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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글) 가장 짧은 시간 동안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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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하면 뭐가 떠오를까?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크메르루주의 킬링필드?


몇몇 사람들은 르완다 대학살도 떠올릴 것이다.


아프리카야 허구한 날 전쟁이 터지는 곳이라는 편견이 있으니 별로 와닿진 않겠지만


 가장 빠르고 끔찍하게 진행된 학살 사건으로 르완다 대학살을 꼽을 수 있다.


나치가 6년 동안 체계적으로 열심히 수용소를 돌려서 학살한 유대인이 600만명


크메르루주가 4년 동안 이념적 광기로 죽인 자국민이 100만명이다.


그런데, 르완다 대학살은 국가 주도의 체계적인 학살도 아니었음에도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단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10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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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는 중앙 아프리카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다.


이곳에 최초로 정착한 자들은 트와족(현재 르완다 인구의 1%)이었다.


서기 10세기 경에 농경 민족 후투족(현재 르완다 인구 84%)이 들어와 눌러 앉았으며


서기 14세기 경에 아프리카 동부에 살던 투치족(현재 르완다 인구 15%)이 트와족과 후투족을 정복하고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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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투치족과 후투족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았다.


두 민족은 오랜 시간 동안 동화되었으며, 같은 말을 썼고, 혼인도 가능했다.


심지어는 부자면 투치, 가난하면 후투라고 부르기도 했다.


점차 투치와 후투는 엄격한 민족 구분이 아니라


좀 느슨한 사회적 지위의 구분으로 엹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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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치와 후투의 구분이 엄격해진 것은 20세기 초, 벨기에 식민 통치기부터였다.


유럽의 우생학자들은 백인과 골상이 더 비슷했던


아프리카 동부 출신인 투치족이 후투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벨기에는 이 주장을 받아들여 투치와 후투를 구분했고


투치를 지배계급으로 인정하여 각종 요직에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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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벨기에의 민족 구분은 정확한 게 아니었다.


대개의 벨기에 관리들는 혈통이나 골상을 통한 엄격한 기준보다는


소를 10마리 이상 소유하면 '투치'


그렇지 않으면 '후투'로 구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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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간에 벨기에는 투치족에겐 고등 교육의 기회를 주며 중간 관리직으로 기용했고


후투족은 강제 노역을 당하며 피눈물을 흘러야 했다.


덕분에 투치와 후투 간에는 깊은 감정의 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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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이 끝나고, 유엔의 신탁통치를 거친 후


1961년, 르완다는 독립한다.


그런데 벨기에는 권력을 그 동안 기용했던 투치족이 아닌


구성원 대다수를 차지하던 후투족에게 넘겨주고 갔다.


위협을 느낀 투치족들은 주변 국가로 피난 가거나


정글로 숨어들어 게릴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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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르완다의 대통령이었던 '카이반다'는 


투치족을 '바퀴벌레'라고 칭하며 박멸을 지시했다.


당연히 투치족 게릴라들의 저항도 있었지만


이 저항은 르완다에 여전히 주둔 중이던 벨기에 군에게 분쇄된다.


카이반다는 정권 유지를 위해 벨기에에게 계속 주둔해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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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쿠데타를 통해 카이반다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른 '하비아리마나'는 한 술 더 떠서


프랑스의 지원까지 받는다.


그는 프랑스의 후원을 받아 정국을 안정시키고


범죄율을 낮췄으며


차근차근 근대화를 이뤄나갔다. 


물론 투치족에 대한 탄압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하비아리마나는 민족 비율에 따라 직업을 할당했으며


투치족 의원도 2명으로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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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프랑스의 후원을 받으며 천년 만년 집권할 거 같았던 하비아리마나는 청천벽력 같은 요구를 받게 된다


냉전이 끝날 즈음 전 세계적으로 민주화 요구가 높아지고 있을 때


르완다의 최대 지원국이었던 프랑스가 


르완다의 민주화를 요구한 것이다.


할 수 없이 하비아리마나는 독재를 완화하고 정치적 유화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유화책으로 다양한 정치집단이 등장했고


르완다 정계는 갑작스런 자유에 혼란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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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에 인접국 우간다로 망명 가 있었던 '폴 카가메'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투치족을 규합하여


'르완다 애국전선'을 결성하고 최고 사령관에 올랐다.


그는 1990년 10월, 투치족 자원병을 동원해 르완다로 진격한다.


르완다 애국전선은 손 쉽게 정부군의 방어를 뚫었고


르완다 수도 키갈리 코앞까지 진격한다.


내전은 곧 끝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프랑스 군이 개입하여 정부군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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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지원으로 숨 쉴 구멍을 찾은 하비아리마나는 


어용 언론을 통해 '후투 십계명'이라는 프로파간다를 펼친다.


투치족과 결혼한 후투족은 배신자이며, 후투족의 자녀들은 고귀하고 성실하며, 투치족은 패권만 추구하는 데다, 르완다 군은 후투족으로만 이뤄져야 한다는


후투족 이데올로기로 채워진 강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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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군은 르완다 정부군을 지원하며


9,000명에 불과하던 정부군을 28,000명까지 훈련시켰고


각 병영에는 프랑스 군관을 배치시켜 군사활동을 도왔다.


이렇게 정부군은 르완다 애국전선을 상대로 선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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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하비아리마나의 추종 집단이자, 후투 민족주의에 심취한 민병대 '인테라함웨'가 조직된다.


인터라함웨는 전쟁 속에서 일자리를 잃은 후투족 청년들에게 주거와 음식을 제공하고


그들을 무장시켰다.


인테라함웨의 목표는 투치 바퀴벌레 박멸이었다.


1992년 3월, 이들은 수도 키갈리 남동쪽의 부게세라로 진입한다.


그곳에서 이들은 투치족이 후투족을 학살하려 한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렸다.


그리곤 사흘 밤낮 동안 300명의 투치족을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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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는 이 사실에 경악했지만


프랑스만은 침묵했다.


1993년 8월, 국제사회는 르완다에게 휴전을 강요했다.


독재자 하비아리마나는


르완다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정권을 이양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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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인테라함웨의 지도자들과 독재 정권의 핵심 인물들을 중심으로


'후투 파워'라는 극단적인 조직이 결성된다.


이들은 하비아리마나에게 굴복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으며


하비아리마나가 결국 휴전협정에 서명하자, 그를 배신자라고까지 비난했다.


그리고는 방송국을 설립하고 전국에 후투족들을 선동하는 메세지를 내보냈다.


많은 후투족들이 이들에게 동의했다.


후투 파워는 각 지역마다 몰래 창고를 만들어 총과 수류탄, 마체테를 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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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 하비아리마나가 탄 비행기가 수도 한복판에서 미사일 공격을 받고 추락한다. 


휴전협정 이행을 위해 이동하던 중 받은 공격이었다.


탑승자는 전원 사망했다.


대통령 사망 1시간 만에, 마치 미리 준비가 되었던 것마냥 바고소라 대령을 중심으로 한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합법적 대통령 승계자인 아가테 우윌링기이마나 총리는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비상대책위원회는 하루 만에 미사일 공격이 르완다 애국전선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그와 동시에 무기가 쌓여 있던 전국의 창고 문이 열렸고


인테라함웨 민병대원들이 투치족과, 배신자 후투족들에게 복수하자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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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판 타키루티마나 목사님, 저희 가족은 내일 살해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중재에 나서서 시장님과 이야기해주시기를 당부합니다."

"주님께서 죽임이 예정된 저희를 인도하실 은덕을 목사님께 베푸셨으니, 유대인을 구한 에스더가 그러했듯이"

"목사님의 중재는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 어느 투치족 신도의 편지


"나는 당신들을 도울 방도가 없습니다."

"최후의 순간이 되었으니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죽음을 준비하는 것뿐입니다."

- 타키루티마나 후투족 목사의 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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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에서 마체테가 휘둘러졌다.


마체테가 없는 자들은 낫과 도끼를 들었다.


후투 파워의 방송국에선 스포츠 중계하듯이 이 소식을 전했다.


이웃과 동료가 서로 죽였고


의사가 환자를 죽였으며


선생이 학생을 죽였다.


약탈과 방화, 살인과 ㅁㅁ이 축제처럼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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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들도 그들을 도울 수 없었다.


도왔다간 같이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종교인이 직접 나서서 학살을 조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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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갈등의 씨앗을 제공했던 벨기에는 그나마 사태 안정화를 위해 병력을 파견했다.


그리고 10명의 벨기에 군인들이 합법적 대통령직 승계자인 아가테 우윌링기이마나 총리를 지키다가 함께 사망했다.


이들 또한 마체테에 난도질 당했다.


직후 반전여론에 휩싸인 벨기에는 르완다에서 완전히 발을 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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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의 든든한 후원자인 프랑스는 여전히 침묵했다.


학살을 사실상 조장했다는 의심도 있다.


후투 파워의 무기 구매 자금이 프랑스에게서 나왔다.


이후 프랑스는 르완다 신정부에 무기 구매 자금에 대한 상환을 요구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르완다 내전에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공식적으론 자신들이 학살을 공모한 증거는 없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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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에는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학살의 광기 속에서 대사관을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국제사회는 추가 파병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1993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 있었던 전투에 대한 트라우마로


파병은 무산되었다.


후투 파워는 지지부진한 국제사회를 조롱하며


투치족들의 마지막 희망을 짓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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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최대의 종교인 카톨릭의 책임론도 나온다.


벨기에 식민지 시절, 르완다 주교와 사제들이


유럽의 우생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민족 구분에 동조하고 가담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살 당시 일부 사제들은 아예 학살에 가담했다.


사건 직후 바티칸은 세계 각지의 조직망을 이용해 


학살과 연관되거나 가담한 유력 카톨릭 신자와 사제들을 


국외로 빼돌렸다.


2017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르완다 대통령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으나


이들 인물에게 책임을 묻거나 르완다로 송환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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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7월, 폴 카가메가 이끄는 르완다 애국전선이 다시 총대를 쥐었다.


정부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정부군의 후원자였던 프랑스 군도 더 이상 르완다 정부를 지원할 명분이 없었다.


르완다 애국전선은 한 달도 되지 않아 수도 키갈리를 함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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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애국전선은 신정부를 세운다.


신정부는 후투족과 투치족은 균등하게 임명했고


앞으로 복수도, 민족 차별도, 학살도 없을 것이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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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부는 학살 사후처리를 위해 각 마을마다 '가차차'를 설치했다.


가차차는 르완다의 전통적인 마을 단위의 의사 결정 모임이다.


이곳에서 가해자들은 학살 가담 사실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대체로 낮은 징역형이나 공익형을 선고 받았다.


피해자에게 소를 헌납하거나, 노동력을 제공하는 등의 방법도 동웠됐다.


하지만 학살 책임을 부인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전국의 가차차는 10만명을 법정에 세웠고 6~7만명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고 2012년 6월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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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대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1997년, 탄자니아에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설치된다.


1998년, 살해 당한 아가테 우윌링기이마나의 후임으로 총리에 취임했던 '장 캄반다' 총리는 종신형을 선고 받아 네덜란드에 구금되어 있다.


비상대책위원회를 주도했던 바고소라 대령은 2008년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가 항소심에서 35년을 받고 말리에서 구금되어 있던 중 재작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후투 십계명을 만든 어용 언론인 '은게제'는 35년형


후투 파워의 방송국을 운영했던 '나이마나'와 '이사바랴야그위자'는 각각 30년과 32년 형을 선고 받았다. 


하비아리마나의 영부인이었던 '아가테 하비아리마나'는 대학살을 지원했던 혐의로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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