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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작은 쓰레기가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두 번의 우연이 겹쳤다.

첫 번째는 '정재준'의 집들이 날에, 너무나 외우기 쉬웠던 현관 비밀번호를 내가 외웠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배달음식을 시킨 정재준이, '필통'에서 현금을 꺼내 계산했다는 것이었다.

오만원권이 수두룩했던 그 필통 안 모습은, 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나는 들키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쓰레기였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외근을 나가는 척하고 정재준의 집으로 잠입한 것이다.

필통은 손쉽게 발견했고, 안에 있던 오만원권도 모두 챙겼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1분도 안 되었다. 외근이 내 알리바이가 되려면 최대한 빨리 도망가야 했다. 
한데, 급히 현관문으로 달려가 신발을 신던 나는 순간적으로 멈춰섰다.

방을 어질러놓고 가야 하나??

도둑이 들었는데, 곧바로 필통 안의 돈만 가지고 갔다? 이건 누가 봐도 면식범의 소행이 아닌가? 그렇다면 용의자는 크게 좁혀진다.

" 이런 씨...! "

나는 얼른 신발을 벗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옷장 문을 열었다. 한데 그 순간,

[ 삐 삐 삐-. . . ]

" ?! "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가 새하얘진 나는 얼른 옷장 안으로 몸을 숨기려 했지만, 이런 씨! 칸막이 옷장의 공간이 너무 작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침대 뒤로 급하게 몸을 던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눈앞이 아찔해졌다. 뭐라고 말하지? 왜 여기 있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지? 필통을 확인하겠지? 젠장! 끝장이다!
한데,

" 콜록! "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여자였다. 
정재준이 아니다? 누구지? 엄마인가? 애인? 
만약 정재준이 아니라면, 어떤 변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화장실이 급해서 들렀다고 하고, 돈을 몰래 필통에 다시 돌려놓는다면? 

나는 슬며시 침대 너머로 상대를 확인했다. 

" ?! "

홍혜화? 
홍혜화가 왜? 둘이 몰래 사귀는 사이였었나? 전혀 그런 티가 없었는데?
머릿속이 복잡한 그때, 어떤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쳤다.

설마, 홍혜화도 정재준의 필통을 노리고??

가능성이 있었다. 집들이 날 홍혜화도 함께 있었으니까.
곤란해졌다. 만약 필통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바로 떠날까? 아니면 방을 뒤질까? 마주치게 되면 뭐라고 해야 하지? 

한데, 내 걱정과는 달리, 홍혜화는 필통 쪽으로 가지 않았다. 곧장 냉장고로 향했다.

" ? "

냉장고를 연 홍혜화는, 안에 들어 있던 병 2개를 꺼냈다. 술 좋아하는 정재준이 항상 챙겨놓던 '숙취해소 음료'였다.
가방을 열어 그중 하나를 챙겨 넣고, 나머지 하나를 그 자리에서 따서 한 모금 마시는 홍혜화. 
나는 황당해졌다. 설마, 고작 저걸 훔치려고? 근무시간에 빠져나왔다고?

한데 다음 순간, 나는 깜짝 놀라 숨을 죽여야 했다.

홍혜화가 가방에서 따로 꺼낸 뭔가를, 그 음료에 섞어 넣는 것이다! 
그녀는 음료 뚜껑을 다시 닫아 냉장고에 돌려놓고, 유유히 집을 빠져나갔다.

" 도대체 무슨...? "

나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가능성을 떠올려봤다.
작게 보자면, 설사약 같은 수준의 앙갚음.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보자면...독살.

나는 그녀가 넣은 음료를 빼내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보았다.

" 아몬드...?! "

순간, 청산가리에서 시큼한 아몬드 향이 난다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의 목적은 독살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왜? 홍혜화가 왜 정재준을? 무슨 원한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건 둘째치고, 일단은 지금의 내 상황이 곤란했다. 
이걸, 어쩐단 말인가??

만약 이대로 모른 척 나가버리면? 언젠간 정재준이 죽는다. 혹시 그렇다면 내 도둑질 행위도 영원히 묻히지 않을까?

" ... "

내가 그 정도까지 쓰레기인가? 돈 몇십에 사람 목숨까지 무시할 정도로
...옘병!

그 정도 쓰레기는 아니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변기에 음료를 쏟아부었다. 병의 내용물을 깨끗히 씻어내고 물로 채운 뒤에 다시 냉장고로 돌려놓았다.

" 아, 망할.. "

돌려놓는 김에, 필통 안에 오만원권도 돌려놓았다. 찜찜해서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왠지, 무엇이라도 엮이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나는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긴장한 얼굴로 홍혜화의 모습을 살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업무를 보고 있는 홍혜화. 바로 옆자리의 정재준을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도대체 저 여자는??

" 최무정이! 뭐 하느라 이렇게 늦었어?! "
" 아 예..거래처 갔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서..죄송합니다. "

나는 김부장의 타박을 대충 얼버무리며 얼른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홍혜화를 힐끔거렸다.
그녀는 왜 정재준을 죽이려고 하는 걸까? 만약 정재준이 죽지 않으면, 다른 시도를 계속할까? 
말을 해봐야 하나? 누구에게? 정재준? 홍혜화?

" 무정아. "
" 어?! "

나를 부르는 정재준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다.

" ? 뭘 그리 놀라? "
" 아니.. "
" 오늘 저녁에 혜화 송별회 있어. "
" 뭐? 송별회? "

나는 놀란 눈으로 홍혜화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 집안 사정상 이번 달까지만 일하기로 해서 말이야.. 오늘 시간이 좋아서 미리 송별회 하려고. "
" 아... "

너무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살인을 설계하고 일을 그만둔다? 게다가 송별회라면 술을 마시게 되지 않겠는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가 내가 알던 홍혜화가 맞나?

.
.
.

송별회 장소는 홍혜화가 결정한 정육 식당이었는데, 마침 정재준의 집 근처였다. 모든 것이 계획적이었다. 
그녀는 은글슬쩍 정재준에게 술을 많이 권했고, 끝나고 따로 2차를 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적극적으로 정재준과 나를 붙잡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내게도 '역할'이 주어졌음을 인지했다. 나는 마다치 않았다.
그녀가 제안한 2차는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술을 사서, 가까운 정재준의 집에서 한잔하자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얼마 먹지도 않은 술이 바싹 깨는 것을 느끼며, 정재준의 집으로 향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먼저 들어가는 정재준, 그 뒤를 따르는 홍혜화를 보며 나는 속으로 말했다.

네가 준비한 독은 내가 없앴어. 재준이는 죽지 않아. 그럼 이제 어쩔 거야?

나는 그녀의 당황하는 모습을 기다렸다. 
하지만, 당황하게 된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 아으~ 머리야!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 아~ 머리가 너무 아퍼... "

그녀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앓는 소리를 내었고, 그것은 정재준에게 어떤 대답을 불러일으켰다.

" 괜찮아? 숙취해소 음료 있는데 그거라도 줄까? "

" ?! "

내 두 눈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게 뭐지? 이게 도대체 무슨 전개지?

정재준은 곧장 냉장고에서 숙취해소 음료를 꺼내어 홍혜화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내가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음료 뚜껑을 따고 거침없이 음료를 들이켰다. 자신이 독을 타놓은 음료를!

" ?! "

다음 순간, 화들짝 놀라며 손에 든 병을 확인하는 홍혜화. 그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 이, 이게...? "

일순간, 놀란 얼굴로 정재준을 돌아보는 홍혜화! 
하지만 정재준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 얼굴에서 아무런 낌새를 읽어내지 못했는지, 그녀의 얼굴은 더욱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 ... "
" ...! "

내 얼굴은 분명 이상했을 것이다. 나는 전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눈을 마주치자마자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버렸으니까.

" ... "

그녀는 곧, 가라앉은 톤으로 이렇게 말했다.

" 아..나 숙취 때문에 아무래도 안 되겠어. 미안한데 오늘 그만 가봐야겠어.. 미안해 내가 말 꺼내놓고.. "
" 뭐? 아~ 참...어쩔 수 없지. 쩝. "

술 좋아하는 정재준이 입맛을 다시며 나를 돌아보았다. 둘이서라도 마실까 하는 물음이었지만,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 아 그러면, 내가 바래다줄게. 같이 나가자. 다음에 한잔하고~ "
" 그래.. "

아쉬워하는 정재준을 두고, 나는 홍혜화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 ... "

그녀는 말이 없었고, 나도 말을 걸지 못했다. 
큰길로 나가기 위해 골목길을 걸어가는 동안,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말을 해봐야 할까? 왜 그랬느냐고 물어봐야 할까? 그녀는 또다시 정재준을 죽이려고 시도할까? 아니, 정재준과 관련되어 죽으려고 시도할까?

" ... "

나는 결국, 물어보기로 했다. 만약 정재준을 죽이려는 거였다면 묻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살이 목적이라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 너 재준이하고 무슨 일 있어? "
" ... "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 너...뭐 알고 있는 거 있어? "

그 자리에 멈춰 서, 내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나는 고백했다.

" 실은 오늘 외근 나갔다가.. 재준이네 집에 휴대폰 배터리 놓고 갔던 게 생각나서 들렀었거든. 그때...널 봤어. "
" ! "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무슨 일이야? 도대체 왜...자살을 하려는 거야? 거기서... "
" ... "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굳은 얼굴로 그녀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 ...정재준 때문에 아이를 유산했었어. "
" 뭐? "

유산? 홍혜화가 임신을 했었다고??

" 2년 전에 만나던 남자의 아이였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었지... 그 사람은 아내가 있었으니까. "
" ! "
" 그때, 재준이가 장난으로 내 의자를 빼서 넘어진 적이 있었어. 정말 우습게도, 고작 그런 일로도 유산이 되더라? "
" 아.. "
" 그냥 장난이라는 말에, 더 화를 낼 수가 없더라. 어차피 나도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지우려던 아이였고, 아무도 모르는 아이였으니까... 그런데. "

홍혜화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 그런데...자꾸만 그 애 생각이 나.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가 않아. 오히려 점점 더 선명해져. 아무렇지도 않게 정재준의 얼굴을 보다가도, 가끔씩 울컥 화가 치밀어올라. 쟤가 내 아이를 죽였구나! 쟤 때문에 내 애가 죽었구나! 그런데 정재준은 기억조차도 못해.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거든. 그래서 난 더 화가 나. "
" ... "

나는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 그런데 왜 네가? 정재준을 죽이는 게 아니라 왜 네가 죽으려고.. "
" ... "

홍혜화의 대답은 느렸다.

" 나를 미친 여자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정재준을 살인자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난... 정재준을 '진짜 살인자'로 만들고 싶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말이야. "
" ... "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적이 그게 다는 아니었다.

" 그리고...자살은 보험금이 나오지 않거든. "
" 뭐? "
" 우리 집에 돈이 많이 필요해. 내 동생의 병도 치료해야 하고, 집안 빚도 갚아야 해. "
" 아.. "
" 나는 이제 너무 지쳤어... 내 목숨 하나로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
" ... "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에 나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 모른 척 좀 도와줘. 너 돈 좋아하잖아. 성공하면 내 보험금에서 천만 원 떼줄게. 더는 안 돼. 빚 때문에.. "
" 뭐? "
" 네가 돕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어차피 계속할 거야. "
" ... "

나는 고민했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나는 돈을 좋아했고, 그녀가 계속한다면 막을 수도 없었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
.
.

" 그렇게 됐다. 그러니까, 혜화한테 가서 진심으로 사과를 빌어봐라. "
" ... "

나는 모든 사실을 정재준에게 털어놓았다. 나는 돈 천만 원에 그런 짓까지 할 쓰레기는 아니었나 보다.
 
만약 정재준이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홍혜화도 포기하리라 생각했다. 그녀가 용서하진 못하더라도, 경계심을 가진 정재준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수가 없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한데,

" ...사과 안 해. "
" 뭐?? "

정재준의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다.

" 무슨 소리야? 사과를 안 하겠다니?! 네가 화가 난건 이해하겠는데, 지금 그렇게 감정적으로 나갈 게 아니라- "
" 아니. 그런 게 아니야. "

정재준은 굳은 얼굴로 내게 고백했다.

" 난... 홍혜화가 죽었으면 좋겠어. "
" 뭐야?? "

이건 또 무슨?! 뜻밖의 대답에 머리가 복잡해질 때, 정재준이 말했다.

" 3년 전 일이야. 홍혜화는 기억도 못 하겠지.. 퇴근길에 너무 급하다고 한 번만 차를 태워달라고 하더라. 부모님이 쓰러져서 급히 가봐야 한다고 말이야. 그때 나는 여자친구와 선약이 있었지만, 홍혜화를 태워줬어. 여자친구에게는 택시를 타고 오라고 했지. 그런데...그 택시가 교통사고가 났어. "
" 뭐..? "
" 알아. 홍혜화가 그 애를 죽인 건 아니야. 교통사고가 원인이지. 하지만 지금도 가끔 생각해. 만약, 내가 원래 계획대로 그 애를 마중 나갔다면 어땠을까? 그럼 그 애는 택시를 타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
" 아... "

정재준에게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그렇다면 홍혜화를 미워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 나중에 알았어. 부모님이 쓰러지셔서 급히 가봐야 한다던 홍혜화의 그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걸. 홍혜화는 단지 놀러 가던 길이었다는 걸... "
" 아...! "
" 잊으려 했어. 그 애가 죽은 건 홍혜화 탓이 아니야. 교통사고 문제야. 그런데 가끔은...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홍혜화는 기억도 못 하겠지만 말이야. "

나는 아연실색했다. 이 무슨 영화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한 명은 여자친구의 죽음을, 한 명은 아이의 유산을. 서로가 기억도 못 하는 일로 원한을 가진 사이였다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던 그때, 정재준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나를 살인자로 만들고 죽겠다고? 그렇게 하라고 해. 혜화가 죽든 말든 나랑 상관없어. "
" 너... "
" 대신, 내게 죄를 뒤집어씌우진 못 할 거야. 네가 나를 좀 도와줘. "
" 뭐?? "
" 혜화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 죽으려고 하는지 알아봐 줘. 나는 이천만 원을 줄게. "
" ... "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
.
.

나는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해봤다.
둘 사이에 이런 원한이 있었던 거라면, 상황을 멈추기는 어렵다.
그럼 난 누구를 도와야 하는가? 

목숨을 잃게 되는 홍혜화?
이천만 원을 약속한 정재준?

" ... "

정답은 정재준이었다.
홍혜화의 계획은 이미 정재준에게 노출되어 있다. 그녀의 계획이 성공해서 보험금을 타내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정재준이 계획을 파헤치기는 쉽다. 내 도움이 있다면 더더욱. 게다가 이천만 원을 받아낼 방법도 확실하다.

나는, 홍혜화에게 문자를 남겼다.

[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되는데? ]

.
.
.

홍혜화의 계획은 액상 니코틴을 이용한 살인이었다. 정재준이 건넨 음료에서 액상 니코틴이 나오게 만드는 것.
그녀가 내게 부탁한 것은, 정재준이 액상 니코틴을 구매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내 전자담배를 핑계로 심부름을 부탁하고, 나중에는 시치미를 떼달라는 것. 그러면 액상 니코틴의 구매기록까지 정재준에게 남겨져서 영락없이 살인 용의자가 될 거란 계획이었다.

물론, 나는 이 모든 계획을 정재준에게 알려줬다.

" ...알겠어. 그렇게 따르는 척해줘. "

우리는 일부러 홍혜화가 보는 앞에서 합을 맞췄다.

" 재준아. 너희 집 근처에 전자담배 가게 있지? 집에 가는 길에 거기서 액상 니코틴 좀 사줄래? 돈은 내가 줄게. 우리 집 근처에는 없네. "
" 그래? 알았어. "

그리고 이틀 뒤, 점심시간에 잠시 사라졌던 홍혜화가 내게 신호했다.

' 오늘 밤. '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정재준에게 말했다.

" 오늘 퇴근하고 치맥이나 달릴까? "

뚫어지게 눈동자를 마주쳐오는 내 눈빛을, 그도 읽어낸 듯했다.

" ...그럴까? "
" 혜화야 너도 가자? "
" 응? 별로 생각 없는데.. "
" 한가하면 같이 가자. 집에 일찍 가봐야 뭐하냐? "
" 음~.. 알았어. "

나는 형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보고, 셋이서만 호프집으로 향했다.

별것 아닌 이야기로 웃고 떠드는 정재준과 홍혜화의 동상이몽 속에서, 나는 홀로 긴장감을 숨기느라 애썼다. 
억지로 웃으며 분위기에 맞추는 내 모습이 분명 어색했겠지만, 생각해보면 어차피 둘 다 날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없었다.

저번과 같이, 자연스럽게 정재준의 집으로 2차 계획이 잡혔다. 그 골목길을 걸으며, 나는 새삼 우리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셋 모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 ... "
" ... "
" ... "

홍혜화는 죽고, 정재준과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놀라는 척한다. 그것이 몇십분 뒤의 미래다.

홍혜화는 정재준을 저주하며 죽어가겠지만, 원하는 바를 이룰 순 없다. 내 증언은 그녀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고, 핸드폰에 저장된 메시지들이 그녀의 조작을 입증할 테니까. 
정재준은 손 하나 까딱 않고서 복수를 할 수 있고, 그 행동에 아무런 죄책감도 남지 않는다.
나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이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쥐게 된다.

나는 괜히 홍혜화를 힐끔거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까? 숙취해소 음료를 내가 먼저 버려버리면 되지 않을까?

" ... "

아니. 어차피 홍혜화는 보험금 때문에 죽을 작정이다. 지금 내가 막는다고 해봤자 죽을 때까지 시도하겠지.

어차피 막을 수 없는 거라면, 차라리 이천만원이라도 챙기는 게 현명한 판단이다. 혜화에게는 미안하지만...정재준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
.
.

정재준의 집에 도착한 우리는 새우깡 하나를 까놓고 캔맥주를 땄다.
홍혜화의 계획은 발전해 있었다.

" 새집이라 그런가 인테리어가 좋다~ 좀 찍어놔야겠다~ "

자연스럽게 폰으로 동영상 녹화를 킨 그녀는, 그것을 끄지 않았다. 
그리고 머리를 짚으며 예정된 연기에 들어갔다.

" 아~ 어지럽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

나는 나도 모르게 정재준을 보았고, 그의 얼굴이 살짝 굳는 걸 보았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일어섰다.

" ...머리 아퍼? 있어 봐 "

나는 정재준이 냉장고로 향하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독약을 꺼내러 가는 그의 심정은 어떨까? 그것이 홍혜화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건네는 그의 심정은?

그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 자. 이거라도 좀 마셔. "
" 어~ 땡큐! "

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지금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게 된다고? 정말로?
난 숨도 쉴 수 없는 상태로 홍혜화를 바라보았고, 병을 만지작거리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 ... "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누구를 떠올리고 있을까? 망설이고 있을까?

이 순간, 우리 셋 사이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너무 길어져 어색해질 지경일 때, 홍혜화의 손이 드디어 움직였다.
그녀는 뚜껑을 열고, 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두 눈을 감고, 음료를 모두 들이켰다. 그리고 예정대로, 두 눈을 부릅떴다.

나는 눈을 돌리고 싶어졌다.
한데,

" 뭐야...? "

홍혜화의 얼굴은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멀쩡했다!

의문스러운 눈동자로 내 표정을 살피다가, 급히 정재준을 돌아보는 그녀!
나 역시 홍혜화를 보다가, 정재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 "

정재준은 방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고 중얼거렸다.

" 진정한 복수는 용서라고 하더라. "

" 아...! "

나는 그것으로 정재준의 마음이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홍혜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으며, 다시금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말이 없던 정재준은, 캔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켠 뒤에 그 힘으로 입을 열었다.

" 내가 용서할 수 있다면, 혜화도 용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
" ... "

나는 그 말에 가슴이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담긴 말이었다. 이 상황의 유일한 해결책인 말이었다.
정재준의 시선이 홍혜화의 대답을 기다렸다.
굳은 얼굴의 홍혜화는 입술을 깨물다, 캔맥주를 들이켰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 용서할 수 없어. "
" 아...! "

내 입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흘렀다. 도대체 그녀의 아픔은 얼마나 큰 것인가?
나는 정재준을 돌아보았다. 묵묵하던 그도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 ...사실은 나도 용서할 수 없어. "
" 뭐? "

내 얼굴은 더욱더 안타까워졌다. 왜 여기서 정재준이 맞불을 놓는단 말인가? 

답답하게 입을 꾹 다문 둘의 얼굴을 살피며, 내가 나설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켠 뒤, 허심탄회하게 입을 열었다.

" 이왕에 이렇게 된 거, 다 털고 그만하자. 혜화 네가 모르는 재준이의 사정도 있어. 3년 전에 네가- "

나는 상황을 설명하면 홍혜화의 마음이 변하리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정재준처럼 기억하지도 못하는 새에 잘못을 저지른 걸 깨닫는다면, 정재준처럼 먼저 용서의 손길을 내밀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 우리 둘이 결혼한다. "
" ...? "

갑자기 들려온 뜬금없는 그 말에, 난 내가 잘못 들었나 내 귀를 의심했다. 
멍해진 얼굴로 정재준을 바라보자,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 혜화랑 나, 결혼한다고. "
" ... "

나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홍혜화를 살폈지만, 정재준의 말은 사실이었다.

" 뭐...라고? 너희 둘이 결혼을... 한다고? "

나는 일순,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짧은 순간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려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일까?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왜 둘이 결혼을 하지? 그럼 여태껏 했던 짓거리는 다 뭐지??

" 우리 둘이 몰래 사귄 지 1년이 넘었어. "
" 뭐?? "

나는 태어나서 가장 놀랐다. 

" 우린 서로의 아픔을 다 알고 있었어. "
" 뭐라고?? "
" 그 공통점으로 우린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 있었던 거야. "
" 뭐, 뭐?? "

번갈아 말하는 두 사람을 향해, 내 얼굴은 쉴새 없이 물음표를 띄웠다.

정재준이 말했다.
" 그리고 우리는 그 아픔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지. "

홍혜화가 말했다. 
" 그 방법은 결국, 용서를 하느냐 복수를 하느냐였어. "

정재준이 말했다.
" 그래서 우린 서로 기회를 주기로 했지. "

홍혜화가 말했다.
" 하지만 끝내, 용서가 아닌 복수를 할 수밖에 없었어. "

나는 결국, 언성을 높였다.
" 도대체 무슨 소리야?! 알아먹게끔 말을 하라고! 너희 둘이 지금까지 장난을 친 거야 뭐야?! "

둘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홍혜화가 나를 향해 말했다.
" 넌 정말, 끝까지 기억을 못 하는구나? 2년 전에 네가 내 의자를 뺐던 거.. 기억 안 나? 그거 너였잖아. "
" 뭐? "

정재준이 나를 향해 말했다.
" 난 적어도 네가 기억은 하고 있을 줄 알았다. 고작 3년 된 일인데 말이다. "
" 무, 무슨? "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당황하는 나를 보며 둘은 담담히 말했다.

" 우리가 왜 너를 용서 못 하는지 알겠어? 우리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그 끔찍한 고통이, 너에게는 기억하지도 못할 장난이고, 거짓말이었던 거야. "
" 그래도 우린 마지막으로 용서해보고 싶었어. 따지고 보면 네가 저지른 일들은 사소한 잘못일 수도 있으니까... 너에게 기회를 여러 번 줬어. "
" 무,뭐...? "

" 청산가리를 버리는 모습을 보고, 네가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만약에 아까, 혜화가 독을 먹는 것을 말렸다면...어쩌면 우리는 너를 용서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넌 마지막에 돈을 택했지. "
" 도대체 무슨! 너, 너희들 지금?! "

나는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긴박감을 느꼈다.
한데,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나는 비틀거리고 말았다!

" ?! "

" 수면제야. 냉장고로 향한 재준이에게 한눈이 팔렸을 때, 내가 네 맥주를 바꿔치기했어. "
" 뭐, 뭐?! "

눈앞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둘의 음성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 네가 쓰러지고 나면, 나는 회사 사람들에게 동영상을 보낼 거야. 네가 내 집에 몰래 들어와서 필통 안의 오만원권을 훔치던 동영상 말이야. SNS와 인터넷에도 퍼트려야지. "

" 다음날 출근하지 않은 너는, 니코틴 원액을 이용해 자살한 모습으로 발견될 거야. "

" 네가 전자담배를 피우려고, 최근에 니코틴 원액을 구한 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 "

" 나는 네 자살을 보며, 내가 괜히 동영상을 올렸다고 자책하며 너에게 미안해하겠지... 따지고 보면 네 자살이, 내 잘못은 아니지만 말이야. "

" 우린 평생 잊지 않을게. 너와는 다르게. "


용서해줘! 다 기억할게! 제발 용서해줘!!

내 마지막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 뿐, 나오지 못했다. 나온다 한들, 이미 늦었겠지만.
댓글
  • 복날은간다 2017/04/16 07:31

    이 이야기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더니, 결국 감각이 멍청해졌네요. 이야기가 이야기처럼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항상 봐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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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요미★ 2017/04/16 07:47

    와.....  마지막 보고 다시읽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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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변인 2017/04/16 08:00

    오 영화 ㄷ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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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법의성 2017/04/16 08:13

    오와 예전 글쓰시던 느낌도 나고 좋은데요?복날님 글보면 연극이나 단편영화보던것 같던 그기분 정말 소재가 안떨어지시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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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이내린미모 2017/04/16 08:52

    와 대박이네요ㄷ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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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uke 2017/04/16 12:34

    정말 대단하네요.
    한가지 흠이라면 청산가리에서 나는 냄새는 아몬드 냄새와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생 아몬드 냄새라서 일반인들은 접해보기 어려운 냄새라고 하네요
    그 정도만 넘어간다면 정말 최고였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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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쏘와 2017/04/16 16:08

    최무정이 니코틴을 구매한 시기가 동영상이 퍼진 시기보다 빨랐던 것이 어쩌면 저 살인의 흠이 될 수 있겠네요. 그리고 니코틴을 구매한 것도 최무정과 홍혜화랑 짜고 정재준이 직접 니코틴을 구매하는 걸 유도했던 거였는데 니코틴 구매시기 이른것과, 니코틴 직접 구매자가 정재준이라는 것과, (정재준이 사는 곳이 아파트라면) 엘레베이터 cctv 영상 등을 이용해서 진짜 범인을 찾는 과정도 써주시면 재밌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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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잠흑곰 2017/04/16 16:46

    추가적으로 그..어..ㅠㅠ 작년 4분기정도부터 자살도 면책기간 2년 지나면 종신보험이든 정기보험 이든 사망보험금 지급이 됩니당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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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륜세준 2017/04/16 21:22

    세상에 우연에우연이 겹치는 이야기는 개연성이 없어보여 원래 좋아하지 않지만 복날님 이야기는 깔끔하게 읽히네요.... 놀랐어요. 작가들이 "우연"이라는 코드를 잘 사용한다면 이런 글도 나오네요!!  반전도 예상치 못했구요. 항상 잘보고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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