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 이게 중요한게 세종대왕님도 성군이셨지만 뜻을 펼치기에 방해가 될걸 전부 제거..
사이프러스2019/02/19 12:52
역시 조선은 패딩의 나라였네요
모래먼지2019/02/19 14:48
형제의 난은 그냥 딱 자기 욕심이었고, - 위협이 되지 않는 친척까지 죽임 - 외척 제거 같은 것도 너무 폭력적인 방식으로 했죠. 결국 이방원의 방식을 본받은 세조가 단종을 죽이게 됩니다. 의도는 좋았을지 몰라도 잘못된 방법으로 비극을 불러온 것이죠.
좋은아뒤2019/02/19 15:49
이방원이 무서운게 위화도 회군당시 이성계는 가족들에게 언질이없었는데 이방원이 다 데리고 피신함.
(상황을 읽는 능력이 뛰어남. 근데 왕위는 형에게 돌아가니... 난이 일어나지.....쩝)
게다가 공신들 정리를 워낙 깔끔하게 해놔서 세종때에 문제를 일으킬 공신 가문이 없음
의도했던 의도 안했던 세종대왕님의 태평성대(라고 해도 되겠지요?)의 기반을 탄탄하게 조성.
Mephistroth2019/02/19 16:49
태종이 일으킨 각종 피바람이 왕권을 강화하고 세종의 치세에 있어 걸림돌이 될만한 요소를 치웠다는 평가는 일정부분 맞지만, 태종의 즉위 자체가 또한 일정부분은 조선 개국 당시의 혁신 기조가 좌절된 결과입니다. 1차 왕자의 난에서 숙청된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이유는 그 손윗 형들이 모두 고려의 권문세가와 혼맥으로 이어져있었기 때문인데, 그 이방석을 숙청하고 정종과 태종으로 왕위가 이어지면서 구세력과의 완전한 결별을 꾀하던 태조와 정도전 등 측근의 의도는 좌절되었던 것입니다.
그밖에도 철저한 재상 중심의 정치를 꿈꾸던 정도전이 태종에게 숙청되고 관료 중심의 의정부서사제는 국왕 중심의 육조직계제로 옮겨 시행되었고, 이는 두 제도의 좋고 나쁨에 대한 역사의 평가를 떠나서 조선 개국 당시의 강력한 개혁 기조가 상당부분 좌절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후 세월이 흘러 조선 왕조는 몇 번의 반정과 사화를 거쳐 세도정치라는 지옥도를 열었으니 이는 재상 중심의 정치를 꿈꾸던, 개국의 주도권을 갖고 있던 사대부나 철저히 왕권을 중시하는 강력한 나라를 바라던 태종의 바람과도 달랐으므로 아이러니하다 하겠습니다.
겨우햇병아리2019/02/19 17:12
세종까지 숙청을 잘했더라면.... 탄탄대로였을텐데...
크르릉릉2019/02/19 17:35
태종은 뛰어난 개인 능력을 가졌음에도 자기 절제를 잘했고, 냉정한 판단력을 바탕으로 행동했으며, 자기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잔인했지만 그게 아닌 피지배층에는 자애로운 동양사적으로 이상적인 군주였죠. 그에 반해 세종은
온화한 성품에 매우 뛰어난 개인 능력을 가졌지만 군주로서 꼭 가져야 할 잔인함은 부족했죠. 그래서 태종은 집권 내내
신하를 가지고 놀았지만 세종은 같이 놀았죠... 집권 초기부터 함께한 애들이 점점 권력에 심취해서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는데
세종은 큰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고, 그게 문종만 살아 있었다면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문종의 급사 후 단종이 즉위한 시점에서
날로 강대해져가는 신권에 위기를 느낀 왕족들 특히 양녕을 포함한 왕실 윗어른들이 세조를 지지하게 하는 빌미가 되죠.
아가토데몬2019/02/19 18:20
용의 눈물
그걸몰라?2019/02/19 18:40
이방원은 별 관심 없었는데 육룡이 나르샤 보고 유아인 연기력에 입덕...
냐냐냥2019/02/19 22:08
어찌보면 세종을 사랑한거겠죠 모든짐을 자기가 다지었으니..
제피르2019/02/19 22:21
이방원이 등장하는 영상물중엔 역시 용의 눈물 만한게 없죠.
마지막화에서 죽기전 기우제를 지내면서 "모든 죄는 이 몸에게 물으소서!!"라고 포효하는 대목은 지금 생각해도 역대급 명장면이네요.
탈퇴한회원임2019/02/19 22:26
킬방원의 한마디..
" 죄와 죽음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
ramion2019/02/19 23:38
저렇게 다 죽여버리긴 했지만 가족에게는 되게 따뜻했음.. 물론 이복동생은 죽였지만 동복이었던 2차왕자의 난 주역 4째형 이방간은 역모를 했어도 안죽임 정종한테도 잘함 아들한테도 지극정성이기도 했음 양녕대군 세자에서 폐할때도 자기옆에 두고서 해가 안당하길 염려했고 자식때문에 울기도 많이 했음 공신이나 외척은 칼같이 죽여버려도 자기 진짜 가족들한텐 약한 사람이었음
레알... 이게 중요한게 세종대왕님도 성군이셨지만 뜻을 펼치기에 방해가 될걸 전부 제거..
역시 조선은 패딩의 나라였네요
형제의 난은 그냥 딱 자기 욕심이었고, - 위협이 되지 않는 친척까지 죽임 - 외척 제거 같은 것도 너무 폭력적인 방식으로 했죠. 결국 이방원의 방식을 본받은 세조가 단종을 죽이게 됩니다. 의도는 좋았을지 몰라도 잘못된 방법으로 비극을 불러온 것이죠.
이방원이 무서운게 위화도 회군당시 이성계는 가족들에게 언질이없었는데 이방원이 다 데리고 피신함.
(상황을 읽는 능력이 뛰어남. 근데 왕위는 형에게 돌아가니... 난이 일어나지.....쩝)
게다가 공신들 정리를 워낙 깔끔하게 해놔서 세종때에 문제를 일으킬 공신 가문이 없음
의도했던 의도 안했던 세종대왕님의 태평성대(라고 해도 되겠지요?)의 기반을 탄탄하게 조성.
태종이 일으킨 각종 피바람이 왕권을 강화하고 세종의 치세에 있어 걸림돌이 될만한 요소를 치웠다는 평가는 일정부분 맞지만, 태종의 즉위 자체가 또한 일정부분은 조선 개국 당시의 혁신 기조가 좌절된 결과입니다. 1차 왕자의 난에서 숙청된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이유는 그 손윗 형들이 모두 고려의 권문세가와 혼맥으로 이어져있었기 때문인데, 그 이방석을 숙청하고 정종과 태종으로 왕위가 이어지면서 구세력과의 완전한 결별을 꾀하던 태조와 정도전 등 측근의 의도는 좌절되었던 것입니다.
그밖에도 철저한 재상 중심의 정치를 꿈꾸던 정도전이 태종에게 숙청되고 관료 중심의 의정부서사제는 국왕 중심의 육조직계제로 옮겨 시행되었고, 이는 두 제도의 좋고 나쁨에 대한 역사의 평가를 떠나서 조선 개국 당시의 강력한 개혁 기조가 상당부분 좌절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후 세월이 흘러 조선 왕조는 몇 번의 반정과 사화를 거쳐 세도정치라는 지옥도를 열었으니 이는 재상 중심의 정치를 꿈꾸던, 개국의 주도권을 갖고 있던 사대부나 철저히 왕권을 중시하는 강력한 나라를 바라던 태종의 바람과도 달랐으므로 아이러니하다 하겠습니다.
세종까지 숙청을 잘했더라면.... 탄탄대로였을텐데...
태종은 뛰어난 개인 능력을 가졌음에도 자기 절제를 잘했고, 냉정한 판단력을 바탕으로 행동했으며, 자기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잔인했지만 그게 아닌 피지배층에는 자애로운 동양사적으로 이상적인 군주였죠. 그에 반해 세종은
온화한 성품에 매우 뛰어난 개인 능력을 가졌지만 군주로서 꼭 가져야 할 잔인함은 부족했죠. 그래서 태종은 집권 내내
신하를 가지고 놀았지만 세종은 같이 놀았죠... 집권 초기부터 함께한 애들이 점점 권력에 심취해서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는데
세종은 큰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고, 그게 문종만 살아 있었다면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문종의 급사 후 단종이 즉위한 시점에서
날로 강대해져가는 신권에 위기를 느낀 왕족들 특히 양녕을 포함한 왕실 윗어른들이 세조를 지지하게 하는 빌미가 되죠.
용의 눈물
이방원은 별 관심 없었는데 육룡이 나르샤 보고 유아인 연기력에 입덕...
어찌보면 세종을 사랑한거겠죠 모든짐을 자기가 다지었으니..
이방원이 등장하는 영상물중엔 역시 용의 눈물 만한게 없죠.
마지막화에서 죽기전 기우제를 지내면서 "모든 죄는 이 몸에게 물으소서!!"라고 포효하는 대목은 지금 생각해도 역대급 명장면이네요.
킬방원의 한마디..
" 죄와 죽음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
저렇게 다 죽여버리긴 했지만 가족에게는 되게 따뜻했음.. 물론 이복동생은 죽였지만 동복이었던 2차왕자의 난 주역 4째형 이방간은 역모를 했어도 안죽임 정종한테도 잘함 아들한테도 지극정성이기도 했음 양녕대군 세자에서 폐할때도 자기옆에 두고서 해가 안당하길 염려했고 자식때문에 울기도 많이 했음 공신이나 외척은 칼같이 죽여버려도 자기 진짜 가족들한텐 약한 사람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