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6세기 이스탄불의 한 남자가 심하게 열병이 났다.
그는 울라마(이슬람교의 법학자)에게 자신이 목숨을 건진다면 어린 소년들과 동성애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그리고 살아났다.
살아난 남자는 막상 살아나니 아쉬워졌지만, 신과 한 약속을 어길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유태교의 랍비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랍비는 그 남자에게 여자랑 관계를 맺으라고 조언했다.
2. 투르크인들은 항해 준비를 마치고 나면 동방정교를 믿는 그리스인들에게 와 바다에 신의 축성이 내려졌는지 물었다.
만약 축성이 내려지지 않았다고 하면 그들은 배를 띄우지 않았고, 축성이 내려지면 배를 띄웠다.
- 유럽 여행자의 기록
3. 언젠가 한 프랑스인이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자 투르크인이 그에게 조언하길, '성모 마리아에게 빌어보시오'
프랑스인이 그에게 이유를 묻자 그는 자신이 빈에 포로로 잡혀있을때 성모 마리아에게 빌면 효험이 있단 말을 들었다고 한다.
4. 영국인 노예들이 배에 오르자 투르크군은 무슨 종교를 믿는지 물었다.
그들이 가톨릭을 믿는다고하자, 투르크군은 가톨릭을 버리고 이슬람을 믿는게 어떠냐고 물었다.
노예들이 거부하자 진정한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차선책으로 개신교라도 믿으라고 말하고서는
선실을 예배실로 개조해 주기적으로 그곳에서 기도를 올리게 했다.
- 영국 노예의 증언
주) 카톨릭은 성상과 성화등의 상징을 써서 그걸 우상숭배로 여기는 이슬람은 카톨릭을 썩 좋게 ㅂㅈ 않았고 개신교는 그런 상징을 쓰지 않으므로 상대적으로 좋게 보았다는 이야기
5. 1872년 에디르네에서 흡혈귀가 나타나자 이슬람 성직자와 기독교 성직자 모두 퇴치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이에 사람들은 투르크 마법사를 불러 푸닥거리를 시켰고, 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
6. 미신이 만연한 발칸 지역에서는 성직자들이 많은 부적을 써줬는데,
기독교도들이 그들의 성직자로부터 받은 부적이 효험이 없다고 생각되면 무슬림 성직자에게 가서 부적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7. 기독교도와 무슬림 사이에 살며 논쟁이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둘 중 어느것이 더 좋은 종교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면서도 진리를 거부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금요일에는 모스크에 나가고, 일요일엔 교회에 나간다.
- 레이디 몬태규
8. 우리는 성모 마리아를 믿는 무슬림들입니다.
- 무슨 종교를 묻느냐는 레이디 몬태규의 질문에 성호를 그으며 답하는 마케도니아의 농부들.
9. 키프로스 출신의 한 기독교도 농민은 자신의 아들에게서 소를 판 돈을 받지 못하자, 그를 샤리아 법원에 고소하고 샤리아에 따라 돈을 받도록 조치해달라고 부탁했다.
10. 투르크인과 불가리아인은 사이좋게 지냈다.
투르크인들 집에 인접해 살던 불가리아 마을 아낙네들은 투르크인 아낙네들과 이웃사촌처럼 지냈다.
아이들도 불가리아 친구들과 다를 바 없이 투르크인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
투르크인 아녀자들은 불가리아어를 잘 구사했으며,
불가리아인들도 투르크어를 아이들만큼은 쓸 줄 알았고 그 결과 일종의 방언같은것이 만들어졌다.
불가리아인 가정에서 일하는 투르크인들은 그 가정의 절친한 친구로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우리는 투르크인들에 익숙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투르크인이 된건 아니었다.
우리는 불가리아식으로 살았고, 불가리아 의복을 입었으며, 불가리아의 관습과 불가리아의 신앙을 믿었다.
투르크인들도 물론 그들 방식대로 살면서 그들 의복을 입었고, 그들 관습과 그들 신앙을 지켜갔다.
우리는 이 모든것을 사물의 이치로 받아들였다.
- 1870년대를 회고한 불가리아인의 기록.
출처 : 발칸의 역사. 마크 마조워 지음, 이순호 옮김. 을유문화사.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피지배층의 종교와 문화에는 크게 간섭을 하지 않았고 대부분 인정해줌
하지만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무력으로 잔인하게 진압하는 사례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통제력이 약화되어 가는 오스만 제국의 후방에 결정타를 꽂으려고
영국은 로렌스를 파견해 제국내에서 사이비 꼴통 취급받던 근본주의 이슬람 와하비를 선동해 봉기를 일으키게 했다
이미귀하께선
2024/06/29 23:06
아 20세기 거슬러 올라간게 아니라 이전이었구만 ㅋㅋㅋ
Amg e53
2024/06/29 23:13
심지어 1차세계대전 직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내무부 감찰관, 검사 비슷한데 총기휴대나 경찰들을 동원하지는 않는 고위직에 유대인 비율이 10%가까웠고,
으스만 제국 고위층중에 동로마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11세 방계 후손들이 있었지만, 아무 문제 없었음.......
그런데 어떤 18살 10색이 프란츠 황태자 부부를 둘다 쏴죽이면서.ㅡ.ㅡ
빅세스코맨김재규
2024/06/29 23:26
또 영국이야?
tsasfr
2024/06/29 23:29
이슬람의 근본주의화는 그 보다도 더 최근의 흐름이라고 봐야함.
사우디아라비아 반도는 애초에 20세기 이전 부터 꼴통이었던 지역이고, 그 외 지역의 이슬람 국가들은 20세기 중반 ... 60~70년대까지도 상당히 세속적이었음. 뭐 결국은 사우디를 중심으로 암세포 처럼 퍼져나간건 비슷하지만, 오스만 멸망이나 1차세계대전이 어찌되었든 간에, 석유시대 이후로는 비슷하게 흘러갔으리라고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