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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사랑없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87)

 


  9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든 햇볕이 사무실 이곳저곳에 빛살자국을 만든다. 한가로이 전화를 받으며 볼펜을 이리저리 굴리는 김 과장의 이마에도,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던 휴대폰의 메시지를 또 들여다보고 있는 이 대리의 어깨에도, 일하는 척하느라 모니터의 인터넷 창을 켰다가 끄기를 반복하는 최미영 씨의 손등에도 빛살자국이 그려졌다.


 가끔 찾아오는 사무실의 고요한 오후시간이다. 다들 평화로운 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붉어진 얼굴로 콧바람을 일으키며 부장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김 과장?”



 전화를 받고 있던 김 과장을 턱짓으로 부른 부장님이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모든 평화는 중단되고 사무실에 스며들던 햇살마저 사라졌다. 어디서 먹구름이 몰려왔는지 실제로 어두워졌다. 김 과장이 급하게 전화를 끊으며 사무실을 나갔고, 이 대리는 휴대폰 대신 마우스를 잡았고, 최미영 씨는 서류뭉치들을 들고 일어났다.


 다른 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라도, 같은 사무실을 사용하는 우리 팀도 영향을 받는다. 칸막이 너머의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다. 부장이 과장을 따로 불러낼 만한 일이 뭐든 좋을 리가 없다. 


 오랜만에 평화롭게 일들을 마무리하고 정시에 퇴근하려는 꿈을 꾸던 직원들이 눈알들을 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서서 사태를 확인하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나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나도 부를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모두들 일하는 척하는 와중에 김 과장이 돌아왔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나를 보더니,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한숨을 내쉬고 내게 다가와 말했다.



 “다 해먹어라”


 “예?”


 “모르는 척 하긴~ 부장님한테 가봐”



 부장님의 얼굴은 아직 붉었지만, 호흡은 좀 진정된 것 같았다. 책상에는 몇 가지 서류들을 펼쳐놓고 뭔가 찾아보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나를 세워두고도 잠시 고민하던 부장님이 서류 한 장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차 과장. 이 평가서가 네가 지난주에 올린 거잖아?”


 “네.”


 “그리고 요 평가서는 오늘 아침에 김 과장이 올린 거고?”


 “그렇습니까?”


 “모르는 척 하지 마. 장난해? 너희가 경쟁자라고 생각해? 같은 부서야. 서로 협력하고 일을 분담하라는 팀들이라고~ 김 과장이 이 평가서 준비하고 있던 거 알고 있었지?”


 “아. 그랬군요.”


 “죽을래?”



 알고 있었다. 같은 부서의 다른 팀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건 거짓말이다. 누군가 주지시키기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기도 하고, 일부러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도 한다. 보통의 일들은 분담하여 배정받기 때문이지만, 간혹 개인적인 평가서나 팀의 의견서와 같은 경우는 겹치는 일도 간혹 있긴 하다.


 평가서나 의견서가 겹치더라도 서로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움을 주고받기 때문이기도 하고, 딱히 그런 걸로 경쟁할 이유가 없다. 물론 회사내규에 따르면 경쟁을 원한다는 걸 알 수 있는데, 관리하는 위에서도 별로 원하지 않고 우리도 서로 피곤하게 경쟁하고 싶지 않다. 상무 이상쯤은 되어야 그런 경쟁을 좋아하겠다.


 그런 걸로 경쟁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피곤하고 어려우면서도 능력을 보여줄 만한 일들은 넘쳤다. 같은 부서의 팀들끼리 경쟁하겠다는 건, 왕따가 되겠다는 선언이거나 싸우자는 얘기다. 


 내가 그걸 했다.



 “차 과장. 왜 그랬냐? 이런 스타일 아니잖아?”


 “김 과장은 유부남이죠.”


 “그래서”


 “유부남은 가정에 충실해야합니다.”


 “빨리 말해. 피곤해. 그래서 뭐?”


 “김 과장이 우리 팀원에게 소개팅을 시켜주겠다고 했습니다.”


 “누구? 아. 송민아?”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팀원은 모두 총각들입니다. 김 과장은 우리총각들 중에 누구도 소개팅 시켜주지 않았으면서, 송민아에게 소개팅을 시켜준답니다. 4년 전에 김 과장이 여직원에게 소개팅을 시켜준다고 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부장님도 기억하실 겁니다.”


 “에이~ 그때는 김 과장 마누라가 임신 중이었잖아. 이해해주자고~”


 “네. 그 여직원도 임신시킬 뻔 했었죠. 훌륭하네요. 그 여직원이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마 모르실 겁니다. 저도 모르거든요. 송민아도 우리 기억에서 사라지게 될까요?”


 “불륜은 당사자들의 책임이잖아. 그 일로 소란스러워지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깔끔한 마무리였죠. 그래서 더 걱정됩니다. 끝이 지저분했던 일이라면, 제가 송민아를 걱정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다시 깔끔하게 끝날 수도 있거든요.”


 “하아~ 그래서~ 복수한 거야? 김 과장을 엿 먹여야겠다고 생각했어? 자네 송민아한테 관심 있어?”


 “저는 총각입니다.”


 “시끄러워. 자네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는지 내가 전혀 모를 거 같아?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 사실이 아니기만 바란다. 응?”


 “저는 우리 팀원을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됐고! 알았으니까. 김 과장은 내가 불러서 따로 얘기하는 대신, 이 평가서는 김 과장으로 가자.”


 “그래야 합니까?”


 “그럼 싸울 거냐? 김 과장 마누라 둘째 임신했단다. 나도 주시하고 있으니까, 일 크게 만들지 말라고~ 아니 무슨 우리부서 과장들은 죄다 이 모양이냐? 발정난 개들도 아니고 참.”



 순간 뜨끔했지만, 허리 숙여 인사하고 부장님 방을 나왔다. 부장님도 내가 소개시켜준 직영매장의 여사님과 애인사이가 되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사무실로 돌아왔더니, 어찌나 분위기가 냉랭한지 에어컨을 켜 놓은 것 같다. 김 과장이 나를 빤히 바라보기에 눈을 피해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것 같은데, 이 사건의 당사자인 김 과장과 나는 아무에게도 설명할 수 없다. 


 잠시 후에 김 과장이 전화를 받고 일어나 나갔다. 김 과장이 부장님을 만나러 나가자마자 송민아를 불러서 물어봤다.



 “김 과장이 소개팅 시켜준다고 했다며?”


 “예? 아~ 네.”


 “어쩔 생각이야?”


 “뭐 싫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한번 나가봐야겠죠.”



 소개팅을 나오기로 했던 남자는 존재하지도 않을 테고, 김 과장은 미안하다고 갑자기 그렇게 되었다며 자기가 대신 놀아주겠다고 하겠지. 송민아는 상사가 그렇게 나오는데 싫다하기도 어렵겠고, 어차피 시간도 비워 논데다 유부남이니까 설마 하는 생각으로 같이 놀겠지.


 치사한 녀석이다. 최소한 나는 그런 식으로 비겁하게 굴지는 않았다. 내가 총각이라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아니 유부남이면 그럴 생각을 말아야하는 거 아닌가.


 김 과장이 돌아왔다. 이번엔 내가 김 과장을 빤히 바라봤지만, 김 과장이 내 눈을 피해서 자리로 돌아가다가 멈췄다.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났다는 것처럼 연기하며 송민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송민아 씨.”


 “네?”


 “아~ 이거 어쩌지? 소개팅 시켜주기로 했던 녀석 있잖아? 최근에 여자친구가 생겼다네? 미안해. 내가 다음에 더 좋은 친구로 소개시켜줄게”


 “앗. 그래요? 에이~ 일부러 불금에 시간도 비워뒀는데~ 책임지세요.”



 송민아는 김 과장에게 얘기하며 내 눈치를 봤다. 아니 분명하게 나를 보면서 그런 식으로 대답했다. 나를 놀리는 건가? 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씁쓸하게 웃으니까, 송민아가 김 과장에게 계속 말했다.



 “김 과장님이 저 영화라도 보여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이래~ 나 유부남이야. 총각들 많잖아?”



 그걸 아는 인간이 그러셨어? 이번엔 김 과장이 내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그랬더니 송민아가 상준이에게 말을 걸었다.



 “선배님. 우리 같이 영화라도 볼래요?”


 “아~ 그럴까? 요즘 볼만한 영화가 있나?”



 듣고 있던 박 대리가 마우스를 던지듯 밀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도 따라 일어났다. 박 대리는 내가 따라가는 줄도 모르고 빠르게 걷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담배 피러 가십니까?”


 “응. 너도?”



 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우린 침묵을 지켰다. 흡연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박 대리가 담배를 꺼내 물기에 내가 말했다.



 “커피?”


 “아. 예? 아니, 제가 뽑겠습니다.”


 “됐어. 나 동전 있어.”



 박 대리에게 커피를 건네고 나도 담배를 물며 말했다.



 “요즘 애들은 위아래가 없어.”


 “아. 죄송합니다.”


 “아니~ 상준이랑 송민아 말이야. 우리 앞에서 대놓고 그래도 괜찮은 거냐?”


 “좋을 때죠.”


 “박 대리는 만나는 여자 없지?”


 “.......”


 “미안. 소개팅 할래?”



 강보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간 있어?]


 [오빠가 만나자고 하면 있지]


 [혹시 소개 시켜줄 친구 있어?]


 [아. 섭섭한데요?]


 [아니, 나 말고 아는 동생이 있는데 소개 좀 시켜주려고~]


 [휴~ 다행이다. 난 또~ 어떤 친구요? 아니, 어떻게 아는 동생인데요?]


 [뭐 동생이라기 보단, 내 부하직원인데~ 외로워보여서]


 [그럼 나는 어때?]


 [아. 섭섭한데?]


 [히힛 농담이에요. 그런데~ 요즘 내가 만나는 애들이 다들 좀 그래서, 좀 알아볼게요.]


 [그래. 그럼 오늘 만날까?]


 [오늘 어떻게 소개시켜줘요.]


 [아니, 오늘은 우리 둘이 만나자고]



 사무실로 돌아와 일부러 송민아가 보는 앞에서 박 대리에게 말했다.



 “박 대리. 주말에 소개팅 잡혔다? 시간 비워둬?”


 “앗. 넵. 감사합니다. 과장님. 충성!”


 “충성은 만나보고 해~”



 퇴근을 준비하며 평소에 보람이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택시를 부르려다 그만뒀다. 대신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보람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데리러 갈게]


 [택시타고 가면 되요]


 [아니, 레스토랑 예약했는데~ 시간이 좀 있어. 드라이브나 같이 하자]



 강보람을 만나면 보통 술을 마시고 자거나, 그냥 자기만 했었다. 뭔가 용돈이라도 줘야 할 것 같아서 물어봤더니, 자기가 얼마나 버는지 아느냐고 했다. 


 내가 집 앞까지 가겠다고 했지만, 보람이는 근처 지하철역 근처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보람이를 태우고 시내를 운전했다. 말이 드라이브지, 막히는 도로 가운데서 그냥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지금부터 그냥 레스토랑으로 가도 시간이 대충 맞겠다.”


 “갑자기 무슨 레스토랑이에요? 거래처랑 만나려던 약속 같은 게 깨진 거예요?”


 “아니야. 너랑 갈려고 예약했어. 귀걸이 예쁘네?”


 “어머? 고마워요. 웬일이에요?”


 “뭐가?”


 “음~ 여기서 한번 빼줘요?”



 강보람이 내 바지벨트를 풀려고 하기에 그만두게 했다. 대신 강보람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만 운전을 하며 말했다. 



 “아직. 그 알바 하고 있는 거야?”


 “음. 사실~ 나 요즘 오빠 만나면서 안 나가요. 오빠 부담스러워 할까봐 말 안했어.”


 “.......괜찮아. 모자라겠지만, 내가 생활비 정도는 보탤게”


 “아뇨. 나 직장 구하려고~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내가 도와줄까?”


 “으응~ 그러지마. 나 오빠하고는 그런 사이가 되는 거 싫어. 아아~ 미안. 부담스럽지? 참! 사랑받는 일은 잘 되고 있어요?”


 “아니, 별로”


 “다행이네요.”



 전에도 왔었지만, 근사한 레스토랑이다. 우리는 괜찮은 식사를 하고 와인도 마셨다. 난 강보람의 구두를 칭찬했고, 강보람은 즐거워보였다. 근처의 호텔에서 서로를 만족시켰다. 


 자다가 깼는데, 강보람이 울고 있었다. 어쩔까 고민하다 계속 자는 척했다. 보람이 다시 내 품에 안기며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난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박 대리에게 소개팅을 시켜줄 여자애를 찾았다며 강보람에게 전화가 왔다. 사진이 어려 보여서 물어보니까, 아직 대학생이란다. 



 [여대생? 박 대리가 너무 좋아하겠는데?]


 [왜요? 오빠도 탐나?]


 [됐고~ 그럼 연락처 전해주면 되는 건가?]


 [아니, 처음은 우리 다 같이 만났으면 좋겠다던데? 부담스러운가봐]


 [그래? 뭐 난 상관없어.]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아니라니까~]



 박 대리와 함께 소개팅 장소로 나갔다. 이렇게 주선자가 되어 소개팅 장소에 함께 나가는 건 정말 처음이다. 우리가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람이가 어떤 여자애와 함께 들어왔다. 박 대리는 벌써부터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보람이도 예쁘지만, 같이 온 여자애도 귀여웠다. 게다가 여대생이라니까 뭐 좋아할만 하다. 


 나와 강보람이 서로 먼저 인사를 나누고, 그 여대생이 자신을 소개했다.



 “전 함지혜요.”


 

 귀여운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눈빛을 갖고 있는 여자애였다.






 계속.




댓글
  • 포포비치 2019/02/11 13:12

    제2의 불펜 소설이 탄생하나유

    (dza5BD)

  • 나탄돌라 2019/02/11 13:23

    정말 재미나게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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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빅픽쳐21 2019/02/11 13:23

    으윽...이 슈퍼빌런;;;
    그나저나 갓과장 어디 성형이라도 햇나요? 외모는 평범한거 아니엇습니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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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Justice 2019/02/11 13:59

    엄청난 휴먼 네트워크네요.
    어디선가 본 문구가 생각나네요.
    "우리 모두는 다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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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살 2019/02/11 14:03

    헐...이제 슬슬 모두 모이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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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량 2019/02/11 14:31

    이거 언젠가 이 소설 끝날때 엔딩은 모든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거 아닙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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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9/02/11 14:39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관계도를 만들면, 다들 굉장히 가까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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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워니유니31 2019/02/11 16:49

    오늘은 특히나 술술 잘 읽어지네요~!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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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ronawa 2019/02/11 17:11

    할.. 함지혜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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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불러용 2019/02/11 17:20

    잘 봤습니다.
    관계도 있으면 재밌겠네요.
    관계도 중심 인물은 누가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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