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노숭(沈魯崇, 1762~1837)은 정조 임금 시대에 활약한 문인 선비이다.
그는 유별나게도 심한 정욕를 가진 남자였다.
15살부터 기생집을 찾아다녔고 기생을 만나려고 개구멍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육체적 정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며 자기 고백했다.
이렇게 자기 약점을 노출하는 언사는 자제하기 마련이지만,
심노숭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자신의 치부까지 문집에 모두 실어놓았다.
오늘날 지식인들이 심노숭처럼 자기고백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18세기 후반 조선은 쓰러질 듯이 애잔한 명말 청초 문학의 전성기였고,
사대부 문인들 사이에 패관 소품이 유행했다.
심노숭 역시 이런 문학적 분위기 속에서 자기감정을 숨기지 않고 뿜어내던 문사였다.
그의 소품은 신변잡사를 기록하고 조선의 풍속을 묘사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풍부하게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의 표출을 제약하였던 성리학적 문학관에서 탈피하여
인간 개체의 다종다양하며 진실된 욕구와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것을 문학의 본령으로 삼았다.
다소 속될지라도 진실성과 활기가 문학의 근본이라고 여겼다.
또한 시대적 금기인 패사소품을 비롯한 다양한 속된 문화(俗文化)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자신의 문학의 자양분으로 섭취하였다.
#1. 자유분방했던 호색한, 심노숭
누구보다 자유분방한 삶을 산 심노숭은 괴팍한 성격과 함께,
날마다 목욕을 해야만 하는 결벽증도 있었다.
이뿐만 아니다. 날마다 책장을 정리해야만 하는 정리벽과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기록벽까지 있었다고 하니
심노숭은 18세기 조선이 낳은 유별난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심노숭이 33살이 되던 해에 제주 목사로 있던 아버지 심낙수를 보러
호남으로 내려가다가 전남 장성의 노령고개 어느 주막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주막 이웃집 스물 남짓 되는 젊은 아낙이었다.
심노숭은 그녀를 보고 정신이 나가 버린다.
치마를 허리에 묶어 정강이와 허벅지가 다 드러났고,
해진 옷에 짚신짝을 신고서 여기저기 동네를 돌아다니는 모습에 반해버린 것이었다.
그는 삼십 평생에 많은 여자를 겪어 보았다고 자부했지만,
오늘 만난 이 여인과 같은 경국지색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여인의 남편이 엄청난 추남인 걸 알아채고선
풀숲과 똥밭 사이에 버려진 미인이라며 애석해했다.
천하의 역대 제왕과 명장과 지사가 산에 올라가 강을 내려다보고선
머리를 풀어 통곡할 노릇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심노숭은 해남에서도 유사한 행동을 벌인다.
수십 일 동안 해남에서 제주로 갈 순풍을 기다리다가
촌사람 틈에서 빛을 내뿜는 어린 소녀를 발견하게 된다.
심노숭은 그 소녀에게 마음이 흔들렸다.
저번에 보았던 여인처럼 한눈에 반해 버린 거였다.
눈치를 챈 소녀는 심노숭에게 시를 써달라고 했다.
서울과 같은 도시의 세련된 여자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바닷가 해남에서 풋풋하고 천연한 미녀를 보니 새로운 욕정이 솟아오른 것이다.
그는 소녀에게 준 시에서 남에게 빼앗기기 전에 그녀를 어떻게 해볼까 망설이는
바람둥이 양반의 심정을 묘사했다.
해남의 어린 소녀는 심노숭의 마음을 그대로 믿었다.
[사진] 일본의 바닷가 해녀, 바닷가 근처엔 미녀들이 많다.
#2. 어린 소녀를 무정하게 내쫓은 심노숭
몇 년이 흘러, 소녀는 오라비와 함께 서울 심노숭의 집을 찾아온다.
소실이 되겠다며 정성스럽게 꽃단장을 하고선 말이다.
심노숭 입장에선 그때 불쑥 솟아난 감정으로 시를 지어서 주었을 뿐인데,
소녀는 그를 평생의 낭군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이제 막 벼슬길에 오른 심노숭 입장에선 첩실을 들여놓는 것도 신경 쓰였다.
그래서 노잣돈을 몇 냥 쥐어 주고선, 남매를 다시 해남으로 돌려보냈다.
순진한 처녀의 가슴만 설레게 해놓고선 발을 빼버린 그는
아버지 심낙수로부터 매정한 놈이라고 핀잔까지 들었다.
이때부터 불행이 연이어 시작된다. 1801년(순조 1)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시파의 핵심인물이었던 부친 심낙수는 관직도 삭탈되었다.
심낙수는 벽파 노론의 수장이었던 김종수와 심환지를 탄핵하는 데
앞장섰던 심지 굳은 인물이었다.
심노숭 역시, 연좌되어 1801년 2월에 경남 기장현(機張縣)으로 귀양을 가 6년간 유배되었다.
1811년엔 아우인 심노암이 세상을 떠난다.
아우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어 이후 5년간 시작(詩作)을 폐하였다고 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심노숭이 그날 내쳐버린 어린 소녀의 원한 때문은 아니었을까?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건 빈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안대회, 자저실기 (심노숭의 문집)
-안대회, 과객 열전-심노숭 편
-이관희, 역대 인물 정보-심노숭 편
오늘도 좋네요!
선추천후감상
잘봤습니다 작가님 ㅎㅎㅎ 이번에도 재미있네요
ㅊㅊ
성격이 예술가해야지 정치하고는 안맞는 사람이었네요.
대치동갈매기// 넵...감사합니다!
Kshatriya// 잘 봐주셔서 고마워요
Vajra// 항상 감사합니다!
라프로익// ㄳㄳ
ok3090// 천성이 예민하고 감각적인 사람이었어요! 안대회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보기드문 로멘티스트이기도 했고 조선 후기 대표적인 미식가였다고 하네요.
어린소녀의 한이 깊었나보네요. ㅎㅎ
잼있게 잘봤습니다
만와 (ㅋㅋ) 잘 보았습니다!
드릴건 추천뿐!
역사에 만약이라는 없다는 말이 제일 실감나는 이야기네요.
받아들였다면 아내로 맞았다면 정 반대의 삶을 살았을지..
오늘도 재밌게 보고 갑니다.
선추천 후감상
빨랑 다음 만화도 내놔용! ㅋ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여자의 한이 문제가 아니라 저 사람의 성품이 저 소녀 사건을 통해 단편적으로 보이는 거 같고 결국 성공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으로 보입니다. 늘 잘보고 있습니다 작가님
혼돈 스런 불팬에 이런 만화 감사 합니다
여자가 저 사람 소실로 들어갔으면 같이 몰락하고 망가졌겠죠. 심노숭이 내친 덕분에 다른데 가서 잘 살았을 겁니다.
화..심노숭이란 이름은 처음 알았는데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다음 얘기 기다리겠습니다
그냥 여자를 너무 좋아하고, 일기에 가깝게 솔직하게 글을 썼던 사람이네요.
후쿠오카는 맥락을 모르겠는데, 작가님의 개인사가 반영된 것인가요.
리그지배자// 심노숭의 자저실기를 보다가 어린 소녀와의 일화를 발견했고, 그 사건이 있은 직후 심노숭의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게 신기했습니다.
건유// 고맙습니다!
[리플수정]09는어디로// 소실로 들였으면 아마도 벼슬길에서 쫓겨나거나 자진해 사퇴했겠죠...그렇다면 적어도 유배형은 받지 않았을거에요! 고맙습니다
사도숙희// 항상 감사합니다!
hampstead// 넵! 준비해드리겠습니당 고맙습니다.
사라스// 고맙습니다!
페이퍼백// 그랬으면 좋겠어요! 불쌍한 소녀...
히파티아// 18세기엔 특이한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이전보다 풍족해지고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심화된 시절이라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출현한 거 같아요!
qinqin// 감사합니다!
빛둥// 넵! 그렇습니다. 항상 고마워요...
[리플수정]썸핫// 예전에 후쿠오카 여행을 간 적 있는데요. 바다가 접한 하카타(博多)미녀들이 일본에서 유명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적어봤어요! 감사합니다...
늘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b
추석 잘보내세요~~
못생기고 솔직해서 망한거 아닌가요? ㅋ
잘생기고 위선적이었으면 출세했을 수도 있겠네요.. 잘봤습니다.
오 재밌네요 ㅎㅎ
윗 분 말씀대로 예술을 하셔야 할 분이
정치를 해서 ㅎ
장화백님 신작 잘보고갑니다. 바닷가 미녀 하니 울산의 김태희와 칭다오의 빅토리아가 생각나네요
작가님 언젠가 면천된 박팽년 손자 이야기 좀 올려주세요.
아니... 시간이 한참 흘러서 17살이면
대체 몇살짜리 애한테 추파를 던진거야;;;
인간으로서 심노숭은 영 별로네요... 늘 잘 보고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