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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2019년 올해의 외국영화 Best 20 & 간단한 리뷰 (스포 포함, 초장문)



아무런 자격이나 권위는 없지만
영화 감상을 무척 즐기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2019년 올해의 외국영화 Best 20"을
선정해 보았습니다.
영화를 평가하는 제 나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걸작(傑作)은 별 다섯 개,
명작(名作)은 별 네 개 반,
수작(秀作)은 별 네 개,
이 정도면 추천할 수 있겠다는 별 세 개 반.
"올해의 외국영화 Best 20"에 오른
20편의 영화들 모두가 별 네 개 이상이며
1위~8위의 영화들은 별 네 개 반 이상입니다.
각 순위 사이의 차이는 정말로 미세합니다.
2019년은 한 해에 별 네 개 이상의 영화들을
20편 이상 만난 최초의 한 해로 기억되겠네요.
'올해'에서 올해의 기준은 개봉 시점입니다.
2018년 12/18일을 시작점으로
2019년 12/17일까지 개봉된 영화가 대상입니다.
영화제에서만 선보인 영화들은 제외합니다.
넷플릭스에서만 릴리스된 영화들도 제외합니다.
다큐멘터리 영화들도 제외합니다.
과거에 만들어졌다가 공식적으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봉한 영화들도 제외했습니다.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는 그래서 빠집니다.)
이 기준으로 올해 관람한 외국영화들을 세어보니
대략 150편 정도이더군요.
순위 선정은 당연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과 판단에 의한 것이므로
그 선정에 못마땅하신 점이 있다 할지라도
너그럽게 넘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순위는 역순으로 감독을 명시하고
간단한 코멘트를 첨가하겠습니다.
간단평은 글 전개의 편의를 위해 경어를 생략하며
20위~5위는 다소 짧게,
5위~1위는 조금 길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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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위) [블랙클랜스맨] (스파이크 리)
백인우월주의를 상대로 한,
여전히 유효한 투쟁에 대하여.
페이크다큐로 현실과 영화를 연결시키며 시작해
실제 다큐멘타리 영상을 보여주며 끝난다.
잘못된 수단이 올바른 목적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성공한 흑인으로서 흑백갈등의 경계에 선 론과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유대인인 필립을 통해
스파이크 리는 혐오와 분노의 시대를 향해
무수한 잽을 날린다.
그리곤 엔딩에서의 그 묵직한 훅 한 방.
이 영화의 아카데미 각색상 수상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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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위) [논-픽션] (올리비에 아사야스)
영화의 원제는 [두 개의 삶], 또는 [이중의 삶].
유형출판물의 삶과 무형출판물의 삶,
직업인으로서의 삶과 일상생활로 영위하는 삶,
픽션같은 삶과 논픽션의 삶의 절묘한 대비.
그리고 그 두 개의 삶 속에서
책도, 사랑도, 사람도 머뭇거리며 서성인다.
그 두 개의 삶이 양립가능한 것인지,
하나가 성할 때 다른 하나는 쇠할 수 밖에 없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정치와 문학과 예술을 주제로 한
인물들 간의 토론은 지적이며 유쾌하다.
적절한 유머에 진한 휴머니즘까지 바닥에 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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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위) [와일드 로즈] (톰 하퍼)
무명 아티스트의 고군분투 성공담이란,
뻔한 스토리를 따라갈 듯 보였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또렷하게 말할 줄 아는 힘과
제시 버클리, 줄리 월터스 두 배우의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리는 연기로
이 음악영화는 자신만의 분명한 색깔을 띤다.
미국 내슈빌에서 만개해야 했으나
엉뚱하게 글래스고에 던져진 들장미는
끝내 세 개의 코드로 진심을 노래한다.
뮤직과 뮤지션이,
노랫말과 노래하는 사람의 삶이
완벽히 하나로 겹쳐졌을 때 전해지는 특별한 감동.
영화의 엔딩, Glasgow(No Place Like Home)은
개인적으로 선택한 올해 최고의 주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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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위) [그린 북] (피터 패럴리)
인종적 약자인 셜리와 계급적 약자인 토니의
갈등, 충돌, 이해, 포용,
그리고 우정과 연대로 이어지는,
뻔한 수순을 밟아나갈 것으로 처음부터 예상된다.
그러나 그 뻔한 과정과 결말을
전혀 뻔하지 않은 작법과 화술로 그려 나감이
이 영화의 황홀하고도 압도적인 매력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죠."
셜리의 진심어린 용기가 토니를 바꾼다.
토니의 진심어린 수용이 셜리를 바꾼다.
그리고 그들의 변화는
삶의 위엄과 품위(dignity)를 만든다.
다만, 영화의 수준에 비추어 과한 상복에
언젠가부터 이 영화가 미워지는, 이상한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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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위) [칠드런 액트] (리처드 이어)
이언 매큐언의 원작.
그는 삶의 한 순간, 한 번의 선택과 행동이
당사자와 주변인들의 삶에
얼마나 큰 파장을 야기하는가에 천착해왔다.
이 영화에서도 그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일중독자에 완벽주의자로서
모두의 신뢰와 존경을 받던 한 판사가
누군가로부터 곤혹스러운 질문을 받고
그 질문에 답을 해야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마주하게 되는 딜레마를, 이 영화는 다룬다.
잔잔하면서도 당당한 표면과
근심과 후회와 고뇌로 요동치는 내면을
엠마 톰슨 아닌 누가 감히 연기할 수 있었을까.
당신의 기울어진 어깨에 내 따뜻한 손을 얹고
느긋하게, 천천히, 평화롭게
살고 사랑할 것을 당부하고 기도하니
그대 이제 눈물을 거두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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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위) [콜드 워] (파벨 포리코브스키)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시대를 얼룩지게 만들었던
15년 냉전의 세월을 관통했던 사랑의 이야기.
멈추라고 말하는 사랑은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억압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사랑은 더 결속된다.
멈추라는 말이 잦아들 때, 억압이 점점 사라질 때
사랑은 오히려 주춤하며 당황한다.
그게 바로 사랑의 비극적 아이러니.
영원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갈망하던 사랑,
그 누구도 빈자리를 대신할 수 없었던 사랑,
너무도 사랑하지만 토해내고 싶었던 사랑은
그들을 옥죄던 정사각형의 프레임을 벗어나
영겁의 시간으로 향한다.
아무런 억압이 없는 그 곳으로,
바람소리가 부르는 그 곳으로,
풍경이 더 좋은 그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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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위)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요르고스 란티모스)
콤플렉스로 가득한 절대권력자를 가운데에 두고
욕망으로 가득한 두 여인이 벌이는 암투의 역사.
권력을 미끼로 사랑을 갈구하는 앤,
사랑을 미끼로 권력을 갈구하는 애비게일,
권력과 사랑의 우위를 자만한 사라.
눈을 호강시키는 미장센과 의상 속의 인물들은
광각렌즈의 왜곡된 화면 속에서
오히려 왜소하고 초라하게 보인다.
당연하게만 느껴지던 권력의 힘을 실감하고
진정한 사랑을 잃는 순간
앤은 무심한 권력자로 다시 태어난다.
애비게일을 무릎 꿇리고 머리채를 휘어 잡은 채.
엠마 스톤의 매력을 무색케 하는 레이첼 와이즈.
그런 레이첼 와이즈 위에 우뚝 선 올리비아 콜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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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위) [포드 V 페라리] (제임스 맨골드)
다채로운 앵글로 속도감을 잡아내는 촬영은
모터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들 중 최고.
아드레날린을 끊임없이 솟게 하는 배기음과 함께
스크린 위에서 펼쳐지는 레이스카들의 경쟁에
관객들은 넋을 잃을 수 밖에 없다.
켄 마일스가 우승을 위해
반드시 도달해야 했던 7,000 RPM의 경지란...
꿈과 열정이 신념, 집념과 손을 잡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완전히 연소시켜야
비로소 이를 수 있는 경지,
승리와 패배의 구분, 성공과 실패의 구분,
심지어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무의미해지는 경지,
세상의 잣대와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지,
그럼으로써 성취 후 곧바로 찾아올
고독과 허무까지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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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위) [나이브스 아웃] (라이언 존슨)
감독 스스로 10년 동안 다듬었다는 시나리오는
전문적 추리작가의 추리물만큼이나 완성도가 높다.
난민 문제, 인종 문제, 이념의 문제에 대한 풍자를
멋지게 녹여내는 블랙코미디로서도 손색이 없다.
편집은 완급을 조절함에 능란하다.
메시지를 전함에 있어서도 소홀하지 않다.
선악의 맹목적 이분법에도 함몰되지 않다.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엄청난 이익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자기도 모르게 발현되는 선한 본성과 인간다움이
마침내 진실의 물줄기를 바꾸는 서사는
욕망과 이기심으로 얼룩진 세상에 용기있게 맞선다.
영화의 엔딩, 카메라 앵글 속 인물들의 배치에는
여전히 선(善)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존중과 신뢰가 함께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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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 [미드소마] (아리 에스터)
감독의 전작 [유전]의 외연적 확장.
한 가계 안에 머물던 비극은
백야(白夜)의 광활한 대지로 뛰쳐나가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공포영화들 중
가장 밝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지옥도를 보여준다.
규율, 행동, 생각 뿐만 아니라
감각과 감정까지 공유하는 공동체 안에서
권태와 무책임의 배신은 처절한 응징을 당하고,
한 관계의 파탄은 다른 관계의 파국으로 전이돼
한 사람의 내면 전체를 붕괴시킨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관점에서 용인할 수 없는,
다른 문화의 관습과 풍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신랄한 주제의식,
인사이더 집단이 아웃사이더 집단을
수용하고 배척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절묘한 묘사,
인간관계의 작용과 반작용의 역학에 대한 해부,
다양한 층위에서 긴밀하게 엮여있는 서사의 구조.
천재감독의 다음 행보가 궁금한 건 당연한 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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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쿠엔틴 타란티노)
1969년의 할리우드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세트, 소품, 의상, 미술, 음악으로
치밀하고 섬세하게 구현된 이 영화의
기본적인 정조는 애상(哀想)이다.
할리우드의 전성기를 만들었던 영화인들에 대한
따뜻한 존경과 쓸쓸한 위로가 담겨 있으며
영화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전반에 깔고 있다.
저물어가는 스타들의 손에 의해
샤론은 마침내 가십과 죽음의 자리에서 벗어나
예술과 생명의 자리로 복권(復權)된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 안겨주었던
통쾌한 영화적 카타르시스는 숭고한 변주를 통해
영화에 대한 애정과 꿈이 가득했던 영화인을
다시 우리들의 곁으로 돌려주고,
그리하여 우리들의 영화는 다시 지켜진다.
릭과 샤론이 비로소 악수와 포옹을 나눈 후
다정한 담소를 나누면서 샤론의 집으로 들어가면
이제 프레임은 텅 빈다.
그리고 바로 그 텅 빈 프레임에서
우리들의 영화는 다시 이어지고
우리들의 영화는 다시 계속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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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위) [아이리시맨] (마틴 스코세이지)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다.
집요하게 반복되는 대사는 "It is what it is.".
삶의 자발적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
삶의 비자발적 선택을 체념으로 수용하기 위해
러셀도, 지미도, 프랭크도 이 말을 한다.
그리고 이제,
죽음의 그림자가 죽음을 앞둔 그들에게
똑같이 말을 걸어온다. "It is what it is."
영화의 엔딩...
요양병원의 병실에서 신부와의 대화를 마친 후
프랭크는 병실을 떠나려는 신부에게
문을 조금 열어두라고 당부한다.
그렇게 열려진 문틈은
미국의 현대사에 대한 평가의 여지인 동시에,
느와르풍의 갱스터 장르를 이용해
오욕으로 점철된 미국의 현대사를
여러 편의 장구한 서사시로 노래했던,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의 77세 거장이
자신의 서사시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으며 열어둔,
자신의 삶과 영화에 대한 평가의 여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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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위) [애드 아스트라] (제임스 그레이)
[지옥의 묵시록]과 [모비딕]을
레퍼런스로 상정한, 이 실존주의적 SF는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은 인물, 로이의
아버지를 찾으러 가는 길고 긴 여정을 통해
고독을 이야기한다.
그 고독은 한 인간의 실존적 고독과
무한한 우주에 유일한 지적 생명체로서 존재하는
인류 전체의 실존적 고독,
즉, 소우주의 고독과 대우주의 고독이다.
삶과 존재의 이유는 멀리 있지 않다.
사랑하고 탐구할 대상은 멀리 있지 않다.
고독을 극복할 수단도 멀리 있지 않다.
무한한 우주 못지 않게 크고 넓고 깊은 우주는
우리의 가슴 속에 심연처럼 존재한다.
없는 것을 찾고 있는 것을 놓치기엔
우리의 삶은 너무나 소중하다.
우리가 진정 향해야 할 별은
내 자신과 내 주변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리하여...
"I will live and love (right here, right now).
Sub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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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위) [경계선] (알리 아바시)
실로 기이하고 충격적, 나아가 엽기적이며
불편하고 불쾌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아름다움의 감동까지 선사하는 이 영화는
양립이 불가능한 지점까지 관객들을 끌고 간다.
불편함과 불쾌함은
개인적 편견과 사회적 통념에서 비롯되고
아름다움의 감동은
영화를 관람하는 과정에서 그 편견과 통념이
깨지고 부서지는 데서 근원한다.
북유럽의 민담을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판타지의 형식을 취하지만
판타지 특유의 미학적 접근을 버린 채
판타지를 범죄스릴러와 결합시킴으로써
아주 강력한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품는다.
동족이 범죄조직의 핵심적인 멤버임을 알았을 때
과연 티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인간이란 종족 전체를 향한 보레의 증오에,
사랑하는 상대의 도덕적 배신에
과연 티나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인간 전체를 향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인 채
인간의 세상에 여전히 머물지,
아니면 환멸의 세상을 등진 채
보레가 말했던 트롤들의 낙원으로 숨어들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티나의 선택이 어느 쪽이든
그녀의 행복과 안식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 바람은 티나의 희망인 동시에
우리 인류의 희망일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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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 [퍼스트 리폼드] (폴 슈레이더)
오염에 의해 잠식되는 지구와
질병에 의해 잠식되는 톨러의 몸은 완벽히 같다.
자신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들이
그가 만든 세상을 오염시키고 타락시킴에도
침묵으로 방치하는 신(神)에 대한 원망.
자신을 유일하게 지켜주던 신앙에 대한 회의로
순교의 길을 선택하는 한 성직자의 이야기.
신앙 속에서 구원을 찾았지만 끝내 실패한
한 목사에 대한 이야기.
충격적 반전의 엔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관객들의 몫.
"절망의 답은 용기"라는 톨러의 대사가 그 단서.
성경의 구절들, 일기를 통한 신과의 대화 속에서
희망을 찾았지만 끝내 절망만을 마주한 성직자.
스스로에 대한 단죄와
세상의 악에 대한 대속을 위해 순교를 택한 성직자.
그를 구원한 건,
세속의 사랑을 향한 용기였다고.
그런 그를 신은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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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 [아사코] (하마구치 류스케)
외모는 똑같지만 성격은 반대인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
과연 그럴까?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국가적 재난이
일본인들에게 안겨준 트라우마를
세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에 투영함으로써
재난 이후 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고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를 말하고자 하는,
깊고 깊은 속내를 감춘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자연을 하나하나 정복함으로써 문명을 일으켰고
자본주의의 시스템 안에서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자연이 안기는 재난에 여전히 무력한 인간들.
예측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전개 속,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다루는 테마를 품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새 집 베란다에 나란히 서서
폭풍으로 불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료헤이는 더럽다고, 아사코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료헤이는 언제라도 홀연히 떠날 수 있는
아사코라는 지진을 늘 불안해 하면서
다시 그녀를 사랑할 것이고,
아사코는 바쿠라는 존재가 남긴 여진 속에
다시 찾아올지 모를 또 다른 지진을 불안해 하며
료헤이 곁에 다시 머물 것이다.
그 선택은 잘못일까? 잘못은 없다.
그것이 삶의 아이러니이고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선택을 반복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숙명일지도 모를 테니.
두 번의 반복에도 똑같은 선택을 할 그들 앞을,
더럽고도 아름다운 강물이
도도하게 흐른다. 그 둘을 지켜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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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위) [조커] (토드 필립스)
[조커]는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배우의 영화다.
호아킨 피닉스를 염두에 두고 쓴 시나리오로
연기의 신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토드 필립스는
이 영화를 오롯이 호아킨 피닉스에게 맡긴다.
절망, 원망, 무력, 체념으로 가득한 삶이
공감이 부재하고 혐오가 들끓는 세상을 만나
분노의 광기로 옮아가는 과정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자신의 몸으로 체화시키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
인상적인 장면을 뽑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상적이지 않은 장면이 하나도 없으니까.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활활 불이 붙은 얼음,
그러나 절대 꺼지지 않을 불, 녹지 않을 얼음...
그의 연기는 그 불가능의 지점까지 이른다.
연기, 미술, 의상, 음악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며
차곡차곡 쌓여가는 이 영화의 정조는
폭발적인 엔딩까지 영화를 이끌고
관객들의 모든 에너지를 남김없이 빨아들이며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페이소스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인다.
조커가 될 수 밖에 없는 아서 플렉을
연민의 시선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을 때
느껴지는 안타까움의 페이소스,
눈물을 터뜨려 그냥 쏟아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더 안타까운, 그런 페이소스...
연말, 개인적으로 진행할 영화 시상식에서
최대의 고민(남우주연상)을 사실상 끝냈다.
2019년이 아니라 영화 역사상 최고의 연기,
대체 불가능함은 물론,
호아킨 피닉스 자신도 재연하지 못할 연기인데,
감히 다른 누구에게 줄 수 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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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 [지구 최후의 밤] (비간)
앉은 자리에서 숨도 안쉬고 연속 본 유일한 영화.
수시로 내면에 마구 침투해 우울을 안기는 영화.
이제는 그만 벗어나고 싶건만
쉽게 탈출을 허락하지 않는 영화.
비슷한 감상을 한 사람들을 좀처럼 찾을 수 없기에
더 외롭고 더 소중한 영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알프레드 히치콕,
데이빗 린치, 리들리 스콧, 크리스토퍼 놀란,
왕가위, 허우 샤오시엔, 스즈키 세이준에
김승옥, 무라카미 하루키, 단테, 샤갈까지...
수많은 영화적, 문학적, 예술적 레퍼런스들을
한 자리에 소환시켜 작품 속에 성공적으로 녹인다.
수소의 몸과 돌의 기억을 가진 남자가 꾸는
자각몽(自覺夢, lucid dreaming).
전반부에서 뤄홍우의 축축한 기억들을 담아내던
카메라와 미장센은 후반부에 이르러
놀랍게 변신을 하는데,
한 시간의 후반부는 기본적으로 원테이크.
절묘한 디지털편집으로 눈을 속이면서
3D 촬영기법으로 찍혔다.
카메라워킹은 지금까지 본 수천 편의 영화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하고
실내외 세트의 치밀하고 섬세한 구성과
인물들의 동선에 대한 완벽한 장악은
감히 최고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질감을 느끼게 하는 방식도 참 좋다.
임강이 맡은 OST는 신비롭고 처연하다.
잠깐의 사랑을 영원의 사랑으로 만들고 싶었기에
기억과 꿈과 영화에 머물렀던 남자,
또는 기억, 꿈, 영화에 어쩔 수 없이 붙잡힌 남자...
이동진 평론가의 한 줄 평을 빌리자면,
"점멸하는 기억과 발광하는 꿈이
함께 서식하는 신비로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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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 [살인마 잭의 집] (라스 폰 트리에)
이 영화는 8년 전의 설화(舌禍)에 대한
라스 폰 트리에의 궁극적 답변으로 읽힌다.
이게 뒤끝이라면 정말 무시무시한 뒤끝.
심지어 잭을 지옥으로 이끄는 버지역을
브루노 강쯔에게 맡긴다. 그가 누구인가.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의 다미엘 천사이자
[다운폴]에서의 아돌프 히틀러...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통해
잭은 버지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잭의 궤변에 가까운 논리와 그에 대한 버지의 반박.
대화의 주제는 살인이 예술일 수 있는가,
즉, 예술에 도덕과 윤리가 개입해야 하는가이지만,
종교, 문학, 음악, 미술 등의 영역을 넘나들며
각종 레퍼런스들을 거의 가지고 논다.
심지어 자신의 전작 영화들까지.
영화에서 경찰들은 한결같이 무능하고 무력하다.
현실의 악(惡)에 대한 공권력의 무력,
더 나아가 사회규범과 법률의 무력.
피살자의 피가 도로에 선명하게 남겨진 순간엔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그 자국을 깨끗이 없앤다.
이 빌어먹을 아이러니.
결국, 악에 대한 세상의 무력...
잭 스스로 자신이 지은 집에
지옥으로 향하는 통로를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단죄하는 것 외에
세상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창작자의 고통으로 완성되는 예술과
타자(他者)의 고통으로 완성되는 살인,
창조와 파괴, 자학과 가학, 자조(自嘲)와 냉소,
자아도취와 자기모멸, 유머와 우울, 직설과 은유,
클로즈업의 핸드헬드캠과 관조적 스테디캠,
중도퇴장과 기립박수, 환멸과 극찬...
이 엄청난 콘트라스트들로 가득찬 걸작.
그 누구에게 함부로 추천할 수 없기에
혼자만의 가슴 속에 영원히 봉인해야 할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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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결혼 이야기] (노아 바움백)
인물들을 향한 따뜻함과 냉철함의
두 가지 시선을 공평하게 갖춘 채
남녀의 사랑, 결혼, 더 나아가 관계를 끝내는
올바른 방법에 대한 성찰을
자연스럽게 이끈다는 점이 가장 큰 미덕이다.
페이소스와 유머를 적절하게 안배한 각본은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교보재로 삼아도 좋을 만큼 빼어나다.
아담 드라이버, 스칼렛 요한슨 두 배우와
명품 조연들이 이루어내는 연기의 앙상블은
137분이란 짧지 않은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의 눈과 귀를 호강시킨다.
몇몇 장면에서는 소름이 돋는 탄복으로,
몇몇 장면에서는 가슴 깊이 저미는 슬픔으로.
노아 바움백, 아담 드라이버, 스칼렛 요한슨,
셋 모두의 커리어 하이...
부부의 진심은 변호사들의 입을 거치며 왜곡된다.
상대의 귀책사유를 찾는 데 혈안이 된 법 앞에서
무심코 내뱉은 말은 불신의 증거로,
순수했던 선의는 의도적 악의로,
로맨틱했던 약속은 무책임한 허언으로 변질된다.
사랑은, 사랑이란 녀석은
사랑의 주체인 사람을 닮은 죄로
사람과 똑같이 생로병사한다.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는 순간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모두가 꿈꾸고 말하지만
그 꿈을 이루는 사랑은 오히려 드물다.
그렇다면 사랑의 진정한 열쇠는
사랑을 끝내는 방식에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은 머무는 모습보다
떠나는 모습과 떠난 후의 모습으로
평가되고 기억되며 추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들과의 시간을 위해 거리로 나서는 찰리를
니콜이 불러 세운다.
운동화의 풀린 끈을 말없이 묶어주는 니콜...
사랑의 끝이 삶의 끝일 이유는 없다.
결혼의 끝이 삶의 끝일 이유도 없다.
찰리와 니콜의 결혼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그들의 삶은 다시 시작된다.
거리로 멀어지는 찰리와 헨리의 뒷모습을
카메라는 멀리 떨어진 채
끝까지, 끝까지, 끝까지 응시한다.
친구같던 카메라의 그 응시엔...
그들의 아픔에 대한 뭉클한 위로와
새로운 삶에 대한 간절한 축복이 있다...
.
.
.
끝났네요...
조금 서둘러서 한 해 영화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제 느낌, 취향, 생각과 여러분의 그것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요.
위에서 언급한 20편의 영화들 중
17편에 대해서는 장문의 리뷰를 써 두었으니
지난 글 보기 이용하셔서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일주일 정도 지난 후에 포스팅할
"제 멋대로 진행하는 시상식"도 기대해 주십시오.
2019년...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불과 보름의 시간만을 남기고 있네요.
건강하게, 보람되게, 무엇보다 행복하게
마무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
  • 라이자 2019/12/17 06:10

    영화를 꽤 본다고 노력했더니 살인마잭의집, 칠드런액트, 와일드로즈를 제외한 17개를 봤네요ㅎㅎ
    본문에선 그린북, 조커, 더페이버릿, 블랙클랜스맨, 나이브스아웃, 포드페라리, 아사코, 결혼이야기, 논픽션이 특히 취향에 맞았고
    빠진영화에선 상반기 베스트20 댓글 이후로, 좀비랜드2, 러브앳, 더룸, 시크릿슈퍼스타, 파프롬홈, 누구나 아는 비밀, 토이스토리4, 심판 등이 좋았습니다.
    저도 올해는 별점 4.0 이상을 최근 몇년중 가장 많이줬더군요 그만큼 좋은 영화가 많아 행복했습니다
    리뷰글로 많이 배우는데 드릴건 추천밖에 없네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
    p.s 블랙클랜스맨은 작년 11월 국내직행인데 기준기간에 포함되는건가요? 전에 물어본다는게 까먹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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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9/12/17 06:25

    라이자// 글이 너~~무 길어 네 번에 나누어 올리는 과정에서 오류가 나는 바람에 다시 또 올렸네요. 더 이상 줄이기는 불가능했습니다. ㅠㅠ 2019년은 정말 외국영화 대박의 해였습니다. 위에 20편 외에도 별 네 개가 세 작품이나 더 있으니... 놀라운 건 이 기라성같은 라인업 맨 위에 기생충을 놓고 싶으니, 기생충은 정말 걸작입니다. 블랙클랜스맨 개봉시점이 그리 빨랐나요? ㅠㅠ 그럼 자격 미달인데, 도저히 글 수정할 힘이 없네요. 블랙클랜스맨 빠진 자리엔, 코끼리는그곳에있어나 서스페리아를 놓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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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9/12/17 06:26

    라이자// 한 해 동안 부족한 글들 늘 읽어주시고 칭찬해주시고 용기주셔서 넘넘 감사드립니다. 한 해 마무리 보람되게 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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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하이 2019/12/17 15:41

    리뷰 잘읽었습니다. 올해는 좋은 영화가 많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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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여울 2019/12/17 15:56

    불펜의 이동진님^^
    정성이 가득한 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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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델리피 2019/12/18 05:46

    [리플수정]파비안느의 관한 진실은 순위권에 없나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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