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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화 [나이브스 아웃]을 보고.. 여전히 선(善)을 믿는 사람들에게... (스포 없음)


라이언 존슨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신작
[나이브스 아웃 (Knives Out)]을 보았습니다.
[포드 V 페라리]보다 먼저 선택해
개봉하자마자 보았는데 매우 흡족하네요.
최근 10년 동안 보았던 추리 장르의 영화들 중
압도적으로 가장 훌륭합니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로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은 듯한 라이언 존슨은
비로소 자신이 집중해야 할 장르를 찾은 듯 하네요.
무려 10년 동안 다듬고 또 다듬었다는 시나리오는
애거서 크리스티를 포함한
전문적인 추리작가들의 추리물만큼이나
그 완성도가 높습니다.
질스 파겟 브레너의 [비뚤어진 집]과 비교하자면,
대저택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사립탐정이 해결해 나가는,
후더닛(whodunnit, Who has done it) 무비의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같습니다.
미술, 소품, 의상 등의 디테일에 있어서
엄청난 공을 들인 점도 같습니다.
오히려 범인을 추리하는 난이도에 있어서는
[비뚤어진 집]의 난이도가 훨씬 더 높죠.
[비뚤어진 집]에서의 범인은
추리소설광인 저도 전혀 캐치하지 못했답니다.
[나이브스 아웃]의 범인과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웬만한 추리물 팬들이라면 예측이 가능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브스 아웃]이
훨씬 더 쫄깃쫄깃한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그 이유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춰 쓰겠습니다.
베스트셀러 미스터리 작가로서 막대한 부를 쌓은
할란 트롬비(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자신의 집에서
85번째 생일파티를 벌인 후 죽은 채로 발견됩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자의 촉탁으로 사건을 의뢰받은
브누아 블랑 탐정(다니엘 크레이그)은
지역 경찰들과 함께 수사에 나섭니다.
할란의 저택에는 그의 가족들이 함께 거주하는데
그들은 할란이라는 숙주에 기생하듯 살아갑니다.
이기적이고 속물적이며 의존적입니다.
할란의 죽음과 함께 그의 엄청난 유산을
누가 상속받을 것이냐가 서브 플롯으로 기능하죠.
영화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는
이 가족들이 트럼프 시대의 미국을 축소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입니다.
정치적 올바름을 노골적으로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난민 문제, 인종 문제, 이념의 문제에 대한 풍자를
극의 흐름 속에 멋지게 녹여냅니다.
블랙코미디로서의 재미에도 충실하구요.
추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주목할 인물은
할란의 간병인, 마르타(아나 디 아르마스)입니다.
그녀는 거짓을 말할 때는 물론,
거짓을 생각만 해도 구토를 합니다.
영화 속에서 마르타가 구토하는 모습은
여러 번에 걸쳐 변주되는데, 기가 막히더군요.
특히, 마지막 구토는 정말 대단합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할란의 유가족들은
경찰들과 블랑 앞에서 수사에 응하죠.
그들의 말이 화면에 제시되는 정보와
전혀 다르다는 점과 대조를 이루면서
마르타의 말과 행동은 영화의 축을 구성합니다.
미술, 의상, 소품은 배우들의 연기와 함께
이 영화를 감상하는 핵심이자 매력입니다.
진하고 또렷한 색감의 화면을 바탕으로
클래식함과 모던함을 절묘하게 아우릅니다.
할란, 블랑, 랜섬(크리스 에반스)의 수트와
할란의 장녀인 린다(제이미 리 커티스),
할란의 며느리인 조니(토니 콜렛)의 드레스는
격조와 품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더군요.
소품들도 하나하나 눈여겨 볼 가치가 충분하구요.
연기는 정말...
크리스토퍼 플러머, 다니엘 크레이그, 돈 존슨,
제이미 리 커티스, 마이클 섀넌, 크리스 에반스에
키스 스탠필드, 캐서린 랭포드, 제이든 마텔까지
힘을 더하니, 이건 관객들의 축복입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이 믿기 힘든 협연을
충분히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이죠.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무게중심을 잡습니다.
미국 남부 사투리 구사를 끝없이 연습했다는
다니엘 크레이그에게서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는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토니 콜렛은 능청맞게 요염하고
돈 존슨은 주책맞게 의뭉스럽습니다.
이 기라성같은 캐스팅 속에서도
1988년생인 아나 디 아르마스는 당당합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조이 역할로
단번에 팬들의 눈길을 끈 그녀는
이 영화에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합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 손색이 없네요.
복선을 깨알같이 배치하고
정보를 조금씩 공개하면서
퍼즐조각을 맞추어 가는 재미를 선사하다가
마침내 모든 퍼즐조각이 다 맞추어졌을 때의
뿌듯한 성취감을 느끼게 돕는 건 편집입니다.
이 장르에서 130분의 러닝타임은 꽤 긴 편이지만
완급을 조절함에 능란한 편집은
지루할 틈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메시지를 전함에 있어서도 소홀하지 않습니다.
선악의 맹목적 이분법에도 함몰되지 않습니다.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엄청난 이익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자기도 모르게 발현되는 선한 본성과 인간다움이
마침내 진실의 물줄기를 바꾸는 서사는
욕망과 이기와 혐오가 들끓는 세상에 용기있게 맞섭니다.
인물들 모두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담는 앵글은
카타르시스와 함께 여운을 남기며
영화의 엔딩을 장식합니다.
그 앵글 속 인물들의 배치에는
정밀한 계산, 우아한 미학, 장르적 쾌감,
그리고 여전히 선(善)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존중과 신뢰가 함께 담깁니다...
자신있게 추천드립니다...
댓글
  • 디파이언스 2019/12/05 04:23

    겁나 재밋었네요
    오늘 나이브스 아웃하고 포드 v 페라리 imax 연달아 봤는데
    차를 몰라서 그런건진 몰라도 저도 나이브스 아웃이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라이온스게이트가 요즘 6대배급사에 뒤지지 않네요
    미드웨이도 엄청 기대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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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파이언스 2019/12/05 04:24

    아 그리고 라스트제다이때문에 라이언 존슨 겁나 싫어했는데 이젠 다시 안까렵니다.
    디즈니 이놈들 탓임 아무튼 디즈니 탓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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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lythew 2019/12/05 04:28

    자신있게 보겠습니다.
    그나저나 '블레이드 러너' 가 실종됐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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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9/12/05 04:28

    디파이언스// ㅋㅋㅋ 라이언 존슨 욕한 분 추가요~~ 포드페라리는 오늘 볼 건데 궁금하네요. 장르가 달라서 단순한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나이브스 아웃은 추리물론 정말 최고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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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9/12/05 04:30

    flythew// 자신있게 권해드립니다,^^ 꺽쇠 표시를 안바꿔서 누락됐네요. 발견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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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너바디 2019/12/05 04:36

    축구보려고 일찍 일어났는데 정작 티비는 켜질않고 불펜에 들어왔다가 좋은 영화소개를 먼저 접하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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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9/12/05 04:42

    암너바디// 즐감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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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rad 2019/12/05 04:45

    디즈니가 나쁜 거 맞습니다!
    저도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보다보면 예측이 되지만 재미없는 것도 아니었고요. 추리소설의 영화화들도 범인 알고 보듯 재밌게 보듯 재밌게 봤습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현대극에선 정통 추리물의 느낌을 내긴 어렵지 않을까 했는데 이런 식으로 하면 되는구나 했네요.
    후속작은 생각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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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9/12/05 04:55

    Krad// ㅋㅋㅋ 다니엘 크레이그도 이제 007 하차하는 마당에 그와 함께 브누아 블랑 시리즈 찍는 것도 괜찮을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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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회말2아웃 2019/12/05 07:13

    잘 읽었습니다.
    할란의 가족들이 저택에 함께 거주하는건 아닙니다.
    생일을 맞아 다들 모인 것이고 그중에는 멀리서 온 가족도 있지요.
    사소한 오류지만 탐정영화인 만큼 디테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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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9/12/05 07:25

    9회말2아웃// 아 그런가요? 모두 저택에서 자길래 동거하는 줄 알았는데 그 날만 같이 잔거네요? 본문은 수정하지 않고 그냥 놔두겠습니다. 발견해주시고 댓글 주셔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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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든510 2019/12/05 10:17

    아니...한번 보고 이렇게 훌륭한 글을 쏟아내는 능력과 비결이 뭔가요?
    전 이런 추리류 영화는 머리쓰는데 다 허비해서 억양이니 옷 입은건 전혀 신경도 못쓰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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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젤라즈니 2019/12/05 12:21

    잘 읽었습니다. 영화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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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쏜튼국장 2019/12/05 14:55

    큰 기대를 했는데 지루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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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lexcool 2019/12/05 15:13

    이미 라이언 존슨은 하드보일드를 틴에이지물에 결합시킨 [브릭]이라는 초기작으로 추리물과 장르에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죠. [브릭]은 틴에이지 드라마+누아르, [블룸형제 사기단]은 로맨스와 결합한 케이퍼, [루퍼] 역시 틀에서 벗어난 SF..
    사실 [브릭]과 [블룸형제 사기단]을 보고 '라이언 존슨은 훗날 놀란처럼 크게 될 거야'라고 항상 외치고 다녔었는데... 그 모든 기대치를 [라스트 제다이]하나로 완전히 날려버렸죠.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쉴드 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 저도 벙쪘던...
    대작에서 벗어나 고전적인 장르를 비틀고 연기의 앙상블 위주로 연출하면 진짜 유니크한 작품을 만드는 좋은 창작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라이언 존슨이 죽을 때까지 [라스트 제다이] 얘기만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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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Mus 2019/12/05 15:16

    볼까말까 했었는데 님 글을 보고 보기로 했습니다.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사운드오브뮤직에 나왔던 분이 아직도 현역이라니 대단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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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bra 2019/12/05 18:51

    저도 개봉하자마자 봤는데, 긴장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실망스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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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lythew 2019/12/05 19:36

    나는 말머리로 장난치는 것들은 무조건 차단하는데...
    내 스타일 어떻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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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방송 2019/12/05 21:46

    저도 오늘 봤는데 겁나 흥미진진하고 반전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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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KIRA 2019/12/05 23:36

    글 잘읽었어요
    기대되네요. 극장에서 혼자보면 좋을 영화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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