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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가 만든 요리가 너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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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내가 만든 요리가 싫다.

어디에서도 요리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나지만
난 가끔 내가 만든 요리가 참 싫다.


우리집은 참 유별났다.
집과 연을 끊은지 벌써 얼마가 넘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마 2017년 지금도
엄마는 고추장, 된장, 간장을 스스로 만들고,
일체의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으며
요리하고 있을 것이다.

엄마도, 아빠도
그런 호칭으로 부르고 싶지 않다.


정말 죽고싶다는 생각을 하루에 십 몇번씩 되뇌이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으니까
나는 무조건 살아야겠으니까

정말 내 생명을 위협하는 물리적인 폭력이나
스물여덟이나 먹은 지금에서까지 앓고있는 
여러 장애들의 근원인 정신적인 학대에서도
다 버텨내고 참다 도망쳐나왔으니까.


다시는 그 사람들을 보지 않을 수 있어서
정말로 행복하고 나는 너무나도 많이 좋아졌다.

어디서부터 나온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스스로 독립할 수 있을 때 까지 여기서 버텨내야 돼'
라는 생각.

사람들은 나에게 자존감이 높다하지만
사실 그것도 잘 몰랐었다.

그냥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냥 그런 것들을 해내고 싶어서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완전히 독립할 수 있을 때 까지
지옥같은 나날을 버텨냈던 것 뿐이다.


그래.
그 근원도 알 수 없는
가짜 자존감에서 벗어나서
나는 이제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딱히 평가를 바라지도 않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고,
내 마음을 숨기지 않는 법도,
내가 지금 슬프다거나 아프다거나
힘이 든다는 표현도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떠날까봐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히지도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스크린 도어가 없는 지하철 플랫폼에 있으면
누군가 날 철길로 밀어서 죽이려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플랫폼 맨 앞줄에 서있지 못한다거나

성인 남성의 한숨소리를 듣는다고
발작을 일으킨다거나

내가 더이상 이 사람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나를 포장하는 일이라거나

상처받기 싫어서
먼저 선을 그어버리고
관계를 정리하는 일 따위도 하지 않을만큼

나는 참 많이 좋아졌다.


그래서 가끔 나는 내가 만든 요리가 참 싫다.


정말로 다 잊고 싶고
지우고 싶은데

내 삶의 2/3동안 먹었던 맛의 기준이
나를 낳은 엄마의 맛이더라.


내가 맛있다 생각하는 요리가
다 엄마가 하던 요리의 맛과 비슷하고,
내가 간을 맞추는 기준도,
사용하는 재료도

어쩔 수 없이
다 기준이 내 엄마라서

내 음식에서 너무 익숙한 그런 맛이 나서
나는 가끔 내가 만든 요리가 참 싫다.



댓글
  • wereer 2017/12/15 20:32

    댓글을 못달겠네요. 오묘 복잡해서...
    근데 제남편은 어릴적 자기들을 버리고 간 엄마 입맛을 잊지못하고 저보고 그렇게 하라는데...
    제가 먹어봤남?
    원래 엄마가 어릴적 만들어주신게 젤 맛나요.그게 정답이예요
    당연히 엄마가 만든게 젤 맛있죠...
    제 남편도 엄마는 미워하면서 입맛은 그걸 고집합디다...저희는 비결은 다시다 인데...
    참! 엄마에 대한 애증이 많으시네...
    밉고 그리우시구나...
    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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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즈홀릭 2017/12/15 21:25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가벼워질 수 있을꺼에요
    어린아가씨고생많았어요 대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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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꾸는빵쟁이 2017/12/15 21:53

    요리라는 것이 그런 것이죠.
    어릴때부터 시작해서 어른이 되는 그 순간까지.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어 준 근원이죠.
    참... 낭만적이죠 ?
    최째끔님의 맛이 딸과 아들에게 전해 질 것이고..
    그 딸과 아들은 최째끔님의 맛을 잊지를 못하기에 그 역시 최째끔님의 맛을 낼 것이고 ..
    그 딸과 아들의... 딸과 아들 역시 최째끔님의 맛을 낼꺼에요.
    그토록 미웠던 맛이...
    누군가에는 그토록 그리움으로 남겠죠...
    이 글을 적다보니까는 무득, 최째끔님이 부럽기도 합니다.
    그토록 미운 부모님이지만..
    그토록 나에게 잔인했던 부모님이지만..
    최째끔님의 나이가 60대, 70대, 80대가 되었을때..
    문득, 정말로 어느날 문득 그토록 미웠고 잔인했던 부모님이 그리운 어는 날.
    보글보글 끓은 된장찌개에 자반 고등어 한 접시를 요리해서 먹노라면...
    그토록 싫었지만... 미웠지만.. 그래도 그 밥상에서 만나 볼 수 있겠네요.
    그때는 "육시랄꺼, 눈물겹게 맛있네"라면서 웃음짓는 어르신 한분이 계신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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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oginiJY 2017/12/15 23:11

    아코.. 항상 밝은 에너지셔서 요리에도 자연스레 담겨 있는듯 했는데, 오늘은 그냥 아무말없이 토닥토닥 안아주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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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게유명인 2017/12/16 00:25

    애증의 관계.. 태어나서부터 본 세상의 전부이고
    자라면서도 비중이 너무 크기에 영향을 받을래야 받지 않을수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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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의동탕웨이 2017/12/16 10:21

    잘 읽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인생은 문제해결의 연속이구나.. 이런 생각으로 살았었는데 도저히 해결 자체가 안되는 문제도 이제는 생기기 시작하더라고요..
    아..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있는 것도 행복이구나.. 이제는 어떻게 해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과 어떻게 적절히 조화하며 살아가나.. 이런 걸 하루 하루 터득하며 살고 있네요..
    다음의 10년 20년.. 어떤 유형의 고민거리들이 날 기다리고 있는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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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귤뀰뮬 2017/12/16 10:25

    자존감 뿜뿜이라 팬이에요!!!
    잘 사세요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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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냥치기 2017/12/16 10:28

    님도 님의 요리도 모두 소중합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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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닭갈비만두 2017/12/16 10:31

    저는 워낙  해준 음식이 없어서  그리워 할 맛이 없더라구요.
    어머니가  자주 해주던맛. 아버지랑 자주 먹던 맛. 엄마의 필살기 요리. 하다못해 특정일날 해줬던 기억나는 음식 하나도
    없어여!!!두분다  살아계신데도! (그러니 그래도 님이 부럽단  개소리 아님)
    저도 요리 좀 잘해먹는다면  잘해먹는 어디 놀러가면  음식담당인데여.
    저도  잘  해먹다가도  가끔  울컥해영. 내 음식 싫어서.
    사먹을때  말고  그냥 남이 차려준  정성스럽고  맛있는  음식  먹고싶어서.
    힘내요. 그나마도  요리 잘 못해서  배고픈데  배달 아님 라면밖에 없었다면
    길고 긴 자취생활  정말 힘들었을 거라  위로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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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다쟁이아짐 2017/12/16 10:49

    돌아가시고 나니 자주 해주시던 음식들 먹기만 하지 말고 레시피 좀 배워둘껄...후회가 막심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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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파의시간 2017/12/16 10:59

    저는 째끔님 요리 허세나 과장없이 사람냄새나서 너무 좋아해요. 댓글은 귀찮아서 잘 못 달지만 세상 어딘가의 오유징어 팬 한명이 늘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 기억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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