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보물 393호 전등사 종. 우리나라와 제작 방식이 확연히 다른 종이며 기록에 의하면 중국 송나라의 종이라고 함. 어떻게 우리나라에 건너온건지는 불명.
2.보물 668-4 호인 권응수 장군의 유물 장검. '권응수 장군의 유물'이란 이름으로 등록된 세트에 포함된 아이템으로 권응수란 장군이 임진왜란때 일본 장수에게 뺏은 일본도.
3.보물 904호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우승의 부상으로 받은 것으로 손기정 선수가 써봤더니 안들어갔다고.. 서양인들은 두상이 작았던듯... 현재는 박물관에 기증됨.
4.보물 635호 경주 계림로 보검 . 경주에 계림로라는 도로가 있는데 그곳 공사하다가 땅에서 파낸 검.... 딱 보기에도 우리나라 물건은 아닌걸로 보이며 아마도 신라시절 바닷길을 통해 들어온게 아닐까 추측중...
저 4번은 양식보면 동로마산으로 추측된다는데
정말 신라까지 오는길에 여러 스토리가 담겨있을거 같음
서양인은 앞뒤가 길고 동양인은 좌우가 길다든가..
머리 크기가 아니라 모양이 문제일거 같음
어떻게 건너온건지 불명이라면서 왜 일본군이 가져왔다고 적혀있지
우여곡절끝에 땅에묻히고 먼후손들한테 발견
뭔가 로망있네
2차 대전 때 한국 내에서 옮겻다는거겟지
저 4번은 양식보면 동로마산으로 추측된다는데
정말 신라까지 오는길에 여러 스토리가 담겨있을거 같음
오다가 몇명이나 죽었을까
우여곡절끝에 땅에묻히고 먼후손들한테 발견
뭔가 로망있네
로마 시대 켈트족 보검일 거라는데 켈트족... 우어 ㅋㅋㅋ 판타지 소설이네
저걸로 영령 소환하면 진흥왕 소환되나?
손기정옹이 대두인것인가 고대 그리스인이 소두인 것인가
서양인은 앞뒤가 길고 동양인은 좌우가 길다든가..
머리 크기가 아니라 모양이 문제일거 같음
그럼 옆으로 쓰면. ㅠㅠ
아니면 그냥 머리에 얹어 쓰던 장식품일수도 있고.
어린애들 훈련용으로 만들어진걸수도 있고.....
장두형과 단두형
1번은 포탄만든답시고 쇳덩이란 쇠는 다 긁어온거네
놋그릇 (방짜유기?로 만든 재료들 다 긁어감...)
4번에 검날은 사라진건가?
목재랑 철로 된 부분은 다 부식되고 금이랑 보석같은 부분만 남았대
신라때 로마식 유리잔도 그렇고 통일신라때가 세계무역 진짜 활발하긴 했나봄
통일신라-고려 때 엄청 활발했죠
오히려 쇄국정책이 유행 하던 시절이 더 이상했던 시절일지도 몰라
장보고가 괜히 외척이 되니마니했던게 아니지
당나라 ㅇㅇ
경주 계림로 보검 저거 네온사인으로 둘러 쌓인 타워인줄...
어떻게 건너온건지 불명이라면서 왜 일본군이 가져왔다고 적혀있지
2차 대전 때 한국 내에서 옮겻다는거겟지
총독부 기록상에는 종위치를 옮겨졌다 하는데
이게 원조가 어디인지 모른다는거 아닐까?
ㅇㅇ 먼지모르겠지만 중국종이 조선절에 걸려있던걸 옮김
일제시대에 금속 수탈 당할 때 원래 전등사에 있던 동종을 뺏겼는데, 뺏기고 얼마 안 지나 일본이 패전함
주지스님이 황급히 수소문해서 부평 병기창(무기제작소 같은 곳?)에 빼앗은 금속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종을 찾으러 갔는데 원래 종은 없고 저 종만 남아있길래 어차피 놔두면 혼란한 통에 훼손될건데 이 것도 부처님 뜻이다 하고 전등사로 가지고 감
원래 저 종이 걸려있던 위치는 종에 쓰인 명문에 새겨져 있던 걸로 암
근데 그 절도 다 훼손되버려서 찾아갈 사람도 없다고 함
4번 서프라이즈에서 봤는데
영국마냥 강탈해온건 없네
계림로 보검 개간지네
계림로 보검 찾아보니 단검이고
복원한거보니 더 멋있더라..
왕족물건이라던데 ㄷㄷ
4번 황금 보검 다큐 봤는데 1개는 그림으로, 또 다른 1개는 다 박살나서 부서진 것, 마지막으로 경주 박물관에 완전품으로 1개
즉 유물로 2개 그림으로 1개로 밖에 안남아있음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서역에서 들어온 유리병
로만 글라스... 이름도 멋졍
?? 문화재를 올림픽 부상으로 줬다고?
1900 파리 올림픽 때부터 마라톤 우승자에게 고대 그리스의 유물을 부상으로 주는 관행이 있었다.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40km를 달려온 병사 페이피데스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 관행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던 시기까지 계속 되었는데, 고대 유물 반출 금지령이 떨어진 후에야 폐지되었다
라고 위키에 써있네
저때가 2차대전시기라 문화재 유출에대한 개념이 안잡혀 있어서 가능했던거. 그나마도 안준다는거 소송인가 통해서 아주 나중(90~2000년대이후?) 에야 받은걸로 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