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 본인이 이공계 대학원생, 특히 의학/약학/생명과학 분야의 종사자라면 얌전히 뒤로가기를 누르십쇼
아그네스 타키온의 첫 논문이 나온 후, 두어 달 정도 뒤의 일이었다.
모르모트 군이 어쩐 일로 먼저 그의 개인 사무실로 아그네스 타키온을 호출했고, 그녀는 어쩐 일인가, 혹 모르모트 군이 로맨스에 눈이라도 뜬 것일까 하여 두근거리는 기대를 하고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간 아그네스 타키온을 맞이하는 것은, 분명 모르모트 군이었지만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그런 모르모트 군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그네스 타키온은 그의 이런 분위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그의 사무실을 탈출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사무실의 문이 닫혀 있었다.
닫혀 있기만 했다면 다행이랄까, 아그네스 타키온이 힘을 주며 당겨 보아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세상에, 우마무스메의 필사적인 당김에도 꿈쩍 않는 문이 있다고?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아그네스 타키온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문밖에서 히죽 웃고 있을 악우의 이름을 으르렁거리듯 내뱉는다.
“……카페, 군.”
그런 아그네스 타키온의 반응에도,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즐겁기 그지없었다.
“트레이너 씨와…단둘, 아닌가요. 모처럼인데…즐거워하셔야죠, 후후.”
“이 문, 당장 열어! 당장 열란 말이네! 카페 군, 카페 구우우우우우운―!!”
그러나 그런 아그네스 타키온의 절규에 대답한 것은, 맨하탄 카페가 아니었다. 한심한 눈으로 아그네스 타키온의 추태를 바라보던 모르모트 군…아니, 트레이너 군이 쯧, 하고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야, 아그네스 타키온.”
“히익?! 트레이너 군, 그런 눈으로 나를 ㅂㅈ 말아주게! 싫어! 싫단 말이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싫다네!”
“…….”
감 하나는 좋은 녀석이다, 트레이너 군은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렇다고 아그네스 타키온의 부탁대로 그만둬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야, 이게 다 아그네스 타키온을 위한 길인걸. 그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학위과정과 짧은 박사후과정 생활을 떠올리며, 그는 자비란 일절 없는 말투로 말했다.
“이렇게 너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싫어! 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 절대로 싫다네 싫어―!!”
“네가 무슨 스윕 토쇼냐? 얌전히 듣지 않는다면 이번 주는 랩 미팅을 2회로 늘려버리겠다.”
“…….”
트레이너 군의 애정 어린 협박에 아그네스 타키온은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1주일에 랩 미팅 2회는 너무한 것 아닌가. 아그네스 타키온이 아닌, 세계의 어느 대학원생을 데려다 놓아도 주 2회 랩 미팅은 가혹한 처사라고 입을 모아 말을 할 것이다.
아무튼, 아그네스 타키온이 조용해지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그네스 타키온…너, 우리들의 랩실 연구비 사정을 알고 있니?”
“풍족하진 않지만 그래도 부족하진 않다고 알고 있―”
“갈―!!! 네 녀석이 요 몇 달 동안 친 사고를 수습하느라, 연구비 거의 다 썼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히익……?!”
트레이너 군이 오랜만에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를 지르며 아그네스 타키온을 타이르자, 우마무스메의 본능이 귀를 접고 사무실 한구석으로 대피하도록 아그네스 타키온에게 명령한다.
그러나 그렇게 한쪽 구석에 쭈그린 아그네스 타키온에게, 일말의 자비도 없는 표정으로 트레이너 군은 판사처럼 주문을 외친다.
“그러니, 연구비를 따라.”
“……히잉.”
“물론, 우리 하늘 같으시고 자애로우시고 연구도 기막히게 잘하시며 존경해 마지않는 나의 동문 선배님이신 심볼리 루돌프네 트레이너 선배가, 이번에 SRC (Science Research Center) 과제를 총괄로 따시면서 이 미천한 몸을 2세부로 넣어주시는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나는 5년간 연 2천 4백만엔 이라는 연구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만.”
물론 그 깐깐한 선배의 입맛과 촉박한 일정에 맞춰가며 세부 연구과제 계획서와 발표 자료를 마련하느라 요 2주간 죽지 않을 정도만 잤다는 슬픈 비밀이 있지만, 아무튼 연구비 걱정에 마음이 심란하던 차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역시 학연, 지연, 혈연은 무적이다. 같은 랩실 출신인 선배님 덕을 이렇게 봅니다. 동문 만세, 동문 최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그네스 타키온의 트레이너 본인이 실적이 없고 연구를 못 했더라면 그런 기회조차 없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분골쇄신하여 과제를 2세부과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야겠다는 마음일 따름이었다.
물론, 그것은 곧 아그네스 타키온와 맨하탄 카페가 레이스 이외의 일들(특히 실험)로 갈려 나가는 미래가 펼쳐졌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나, 그런 말을 굳이 담당 우마무스메들에게 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랩에 연구비가 조금이라도 더 있으면 좋은 게 아니겠냐? 그러니 너도 써라, 연구비.”
“……히이잉.”
아그네스 타키온답지 않게, 기어가는 목소리로 불만을 표한다. 하지만 그런 불만, 학계에서 용인될 리가 없다. 까라면 까는 꼰대 조직 학계답게,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아그네스 타키온의 불만을 무시하며 말한다.
“물론 너는 박사가 아니기 때문에, 하다못해 박사 수료조차 아니기 때문에, 조금 엄밀하게 말하면 학사는커녕 고졸조차 아니기 때문에! 너는 국책과제에 지원하지 못한다. 국가가 주는 모든! 모든 펠로우십(장학금)이나 연구과제를 쓰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트레이너 군…!”
한 줄기 희망이 아그네스 타키온의 눈동자에 깃든다. 자격이 안 되어 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분명한 핑곗거리가 된다.
그러나 아그네스 타키온은 생각했어야 했다. 트레이너 군이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하여 연구비 이야기를 꺼낸 이상, 어딘가에 아그네스 타키온이 쓸 수 있는 연구과제, 또는 팰로우십이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너는, 중앙 트레센 교내 과제를 쓴다.”
“……에?”
“못 들었니? 다시 말해 줄게. 중앙 트레센 교내 과제를 쓴다.”
“타키온은 아무것도 못 들었네, 아무것도 듣지 못했네.”
“주 2회 랩 미팅에 주 2회 저널 클럽 추가.”
“죄송합니다, 교내 과제, 쓰도록 하겠습니다.”
트레이너 군의 한마디에, 아그네스 타키온은 얌전히 소파 위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응…3년 내내 고통받느니, 몇 주 고통받고 말지.
“잘 생각했다, 아그네스 타키온. 솔직히 과제 제안서 못 쓰는 PI(연구책임자)가 어디 있겠니. 카페는 PI 할 생각이 없으니까 상관없지만, 너는 아니잖아. 이게 다 인생의 경험이다, 생각하고 잘 써봐야지, 피하려고 하면 안 돼요.”
“……히이이잉.”
아무튼 그런 현명한 선택을 한 아그네스 타키온을 앞에 두고, 트레이너 군은 그가 확인한 정보들을 아그네스 타키온에게 말해 주기 시작했다.
“자, 일단…과제명은 ‘중앙 트레센 교내 신진연구자 지원사업’이다. 뭐, 교내 과제니만큼 어디 시스템에 업로드 하는 건 아니고, 연구지원과에 직접 제출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름 정도는 알아 두라고.”
“……네에.”
갑자기 공손해진 아그네스 타키온의 등을 위로하듯 토닥이며, 그는 아그네스 타키온의 눈앞에 노트북의 화면을 들이댄다. 등을 토닥이는 것은 어디 도망가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었으리라.
트레이너 군의 명치를 한 대 세게 가격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아그네스 타키온은 트레이너 군이 보여주는 노트북의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다.
“네가 이 과제에 지원해야 하는 이유는, 유일하게 네가 자격 요건이 되기 때문이야. 여기, 지원 자격을 보면…박사학위 수여 받은 지 3년 이내인 자 또는 ‘현직 중앙 트레센 소속 연구원’이라고 되어 있잖아.”
“연구원 등록이 되어 있으니까 문제없다, 이 말이군.”
“그래. 이미 연구지원과에 전화해서 자격 요건 다 확인해 봤어.”
“……칫.”
은근슬쩍 스리슬쩍 빠져나갈 수 있을 거란 아그네스 타키온의 기대는, 트레이너 군의 말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빼도 박도 못하게 연구비를 써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거, 무려 2년간 연 5백만 엔이라고. 총 1천만 엔짜리 연구비란 말이야. 가만히 멍때리고 있으면 1천만 엔이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니? 아니잖아.”
“물론, 아니긴 하다만.”
“거기다가 이거, 발표평가는 없고 오롯이 서면 평가만이야. 발표평가가 없는 연구과제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이니. 계획서…써야겠지?”
“…….”
“너무 그렇게 싫다는 표정 짓지 마렴. 그래도 우리 지금 하는 프로젝트가 과제의 목적에 제법 들어맞으니까, 계획서 쓰는 건 그다지 어렵진 않으리라 생각해.”
“트레이너 군에게는 쉽겠지만, 나는…그, 경험도 없고…….”
그러면서 아그네스 타키온은 슬그머니 트레이너 군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최후의 방어기제이다. 하기 싫다는, 안 하고 싶다는 그런 본능적인 방어기제.
하지만 트레이너 군은 그런 아그네스 타키온의 모습을 상큼하게 무시하며,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 웃으며 말한다.
“물론, 과제 제안서…지금은 연구계획서라고 할게. 아무튼, 연구계획서를 어떻게 쓰는지 알려줘야지. 자자, 이 연구계획서 화면을 볼래?”
“……싯팔.”
아그네스 타키온의 모든 퇴로가 막혔고, 그녀는 트레이너 군 앞에 속절없이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뭐…앞부분 연구과제 지원 신청서는 공란 다 적으면 되니까 넘어가고, 연구 계획 요약문은 네가 할 연구 간단하게 4-5줄 정도로 요약해서 적으면 돼. 키워드는 5개 이내니까, 대충 맞춰서 쓰고. 크게 중요하지 않아.”
“다행히 앞부분은 어려운 것이 없군.”
아그네스 타키온의 표정이 조금 풀린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쉬워서 다행―
“연구계획서 부분은, 1 연구의 목적, 2. 연구목표 및 내용, 3. 연구 방법, 4. 사업 목적 및 연구 수행기관, 담당 트레이너의 적합성, 5. 연구자의 연구 수행역량, 6. 연구성과의 활용방안 및 기대효과, 7. 참고문헌. 이렇게 적으면 되겠네.”
“…….”
―이기는 개뿔, 실전은 언제나 기대 이상이었다.
평생 처음 들어보는 문장들의 나열에, 아그네스 타키온은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 시간이 끝나면 연구실에 가서 아세트아미노펜이나 한 움큼 먹어야겠다며 그녀의 간을 혹사할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그네스 타키온이 그러거나 말거나, 트레이너 군은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연구의 목적 부분은, 네가 하려는 연구가 왜 필요한지, 주제의 독창성이 무엇인지, 다른 연구와의 차별성이 무엇인지 서술해야 하는 부분이야. 왜 연구비를 너한테 줘야 하는지 설득하는 거지. 논문에서 말하는 introduction (도입부)와 비슷한데, 교내 과제니까 영어로 쓸 필요 없고, 일본어로 쓰면 돼. 논문 써봤지? 그럼 쓸 수 있어.”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한 듯이 할 수 있지? 라며 반문하는 트레이너 군을, 애정과 증오가 뒤섞인 눈으로 잠시 노려보다가, 아그네스 타키온 체념한 듯이 말한다.
“……아마도.”
“응, 쓸 수 있어. 일단 써 봐.”
하지만 트레이너 군은 이미 답을 정해놓고 물어본 것이었다. No라는 대답 따위를 생각한 것이 아니리라. 도대체 트레이너 군의 대학원 생활은 어땠길래, 이렇게 성격이 뒤틀린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
“다음으로, 연구목표 및 내용 부분은…솔직히 어려운 부분은 없어. 연구과제의 최종 목표 간단하게 쓰고, 연차별 목표를 정량/정성적으로 쓰면 돼. ……정량 정성이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지?”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네. 담당 우마무스메를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무시했으면 연구과제 쓰라고도 안 했어.”
“무시해주게! 제발 무시해주게 트레이너 군……!”
순식간에 태도가 바뀌며 절규하는 아그네스 타키온이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트레이너 군은 표정변화 하나 없이 웃으며 그의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아무튼, 이 과제는 2년짜리니까 1차년도와 2차년도만 쓰면 되겠네. 목표 및 내용 부분은 표로 간단하게 정리하고, 연구과제의 내용 부분에다가 서술해서 쓰면 돼. 어려운 것 없어.”
“…….”
트레이너 군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아그네스 타키온의 얼굴은 죽상이 되어간다. 어려운 것이 없다는 말은 트레이너 군이나 다른 연구책임자 트레이너들 기준이지, 학사 학위조차 없는 한낱 고등부인 아그네스 타키온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 박사는 병아리의 마음을 모른다. 이 얼마나 잔인하고도 참혹한 명제란 말인가.
그러나 트레이너 군은 담당 우마무스메의 마음을 모르는 존재, 담담하게 그의 말을 할 뿐이다.
“다음으로 연구 방법 부분은, 네가 어떤 실험 등을 통해서 연구계획서에 적은 주제를 증명할 건지 구체적으로 적으면 돼. 그리고 조금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으면, 연구의 추진체계 같은 걸 도식화해서 집어넣으면 되고. 서식은 자유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나열하는 것보다 서술해서 적는 걸 선호하니까 그렇게 적으렴.”
“트레이너 군은…악마라네.”
“……다음은 사업 목적 및 연구 수행기관, 담당 트레이너의 적합성인데…여기는 과제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왜 이 연구 수행기관…그러니까 중앙 트레센이어야 하는지, 담당 트레이너가 왜 이 몸이어야 하는지 이유를 논리적으로 적어야 하는 부분이야. 원래는 내가 적어주려고 했는데, 어차피 악마가 된 거, 조금 더 사악해져 볼까.”
“트레이너 군은 천사! 정말 천사! 천사라네!”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데.”
“오오, 위대하신 트레이너 군이시여, 전능한 과학의 빛으로 나를 보호하…시팔 때려치우게. 그냥 내가 쓰겠네.”
이를 부득부득 갈며 애정보다는 증오가 조금 더 많아진 눈빛으로 트레이너 군을 노려본다. 조금 심하게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트레이너 군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자극하는 것을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게 다 타키온 네가 잘되라고 하는 일이란다. 나중에 어엿한 연구책임자가 되어 제자들을 가르치다 보면, 분명히 나에게 고마워할 날이 올 거란다. 지금의 아그네스 타키온에게 그리 말해봐야 씨알도 안 먹힐뿐더러 좋은 소리 못 들을 테니,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다음은 연구자의 연구 수행역량인데, 이 부분은 정말 쉬워. 타키온 네가 이 연구를 얼마나 잘 수행할지 적으면 돼. 너 최근에 논문도 하나 냈고, 네가 연구하던 부분이랑 과제 주제랑 대충 비슷하니까 적당히 나 잘났어요…하고 적으면 돼.”
“잘난 거라…야근을 잘합니다, 같은 거?”
“그건 기본이니까 안 돼.”
“…….”
트레이너 군의 단호한 말에 아그네스 타키온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연구자에게 있어서 야근이란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명제다. 그러니까 연구직이 포괄 임금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연구과제의 활용방안 및 기대효과는…솔직히 이 부분은 평가하는 사람도 거의 안 봐. 적당히 그럴듯하게 좋은 말 창작해서 쓰라고.”
“그 말이 제일 어려운 거 알고는 있나, 트레이너 군?”
“아니? 진짜로 쉬워서 말한 건데? 아, 그리고 레퍼런스 (참고문헌)은 7개 이내야. 교내 과제라 참고문헌 수에 제한 있으니까 꼭 필요한 레퍼런스만 달아.”
“…….”
그러나 아그네스 타키온은 뚱한 눈으로 트레이너 군을 노려본다. 그야, 설명을 해줬다곤 하지만 아그네스 타키온의 계획에 없던 일을 시켰을뿐더러, 트레이너 군이 하는 일은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불만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트레이너 군이 과제를 쓰자고 제안(이 아닌 통보)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건 이는 아그네스 타키온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트레이너 군과는 분리된, 오롯이 아그네스 타키온 혼자만의 연구비가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귀찮은 일을 가져온 트레이너 군에 대한 원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 다 쓰면 검수는 해줄 테니까.”
그래도 그런 아그네스 타키온이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그는 검수는 해주겠다며 아그네스 타키온을 다독인다. 그러나 아그네스 타키온에게 이는 전혀 위로가 아니었다. 검수…중요하긴 한데, 그렇다고 트레이너 군이 안 해주면 안 해주는 거지, 뭐 어쩔 건데.
그러나 눈앞에 닥친 거대한 업무의 벽에 부딪힌 아그네스 타키온의 정신은, 그런 트레이너 군의 위선 아닌 위선에도 화를 내거나 불만을 표하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투덜거리듯 말한다.
“마음대로 하게나.”
“그래. 그러면 기대하고 있을게. 아 참, 마감 2주도 안 남았으니까, 이번 주까지는 써서 나 줘야 봐줄 수 있다?”
“개X끼야―!”
“욕해도 소용없어 써 와~.”
“…….”
트레이너 군의 말에 아그네스 타키온은 소리를 빽! 지르며 걸쭉한 욕설을 내뱉은 뒤, 사무실에서 나간다. 뒤에서는 아그네스 타키온이 욕을 하거나 말거나 트레이너 군이 헤실헤실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언젠가는 진짜 죽…이진 않고, 죽기 직전까지 짜내어버리리라, 아그네스 타키온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속으로 트레이너 군을 원망하고 저주하고 또 증오했다.
그리고 물론, 문을 막았던 맨하탄 카페의 입속에 설탕 가득한 홍차를 들이부어, 그녀를 응징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 * * * * * * * * *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이었지만, 아그네스 타키온은 역시나 아그네스 타키온이었다.
불과 5일 만에 연구계획서를 다 쓴 그녀는, 마지막 줄의 마침표를 찍고 나서야 팔을 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할 수 있었다.
이는 절대 주말 지켜! 라는 아그네스 타키온 최후의 발악이었으며, 동시에 주말에 트레이너 군이 그녀의 연구계획서를 보게 만들려는 약간의 악의적인 복수심의 발로였다.
그래서, 아그네스 타키온은 평소에 거의 입에 대지도 않는 커피―맨하탄 카페에게 사정사정해서 얻어 낸 최고급 원두로 내린 에스프레소―를 몇 잔이고 마셔가며 밤을 지새워 계획서를 완성한 것이다.
이제 트레이너 군에게 메일만 보내면 된다. 게다가 트레이너 군의 금요일 밤조차 허락하고 싶지 않았기에, 일부러 오후 여섯 시에 맞추어 메일을 보낸다. 집에 가건 사무실에 남아 있건, 야근하란 말이네, 트레이너 군.
게다가 트레이너 군이 혹시라도 아그네스 타키온의 연구계획서를 빠르게 검토했다 하더라도, 답신 메일은 무시하면 그만인 것이다. 왜냐고? 오후 여섯 시 이후니까. 업무 시간 이후니까 아그네스 타키온은 자유에요.
그런 영악한 계획을 세운 아그네스 타키온은, 완성한 워드 파일을 이메일에 첨부하여, 트레이너 군에게 보낸다. 분명 업무용 메일이고, 업무 내용이었지만, 프로페셔널한 그녀답지 않게 메일의 내용은 조금 투정 부리듯 보낸다.
내용인즉, ‘다 했으니까 봐주게. 빨리 봐주게. 트레이너 군의 모든 일보다 우선해서 봐주게.’였다. 트레이너 군 또한 그의 연구과제 때문에 심볼리 루돌프네 트레이너 놈과 미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그네스 타키온으로서는, 그녀의 메일로 인해 트레이너 군의 스트레스가 조금이라도 증가하면 복수 성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그네스 타키온이 조금 잘못 생각한 것이 있으니, 상대가 트레이너 군이라는 것이다. 그의 학위과정 생활과 짧은 박사후과정 생활만 해도 10여 년 가까이 될진대, 학술업무 관련하여 짬이 찰 만큼 찬 트레이너 군에게, 아그네스 타키온의 연구계획서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며, 그녀의 잔머리 같은 건 겪어볼 대로 다 겪어본 사람이라는 점이다.
아그네스 타키온이 트레이너 군에게 메일을 보낸 지 정확하게 한 시간 뒤, 트레이너 군에게서 전화가 온다. 그 번호를 보자마자 아그네스 타키온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옆에서 맨하탄 카페가 풉,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솔직히 받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트레이너 군의 전화를 무시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아그네스 타키온은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받았네, 트레이너 군.”
[어, 타키온. 연구계획서 초안 보내준 거 봤어.]
“그래……검토해 주게.”
[어, 다 고쳤어. Track changer로 다 표시해 놨으니까, 확인하고 고쳐서 다시 줘.]
“…….”
아그네스 타키온의 걱정대로, 트레이너 군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그녀의 연구계획서를 검수한 것이었다. 게다가 메일로 보내기만 하면 될 것을, 구태여 전화로 이야기한다. 아무리 눈치 없는 아그네스 타키온이라 해도, 트레이너 군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래, 메일로만 보내놓으면, 아그네스 타키온이 주말 동안 안 볼 테니까, 전화로 알려주는 것이다. 주말 동안 계획서 쓰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정말 피곤하고 짜증 나는 성격이다, 트레이너 군은.
[주말에 고치면 될 거 같으니까, 월요일까지 줘.]
“……시발.”
[노 시발 킵 고잉, 아그네스 타키온.]
아니, 짜증 나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 새낀 일본에서 오래 살았으면서, 왜 돌려 말하는 법이 없지? 아그네스 타키온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증오와 트레이너 군에 대한 애정을 동시에 느끼며, 그녀 안의 사디스틱한 성향이 깨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아그네스 타키온은 알고 있다. 트레이너 군은 아그네스 타키온 본인보다 더한 사디스트라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아그네스 타키온이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어쩌겠는가. 트레이너 군은 중앙 트레센의 트레이너이자 연구비도 넉넉한 연구책임자이고, 아그네스 타키온은 한낱 학생일 뿐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트레이너 군이 월요일까지 써오라면 월요일까지 써 가야 할 뿐. 그저, 트레이너 군한테 쏘아붙이듯 ‘알겠으니 끊게!’라며 역정을 내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일 뿐이었다.
그런 아그네스 타키온의 말을 들으며, 트레이너 군은 중얼거렸다. 역정이라도 낼 수 있는 게 어디니…실제 대학원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단다.
그렇지만 트레이너 군의 생각을 아그네스 타키온이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옆에 있던 맨하탄 카페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답지 않게 아그네스 타키온을 토닥인다. 그 온기만이 현재로서는 아그네스 타키온의 유일한 위로였다.
* * * * * * * * * *
본래라면 행복하게 휴식을 즐겨야 할 주말이었지만, 아그네스 타키온의 이번 주말은 계획서와의 싸움 그 자체였다.
트레이너 군이 track changer로 하나하나 표시해 둔 코멘트를 읽고, 그의 주문대로 연구계획서를 수정한다.
문제는 연구계획서의 거의 처음부터, 거의 끝부분까지, 40개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코멘트가 달려있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한줄 한줄 작성할 때마다 근거를 필요로 하는 학술 글쓰기 특성상, 아그네스 타키온은 그녀가 뭔가 잘못 쓰는 것이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참고문헌을 뒤지고 또 뒤지며 머리를 쥐어 짜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또 참고문헌 제한은 고작 일곱 개였기 때문에, 참고문헌 대부분은 아그네스 타키온 마음의 위안일 뿐이었다.
그래, 그게 어디인가. 마음의 안도감이라도 있어야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리지만, 그 속내는 생각만큼 편하지 않다.
그야, 주말 내내 계획서를 수정했는데도 다 끝내지 못했고, 월요일 아침 트레이닝을 마친 뒤에 다시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점심 식사 따위는 사치이기 때문에, 샌드위치를 입에 문 채, 다 죽은 눈으로 타닥타닥 손가락을 놀리는 중이었다.
월요일까지 달라고 했으니, 아무튼 월요일 오후 11시 59분도 월요일이다. 어찌 되었건 오늘까지만 보내주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다만, 그런 아그네스 타키온의 생각을, 트레이너 군이 모를 리 없었다. 마감이 이번 주 금요일까지기에, 화요일에 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사무실에서 자기 일을 조용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트레이너 군의 생각을 아그네스 타키온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리라.
어쨌건, 맨하탄 카페에게 실험을 가르쳐 둔 것이 천만다행이다. 오늘 해야 할 아그네스 타키온의 실험을, 맨하탄 카페가 조금은 대신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금색 양푼 냄비뚜껑 같은 눈동자가 때때로 아그네스 타키온을 노려보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꼬우면 실험실에 먼저 들어왔어야지.
아무튼 자신의 실험은 맨하탄 카페에게 짬 처리를 해놓은 아그네스 타키온이었지만, 그런데도 시간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점심 식사까지 대충 때우며 작업한 연구계획서는, 자정이 되어갈 무렵까지 전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오후 열한 시가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맨하탄 카페에게 사정사정해서 받아낸 커피를 홍차와 섞어 물처럼 들이키며,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은 눈으로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드린다.
그런 아그네스 타키온의 모습을, 연구실 문에 달린 유리창 너머로 트레이너 군이 두어 번가량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자정이 되기 60초 전, 아그네스 타키온은 가까스로 끝낸 연구계획서 수정본을 이메일에 첨부하여, 송신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기대며 짐승과도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아무도 없는, 오롯이 아그네스 타키온만이 있는 실험실이었다.
* * * * * * * * * *
아그네스 타키온이 맺은 노력의 결실은, 이틀 뒤에 거둘 수 있었다.
트레이너 군이 메일로 짤막하게 ‘몇 군데 수정했으니까 참고해서 제출해’라고 짧게 메일을 보낸 것이었다.
물론 한 번 더 수정해야 했지만, 그래도 이전처럼 40개 정도의 코멘트가 달린 것은 아니었고, 5개 정도의 마이너한 코멘트만이 있을 뿐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그네스 타키온은 잠시 하던 실험을 중단하고, 트레이너 군의 코멘트에 따라 연구계획서를 수정한다. 그리곤 행정실에 제출하기 위해 연구계획서를 프린트한 뒤, 스테플러로 계획서를 모아 찍는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하나 빼먹었는데…라며 중얼거리다가, 깨달았다는 듯이 머리를 탁, 치더니 이내 트레이너 군의 사무실로 달려간다.
문을 쾅쾅쾅 두드리며 트레이너 군의 답변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어젖힌 그는, 맨하탄 카페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있는 트레이너 군의 모습을 발견했다.
트레이너 군과, 멘하탄 카페가, 단둘이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그 모습에, 아그네스 타키온의 독점력이 순식간에 그녀를 지배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리라.
하지만 트레이너 군은 그런 아그네스 타키온의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이 쯧, 하고 혀를 한번 차며 아그네스 타키온의 정신을 일깨울 한마디를 던진다.
“너도 데이터 미팅하러 왔니?”
“……아, 그런 게 아니네. 둘이 오붓한 데이터 미팅의 시간을 갖게.”
트레이너 군의 말에, 아그네스 타키온은 순식간에 제정신을 찾는다. 미팅 앞에 독점력 따위가 발현될 틈이 없는 것이다. 당근 될 뻔했네, 중얼거리며 사무실 문을 닫으려다가, 그녀의 본래 목적을 상기하며 다시금 사무실 문을 연다.
“아니, 이게 아니라…트레이너 군, 추천서 내놓게.”
“추천서? 아, 과제에 쓸 트레이너 추천서 말이지?”
“혹시 안 썼나? 마감이 모레인데 아직도 추천서를 안 써 두었던 말인가?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트레이너 군은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이었던가? 나한테는 이것저것 다 시켜놓고선, 본인은 꿀만 빠는 그런 파렴치한 트레이너 군이었던가?”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이 트레이너 군을 몰아붙이는 아그네스 타키온이었지만, 그런 그녀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트레이너 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타키온…추천서는 원래 비공개야. 세상의 어느 지원자가 트레이너 추천서를 지원자 본인이 보내니. 옛날 옛적 논문을 봉투에 담아서 우편으로 보내던 시절에는, 추천서도 봉투에 밀봉해서 보냈고, 인이 뜯기지 않은 추천서만 인정이 되었단다. 지금은 추천인이 직접 보내주는 게 관례야.”
“…….”
“그리고 네 추천서는 오늘 오전에 행정실로 보냈어.”
“…….”
“알았으면 가서 실험하렴. 그리고 데이터 나오면 갖고 와서 같이 discussion (토의) 해보자.”
“……큭.”
본전도 못 찾은 채, 아그네스 타키온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트레이너 군의 사무실에서 나온다. 맨하탄 카페가 그녀답지 않게 측은한 눈빛으로 아그네스 타키온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더욱 비참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그네스 타키온이 할 수 있는 것은, 뽑아 놓은 연구계획서를 들고 축 늘어진 걸음으로 행정실로 걸어가, 과제 담당 직원에게 제출하는 것뿐이었다.
* * * * * * * * * *
그리고 한 달 남짓 지난 어느 날, 아그네스 타키온은 그녀가 교내연구과제를 썼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평소와 다름없이 실험실에서 파이펫을 만지고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트레이너 군이 아그네스 타키온을 그의 사무실로 호출했다.
어차피 트레이너 군이 불러봐야, 보통은 실험 이야기나 레이스 이야기나 트레이닝 이야기일 뿐이었기에, 그녀는 큰 기대 하지 않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하지만,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트레이너 군이 오늘따라 환하게 웃으며 아그네스 타키온을 맞이해준다. 그리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그네스 타키온이 까맣게 잊고 있던 소식을 들려준다.
“너 예전에 썼던 교내 과제 선정되었다고 조금 전에 연락받았어. 너한테도 메일이 갔을 거야. 확인 해봤니?”
“……아.”
안 했구나, 트레이너 군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협약 체결 과정이 남아 있으니까, 메일 확인하고 필요한 서류 작성해서 행정실에 보내 드려. 그리고 축하한다, 너도 이제 진정한 의미의 보고서의 노예가 된 거다.”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모를 트레이너 군의 말에, 아그네스 타키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트레이너 군을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한 달 전의 그 개고생을 떠올리자, 아랫배에서부터 꼴받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끝났잖은가. 연차보고서는 내년 말에나 쓰면 되는 것이니까, 지금은 아그네스 타키온이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트레이너 군을 향한 꼴받음의 복수를 해야 할 때이다.
“아무튼, 너도 이제 네 과제를 가지고 있는 연구책임자 나부랭이가 되었으니, 그에 걸맞게 더 실험도 열심히 하고 논문도 많이 보고 생각도 많이 하고 나랑 데이터 가지고 이야기도 많이 해보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내 보고, 조금 더 방향성을 가지고 실험을―”
“당근이나 까게.”
“……어?”
꼴받음과 꼴림은 한 끗 차이라고 했던가, 아그네스 타키온은 사무실의 문을 찰칵, 하고 잠그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말에, 트레이너 군은 황당해하는 얼굴로 아그네스 타키온을 잠시 바라보다가, 평소처럼 당근 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간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꼴받은 우마무스메의 앞에서 히토미미 수컷이 뭘 할 수 있는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그네스 타키온이 한 걸음 그에게 다가오자마자 반사적으로 창문을 열고 몸을 날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그는 히토미미 수컷이었고, 아그네스 타키온은 단츠 플레임을 누르고 사츠키상의 트로피를 들어 올릴, 미래의 중상 우승마이다. 그가 창문으로 번지점프라는 이름의 탈출에 성공하기 직전, 초광속과 같은 스피드로 트레이너 군에게 달려들어 그의 옷깃을 잡는 데 성공한다.
“히, 히익……?!”
트레이너 군의 나약한 신체는 우마무스메의 힘 앞에 속절없이 끌려갔고, 트레이너 군을 다시 그의 의자에 앉힌 아그네스 타키온은, 거칠어진 숨을 천천히 진정시…키긴 개뿔 야생의 우마무스메처럼 더욱 거친 호흡으로 트레이너 군을 꼼짝 못 하게 붙든다.
“트레이너 군.”
“왜, 왜왜, 왜 그러니 타키온…?”
“나를 꼴받게 했으니, 그 책임을 지게.”
“아니, 책임이 조금 이상한데…그리고 과제 때문에 그런 거라면 이게 다 너를 위해―”
“나를 꼴리게 했으니, 그 책임을 지란 말이네!!”
“뭔 소리야 이 뾰이에 미친 말딸아!!”
“닥치게, 트레이너 군은 지금 나랑 다이와 스칼렛 군과 딥 스카이 군을 만드는 거라네!!”
“야! 너 그거 메타발언이야!”
저항해보았지만 눈이 돌아간 우마무스메의 앞에서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연구계획서로 인해 절부조로 떨어진 아그네스 타키온의 컨디션을, 순식간에 절호조로 만드는 방법은 단 하나, 아그네스 타키온의 독점력과 본능의 중간 그 어딘가에 새겨진, 트레이너 군과의 우마뾰이,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래,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었다.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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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온 마구마구 괴롭히고 싶다 꺄르륵
이렇게 해서 스칼렛이 탄생하게 되었구나....
뒤운
2024/05/28 01:08
이렇게 해서 스칼렛이 탄생하게 되었구나....
붉은외로움
2024/05/28 07:52
타키온 배방구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