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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김남우 교수의 보통 사람 이야기

" -결국, 개인의 정의라는 건 환경에 좌우될 수 있다는 거지. "

김남우 교수님의 수업은 재미있다. 이야기를 잘하기도 하지만, 매 수업을 그냥 때우려 들지 않아서 더 그렇다. 
오늘만 해도, 교수님이 준비해온 나치 이야기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었고,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딴지를 거는 학생은 존재했다.

" 교수님! 그건 그냥 그 사람이 나쁜 거 아닐까요? 제대로 된 정신이 박혀있는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겁니다. "

도전적인 표정의 그 학생을 보며, 교수님은 빙긋 웃었다. 김남우 교수님은 저런 학생을 싫어하지 않았다. 좋아했다.

" 맞아. 맞는 말이야. 정말 정의로운 사람은 환경 탓을 하지 않아. 아닌 건 아니라고 끝까지 저항하지. 하지만~ "

말을 멈춘 교수님은 잠깐, 그 학생의 이름을 떠올리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떠오른 듯,

" 모든 인간이 최무정이 너처럼 흔들리지 않는 멋진 신념을 가진 건 아니야. 인간의 다수는 나약하거든. "

최무정은 동의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멋쩍은 건지, 눈썹을 꿈틀했다.
김남우 교수님은 모두를 둘러보며 톤을 한번 정리했다.

" 아무래도, 내가 대학교 때 겪었던 이야기를 해줘야겠는데. "

학생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교수님의 대학 시절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시선을 멀리 두고 옛 기억을 꺼냈다.

" 정재준이라는 친구가 있었어. 조용한 성격에 사교성이 좀 별로라...굳이 말하자면 아싸라고 할 수 있겠네. 나하고도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어느 날 내가 우연히 봐버린 거야. 그 친구가 흘린 수첩을. "

잠깐, 교수님의 얼굴이 굳었다.

" 거기에는... 자살 예고가 쓰여있었어. 본인은 잘못 태어난 인간이고, 태어난 생일에 죽어버릴 거라고 말이야. "
" 헐 "

많은 학생이 놀라며 교수님의 실화에 점점 빠져드는 모습을 보였다. 
교수님은 심각해진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 불안정한 낙서가 가득한 수첩의 내용은 절대 장난이 아닌 것 같았어. 그래서 나는 녀석이 수첩을 달라고 할 때 조심스럽게 설득했지. 그랬더니 녀석이 그러더라, "

[ 내게 간섭할 생각하지도 말고, 어디 가서 떠벌릴 생각도 하지 마. 그 순간 나는 너를 원망하면서 바로 죽어버릴 거니까! ]

" 정말이지 하...그 나이의 나는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어. 한 달 안에 그 녀석이 자살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찌할 줄을 몰랐지. 흠. 솔직히 말하면, 억울했을지도 모르겠어. 왜 하필 그 수첩을 주워서 마음의 짐을 얻게 됐나 하고 말이야. " 

착잡한 표정의 교수님은, 이 대목에서 최무정을 바라보았다.

" 네 말처럼 진정 정의로운 사람은 어떻게든 그를 살리려고 애썼을 거야. 나는 그러지 못했지. "
" ... "
"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천하의 악당이었을까? 그건 아니야. 난 여러분들처럼 평범한 학생이었어. "

교수님은 손날을 세워서 말했다.

" 자, 나는 보통 사람이야. 보통 사람인데, 약간 비겁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사람이지. 어쩌면 조금 많이. 여기까진 동의하지? "

최무정은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은 인정하는 듯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손날을 접어 손가락 하나만을 세워 들었다.

" 이때, 내게 기회가 왔어. 10억 원을 벌 기회가. "
" 예? "

10억이라니? 뜬금없는 전개에 학생들의 고개가 갸웃했다. 
잠시 그 반응을 즐긴 교수님이 웃음을 지우고 말했다.

" 이야기를 하자면 복잡하지만, 사실 정재준 그 친구는 '사생아'였어. 아마 그래서 그렇게 늘 어두웠는지 몰라.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냐면, 내가 정재준의 주변을 기웃거리는 걸 본 교수님이 나를 따로 불러서 알려주었어. 그리고 그 교수님이 그러더군. "

[ 얼마 전에 일어난 정채범 회장 일가의 교통사고 뉴스를 보았나? 사고로 모두 죽고 정채범 회장만 병원에서 오늘내일하고 있어. 지금 아마 정재준은 모르겠지만, 회장이 죽으면 그 모든 재산의 상속권이 정재준에게 있다. ]

" 나는 정말 깜짝 놀랐어.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교수님의 제안이었어. "

[ 그리고 만약 정재준마저 죽는다면...그 재산은 먼 친척인 한 여자에게 돌아가겠지. 바로 내 아내에게 말이다. 만약에, 만약에 말인데... 자네가 정재준을 죽여준다면 내가 자네에게 10억을 주겠네. ]

" 헐 "

깜짝 놀라는 학생들. 교수님은 그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10억. 그 당시의 10억이야.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이해가 가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정재준이 곧 자살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는 거야. "
" 아! "

김남우 교수님은 몰입한 눈빛으로 독백했다.

" 교수님은 어떤 방식이든 좋으니 정재준을 죽여달라고 했어. 그럼 만약 정재준이 자신의 생일에 옥상에서 뛰어내린다면...교수님은 내가 죽였다고 알지 않을까? 그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10억을 받을 수 있잖아? "
" 와 "
" 헐 "

놀라운 이야기에,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교수님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가락을 세웠다.

" 자, 정리해보자. 정재준이 자살할 것이란 걸 나만이 알고 있어. 그리고 나는 그 자살을 막을 수가 없었어. 이 상황에서 교수는 정재준을 죽이면 10억을 주겠다고 제안했어. 내가 제안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어차피 정재준은 곧 죽어. 그럼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까? 말아야 할까? "

학생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때, 교수님은 최무정을 지목했다.

" 너라면 어때? 너였다면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거절했을까? "
" ... "

인상을 찡그린 채로 망설이던 최무정은 대답했다.

" 아마 받아들였을 겁니다. "
" 그래. 그럼 그런 너는 나쁜 사람인가? 인간말종인가? 천하의 악인인가? "
" ... "
" 아니야. 너는 보통 사람이야. 이렇게, 조금은 속물 쪽으로 기울어진. 어쩌면 조금 더 많이. "
" ... "

최무정은 복잡한 얼굴로, 기울어진 손날을 바라보았다. 지금 강의실의 모두가 최무정의 그 표정과 닮아있었다.

빙긋 웃은 김남우 교수님은 모두를 둘러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 정재준은 정말로 생일날 죽었어. 나는 망설이다가 교수님을 찾아갔지. 그런데 거기서 내가 들은 얘기가 뭐였는 줄 알아? 하참! "

헛웃음을 터트린 교수님은 인상을 찌푸렸다.

" 정재준이 기업 회장의 사생아라는 건 거짓말이었다는 거야. "
" 예에? "
" 사실은 모든 것이 다, 그 교수의 심리학 논문을 위한 실험이었던 거야. 나 말고도 50명에게 똑같은 짓을 했더라고. "
" 헐?! "

경악으로 눈이 커지는 학생들!
김남우 교수님은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리는 듯한 얼굴이었다.

" 내가 수첩을 주웠던 것부터 시작해서 그 모든 게, 교수와 정재준이 짠 시나리오였던 거야. 정말이지 역겨운 교수야.. "
" 세상에... "

학생들이 황당함에 웅성거릴 때, 교수님이 최무정을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친 교수님은 담담하게 말했다.

"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는 사람이라면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지? 실험에 참여한 50명의 학생 중 80%가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였어. "
" ... "
" 보편적인 개인의 정의는 상황만 맞춰진다면 얼마든지 흔들릴 수 있어.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무서운 일이야.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상황에 지배당하거든... 그 교수의 논문은 발표될 수 없었어. "
" ? "

" 정재준이 진짜로 죽었기 때문이야. "
" ! "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때, 교수님은 담담하게 말했다.

" 정재준이 자살하지 않아서 누군가는 당황했어. 그 누군가는 이미 상황에 빠져들어 있었고, 정재준은 약속한 날에 죽어야만 했어. 그리고 그는 원래, 보편적인 보통 사람이었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겠어 무정아? "

최무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편적인 보통 사람의 얼굴로.
댓글
  • 복날은간다 2017/09/01 12:50

    폭 넓게 여러 스타일의 이야기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래야 취향에 맞는 게 있으실 테니까요 흐하하;
    이 이야기는 쓰면서 계속 궁금했어요. 여러분이 만약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였을까요?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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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karote 2017/09/01 13:01

    어디서 들은 말이지만 심리학 실험은 피험자에게 심리적 트라우마,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고 합니다.
    교수님은 잘못된 실험을 한게 아닌지...
    매번 재미있게 글 챙겨보고 있습니다.
    재미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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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리왕김억지 2017/09/01 13:08

    이의 있습니다.
    정재준 교수의 수업에서 친구인 김남우 이야기를 해주는 설정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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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풍의라빈 2017/09/01 14:08

    잘봤습니다 ^^
    정재준이 생일날 죽은건, 계획이 어긋나
    실험자 중 하나가 진짜로 죽인거 인가 보네요...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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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gdha 2017/09/01 14:14

    그 감전시키는 실험이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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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되아니고돼 2017/09/01 14:18

    50명 중에 누군가가 혹은 누군가들이 진짜로..... 그랬을지도요.....
    잘 읽었습니다
    저라면.. 받아들였을 것 같습니다... 10억..... 부작위니까 괜찮을거야.라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쇄놰시키면서?
    으악.. 그러다가 정재준이 죽길 바라는 마음이 손톱만큼이라도 생기면 그 죄책감을 가지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아.. 여기까지 조금만 생각이 깊다면 안 받아들였겠지만.. 솔직히 다시 생각해봐도 돈에 눈이 멀어서 받아들였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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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밀순면 2017/09/01 15:34

    "그 교수의 논문은 발표될 수 없었어" 앞에 역접이 붙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스타일 글도 재미있어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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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방구향기로와 2017/09/01 15:36

    저였어도 어차피 난 아무것도 못해..하며 그 제안을 받았을텐데
    실험이란 걸 알고 엄청난 자괴감에 빠질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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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슬기(24) 2017/09/01 16:26

    섬뜩하네여ㅠㅜ김남우 교수님 얘기는 넘모 재밌어요.. 그래서 언제 죽으시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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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ementist 2017/09/01 17:26

    ㅋ ㅑ 재밌네요~ 항상 좋은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짜로 보는게 죄송해서 추천이라도 마구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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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은1초 2017/09/01 18:30

    이분 아이디어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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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리포터리포터 2017/09/01 21:28

    아놔 시벅 받을줄 알고 엄청 땡겨썼는데 이런 시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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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이내린미모 2017/09/01 21:54

    아....이런 이야기 완전 제 취향저격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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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일기♡ 2017/09/01 22:42

    와 대박.... 너무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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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날은간다 2017/09/01 23:14

    요즘 너무 불친절한 결말이 많나요? 그게 가장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댓글을 보니 안심하는 거로 ㅎㅎ;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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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우1.4만원 2017/09/02 19:52

    숨도 안 쉬고 읽다가 마지막까지 다 읽고 나서야 호흡했네요 ㄷ;
    괜찮으시다면 이거 루리웹 유게에 출처남기고 가져가도 될까요? 유게이들한테 보여주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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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이2 2017/09/02 20:06

    오늘 얘기도 아주 좋았어요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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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큼자몽 2017/09/02 20:18

    요괴시리즈도 참 좋아했는데, 이런 인간 심리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참 좋네요! 마지막 교수의 말에 머리를 댕~하고 맞은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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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세마왕강림 2017/09/02 20:48

    왜 죽은사람이 정재준뿐인거죠.....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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