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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철살인을 꿈꾸는 사람이 너무 많은 세계


촌철살인을 꿈꾸는 사람이 너무 많은 세계인 것 같습니다.

나를 찌르는 누군가의 한 마디에 그 자리에서 명쾌하게 똑같이 찔러주길 바래요.

문제는 사람이 완벽할 수 없고, 언제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일 수 없다는 거죠.

나를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를 찌른 게 아닐 수도 있고
공격할 필요 없는 상황에서 내가 먼저 공격해버린 상황이 될 수도 있고
나는 합당하게 칼을 휘둘렀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죠.

"이것만은 정말 내가 옳잖아"
"이 정도는 상식이잖아, 아니, 진짜로 말야."

그렇게 생각해서 당위성을 가지고 칼을 휘두르지만 사실 그게 얼마나 뒤집히기 쉬운 것이던가요.

인터넷에서는 더합니다.
짧고 간결하고 강한 글일수록 지지받아요.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고, 그냥 "아니, 니가 틀렸는데?"로 끝나버립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는 생략되고 뒷부분의 "네가 틀렸다고 생각해."만 올라갑니다.
우리는 톨스토이도 아니고 헤밍웨이도 아니라서 그런 단문에 많은 것을 담기는 힘든데 말이예요.

물론 이렇게 말하는 저도 남들과 다를 바 없이 모자라고 모자란 인간입니다...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네요 ㅎㅎㅎ

별개로 예전에 제가 만원버스에서 휘청거리다가 뒤에 있던 어떤 여자분의 발을 밟은 적이 있는데요.
당황해서 황급히 뒤돌아보니까, 그 여자분이 '괜찮아, 어쩔 수 없었던 거 이해해.'하는 표정으로 웃고 계시더라구요.

그 때 정말 스스로가 엄청나게 부끄러워졌습니다.
왜냐면 저라면 그 상황에서 그런 관대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관대하긴커녕 눈살 찌푸리면서 화를 냈을 게 확실합니다.
분명 실수인 건 알지만 내가 당한 거고, 피해자고, 그러니까 화내도 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물론 피해자일 때 그 피해에 대해서 화를 낸다는 건 충분히 합리적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참 간사한 게,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상대가 용서해주길 바래요.
'화내도 어쩔 수 없다, 당연하다, 그렇지만 세련된 태도로 나를 지적해주거나 용서해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쪽이 훨씬 관대하고, 자비롭고, 성숙한 태도라는 걸 사실은 다 알고 있어요.

뜬금없지만 마블의 시빌 워에서 블랙 팬서가 그렇게나 멋있었던 것도 사실 그 이유 때문이잖아요.
보통의 범인은 그렇게 행동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상대의 '실수'를 한 번은 넘어가주는 사람이 되길 원해요.
고의로 저지른 범죄 같은 것이 아니라, 누구나, 심지어 나조차도 언젠가 저지를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최소한 한 번은 매도하거나 비방하거나 욕하지 않고 그저
"지금 당신의 행동 때문에 제가 약간 당황했어요."하고 짚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네요.
상대가 개차반이면 "어쩌라고?"로 나올 테지만... ㅠㅠㅠ 그럴 확률이 높지만 ㅠㅠㅠㅠ......

누구나 실수를 하고 누구나 잘못을 하니까요......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도 한 번쯤은 도서관에서 무음모드를 잊어버릴 수도 있어요.
누구라도 한 번 정도는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져서 시선을 끌게 될 수 있어요.
누구나 한 번쯤은 이어폰을 꼈다고 생각한 채 기차 안에서 높은 소리로 유튜브를 볼 수도 있구요.
살면서 한 번 정도는 분명 다른 사람의 발을 밟아봤을 거예요......

저는 그런 상황에서, 제가 밟을 밟았는데도 '이해해'라는 미소를 보여주신 그 여자분같은 사람을 만나길 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네요.

한 번은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KTX 안이었는데, 어디에선가 엄청난 소리의 트로트가 계속 계속 들리더라구요.
일단 10분 정도 상황을 지켜보다가, 굉장히 고민하며 다가가서,
"죄송한데 음악 소리를 좀 낮춰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하고 머쓱하게 웃었거든요.

범인은 어떤 아주머니였는데 이어폰 단자가 구멍에 들어가 있기만 하고 제대로 누르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어요.
"네? 어머, 어떡해! 안꽂혀있었네! 미안해요."하고 화들짝 놀라셨는데
그 모습을 보고 저 모습이 과거 혹은 미래의 내 모습이 될 수도 있었겠구나,
내가 여기서 인상 쓰고 화를 내면서 공공장소에서의 예의범절도 모르는 무뢰한 취급했다면
나는 스스로의 야박함에 부끄러웠을 것이고 저 아주머니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봤을까 싶어 부끄러웠겠구나 싶었어요.

사실 타인의 허물을 지적하고 미움을 사는 건 굉장히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서 (누구도 미움받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그저 KTX 타고 가는 내내 속으로 '저 사람은 정말 예의라곤 모르는 사람이네.'하고 욕을 하는 편이 더 쉽습니다.
혹은 '지하철_진상.jpg'같은 이름으로 인터넷에 올리든가요.
타인의 허물을 지적한다는 건 그 사람의 허물이 나를 덮칠 위험을 감수하는 거니까요.
알고보니 실수가 아니고 알고보니 적반하장이라
나름 선의를 베풀고 싶었던 내가 더 기분나쁘게 되는 그런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거지요.

어느 쪽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내가 더 기분 나빠질 확률을 감수하고서라도 말 한 마디 건네보느냐,
아무 상관 없는 내가 피해를 감수할 이유가 없으니 애초에 배제하느냐......
이런 사람 있고 저런 사람이 있을테니 어느 한 쪽이 옳다고 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강요할 수도 없는 문제구요.

그냥 저는 제가 '옳다', '이 편이 더 세련되고, 어른스럽고, 성숙하다'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싶어요.
저에게 발을 밟히고도 웃어주신 그 여자분을 보고 제가 큰 감화를 받은 것처럼
저도 그렇게 행동하다보면 언젠가 제 행동에 감화받는 분도 생기지 않을까요.
그러면 언젠가는 덜 예리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ㅎㅎ
사실 이건 거짓말 좀 보탠 거고, 그냥 제가 그런 모습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아직 멀었어요)
저는 요즘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끝이 뾰족한 유리 샹들리에 밑에 서 있는 느낌이라
덜 예민하고 덜 예리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모두가......

댓글
  • 꿈꾸는새벽 2017/06/20 09:23

    좋은 말씀입니다.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갖고, 남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사람이 되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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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빨간냄비 2017/06/20 13:12

    공감합니다. SNS시대를 향해 리트윗되는 유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일부 '독설을 위한 독설'엔 알맹이 대신 창 끝만 남더군요.

    (9J107q)

  • 등려군 2017/06/21 15:41

    이렇게 쓴 다음날인 오늘 바로 또 공격해버렸네요...... 좀 더 세련되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예요......
    '상대방이 나쁜 의도로 그랬을 리가 없다'를 전제로 공격이 아닌 손을 내미는 듯한 말투로 말하기, 참 어렵습니다ㅠㅠㅠ
    당장 그 순간에는 내가 기분이 나빴으니 상대를 무안주고 싶은 욕구가 치솟아서 그런 배려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 같아요.
    "네가 나쁜 의도로 말했을 리 없다는 건 알지만 사실 나에겐 그렇게 들려서 지금 약간 당혹스럽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그렇게 들릴 수 있다고 생각해. 그 표현보다는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말해보는 건 어떨까?"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저는 사실 피해를 입거나 다른 사람의 무례한 한 마디를 들었을 때 바로 쏘아붙이는 것에 특화된 사람이라,
    집에 와서 '아, 이렇게 말했으면 시원했을텐데!'하고 후회하는 감정은 잘 느끼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제가 한 말에 제가 찔리는 경우가 왕왕 생깁니다.
    스스로의 야박함, 잔인함에 몸서리치는 경우가 많아요. 사이다같은 거 별로 만들고 싶지 않은데...
    특이하게도 남자친구에게는 신경을 안 써도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대화 방식으로 말하는 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데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그게 잘 안되네요. 인류애가 부족한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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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라타운 2017/06/21 23:09

    좀 감성적인 멘트를 중2병으로 몰아가는 것두요~ 그런게 제 취향은 아니지만 제가 가치평가할게 아니라고 생각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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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ㅁㅈ이 2017/06/21 23:23

    아... 신기하죠. 이 글을 먼저 봐더라면 그리 날카롭고 예민하게 행동하지 않았을텐데, 늘 좋은 글은 뒤늦게 제 뒤통수를 치네요. 요즘 저런 여유가 나한테 없다는 걸 아주 많이 느껴요. 옛날엔 어지간하면 화내는 모습이나 짜증내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보살이란 별명도 있었는데. 지금은 누가 톡 터치만 해도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싸우자!!! 가 되었네요. 마음의 여유를 찾아,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무던한 사람이고 싶네요. 글 잘 읽었어요^^

    (9J107q)

  • 그럴수도있재 2017/06/22 04:53

    그래서 제가 이 닉을 만들었어요.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말고 그냥 그럴수도 있다고 너그럽게 맘 먹자고요.  나에게나, 남에게나.

    (9J107q)

  • 낱말 2017/06/22 10:39

    여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의 스트레스가 저런식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건강한 사회가 되서 여유로운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9J107q)

  • B2222 2017/06/27 02:36

    김수영 시인이 연상되는 성찰입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등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9J107q)

  • Arund 2017/06/27 02:42

    이글은 언제나 다시보고 상기해야겠습니다
    저는 어쩌다가 저랑 가치관이 맞지 않는...사람들에게 무례하고 이기적이고 게으르고 모든면에서 제 주관적으로 떨어지는 친구가 생겼습니다
    전 그 친구가 사회에서 일반인 코스프레 정도는 할수있도록 도와주고 이끌어주려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말로만 희망사항을 말하고 행동으로 실천을 안하는 모습에 전 실망을 했었고 전 점점 그 친구를 도와주는 방식이 공격적이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제 행동이 그 친구에게 어떻게 다가갔을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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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잎바라기 2017/06/27 03:37

    좋은 글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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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rbyeot 2017/06/27 04:18

    제목이 참 명쾌합니다. 촌철살인보다 시원함이 느껴지네요. 잘 읽고갑니다.

    (9J107q)

  • 바삭스프링롤 2017/06/27 04:41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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