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하면 뭐가 먼저 생각나시나요?
아마도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이겠죠?
근데 5.18 민주화 운동 사.유적지 하면 떠오르는곳이 몇군데나 되나요?
아마도 구도청 상무지구 5.18공원 운정동 5.18 민주화 묘지 용봉동 전남대학교 정도 겠죠?
하지만 광주에 5.18 민주화 운동 사.유적지는 알려진것 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다 돌려면 한 1박 2일은 잡고 오셔야 할정도죠
5.18 민주화 운동 사적지를 통틀어 광주 오월길이라고 하는데 한번 오월길을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5월길
사적지 1호 전남대학교(용봉동)
1980년 5월 17일 밤 전남대에 진주한 계엄군은 도서관 등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불법 구금하였다. 계엄군은 5월 18일 아침 학교에 등교하거나 5‧17비상계엄확대조치에 항의하기 위해 정문앞에 모인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강제해산시켰다. 이에 학생들이 항의하면서 항쟁의 불씨가 되었다
사적지 2호 광주역 광장(중흥동)
무자비한 살육 앞에 나도 광주시민!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과 계엄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 5월 20일 밤 광주역에 주둔해 있던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발포,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고 21일 아침 주검 2구가 발견되었다.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주검을 옮겨오자 이 소식을 들은 시민 수십 만 명이 민주화운동에 적극 동참하면서 항쟁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사적지 3호 시외 버스 공용 터미널 옛터(농성동)
계엄군에 의해 피로 얼룩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이 있던 곳으로 전남 일원을 잇는 교통 중심지였다. 5월 19일 오후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는데, 계엄군은 대합실과 지하도에까지 난입하여 시민들에게 총검을 휘둘러 이곳은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소식은 시외버스를 통해 시외로 나간 사람들에 의해 곳곳에 전파되어 항쟁이 전남 전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적지 4호 금남로 5.18 기록관 (금남로)
항쟁·민중·민주의 거리
1980년 5월 18일 가톨릭센터 앞에서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있었고 5월 19일부터는 수많은 시민들이 투쟁의 대열에 동참했다. 5월 20일 저녁에는 택시와 버스를 중심으로 100여대의 각종 차량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이 거리를 가득 메웠고,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에도 수십 만의 시민들이 매일 모여, 계엄군에 맞서 민주화를 촉구했던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거리다.
사적지 5-1호 구 도청 (금남로 광산동)
가자, 도청으로! 최후의 결사항전지
5·18민주화운동 당시 항쟁 본부가 있던 곳이다. 시민·학생수습위원회 활동이 있었고, 시민공동체 활동의 중심이었다. 또한 이곳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맞서 싸운 시민군의 최후 결사항전지로 마지막 항전에서 수많은 시민군들이 산화하였다
사적지 5-2호 민주화 광장 (금남로 광산동)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5월 18일 이전 3일 동안 학생과 시민들은 이곳에 모여 대규모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시국선언문을 발표해 군사통치 종식과 민주화를 촉구하였다. 특히 5·18 사적지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된 분수대와 30여년 만에 복원돼 제자리로 돌아온 5·18시계탑으로 인해 5·18민주광장은 시민들의 피끓는 함성이 울려퍼지던 옛 전남도청 앞 현장의 본래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게 되었다. 매일 오후 5시 18분에는 5·18시계탑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 차임벨이 울려 퍼진다.
사적지 5-3호 구 상무관 (금남로)
계엄군의 총칼에 희생된 주검이 있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잔인한 학살과 집단 발포로 희생된 이들의 시신을 모셔놓고 통곡하며 분노했던 곳이다. 항쟁기간 동안 시민들은 상무관 앞 빈소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지어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민주화투쟁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계엄군이 점령한 뒤 5월 29일, 상무관에 모셔져 있던 시신은 청소차에 실려 망월동 시립묘지로 옮겨져 묻혔다
사적지 5-4호 광주 YMCA (금남로)
60년대 이후 반독재·반유신운동의 거점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항쟁지도부가 자주 옥내 집회를 열었던 곳. 5월 26일에는 계엄군의 무력진압을 막기 위해 ja위적 수단으로 시민군에게 총기훈련을 실시했으며, 항쟁이후에도 광주항쟁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수많은 집회가 열렸다. 이곳은 60년대 이후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반독재·반유신운동의 거점이었다
사적지 6호 광주 YWCA 옛터 (금남로)
항쟁의 산실
광주 여성운동의 산실이자 1970년대 이후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어냈던 장소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민주인사들은 이곳에서 시민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대책회의를 수시로 가졌고, 투사회보(민주시민회보)를 제작하고 시민궐기대회를 준비했다. 이곳은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을 공략하던 계엄군의 주요 공격목표가 되어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사적지 7호 광주 MBC 옛터 (궁동)
왜곡보도, 시민이 심판하다!
계엄 하에서 군부의 검열을 받던 언론은 항쟁 열기는 물론 계엄군의 과잉진압 행위마저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진상을 사실대로 보도하라고 거세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5월 20일 밤 광주MBC와 서석동 광주세무서 건물에 불길이 타올랐다. 다음날 새벽에는 광주역 앞 광주KBS 건물이 불탔다.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계엄군의 과잉 진압과 언론의 왜곡에 대한 항의와 응징의 표현이었다
사적지 8호 녹두서점 옛터 (장동)
항쟁대책 논의장소
유신체제 말기 암울한 시대에 민주 청년 학생들이 모여 열띤 시국 토론을 벌이던 사랑방이었던 이곳은, 1980년 5월 17일 밤 전국에서 많은 민주인사들이 예비 검속되자 청년 학생들이 민주화를 촉구하는 궐기대회를 준비하고 대책을 논의한 항쟁의 산실이다.
사적지 9호 전남대병원 (학동)
5·18민주화운동의 야전병원
부상당한 시민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하고 돌본 5‧18민주화운동의 야전병원이었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서도 복도까지 밀려든 부상자, 치명상을 입고 ㅅㅇ하는 중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의사와 간호사들의 혼신의 노력이 있었고, 자발적인 시민 헌혈 행렬이 이어졌다
사적지 10호 광주 기독교 병원 (양림동)
5·18부상자를 헌신적으로 치료하다
이 병원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부상당한 시민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한 민주의료현장이다. 병원에 있던 의료진은 일시에 밀려든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침식을 잊었으며 수혈할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시민들이 헌혈에 동참했다.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광주시민은 남녀노소 구분없이 하나가 되어 서로 돕고 위로하였다.
사적지 11호 구 광주 적십자 병원 (불로동)
뜨거운 시민정신이 빛나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부상당한 시민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하고 돌본 곳이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서도 의료진은 부상자들의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 위해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활동을 펼쳤다. 피가 부족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시민뿐만 아니라 인근 유흥업소 종업원들까지 헌혈에 참여, 뜨거운 시민 정신을 발휘했다. 항쟁 후에도 계속 부상자들을 따뜻하게 치료해 주는 등 적십자정신을 빛낸 곳이다
사적지 12호 조선대학교 (서석동)
계엄군의 주둔과 시민들의 고난
조선대학교 학생들은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더불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으며, 항쟁기간에 시민군 지도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80년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시내 곳곳에서 계엄군에게 마구 끌려온 수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체육관에 수용되어 잔혹한 폭행과 고문을 당한 현장이다
사적지 13호 배고픈다리 일대 (소태동)
시민군의 모범적인 지역방위 현장
여기 있던 배고픈다리(현 홍림교) 일대는 5·18민주화운동이 치열하던 1980년 5월 21일, 시민군이 시내 중심가에서 계엄군을 물리친 후 모범적으로 지역 방위를 했던 곳이다. 조선대학교 뒷산을 통해 퇴각한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진출할 것에 대비, 그날 해질 무렵부터 이 지역 예비군 등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어 시민군을 편성하고, 이 다리를 중심으로 방어망을 구축하여 물샐틈없는 경계를 폈다.
사적지 14호 주남마을 양민 학살지 (월남동)
누구도 광주를 빠져 나가지 못해!
1980년 5월 21일 광주 시내에서 퇴각하여 주남마을에 주둔한 계엄군들이 광주-화순간 도로를 지나가는 미니버스, 대형버스, 앰블런스 등에 무차별 공격을 자행한 곳이다. 5월 23일에는 승객 18명을 실은 미니버스에 무차별 사격을 가해 탑승자 가운데 단 3명만이 살아남았다. 계엄군은 이들 3명 중 부상당한 청년 2명을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살해하였다. 그 후 이곳에 묻혀 있던 시신은 항쟁이 끝난 뒤 주민의 신고로 발굴되었다.
※ 주남마을에 가보면 집집 마다 사슴이나 동물 같은 벽화가 있습니다 그 벽화를 보고 대부분 아름답다 이쁘다 이럴겁니다. 하지만 그 벽화의 뜻을 알고 가면 가슴속부터 엄청난 눈물이 나올겁니다 왜냐구요? 그 동물 벽화는 바로 5.18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의 초상벽화이기 때문입니다
사적지 15호 광목간 양민 학살지 (진월동, 송암동)
계엄군의 화풀이, 젊은 청년들의 죽음
계엄군 간 오인사격으로 인한 화풀이로 공수부대원들이 무고한 양민 학살을 자행한 곳이다. 계엄군은 집집마다 난입하여 총격을 가하였으며, 이로 인해 권근립, 임병철, 김승후 등 다수의 주민이 살해 당했다. 또한 항쟁 기간 중 이곳을 지나가던 민간차량에까지 무차별 사격을 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적지 16호 농성광장 (농성동)
죽음의 행진
1980년 5월 22일 계엄군이 국군광주병원 부근에 통제선을 설치하고 인근 주택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무고한 시민이 희생당한 곳이다. 또한,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이 시내로 다시 진입하려 하자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이 구 도청에서 농성광장까지 ‘죽음의 행진’을 하여 계엄군 장갑차의 시내 진입을 저지한 저항의 현장이다.
사적지 17호 상무대 옛터 (치평동)
영창에서는 고문의 ㅅㅇ소리, 법원에서는 사형선고
상무대(육군 전투병과교육사령부)가 있었던 자리로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주요 지휘관 회의가 이곳에서 자주 열렸고, 시민수습위원들이 수차례 군 수뇌부와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항쟁 뒤에는 시민 3천여 명이 붙잡혀와 헌병대 영창에서 상상을 뛰어 넘는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현재 군사법정 건물 및 헌병대 영창 건물은 상무지구 택지개발에 따라 인근 5·18 자유공원에 옮겨져 복원되어
사적지 18호 무등경기장과 광주 - 기아 챔피언스 필드 정문 (임동)
경적소리로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다
1980년 5월 20일 계엄군의 만행에 격분한 운전기사들이 모여 차량시위를 시작한 곳으로 운전기사들은 대형버스를 앞세워 경적을 울리고 전조등을 비추며 전남도청으로 향하였다. 시내버스와 택시 등 100여대의 차량이 참가한 이 시위는 실로 장엄한 드라마였으며, 시민들에게 강한 연대의식과 항쟁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이 차량시위와 운전기사들의 민주 정신을 기리기 위해 5월 20일을 ‘민주기사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사적지 19호 양동시장 (양동)
대동정신을 발휘했던 나눔의 공간
5·18민주화운동 당시 양동시장 상인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모금하여 시민군과 학생들에게 빵과 우유를 나누어 주고 밥(주먹밥)을 지어 주었다. 양동시장과 대인시장 상인들은 조를 나누어 밥을 짓고, 양동이에 물을 받아다 목마른 이에게 주고, 함께 시위에 참여하는 등 시민이 하나가 되는 대동정신을 앞장서서 발휘했다
사적지 20호 광주공원 (구동)
시민군 무기를 들다
이곳은 5·18민주화운동 때 시민들이 계엄군의 학살에 맞서 시민군을 편성하고 훈련했던 곳이다.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나자, 오후 4시경 시민들은 ja위 수단으로 인근 시군 지역에서 예비군용 총과 탄약 등 무기를 가져와 시민군을 편성하고 사격술 훈련을 실시했다. 5월 27일 계엄군이 진압해 올 때 이곳에서도 시민군과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사적지 21호 5.18 최초 발포지 (계림동)
시민을 향해 최초로 발포하다
5·18민주화운동 때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을 향해 최초로 발포를 했던 곳이다. 1980년 5월 19일 계엄군의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게 포위되자 시민을 향해 발포하여, 조대부고에 다니던 김영찬 학생이 총상을 입었다. 발포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극도로 격분, 투쟁이 한층 더 거세지는 계기가 되었다.
사적지 22호 광주교도소 옛터 (문흥동)
시민들이 붙잡혀와 고문당하고 수용되었던 곳
광주교도소에 주둔한 계엄군은 담양, 순천 방향으로 이동하던 차량과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다. 또한 계엄군에 의해 무고한 시민들이 광주교도소로 끌려와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사망한 희생자 시신은 교도소 안과 인근 야산에 암매장되었다가 항쟁이 끝난 후 발굴되었다
사적지 23호 국군 광주병원 옛터 (화정동)
부상환자를 치료하고 수용 조사하였던 곳
이곳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사에 연행돼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문과 폭행으로 부상을 당한 시민들이 끌려와 치료를 받았던 곳이다. 이곳에까지 계엄사 수사관들이 파견되어 시민들은 치료 과정에서도 취조를 당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사적지 24호 5.18 구묘지 망월동 묘역 (망월동)
오월영령 민주주의를 수호하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산화한 영령들이 묻혔던 곳으로 ‘망월동 묘지’라 불려왔다. 당시 시민들은 처참하게 훼손된 주검을 손수레에 싣고 와 이곳에 묻었고,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거나 5월 27일 도청 함락 때 희생된 주검은 청소차에 실려와 묻혔다. 구 묘역은 당시의 참상을 처절하게 안고 있는 곳으로 현재까지 국내외 참배객들이 수없이 다녀간다.
※ 현 5.18 민주화운동 묘지 정문과 구 5.18 민주화운동 묘지는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사적지 25호 남동성당 (남동)
광주 민주인사들, 수습대책을 논의하다
1980년 5월 22일 당시 김성용 주임신부를 비롯하여 광주의 민주인사들이 모여 시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한 수습대책 8개항을 최종적으로 정리한 장소다. 또한 1980년 7월부터 구속자 석방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월요미사가 진행됐던 곳이다.
사적지 26호 505 보안부대 옛터 (쌍촌동)
민주인사들을 연행·고문한 장소
이곳은 전남지역 군 정보부대였던 505보안부대가 자리 잡고 있었던 곳이다. 신군부는 이곳에 합동수사단을 설치하고 이 지역 민주인사와 학생운동 지도부 및 시민군 등을 체포해 지하 감옥에 감금하고 고문 수사를 자행하였다. 또한 5·18민주화운동 진압작전의 실질적인 지휘본부였다.
※ 터미널로 오실분들은 여기부터 가보시는게 좋을듯 하군요 광주 유스퀘어 뒷편에 있는데 도보로 10분~15분정도 걸립니다
사적지 27호 광천성당/광천 시민아파트 (광천동)
들불열사들의 활동장소
5월 18일 들불야학의 일곱열사(윤상원, 박기순, 박용준, 박효선, 신영일, 김영철, 박관현 열사) 중 윤상원의 주도로 투사회보가 제작되었던 곳이다. 들불야학이 교실로 사용하였던 광천동 성당 옆에는 70호 규모의 3층 연립아파트 3동이 ㄷ자 형태로 자리를 잡고 있는 광천시민아파트가 있다. 이곳에 김영철, 윤상원 등 들불열사들이 아파트와 들불야학당을 거점으로 지역주민운동과 야학활동을 펼쳤다
※ 역시 여기도 유스퀘어랑 그리 멀지 않습니다
사적지를 알아봤으니 이젠 유적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등록된 유적지
5.18 자유공원 (치평동)
5·18 자유를 위한 숭고한 정신을 체험하다
1980년 5월을 재현한 전시 시설로 5·18민주화운동 참여자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당시 법정과 영창, 중대내무반 등 7개 장소를 복원·재현하였다. 실물 모형, 수감 상황 미니어처 등 각종 소품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체험할 수 있다. 또한 공원 입구에는 들불야학 7열사의 기념비가 조성되어 있다.
5.18 기념공원 (치평동)
그날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다
슬픔의 역사와 어두운 질곡에 빠져 있던 그 시절, 민주화운동을 위해 희생한 광주의 모든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상무대 자리가 5·18기념공원으로 조성되었다. 5·18기념재단과 5·18기념문화센터가 위치해 있고 광장에는 광주인권상 수상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공원에는 5·18현황주작과 추모승화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전남대 민주길 (용봉동)
5·18도보순례로 그날의 정신을 계승하자!
‘전남대 민주길’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불씨를 지핀 전남대학교 정문 를 비롯하여, 오월정신과 관련된 전남대 내부의 주요 역사적 장소를 연계하여 도보로 순례하는 체험코스다.
무등도서관 (우산동)
계엄군의 총격으로 무고한 시민이 희생되다
80년 5월 22일 당시 계엄군은 시민들의 행렬에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수습위원들이 ‘5·18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계엄사를 방문했지만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날 오후 1시 경 이곳에서 계엄군의 총격으로 1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무등도서관은 故 정주영 회장이 5·18민주화운동으로 고통받은 광주시민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1981년 광주 북구 우산동 1만2488㎡ 부지에 지하 2층 지상 3층 연면적 9148㎡ 규모의 무등도서관을 지어 광주시에 기증했다.
현 5.18 민주화운동 묘지 (운정동)
준엄한 역사교육의 장, 국립5·18민주묘지
1994년부터 시작한 5·18묘지성역화 사업이 3년만에 완공되어 구 묘지에 묻혀 있던 분들부터 이곳에 안장되었다. 국립5·18민주묘지는 무등산이 바라다 보이는 아늑한 곳에 터를 잡고 있으며, 이 땅에 다시는 불의와 독재가 발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준엄한 역사교육의 장으로서 활용되고 있다. 국립5·18민주묘지는 민주의 문, 숭모루, 역사의 문, 추념문, 유영봉안소, 추모탑, 부조, 헌수기념비, 사진자료전시관, 추모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등록 유적지
대창운수(오룡동)
다 필요 없습니다 이 사진 하나에 설명이 다 됩니다
5.18 당시 광주시민들의 방패가 되어준 대창운수 버스들이네요
광주 문화 예술회관 (운암동)
대한민국 민중가요의 산실 광주 5월의 대표곡 임을 위한 행진곡이 태어난 곳
작곡가 황석영 선생 집이 있던 운암동에 작곡가 황석영 김종률을 비롯 9명의 인재들이 모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었습니다 황석영 선생 집터는 지금 광주문화예술회관으로 변모 하였습니다
정말 많죠? 이걸 어떻게 다돌아? 걱정이신가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코스는 가까운곳끼로 묶어서 4개 코스로 되어있습니다
오월길 홈페이지에 가셔서 신청하시면 해설사 동행하에 여행하실수 있습니다
하나 더! 오월길을 돌아다니다 보면 광주의 또 다른 근현대 사건들의 사. 유적지들을 보실수 있습니다
바로 일제시대, 6월 항쟁, 한국전쟁 사. 유적지들을 보실수 있습니다
일제 시대 사. 유적지
광주제일고등학교 (누문동)
광주일고는 광주학생독립운동 발상지로 광주학생독립운동 사적지 1호로 지정되어있습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 운동 다음으로 대규모로 진행된 독립운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광주 3.1운동 최초 발상지 (양림동)
양림동은 오월길 사적지 10호로 지정된 광주기독병원이 있는곳이기도 하죠.
광주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탄생시킨 지역임과 동시에 광주 3.1운동 최초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광주 수피아여고 (양림동)
광주 수피아여고는 일제시대 당시 천황에게 참배하라는 지시를 전교생이 거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신사참배 거부 학교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 일로 전교생이 퇴학내지 정학을 당하기도 한곳입니다
광주공원 (구동)
광주공원은 5.18사적지 20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죠 5.18 사적지로 갔을때는 경건한 마음으로 가셨다면 일제시대 유적지로 가실때는 침 수십통과 온몸에서 나오는 분노 욕설 즉 전두환 보는 마음으로 오십시오
왜냐구요? 전두환 같은 인물 20여명의 단죄비가 있는곳이죠
즉 친일파 22명의 단죄비가 있는 유일한 지역
거기에 모자라 친일파중에 레전드 오브 레전드 라고 불리우는 친일파 윤웅렬 친일파 이근호에 대한 이승만 버러지가 조국의 영웅이라고 직접 하사한 조국 영웅 선정비가 있습니다......
윤웅렬 이근호가 누구입니까? 대한제국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죽이고 그랬던 친일파중의 친일파입니다
윤웅렬 이근호 자손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조상인 윤웅렬 이근호를 옹호하며 국가에 빼앗긴 토지를 다시 되찾겠다며 국가 상대로 소송중에 있습니다........
이글을 쓰다보니 정말 치가 떨리네요
한국전쟁 유적지
충현원 (양림동)
양림동 참 대단한 곳이죠? 5.18, 3.1운동에 이어 이젠 한국전쟁까지
충현원 대단 한곳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영아 보육 시설이고 현재는 영 유아 보육시설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대한민국 국립 보육시설입니다.
거기에 또하나의 타이틀이 한국전쟁 최초의 전쟁고아 보육시설이기도 합니다
충현원은 한국전쟁때 전쟁고아 보육 시설 역할만 했을뿐 아니라 최초로 보육 시설과 함께 전쟁고아들이 가장 많이 걸렸다는 질병중에 하나인 황달을 치료 하는 역할까지 했습니다.
지금은 한국 전쟁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故러셀 블레이즈델 대령의 기념관까지 운영하고 있는데 거의 전쟁기념관 수준이라고 하네요.....
6월항쟁 유적지
서현 교회 (구동)
저도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는데 서현교회는 광주 6월항쟁 발상지라고 하네요....
※ 여기서 잠깐 다 좋은데 숙소가 고민이시지 않나요? 한번 근현대사 여행 테마에 맞는 숙소로 가보시는게 어떠실지 제가 추천하자면 저기 위에 쓰여져 있는 충현원으로 숙소를 추천합니다.
충현원 참 대단하죠?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육아 보육원이면서 한국전쟁 기념관이기도 하고 더불어 광주에서 가장 좋은 게스트 하우스이기도 하다는 사실!
어떤가요? 이런 컨셉으로 광주 여행하면 정말 좋은 여행이 되지 않을까요? 이래도 광주가 볼곳이 없는건가요?
충현원 홈페이지에서 신청 할수 있다고 합니다
ㅇㅈ
와... 광주에서 수십년 살았는데도, 모르고 안가본데가 많네요. 스크랩해놓고 차근차근 볼게요. 감사합니다
5.18 관심있어서 광주여행 오는 사람이 얼마 안될꺼 같은데
아! 그리고 양림동에는 일제시대 대표 드라마 각시탈 촬영지도 있습니다 각시탈이 일본 순사들을 때려 눕히는 장면을 촬영한 오웬 기념각이라고 오웬 기념각은 각시탈에서 일본 순사들 대강당으로 나온곳이죠
스크랩했는데 지우지 말아주세요
보통 여친이랑 놀러갈 경우 5.18. 관련된곳 안가잖아요....
남동성당 어린시절 주구장창 가던곳인데 저런곳인지 몰랐네요
저도 지굼 광주입니다만 그냥 추천수집글이네요.
역설적으로 볼것 진짜 없는것을 드러내는 글이기도 하고.
알찬 정보 감사합니다♡ 광주여행길에 저 중 몇 곳은 꼭 들러 봐야겠습니다.
와드 박고 갑니다
일리단님이// 이런게 볼거 아니라고 한다면 지구상에 볼것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님의 개인적인 생각이 다 똑같을거라고 생각하는거 같네요 다른 사람들의 관광의 가치도 인정해 주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