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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빙의 주식회사

도시 변두리의 '빙의 주식회사' 사무실. 대기실 의자의 낯선 네 사람은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이 사무실을 찾아왔다는 건 서로가 같은 목적이란 뜻이었고, 그것은 은근히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말로 황당한 이야기다. 돈을 내고 누군가의 시간을 사면, 그 시간만큼 빙의할 수 있다니?  

어떤 믿을만한 사유가 있었는지, 혹은 간절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네 사람은 그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이메일로 점심때를 약속했던 사장은 아직 나타나질 않았고, 그들은 지금 마냥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기다림이 지루했는지, 한 사내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는 부티나는 정장을 차려입은 뚱뚱한 중년인이었다. 둥글고 큰 코를 습관적으로 훌쩍이며,

" 크흠! 여러분도 누군가의 시간을 사러 오셨습니까? "

중년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자리의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 예, 저는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니 영 뜬소문은 아닌가 봅니다. 믿기 힘든 말이었는데... "

그는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마른 사내였는데, 옷차림에 맞지 않는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마른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맞은편의 청년이 입을 열었다.

"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이곳에 올 이유가 없죠. "

대학 신입생 정도로 보이는 캐주얼한 복장의 청년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입을 여는 한 여인,

" 애초에 다들, 여기 지원해서 겨우 당첨된 거잖아요? 그런데 여기까지 와 놓고 안 믿으면 내가 미친' 년이죠. "

당돌한 느낌의 그녀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짧은 옷차림의 미인이었다.

대화의 장이 열리자, 그들은 서로가 아는 서비스에 대한 정보를 나눴다. 
빙의는 대상의 가치에 따라 그 가격이 달라진다, 완전히 내 몸처럼 조종이 가능하다, 빙의 당한 대상은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도 모르고 넘어간다 등등...

그리고 정리가 될 때쯤, 중년인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 그런데 참, 궁금해지는군요. 여러분은 누구의 시간을 사서 조종하려고 하시는지. "

다른 셋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서로 간단히 말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중년인은 정 궁금했는지, 시키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기 옆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들어 올리며,

" 이 가방 안에 얼마가 들어있는 줄 아십니까? 현금 10억입니다. "
" 10억? "
" 헐 "

깜짝 놀라는 셋과 그 반응을 즐기는 중년인. 그는 가방을 두들기며 말했다.

" 하지만 이 10억으로도 과연 그놈의 시간을 몇 분이나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사고 싶은 상대의 가치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니까 말입니다. 참고로 지금 대통령의 시간을 10억으로 사면 '4.6초'를 살 수 있다더군요? 10억으로 고작 4.6초라니 참~나. "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든 중년인은,

" 제가 사려는 그 작자도 실은, 정치인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재산을 탈탈 털어왔지요. "
" 정치인이요? "

중년인은 그자의 얼굴을 떠올리는 듯 이를 갈았다.

" 제 원수 같은 놈 있습니다. 사사건건 제 사업을 말아먹으려 드는 새끼요. 저는 그 새끼의 시간을 살 겁니다. 이 10억으로 단 30분만 살 수 있어도 충분합니다. "

듣고 있던 청년이 호기심에 물었다.

" 30분 빙의해서 무엇을 하시려고요? "

중년인은 순간, 소름 돋게 히죽이며 대답했다.

"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할 겁니다. 변태처럼 욕하며 ja위하는 영상을 녹화해서 자기 SNS에 올릴 테니까 말입니다. 흐흐흐. 아마 다시는 정치를 못할 겁니다. "
" 아 "

청년의 눈이 커지고, 여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반면, 궁금한 얼굴의 마른 사내는 뜬금없이 물었다.

" 그런데, 발기가 안 되면 어떡합니까? "
" 응? "
" 발기가 안 되면 말입니다. 남의 것으로 그게 잘 되겠습니까? 마음이 급할 텐데. " 
" 아! "

중년인의 얼굴이 굳었다. 그 문제는 생각해보지 않은 듯했다.

그가 고민하는 사이, 마른 사내가 입을 열었다.

" 저도 제 이야기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마른 사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제 아내는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입니다. 제대로 돈도 못 벌어주는 못난 남편 대신에, 하루 14시간씩 힘들게 일하며 여태껏 살림을 꾸려왔습니다. 저 같은 사람을 안 만날 수도 있는 예쁜 사람이었는데, 저를 만나 고생만 하고 있습니다. "

이때 마른 사내는 가죽 장갑을 벗어, 자신의 '의수'를 보여주었다. 작게 놀라는 사람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 그러면서도 평생 짜증 한번,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는 착한 사람입니다. 항상 저를 사랑해주고 배려해주고,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입니다. 저에게는 정말 과분한 사람이죠. 그런데, 그런 그녀가 지금 병실에 누워있습니다. 폐암으로 말입니다. "
" 아이고 저런 "
" 힘들게 고생만 한 아내에게 그런 병까지 생긴 게 다 제 탓인 것만 같아 너무 미안합니다. 지금 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아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도움이 못 되는 제가 너무나 한심했습니다. "

그의 슬픈 표정은 보는 이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다들 쉽게 뭐라 말하지 못했는데, 사내의 기구한 사연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 지금 아내의 유일한 소원은, 저희 딸이 입을 여는 것입니다. 저희 딸은 어릴 적 당한 사고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말을 못 하고 있습니다. 실어증이죠. "
" 허이구 저런.. "
" 그래서 저는 제 딸의 시간을 사려고 합니다. 딸의 몸으로 들어가서, 수술을 앞둔 아내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사랑한다고, 다 괜찮을 거라고. 제발 힘을 내라고 말입니다. "

절로 숙연해지는 사내의 사연에, 사람들은 위로의 말을 한마디씩 건넸다. 
감사를 표한 사내는 중년인의 가방을 보았다.

" 저는 겨우 백만 원을 마련해 왔는데, 시간이 모자랄까 봐 그게 걱정입니다. 제 딸의 시간이 얼마나 할지.. "
" 크흠! 일반인 꼬마 정도는 얼마 안 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시길. 또 병까지 있는 아이면 뭐. "
" ...정말 그렇다면 다행이겠습니다. "


자기 이야기를 끝낸 두 사람의 시선이 남은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여인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 저는 말이에요... "

여인은 잠깐 입술을 눌렀다가 어렵게,

" 중학교 시절에 심한 왕따를 당했어요. 정말 심했죠. 말로 다 못해요. "

사람들은 조금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당돌해 보이던 그녀의 첫인상 때문이었다.

" 몇 번이나 죽고 싶은 걸 참고, 다른 지역으로 전학을 갔어요. 그리고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극복해냈죠. 저는 저 스스로를 대견하다고 자신 있게 칭찬할 수 있어요. 저는 정말 잘 견뎌냈거든요. 이렇게 멋지게 사는 제가, 정말로 자랑스러워요. "
" 제 눈에도 그래 보입니다. "
" 고마워요. 그런데 말이에요. 어느 날, 저를 왕따시켰던 년이 TV 드라마에 나오더라고요? 임장미라는 가명으로 말이에요. "
" 허? "

사람들은 놀랐다. 특히 가장 놀란 청년은 눈치 없이,

" 임장미요?! 나 임장미 팬카페 회원인데...! "
" 그래요? 보는 눈이 없으시네. 그 쓰레기 같은 년을 참. "
" 아, 음. "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다물었다.
여인은 피식 웃더니,

" 저는 제가 다 극복하고 잊은 줄 알았는데, 그년을 보자마자 아~ 마음이 영 좋지 않더라고요. 울컥하고, 화가 나고..막 물건도 집어 던지고 하하하. 그래도 뭐, 그냥 신나게 욕만 했어요. TV에 나올 때마다 신나게 욕하고 채널을 돌리는 정도로 넘겼어요. 그년이 잘나가든 말든, 어차피 저는 지금 잘살고 있으니까요. "
" 아~ 훌륭하십니다! "

중년인은 쿨한 그녀를 향해 박수까지 칠 기세였다. 
한데, 

" 그런데 말이에요. "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힌 여인이 차갑게 말했다.

" 그년이 이번 드라마에서 왕따 역할을 하더라고요...? "
" 아 "
" 왕따를 말이에요. 그년이 그러면 안 되잖아요? 어떻게...그년이 왕따 역할을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상하잖아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정말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그년이 그럴 순 없잖아요! 그년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래선 안 되는 거잖아요!! "
" ... "

눈에 핏발을 세운 여인은 피가 배어 나올 것처럼 입술을 깨물며 낮게 말했다.

" 전 그년의 시간을 사서...그년을 망가뜨릴 거예요. 단 3분만 있어도 충분해요. 모자라지 않아요. 3분만 있어도 그년을 찢어발길 자신 있어요. "
" ... "

여인의 서슬 퍼런 모습에, 세 남자는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오지랖이 넓은 사람일지라도, 그녀의 일에 참견할 순 없을 듯했다.

이 분위기를 깰 생각이었는지, 헛기침한 중년인이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 그쪽은? 그쪽은 누구의 시간을 사려고 왔습니까? "
" 예? 아, 저요? "

청년은 당황했다. 그는 말하기가 꺼려지는 듯했지만, 모두가 말한 이 분위기에서 차마 뺄 수도 없었다.

" 어 저, 저기 저는 그- "
" ? "

눈치를 보던 청년은,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 걸그룹 멤버 장진주의 시간을 좀... "
" 크하하하! "

청년의 말이 끝나자마자 중년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 아~ 역시 젊습니다~ 젊어요. 그 나이 땐 본능에 충실한 게 아주 좋습니다. "
" 아, 아뇨 저는 그런 생각이 아니라-! "

청년은 얼굴까지 빨개져서 손을 내저었지만, 세 사람 다 청년의 목적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했다. 걸그룹 멤버의 몸에 빙의해서 할만한 일이란 게, 뻔하게 그려졌던 것이다.
당혹스러운 얼굴의 청년은, 한껏 높아진 목소리로 변명했다.

" 그게 아니라, 장진주와 저는 첫사랑이에요! "
" 음? "
" 중학교 때 진주가 이사를 가면서 약속했었거든요. 우리 나중에 대학생이 되어서 꼭 다시 만나자고요. 다시 만나서 그~, 그게, 결혼을...하자고. "

청년은 쑥스러운 듯, 눈 둘 곳을 헤맸다.

" 그냥, 저는 제 흔적을 좀 남겨볼 생각이에요. 혹시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저는 계속 잊지 않고 있었거든요. "
" 흠. "

어딘가 진정성이 있는 청년의 말에, 턱을 매만지던 중년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 참 순수한 이야기이긴 한데,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네. 걸그룹 멤버까지 된 여자가 어릴 적 약속을 기억하나 마나 뭐~ "
" ...그냥 저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는지만 확인해도 만족해요. "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는 중년인. 그는 곧, 여인을 보며 농을 던졌다.

" 아무래도, 여기서 가장 현실적으로 서비스를 활용할 사람은 여성분과 저뿐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 "
" ... "

여인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히죽 웃은 중년인이 영양가 없는 말을 더 하려던 그때,

' 쿵 쿵 쿵 쿵 쿵 쿵! '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입구 쪽을 바라보는 사람들. 곧, 대기실 문이 열리며 양복 차림의 사장이 나타났다.

" 아이고 늦었습니다! 네 분이 벌써 다 오셨네! "

사장은 대충 걸친 듯한 양복에다, 양손에 정리 안 된 서류뭉치를 아슬아슬하게 들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참. 서비스를 신청하신 분들이 너무 많아서 밤새도록 검토하다가 그만! 하하하 "

사장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급히 일어났다.

" 당신이 빙의 주식회사 사장이에요? "
" 크흠. 내가 예상한 모습은 아닌데 "
" 비용에 관해서 좀 묻고 싶습니다만- "

사장은 서류를 들어 막으며, 안쪽 사무실로 급하게 이동했다.

" 아~아 잠시만요, 사무실에서 정리 좀 하고 금방 오픈하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
" 아. "
" 음. "

일단 멈춰선 넷은 조금만 더 기다리기로 했다.

한데, 사무실 문이 닫히기 직전 "아!" 돌아본 사장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아참, '엔드루 헤일'이란 외국인의 시간을 사려는 분이 있더군요? 햐~, 전략 핵잠수함 함장의 시간은 왜 사려고 하시는 걸까요? 그 목적이 참 기대가 됩니다 하하 "

" ?! "

네 사람의 눈에 휘둥그레졌다! 
누군가 핵잠수함 함장에게 빙의하려 한다고? 아니 왜??

사장이 사무실 안으로 사라지고, 남겨진 사람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로를 살폈다.
곧, 청년이 떨리는 음성으로 무서운 단어를 내뱉었다.

" 설마 핵폭탄을... "
" 크흠. "
" 으음. "

핵폭탄. 모두를 긴장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 사내의 말대로라면, 지금 이 중에 누군가는 아까 거짓말을 했다. 누굴까? 누가 거짓말을 한 걸까?

정치인을 파멸시키려는 중년인? 아내를 위하는 마른 사내? 왕따 당한 복수를 하려는 여인? 첫사랑에 미련을 가진 청년?
지금 그들의 표정만으로는,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불안해진 청년은,

" 저기, 누군지 몰라도 그러지 마세요. 함장 하나를 조종한다고 해서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렇죠? 절대 그러지 마세요. 예? "
" ... "

당연히 청년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여인이 말했다.

" 전략 핵잠수함의 함장 정도를 사려면...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
" 뭐? "

여인의 시선은 중년인의 10억 가방으로 향해 있었고, 중년인은 펄쩍 뛰었다!

" 무, 무슨 소리야! 내가 핵폭탄을 발사하려 한다고? 내가 미쳤어?! 난 그 정치인 새끼만 파멸시키면 돼! "

흥분한 중년인은, 마른 사내를 가리켰다.

" 그, 그래! 차라리 저기 손 없는 작자가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다거나 해서, 그런 가능성이 더 크지 않겠어?! 그러고 보니 저 양반 하는 말부터가 그렇네! 아내는 폐암에, 딸은 실어증이라고? 무슨 드라마야 뭐야?! "

마른 사내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 저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
" 그건 모르는 일이지! 어떻게 믿어?! "
" ... "

마른 사내가 기분 나쁜 얼굴로 중년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중년인은 곧장 고개를 돌려, 이번엔 청년에게 언성을 높였다.

" 아니면 너지?! 너 연기하는 거 아니야? 기껏 걸그룹 몸을 빌려서 뭘 하겠다고? 핑계부터가 이상하잖아! "
" 무, 무슨! 저는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

청년은 사색이 되어 손을 내저었다. 
그 옆의 여인도 고개를 흔들며 단언했다.

" 저도 확실히 아니거든요? 전 평화주의자예요. "

그러나 빈정대는 중년인,

" 평화주의자는 무슨, 싸이코 끼가 다분하더만... "
" 뭐라고요?! "

여인이 중년인을 매섭게 노려볼 때, 청년이 겁에 질린 얼굴로 끼어들었다.

" 지금 싸울 때가 아니에요! 호, 혹시라도 핵폭탄이 터지면- "
" 재수 없는 소리! 어떤 미친' 놈이 그런 짓을 해?! "

중년인이 말도 안 된다며 버럭댔지만, 청년은 핵폭탄 말고는 다른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울상이 된 청년은 애원하듯 모두에게 말했다.

" 핵폭탄이 터지면 첫사랑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복수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예? 그렇잖아요. "
" ... "

청년의 말은 모두의 표정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생각에 빠지게 했다.


그때, 안쪽 사무실 문이 열리며 사장이 나왔다.
얼른 나서서 물어보는 청년.

" 저, 저기요! 아까 핵잠수함 함장의 시간을 사려 했다는 사람이 누구예요? "

그러나 사장은 어깨를 으쓱,

" 글쎄요? 네 분 중에 누군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안다 한들, 저는 절대 고객님의 일을 발설하지 않습니다. 뭘 하려고 하시든 절대 간섭하지도 않지요. 그것이 절대 원칙입니다. "
" 그런! "

청년은 애가 탄 모양새였지만, 사장은 상관없이 손에 든 서류를 들어 누군가를 불렀다.

" 이메일 Roro123 아이디를 사용하시는 분? "

그 말에 여인이 반응했고, 사장이 빙긋 웃으며 안내했다.

" 들어오시죠. 첫 번째 입니다. 나머지 분들은 잠시만 기다려주시고요, 상담 중에는 절대 이 문을 열면 안 됩니다. " 

긴장된 얼굴의 여인이 안쪽 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청년이 여인을 막아서며,

" 자, 잠깐만요! 아니죠? 핵잠수함 아니죠? "

여인은 말없이 인상을 찌푸릴 뿐,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안한 모양새로 의자에 주저앉은 청년은,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저분은 아닐 거야. 왕따를 당한 복수를 하려고 왔다잖아. 그게 거짓말은 아닐 거야. "

그때, 마른 사내가 불쑥 그 혼잣말을 받았다.

" 그 복수의 규모가 매우 크다면 말입니다. 왕따 가해자가 성공하는 이 세상을 저주하며, 모두와 함께 자살할 생각이라면...  "
" 예...? "

청년의 눈빛이 흔들렸다. 침음을 삼키는 중년인의 표정도 불안정했다.
셋은 하염없이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문이 열리며 사장이 다시 나왔다.

" 자~, 지금 한 분은 빙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럼 다음은~ "

사장이 청년을 호명하고, 긴장한 모양새의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년은 사장을 따라 들어가기 직전에, 남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중년인에게 말했다.

" 제발요.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
" ... "

청년이 들어간 뒤, 남겨진 둘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 찌이익-! '

중년인이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그는 여태까지와는 다른 진지해진 얼굴로, 마른 사내를 바라보았다.

"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당신의 말을 다 믿습니다. 아내분이 꼭 건강하게 일어나시길 바라고, 따님의 병도 나아지길 바랍니다. 진심입니다. "
" ... "

중년인은 마른 사내의 손에 돈뭉치를 건넸다.

" 100만 원으로 모자란다면 이 돈을 쓰십시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당신의 말을 믿습니다. 그리고...당신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
" ... "

진심 어린 중년인의 눈빛을 보며, 마른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곧, 문이 열렸다.

" 자~, 그럼 다음은~ "

호명된 중년인이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겨진 마른 사내는 복잡한 얼굴로 돈다발을 바라보았다.

" 좋은 사람... "

잠시 뒤, 마지막으로 호명된 마른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전 세계 어디에서도 핵폭탄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
.
.
.
.
.


사무실에 들어온 청년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누가 핵잠수함 함장을 조종하려 하는 걸까?

방금 '임장미 팬카페'의 단체 쪽지가 도착하면서, 지금 잠들어 있는 저 여인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 누굴까? 중년인일까, 마른 사내일까?

" ...아! "

고민하던 청년은 중요한 사실이 생각났다. 대상의 가치에 따라, 시간의 가격이 다르다는 사실 말이다.
사람의 가치를 어떤 기준으로 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청년은 물었다.

" 밖에 있는 두 아저씨의 시간은 각각 얼마씩 합니까? "

의미심장하게 웃은 사장은, 둘의 가격을 알려주었다. 둘의 가격은 아주 큰 격차가 있었다. 
고민하던 청년은 장진주의 시간을 사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밖에 있던 두 사람 중 싸구려의 시간을 샀다.


그리고-,


' 찌이익-! '

[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당신의 말을 다 믿습니다. 아내분이 꼭 건강하게 일어나시길 바라고, 따님의 병도 나아지길 바랍니다. 진심입니다. ]


중년인에게 빙의한 청년은, 마른 사내에게 진심 어린 말을 건네고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잠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신기하게 힐끔거린 청년은, 책상 위에 10억 가방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 이 돈을 전부 써서 대통령의 시간을 사겠습니다. ]
[ 하하 ]

그날, 집무 중이던 대통령이 잠깐 "호!" 댑댄스를 추었단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남겨졌다.
댓글
  • 복날은간다 2017/09/05 07:35

    최근에는 전개를 깔끔히 하는데에 신경을 썼는데, 이번에는 좀 그랬네요 흐하하; 자꾸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눈에 들어와서 그런지 잘 진행되지도 않고;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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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풍의라빈 2017/09/05 09:38

    오... 재밋게 봤습니다 ^^
    돈많은 양반이 핵쏠려고 해서 그사람에게 빙의한 건가요...
    아니면 돈많은 양반한테 빙의해서 착한일을 함으로써 마른 양반의 생각을 돌린건가요...ㅎ 난독인가
    설마 싸구려를 샀다는게..돈많은 뚱뚱한 양반보다 마른 양반이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던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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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제확인 2017/09/05 10:18

    대통령이 잠깐 "호!" 탭댄스에 밥먹다 뿜었어욬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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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점시락 2017/09/05 10:28

    핵미사일은 함장과 부함장이 같이 쏴야하는데! 마른 청년이 전쟁영화를 좀 덜봤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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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UOU 2017/09/05 12:02

    이번 이야기도 신선하고 흥미롭네요!!
    충분히 깔끔한 진행이었어요~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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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들린검사 2017/09/05 12:09

    저도 이해부족 ...역시 저녁에 봤어야했나...누군가 해석 달리겠져 이따 저녁때 다시 와야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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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베 2017/09/05 18:24

    흔적(편지 등)만 남기는 거라면 그 돈의 일부로 대통령 시간 말고 원래 타깃 시간을 샀어도 됐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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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eritasLxmea 2017/09/06 02:47

    와 잔잔한 감동  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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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알꽃 2017/09/06 12:43

    잘 봤습니다!! 임장미 팬클럽 쪽지가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는데, 꼬리말보고 역시 싶었네요! 박수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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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탐정나부랭이 2017/09/07 02:19

    와.. 복날님 글 복습 할 정도로 자주 보는데
    이 글이 제일 감동적이고 저에겐 베스트에요
    잔잔한 감동...
    심지어 꼬릿말까지 완벽했습니다
    읽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Qe8k12)

  • 무지개솔로처 2017/09/09 02:42

    추천조작이 의심되어 실제 추천이 이뤄지지 않았대요 ㅜㅠ 댓글로나마 감사히 읽었다고 전하고 갑니다. 복날님 특유의 (?)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미궁으로 빠지는 전개 너무 좋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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