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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을 잡아먹은 도플갱어에 대하여', 그리고 사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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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을 잡아먹은 도플갱어에 대하여', 김윤찬 作

 



[서론]


본 작품은 '김윤찬' 작가의 만화로, '최효정'과 그의 '엄마'가 실존적 위기를 겪는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작품 전체에 대한 분석이기에 누설(스포일러)이 될 수 있으니 작품을 보고오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상기한 출저로 들어가서 작품을 우선 읽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러면 스토리에 대해서 시간 순서대로 간략하게 정리해봅시다.
1. '딸'은 도플갱어의 습격을 받았다. (이 우연적 사건 이후의 최효정을 '도플갱어–딸'이라고 부르자.)
2. '엄마'는 '딸'과 '도플갱어–딸' 사이의 지나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동일시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외상적 혼란을 겪는다.
3. '도플갱어–딸'은 '엄마'의 외상을 통해 자신의 진상('나'는 '딸'이 아니다.)을 깨닫고 집을 뛰쳐나온다.
3.5 '엄마'는 '딸'과의 회상에서 과거의 '딸'이 새어머니였던 자신을 '엄마'로 불렀던 것을 기억한다.
4. '엄마'는 '딸'과의 추억 속에서 '도플갱어–딸'과의 화해를 모색하지만 동시에 그 둘에 대한 동일시 또한 포기한다.
5. 이렇게 '딸'에 대한 가능성은 좌절되지만, 그럼으로써 '엄마'와 '도플갱어–딸'은 서로를 모녀로 칭할 수 있게 되었다.
본 작품은 대략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작품에 대한 해석에 있어 라캉의 정신분석과 헤겔을 참조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도플갱어의 존재론적 지위]

우선 도플갱어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해서 말해봅시다. 도플갱어가 그 희생자에 대해 미치는 효과를 생각해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은 실상 피해자에 대한 어떠한 피해도 끼치지 않으나 동시에 그럼에도(그럼으로써) 피해자를 죽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도플갱어에게 습격당하기 전과 후가 같거나 다르다는 입증되지 않은 전제는 폐기하고(무전제성의 원리) 바라보도록 합시다. (따라서 저는 '딸'과 '도플갱어–딸'을 전부 '최효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는 이 둘이 동일하다는 것이 아닌 그 둘의 대립에 있어 묶어줄 수 있는 상위 범주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희생자가 겪게되는 죽음이란 다름아닌 그의 상징적 지위(사회 속 그의 위치, 역할 등 그의 사회적 실존)에 대한 죽음입니다. 도플갱어에 대하여 개인의 진위라는 이율배반적 문제를 치워놓고 본다면 그것에 포획된다는 것은 그저 순수한 상징적 죽음에 불과합니다.

즉 도플갱어란 '상징적 죽음(의 우연한 계기)'에 대한 순수한 환유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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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는 변론 이전에 상징적으로 이미 죽은 것으로 취급된다. 확인 절차는 단지 그것을 확정하기 위한 것이다.



 


[코기토Cogito, 주체라는 공백]

도플갱어의 습격 즉 상징적 죽음을 겪게된 인간은 지금껏 자신이 맺어온 모든 상징적 관계들(기억을 포함하여 타자와의 매개로 형성된 내용들)과의 연결이 끊어진 것으로 스스로를 경험합니다. 사회(의 공중이자 협약의 잠재적 보증자라는 의미)의 대타자Autre에게도 도플갱어의 '희생자'는 죽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즉, 여기서 희생자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존재(즉자)와 자신의 경험(대자)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극을 절대적으로 느끼며 존재와 경험을 어떤 식으로든 연결할 수 없다는 무력함을 느끼게 됩니다.

img/24/05/30/18fc534e1995611c2.jpg'나는 그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이는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말했던 순수한 자기의식의 상태와 동일합니다. 자신이 겪었던 모든 실정적positive 내용들을 도외시하고 단지 자신을 그 내용들 사이에 있는 공백으로, 철저하게 어떤 내용도 없이 스스로를 반성하는 어떤 경험의 틈새로 인식하는 상태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데카르트가 지적했듯이, 인간의 순수한 모습입니다. 이는 또한 라캉적 주체로 기호로는 빗금쳐진 S ('$')로 나타냅니다. 이는 도플갱어의 습격을 받은 인간이 최초에 그의 의태로서 다시 눈을 떴을 때(상징적 죽음을 겪고 난 이후에) 자신을 내장과 골격마저 비쳐보이는 투명한 신체로 바라보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희생자가 알몸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옷이라는 은유, 그의 사회적 지위가 철저히 박탈당했고 그의 기표(이름, 직위 등등 그가 사회에서 상징적으로 실존한다는 표식)는 이제 죽은 것으로 취급되고 사회적 질서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희생자 곧 주체는 그 자신을 경험함에 있어 상상적으로조차 그 실정적 내용이 박탈당했다는 점에서 자기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반영마저 꾸밀 수 없다는 점에 있어 더 이상 헐벗을 수 없는 존재이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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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떠한 '나'의 속성에서도 '나'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는 늘 박탈당한 것으로 경험된다.



  


[라멜라Lamella, 죽음 너머에도 지속되는 것]

여기서 '최효정'은 스스로의 모든 상징적 지위를 박탈(당)한 것으로 느끼며, 상징적 질서 속 자신의 위치는 물론 그 개인의 기억 및 '엄마'와의 관계마저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자신은 '도플갱어–딸'이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존재와 무관해 보였던 특성들은 이러저러한 버릇이나 신체적 특징들처럼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며 마치 '딸'이 존재하지는 않으나 존속하는insist 것처럼 여겨지는 섬뜩한 특성(이를 라멜라Lamella라고 부릅니다.)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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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기게 지속되는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는 '엄마'에게는 충격적인 것으로, '최효정'이 설령 '딸'의 특성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음에도 '엄마'는 거기서도 전혀 다른 것을 보고있다는 느낌을 '도플갱어–딸'에 대한 소름끼치는 대면으로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엄마'는 '최효정'에 대한 원초장면(트라우마적 장면, '최효정'의 투명한 몸체에 대한 기억)을 통해 '최효정'에 대해 그는 '딸'이 아니라는 경험('이것은 그것이 아니다')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도플갱어–딸'이란 원초장면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죽은 '딸'의 실재(대상a가 은폐하는 공백)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대상a란 무엇이고 실재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나올 것입니다. 다음의 예시로 설명하겠습니다.
["아버지(어머니), 제가 불타오르는게 보이지 않으세요?" 주체와 대상 a]

프로이트의 환자들 중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는데, 저는 이를 통해 해당 개념들을 설명해보겠습니다.
프로이트에게는 한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 환자는 안타깝게도 어린 나이에 아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무력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들의 장례식에서 아들의 시체 옆 의자에 앉아 졸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선 사방이 불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관에 누워있어야 할 어린 아들이 일어나 있습니다. 아들은 한쪽 팔이 불타오르고 있으며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불타오르는게 보이지 않으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그러자 아들의 옆에 놓여있던 촛불이 아들의 팔 쪽으로 넘어져 불이 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사례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은 이는 꿈의 기능이란 수면을 지속하게하는 능력에 있으며, 뇌가 꿈을 구성하는 이유는 이처럼 잠을 더 많이 자기 위해 현실과의 대면을 어떤식으로든 지연시키는 것이라고 설명됩니다.
그러나 라캉은 반대로 이 사례를 아버지가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욕망의 실재가 꿈 속에서 드러난 꿈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욕망의 공식은 $◇a로 $란 앞서 말했듯이 주체이고 a란 욕망의 대상이며 그것이 단순히 대상일 뿐만이 아니라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면 '욕망의 대상원인'이라고 부릅니다. 흔히 대상a로 불리지요.
그런데 욕망의 공식은 이러한 대상a의 은폐효과를 통해 벌어집니다. 즉 대상a란 실은 내가 욕망하는 것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공백이라는 것을 감추는 것으로,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면 (대상a에 너무 근접해서 그것을 들추어내면) 그것의 효과는 무산되고 대상a는 다른 대상으로 옮겨갑니다(전치). 그래서 연산자 ◇는 또한 주체가 대상a에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거리(지연)를 의미합니다.
예시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어떤 만화책을 갖고싶어서 그것을 사면 순간의 만족과 함께 그것을 가지려는 욕망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조만간 욕망은 다시 피어올라 다른 물건(게임이던 피규어건)을 향합니다. 이는 각각 주체로서 여러분이 만화책을 대상a로 만나고 그것을 대상원인a로서 욕망하고 얻은 다음, 대상a의 지위를 다른 물건으로 옮긴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너무 가지고 싶어서 안달났던 것을 실제로 얻은 다음에 느끼는 허무감은 이 대상 a의 전치 과정에서 드러나는 공백이 쉽게 가려지지 않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실재란 무엇이냐? 이 물음은 다시 아버지의 꿈으로 돌아갑시다. 아버지는 아들이 죽었음에도 그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대상a로서 욕망하고 있습니다. 의식적으로는 아들의 죽음을 알지만 (아들의 죽음을 인지함) 무의식적으로는 아들의 죽음을 모르는 상태인 것 (그럼에도 아들을 욕망함) 이지요.
여기서 꿈은 대상a의 지위를 다른 무언가로 전치하거나 아들이 죽은 현실을 피하기 위한 도피수단이 아닙니다. 꿈은 욕망의 실재 곧 무의식적 진실을 주체에게 대면하게 하는 공간입니다.
여기서 아들은 아버지의 무능을 비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아들은 더 이상 대상원인a는 물론이고 단순한 대상a로조차 삼을 수 없다는 정신분석학적 진리가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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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불타오르는게 보이지 않으세요?"'



즉, 의식적 측면에서 등록된 아들의 죽음이 비로소 무의식이라는 욕망의 구조에까지 침투하고 나서야 아버지는 아들이 죽었다는(아들은 죽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욕망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리에 대해서만큼은 꿈과 현실의 지위는 뒤바뀌는데, 아버지가 현실로 깨어나는 것은 꿈이 전해주는 진리(아들을 더 이상 욕망할 수 없다. 그리고 거기엔 내 책임/무능이 있다.)가 주는 외상적 충격을 피하는 방어기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충격적 사건을 겪은 사람들이 수면을 두려워하는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는 사실로, 이들 또한 이러한 면에서는 실재의 외상적 충격을 피해다니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재란 이처럼 대상a의 지위에 놓인 어떤 것을 상실했으되 다른 것으로 전치하지 못하는 (그러므로 그것을 공백으로 경험하는) 곤경에서 드러나는 욕망의 진리입니다.
이 경우 본 작품에서도 '엄마'가 '최효정'에 대하여 더 이상 '딸' 곧 그의 대상a가 될 수 없다는 사실 곧 '도플갱어–딸'의 원초장면(몸이 투명한 '최효정'에 대한 기억)이라는 '최효정'의 실재를 만났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효정'에게서 '딸'을 연상시키는 모든 행위는 오히려 대상a에 대한 상실을 환기시키는 조건으로서 작용하며, 그 외상적 상실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딸'과 '도플갱어–딸'의 차이가 '엄마'의 트라우마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 차이가 과연 무엇이고 '딸'이 '도플갱어–딸'로 변화했을 때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기에 전혀 다른 존재로 비추어지는가?
자, 여기서 우리의 실존적 위기라는 피상적 화두가 성취될 때입니다. 그것은 '딸'의 정체성, 본질, 다른 말로는 '아갈마agalm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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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갈마, 우리 심장 속의 보물.

 




[아갈마, '나는 너의 안에 있는 것을 너보다 더 사랑한다.']

아갈마란 어원상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개념으로, 이것은 아무도 볼 수 없는 사티로스의 심장부에서만 찾을 수 있는 보물을 뜻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여기서 아갈마는 '딸'에서 '도플갱어–딸'로의 이행에서 잃어버린 딸의 어떤 본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 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즉, 아갈마란 어떤 것을 대상a의 지위로 올릴 때 대상 a의 은폐효과 아래에 가려진듯한 어떤 충만함의 실루엣, 환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예시를 들어봅시다. 어린왕자에게 양을 그려주는 이야기에서 화자(아마 작가인 생텍쥐베리)가 어린왕자를 위하여 양을 끊임없이 그리지만 어린왕자는 모든 안에 기각을 하며 그것은 이상적인 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화자는 지쳤는지 마지막으로 상자를 하나 그려놓고 '여기에 네가 원하는 양이 있다'고 말하고 어린왕자는 그제서야 기뻐합니다.
여기서 상자가 대상a고 '실제로 존재하는' 이상적인 양이 아갈마입니다. 즉, 아갈마란 불완전한 현실 너머에서 나타나는 완전한 대상(플라톤에게는 이데아, 칸트에게는 물자체)이라는 환상임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여기서 해야할 일은 양의 이상적인 비율이나 조건을 검토하는 것이 아닌, 그러한 이상적인 양이 존재한다는 기대를 주는 가림막을 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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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것이 아니다.' 대화 속에서 나타나는 결렬은 끊임없이 욕망의 대상과 요구의 응답 사이에서 요동한다. 즉, 욕망은 순수 요구이다. 그것은 욕구의 충족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대한 요구이다.

 


즉, '딸'과 '도플갱어–딸'의 차이란 단순히 정신분석학적 위상의 차이, 곧 '최효정'이 대상a인가 아닌가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아갈마는 앞서 말했듯이 욕망의 은폐가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본질이기에, 그것이 더 이상 대상a가 아니라면(실재라는 공백을 은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게됩니다.
'엄마'가 '딸'을 잃어버렸다는 경험은 다름아닌 '최효정'이 더 이상 대상 a가 되지 않음으로써 '도플갱어–딸'이라는 실재가 그러한 아갈마의 순전히 환상적인 지위를 드러냈다는 경험에 불과한 것이지요. 즉, 욕망이란 욕망의 대상(대상a로의 대상)보다 욕망의 대상에 대한 환상(아갈마)을 더욱 사랑하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욕망이 좌절되면 대상에 대한 환상을 고수하기 위해 대상을 거부하는 지경이 이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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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더 이상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로써 '최효정'은 '도플갱어–딸'로서 '딸'의 상실이라는 부정적 대상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또한 놀랍게도 인간의 정체성이란 즉자적으로(자체적으로, 스스로) 지닌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지닌듯한 환상을 통하여 대자적으로(그에 대하여서, 스스로 아님으로) 지니게 된다는 통찰을 얻게됩니다.

즉, 테세우스의 배가 테세우스의 배로 불릴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테세우스의 배로 바라보기를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로 '테세우스의 배여야할 어떤 설득력 있는 이유'란 단지 내재적 환상이거나 사후적으로 찾아지는 것입니다. 즉, 편향이란 단순히 심리학적이거나 사회학적인 현상일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인 개념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체란 순전히 이런 타자의 욕망이 늘 대상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 더 정확히는 주체 자체가 타자라는 상징적 질서의 비정합성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존재란 의미론적 공백과 동일한 것이지요.
현실 속의 테세우스의 배와 개념으로서의 테세우스의 배가 지니는 차이라는 문제 자체가 그것을 예증하듯이 말입니다. 결국, 주체란 인간 자신(현실을 살아가는 인간 실존)은 인간(상징적 질서에 등록된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주체인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는 늘 분열된 주체(빗금쳐진 주체, $)로서의 주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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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욕망에서 사랑으로]

그렇다면 '엄마'가 어떻게 '최효정'을 '딸'이라는 잃어버린 상상적 대상과 '도플갱어–딸'이라는 실재 간의 대립을 넘어서서 만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헤겔의 종합과 만나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헤겔의 종합에 대해 정,반,합으로 도식화하는 풍습에 대하여, 그리고 이런 삭막한 도식화는 잘못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잘 알고있습니다.
짧게 말하자면, 종합이란 논리적 연관에서 보자면 단순히 외적으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내적으로는 서로에 대해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우선 우리가 판단을 할 때 "A는 B다"라고 판단을 합니다. 여기서 A와 B는 물론 다릅니다. 같다면 그것은 동일률, 동어반복으로 판단의 내용이랄게 없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과는 빨갛다. (사과≠빨간색) 아인슈타인은 똑똑하다. (아인슈타인≠똑똑함) 등등...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는 서로 어떤 식으로든 다르다는 사실에서 이 둘은 대립한다는 것(이를 모순률이라고 합니다)을 보게됩니다.
그렇다면 이를 극단으로 밀어붙여서 아예 다른 것들끼리, 대립이 극심해서 같은 것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극단적인 대립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이를 사변적 명제라고 하는데, 헤겔은 '정신은 뼈다'라고 했지만 저는 좀 더 쉬운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빛은 어둠이다.'
'빛은 어둠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대립은 또한 서로는 서로에 대한 부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편리함이 있습니다. 빛은 어둠에 대한 부정이고 어둠은 빛에 대한 부정입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신기하게도, 각각에 대한 즉자적(자체적)인 정의가 아니라 오로지 서로라는 대자적(상관적)인 부정입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부정이라는 점은 또한 서로에 대한 포함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입니다. '빛'은 '어둠'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에 '어둠'을 논리적으로 내포합니다. 반대로 '어둠'은 '빛'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에 '빛'을 논리적으로 내포합니다.
여기서 빛과 어둠을 정의할 수 있는 방법은 부정 밖에는 없으며 따라서 각각은 내용이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빛과 어둠 각각은 실은 즉자적으로(자체로)는 서로에 대한 부정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절대적 차이이자 순수한 부정성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얻는 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종합인 '빛과 어둠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상태'가 아니라 순수한 부정성으로서 두 대립물의 일치입니다.
이것이 논리학의 초입에서 순수 존재가 순수 무로, 순수 무가 순수 존재로 이행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다름아닌 존재를 자체로 파악한다는 것은 앞선 과정처럼 대립물이 없으므로 부정할 것 또한 없다는 사실에서 그 내용 또한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내용이란 부정적으로 형성되기에 순수 존재에 대한 파악은 그 대립물인 순수 무로의 붕괴로, 또한 순수 무에 대한 파악도 순수 존재로의 붕괴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이해 못하셨다면 종합이란 논리학적–형이상학적인 개념이며, 이것의 의미는 양자의 대립이란 또한 그 양자가 내속적으로 결합해있는 방식이라는 논리적 사실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더 쉬운 예시로 개인과 사회는 대립하는 것으로 종종 이해되지만 그 대립은 순전한 외적 대립이 아닌 서로에 대한 차이(부정) 속에서 서로와 관계맺고 결합하는 방식입니다. 개인 없는 사회 없고 사회 없는 개인은 없습니다.
이 둘의 대립하는 존재는 상호에 대한 논리적 내포이며 오로지 내포로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동일합니다. 대립이 없이는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해결책을 얻게됩니다. '딸'과 '도플갱어–딸'의 대립이 종합될 수 있는 것은 다름아닌 이 둘의 차이, 이 둘은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는 절대적 간극에서 오는 이 분리에 있습니다. 즉, 앞서 말했듯 대립한다는 사실은 곧 그것이 종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순전한 대립이란 단지 우리가 그것이 종합임이 모르는 상태일 뿐인거죠. 종합이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가 그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모르는 상태로의 이행입니다.
'최효정'이란 단지 이 둘이 대립하고 분열하고 갈라져있다는 사실이 이미 종합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마'가 이를 깨닫는 방식 또한 매우 변증법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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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부름(요구)에 응답 할 수 없다는 것, 그 궁극적 실패가 바로 주체이다.

 




['아무것도 없거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로 읽어라', 사랑의 이자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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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기억해냅니다. '최효정'이 어릴적 최초로 '엄마'를 '엄마'로 부름으로써 그는 비로소 '아줌마'가 아닌 '엄마'가 되었다는 것을요. '엄마'가 되었음이란 단지 '최효정'이 '엄마'라고 불렀던 최초의 아주 사소한 계기이자 과장하자면 '시원적 명명행위(최초의 부름')'만이 있었을 뿐이고, 이로써 '딸'이 있고 그럼으로써 '엄마'와 '딸'이라는 둘은 '가족'이라는 종합 속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참고로 상대를 특정한 어떤 것으로 정립하는 이런 명명행위를 또한 정초적 말founding word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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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너는 나에게 특별하다.



거기에는 아주 우연하고 형식적인 계기(그저 '엄마'라고 부르고 '딸'이라 부르는 행위)만 있었을 뿐 어떤 필연적이고 장엄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엄마'가 되는 것엔 단지 그렇게 부르는 것만이 필요했습니다. 아갈마의 등장도, 대타자(상징적 삶을 승인하는 보증자)의 인정도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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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네가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여기서 '엄마'는 깨닫습니다. '아, '딸'이라고 부르는 것을 넘어서는 '딸'은 없다. 그것은 애초에 없었다. 딸의 아갈마agalma, 딸의 본질, 가증스런 벌레(도플갱어)에게 죽어없어진 내 가엾은 새끼의 본질이라는게 애초에 없었다. 만약에 내가 정말 그것을 잃어버렸다 한다면, 사실은 애초부터 나는 그것을 영영 잃어버린 채였다.'


이제 엄마는 '딸'을 욕망하지 않습니다. '딸'을 가능케 할 아갈마는 애초에 환상이었다는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도플갱어–딸'이 사실은 이 '딸'의 실재였다는 것, 지금 여기 있는 '진효성'이란 그러한 '딸'과 '도플갱어–딸'의 대립을 통해 존재하는 아이라는 것, 그리고 '엄마'가 '딸'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엄마'가 '엄마'를 그리고 '딸'이 '딸'을 마지막으로 '딸'이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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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충동은 죽음조차 넘어선다. '딸'의 실재는 자신이 죽은지도 모르고 재채기로 자신의 과잉을 드러낸다. 이 과잉은 공백 자체라는 안죽음undead이다.




이로써 '엄마' 또한 '딸'처럼 아갈마 없는 공백이 되었습니다. '딸'을 잃어버린 그 상태가 바로 '엄마'가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공백이 되는 상태, 텅빈 주체로서 '딸'의 실재를 만나고 포옹할 수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분리가 애초에 종합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최종적인 자기비움kenosis로서의 사랑,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됨으로써 ('딸'에 대해 '엄마'가 아갈마를 단념하고, 자신 또한 공백으로 돌아감으로써) 합쳐지는 것, 이것이 종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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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가지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다. – 자크 라캉




욕망과 사랑의 차이는 바로 아갈마의 차이입니다. 설령 내가 상대방에 대해 더 이상 욕망해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그 텅 빈 공백으로서의 실재에 대해 사랑하는 것. 그것에 대한 이유가 그것 뒤에 따라나오는 것. 이 처럼 아갈마의 부재 속에서도 지속되는 사랑이 실재를 향할 때, 이 실재를 단독성Singularity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엄마'는 '최효정'을 '딸'(즉자)이나 '도플갱어–딸'(대자)이라는 아갈마의 여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최효정'이 '딸'의 아갈마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도플갱어–딸'은 '딸'의 실재라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이 둘은 그 대립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며 따라서 동일한 것입니다. '엄마'는 마침내 순수한 부정성 속에서 승화한 '최효정'(즉자–대자)의 공백을, 사랑이 향하는 단독성으로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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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란 사랑의 대상을 상실하는 것이고 시작부터 그것을 애도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내게서 사랑하는 사람이 '도플갱어'로 바뀌는(심지어는 내가 그를 바꾸는) 경험인 셈입니다. 오로지 내가 그 사람을 나의 욕망에 있어 늘 상실되고 죽은 것으로 여기는 한에서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죽음을 동시에 넘어서는 라멜라의 끈질긴 불멸성으로 내게 돌아오는 한에서만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딸'을 헐벗게 만들고 죽음에 빠뜨렸던 것은 다름아닌 '엄마'의 사랑이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도플갱어는 작품 속에서 뱀과의 연관을 가지는데, 이러한 뱀은 '실낙원'이라는 내러티브 속에서 나타나는 근원적 상실에 대한 계기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합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지젝의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렇기에 "사랑받는 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지극히 폭력적이고 외상적인 사건이다." 이는 나와 나의 불가해한 X 사이의 간극을 직접 대면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이유로 "사랑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주는 것이다."라는 말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라는 말로 보충된다." –「How to read 라캉』, 슬라보예 지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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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또한 그것이 죽였던 것들을, 주체와 대상을 우리에게 돌려준다. 하지만 그것은 동일하지 않으며 근원적인 변화를 겪은 회귀이다. 죽음과 부활은 동일한 것의 다른 표현이며 이로써 죽음을 경험한 우리는 사랑의 심연 속에서 하나되어 다시 만난다.








[결론]


결론을 말해봅시다. 우선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우리(그리고 우리가 사랑한다 생각하는 것들)는 본질적으로 도플갱어입니다. 아직은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길뿐인 도플갱어말입니다. 본질이라는 (불가능한) 정체성을 꿈꾸며 스스로를 기만하는 존재지요. 그것이 오늘날이 참된 사랑이 적다는 상투어가 넘쳐나는 시대가 된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영혼을 비웃고 진리에 침을 뱉으며 종교에 의지 않고도 자유로운듯 척하지만, 욕망할 때 만큼은 도처에 아갈마가 넘쳐난다고 생각하는 사이비 형이상학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날 우리는 비참해질 수 밖에 없다는 점만이 비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선 정말 무엇이든 한다는 점에서 더 없이 비참한 것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에 목을 메고 모든 것을 욕망으로 대함으로써 진실을 외면하며 윤리와 진리는 아예 계산식에서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맹목적인 욕망이란 사실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의 방어기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는 여러분에게 지겹고도 통상적인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겠습니다: 사랑하십시오, 여러분. 


설령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허무고 공백이라 할지라도 거기서 눈돌리거나 억압하지 말고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이 세상에 사랑이 희박하더라도, 모든 것이 욕망의 척도로, 돈으로, 쾌락으로 계산되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설령 우리가 이러한 것들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라 할지라도, 오로지 사랑으로 나아가십시오.


자신을 들여다보십시오. 너무나 투명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본다면 이제 명확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사랑만이, 오직 사랑만이 진정 우리가 서로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따라서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유산인 것입니다. 더 정확히는,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곧 사랑만이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말고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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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VhZW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