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임진왜란 극초기
음력4월28일 신립의 부대가 전멸,
4월30일 조정의 파천이 결정되며
조정에서는 도원수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에게
한강에 방어선을 펼칠 것을 명한다
이는 파천에 필요한 시간끌기로 방어선에 배치된 조선군들은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결국 탈영병이 속출하여 방어선의 유지는 실패하였고,
부대는 뿔뿔히 흩어진다
음력 5월3일
개성의 조정이 다시 한 번 파천하며
도원수 김명원에게 임진강에 방어선을 펼칠 것을 명했다
김명원은 예하 부대에게 음력 5월18일까지 임진강에 집결하라고 명했다
허나, 부원수 신각의 부대는 임진강에 오지 않았다
명령을 전달받지 못했던
부원수 신각은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양주에서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이후에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과 합류하여
한양 인근에 주둔 중이었다
음력 5월16일
부원수 신각의 부대는 한양 인근 북쪽에서
왜군 선발대 70여명이 민가를 약탈하고 있는 것을 목격,
기습을 걸어 왜군 70여명을 전멸시킨다
이는 임진왜란 중 조선 육군의 첫 승리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임진강의 도원수 김명원은
집결일자인 음력 5월18일이 지나자
부원수 신각이 적전도주를 하였다 판단하여
*비변사에 보고한다
비변사: 조선 중~후기 국방총괄기구, 현대의 국방부와 유사
당시 조정은 급박한 전황 속에서도
적전도주를 하는 장수가 넘쳐난다는 사실은 파악하고 있었고,
일벌백계를 통해 이를 막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때마침 걸린 제물이 신각이었다
비변사의 보고를 받은 선조는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참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신각의 승전보와 수급70이 조정에 도달했고
선조는 뒤늦게 새로 선전관을 보내어
처형을 취소시켰으나
이미 신각은 처형을 당한 이후였다
도원수 김명원은 이 일로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훗날 정유년, 선조가 작정을 하고
이순신 장군을 쳐내려고 할때
그를 끝까지 변호하고 두둔하였다고 한다
근데 빤스런 안했으면 왕 목따이고 조선 끝났어
신각:시발.
저 이후, 현장 처형을 금지시켰다고 하지.
그래서 이순신 장군님도 살수 있었고...
개억울하겠다 도원수도 자기가 훌륭한 장수를 무고했으니 진짜 멘붕이고
인생사 될놈될 안될안
조선 조정은 빤스런 한 상태 아님? 왕도 빤스런 해놓고, 장수들 빤스런 하자마자 바로 처형이라니 ㅋㅋ 지들이나 잘하지
근데 빤스런 안했으면 왕 목따이고 조선 끝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