 고릴라덩크 2017/11/01 11:22

    아이언리거// 만약 박찬호라면요?ㅋㅋ

    (Vmt9zS)

  • 국뽕한사발 2017/11/01 12:29

    부럽다 신랑신부

    (Vmt9zS)

  • JN.MN 2017/11/01 13:33

    글에 음성이 묻어나네요.
    잘 봤어요.

    (Vmt9zS)

  • 군옥수수맛 2017/11/01 13:34

    원래 책에따라서 다르게 써주십니다. 미리 펼쳐서 가져가면 꼭 어떤책인지 다시 확인하고 사인을....
    저도 신랑신부 다 알아서 결혼식장에 다녀왔네요

    (Vmt9zS)

  • Clutch_Chu 2017/11/01 15:29

    우와 대박
    글도 잘 봤습니다.

    (Vmt9zS)

  • 태공 2017/11/01 15:42

    우와... 저런 주례사라면 경청 또 경청하겠습니다

    (Vmt9zS)

  • baremast 2017/11/01 16:11

    명언인데요. 결혼은 차이와 변화를 다루는 예술. 정말 힘들겠군요..

    (Vmt9zS)

  • 노부장 2017/11/01 16:24

    음성지원 됩니다

    (Vmt9zS)

  • ThankU 2017/11/01 16:39

    읽고 있는데 진짜 자동음성지원되네요 ㅋㅋ 간결하면서 포인트 딱딱 집는 주례사 좋네요

    (Vmt9zS)

  • 타투인 2017/11/01 16:44

    사인에 적어주신 말도 인상 깊네요
    환갑이 넘으신 저희 어머니도 요즘 많이 하시는 말씀인데
    살고보니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자기답게 사는것이 중요하더라

    (Vmt9zS)

  • crazy4family 2017/11/01 17:01

    결혼은 차이와 변화를 다루는 예술. 정말 100번 추천하고 싶은 말씀입니다.

    (Vmt9zS)

  • jumpman23 2017/11/01 17:39

    글 읽는데 유시민 작가 목소리가 들리는거 같음

    (Vmt9zS)

  • 물냉면 2017/11/01 18:10

    근데 대본이 있는것도 아니고 어떻게 다 적으셨어요?

    (Vmt9zS)

  • 트윈스키드 2017/11/01 18:27

    헐 새벽에 글 올리고 이제 불펜들어와서 확인했는데, 이게 좌측담장에 걸렸네요. 역시 유시민 작가님의 힘이란ㄷㄷㄷ 주례사는 와이프가 동영상 촬영한 것을 제가 다시 들어가면서 기록한 것입니다ㅋㅋ 업무하면서도 종종 녹취 풀 일이 있는데, 그때와 달리 짜증 한번 안나더군요ㅎㅎ 추천 및 리플 남겨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Vmt9zS)

  • 돈성의8번 2017/11/01 19:01

    대부분의 주례사들은 정말 좋은 내용이 많습니다. 다만 유명인사가 아니면 하객들이 들을생각을 안하니 지루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거죠. 유명인사가 주례선다고 그럴때만 들으려고 하시지 마시구요 결혼식 갈일 있으면 갈때마다 경청해서 들어보세요 참 좋은 내용이 많아요

    (Vmt9zS)

  • 루티니스트 2017/11/01 19:40

    소리 주의 표시 좀 ㄷㄷ

    (Vmt9zS)

  • 물냉면 2017/11/01 20:03

    트윈스키드// ㄷㄷㄷ님 열정도 대단..

    (Vmt9zS)

  • nach 2017/11/01 22:54

    덕분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Vmt9zS)

  • 키가컸으면 2017/11/01 23:46

    덕분에 좋은 말씀 가슴에 새기고 갑니다.

    (Vmt9zS)

  • OASIS 2017/11/01 23:47

    유시민사랑합니다 저도 1988년판 거꾸로읽는 세계사있는데

    (Vmt9zS)

  • 끓는트름 2017/11/01 23:51

    좋은글이네요

    (Vmt9zS)

  • 한화97 2017/11/01 23:59

    좋아요. 상투적이지도 딱딱하지도 않고 와닿네요

    (Vmt9zS)

  • 봉준호 2017/11/02 01:27

    와 님 이글 지우지 마세요 추천및 스크랩 합니다

    (Vmt9zS)

  • torrent3 2017/11/02 12:51

    노회찬 의원님 어록인데요. 혼인 생활을 가리켜서, ‘차이를 다루는 예술이다’ 이렇게 늘 말씀하십니다. 원 출처가 회찬옹이군요 역시 언어의 마술사..

    (Vmt9zS)

(Vmt9z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