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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글[역사] 역사상 최악 수준의 졸전과 패배, 청나라의 아편전쟁 패배

 



청나라 말기 청과 영국이 맞붙었던 아편전쟁은 인류 역사상 무수한 전쟁 중에서도 상당히 인지도가 있는 전쟁입니다. 그동안 서구 문명에 우세를 점하는 것처럼 보였던 동방 문명의 낡고 허술함이 만천하에 밝혀지고,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세계 질서의 종언을 뜻하는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광대하며 오래된 문명 중 하나인 중국의 역사가 근대사로 진입하는 전쟁으로 일반론적으로는 인식됩니다.
 보통 아편전쟁을 언급할때는 그런 역사적 의의와, 아편이라는 물건을 취급하며 전쟁을 건 영국의 부도덕함을 성토하는 주제가 많고, 이 전쟁의 성패나 전개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이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청이 지는 게 당연한 전투" 라는게 보편적인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아슬아슬한 전투라면야 전개 과정을 되집어보며 상황이 바뀔 수 있었던 분기점을 살펴보지만, 지는게 당연한 전투라면야 굳이 그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영국이 동시기의 청나라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우위에 있던 국가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특히 해군력은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최강의 국가라는 미국이, 정치경제사회 면에서 종합하면 자신들 문명보다 거의 1세기 가까이 뒤에 있는듯한 국가들과의 전쟁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고전을 하기도 하는등, 원정이라는 것은 어느시대라고 하던지 골치 아픈 싸움입니다.
 하물며 영국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인 중국은 당시 기술로는 원정군을 보내는데만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며, 자연히 많은 병사를 보내기 힘들고, 결정적으로 중국은 땅 하나하나를 단기간에 일일이 싸워가며 점령하는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나라입니다. 즉, 생각해보자면 영국은 청과 싸운다고 해도 '무조건 해보나마나 이기는게 당연하다' 라고 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이겼습니다. 그것도, 너무나도 간단하게 이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반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아니, 대관절 대체 청나라가 얼마나 못 싸웠길래 그렇게 졌단 말인가?

 전쟁의 시작 당시, 영국군은 임칙서가 지키고 있던 광동을 일부러 피해 주산열도(舟山列島)을 공격했습니다. 임칙서가 지키고 있는 지역은 그의 (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대비로 여러척의 병선과 수백문의 대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군이 대신 공격한 주산열도에는 2천명의 병사가 있었는데, 사실 이들 대부분은 현지의 목공, 토목들로 이루어진 제대로 된 부대라고 하기 힘든 부대들 이었고, 당연히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패배했으며 영국군은 유유히 북상했습니다.
 이 함대는 천진 앞바다까지 나아갔습니다. 천진과 베이징은 그야말로 지척으로, 북경 앞까지 적군이 몰려온 것을 본 청나라 조정은 경악하게 됩니다. 그동안 북경이 적에게 위협받은 적은 청나라 역사상 없다시피 했고, 아편과 관련된 영국과의 분쟁도 그저 지방에서 일어나는 소란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란이 눈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갑자기 임칙서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습니다. 대관절 임칙서라는 작자가 얼마나 무능하길래 적이 이 곳 앞까지 오도록 사태를 초래했느냐는 동시에, 적을 눈 앞에 두고 지도부가 겁을 먹은 탓이었습니다. 이때문에 청나라 조정은 현지에서 열심히 싸움에 대비하던 임칙서를 영국군 비위도 맞출겸 파면하고, 협상으로 정책을 잡아 영국군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청나라 조정은 협상을 하는 대신 장소를 천진 앞바다에서 광동으로 바꿔 대화하자고 사정 사정했고, 영국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협상을 하며 청나라 조정은 영국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앞서 말했듯 임칙서를 파면했고, 현지 의용병을 해산했으며, 방어시설을 철거하고, 수비병 1만을 2천명으로 감축했습니다.
 이 과정엔 조금 웃픈 일이 있습니다. 협상에 나서는 청나라 쪽에서 불충하고 어리석은 임칙서를 파면했다며 영국군에 경하할 일이라고 하자, 영국군 사령관은 이렇게 대답한 겁니다.
"아니, 임칙서는 실제로 훌륭한 재능과 용기를 지닌 대단한 총독이었소. 애석하게도 외국 사정을 몰랐을 뿐이오."
 그런데 이렇게 대략의 협상을 하고 있자니, 당장 눈앞의 적이 다시 광동으로 떠나 사라지자, 갑자기 조정에서는 뜬금없이 주전론이 급부상 합니다. 
눈앞에 적이 올떄는 벌벌 떨었으니 사라지고 보니 무서울 게 없는데 오랑캐놈들이 괘씸하다 이겁니다. 그렇게 아무 대책 없이 당장 당장의 분위기에 휩쓸려 목소리를 높인 정치인들의 주장으로 다시 전쟁이 재개 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현지 지휘관 해임하고 방위시설 철거하고 병력 해산하고 군비 감축한 상태인데....
 일이 이렇게 되어 영국군은 다시 선공을 하여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영국군의 병력은 1461명의 병력에 왕국 포병대가 가세한 숫자였는데, 이를 막는 청나라군의 숫자는 600명에 불과했습니다. 본래 2천명이었는데 협상하려고 줄여놓은 겁니다. 당연히 상대도 되지 않고 청군은 대패했으며, 이쪽의 사망자는 200명이 넘었는데 비해 영국군은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부상자만 몇십명 나왔을 뿐이었습니다.
 이때 영국군 사령관이었던 엘리엇은 자신들이 장악한 주산이 기지를 세우기엔 불편한 땅이었기에, 주산을 반환하고 점령한 요새에서 철수할테니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청을 압박했습니다. 하지만 베이징은 강경책으로만 일관했는데, 강경책에 필요한 준비 따윈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지르고 보는 것입니다.
 영국군은 이후 정원(靖遠) 포대를 공격했습니다. 양측의 훈련도와 무장 상태를 보면 청군 수만명이 있어도 막기는 어려웠겠는데, 실제로 정원포대를 지키는 병력은 고작 200명이었습니다. 물론 협상한다고 부대를 줄여놓았기 때문...
 이때 광저우를 지키기 위해 내려온 사람은 참찬대신 양방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방은, 영국군의 포격이 정확한 이유를 발달한 기술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적의 주술이 강력하기 때문에' 라고 생각했고, '적 주술사의 힘을 약하게 해야' 승리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점쟁이에게 견해를 물어보자, '외이의 요술을 막으려면 여자가 쓰는 요강의 뚜껑을 벗겨, 그 입구를 적이 있는 쪽으로 향하게 하면 요술은 금세 깨질 것이다.' 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양방이 부임하자마자 내린 첫 명령은, 다름 아닌 요강을 모두 모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광저우를 지키기 위해 몰려왔던 4만명의 청나라 군사는, 사실상 도적때나 다름없는 수준의 군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는 커녕 현지 주민을 폭행, 살해, 강O, 약탈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넝마가 된 현지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무기를 들고 군대를 습격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적이 눈 앞에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혼돈의 도가니...
장군은 여자 오줌을 모으고 있고, 백성들은 악랄한 관군을 습격하는 아수라장 속에서 영국군은 광저우를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그러자 여지껏 약탈에 전념하던 청나라 병사들은 실제로 적이 오는것을 보고는 총 한발 쏘지 않고 바로 달아났고, 남은 백성들은 영국군에게 무자비하게 학살, 강O, 약탈을 당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백성들은 민병대를 조직, 2만의 숫자를 갖추고 영국군을 습격하여 포위했습니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곡괭이를 든 민병 2만명이 있어도 총기로 잘 무장된 영국군이 이길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필 이 날 비가 내려 총기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가 아편전쟁에 있어 영국군의 최대 위기로, 까딱하면 영국군이 전멸 당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광저우 총독 여보순이 나타났습니다. 이길 자신이 없었던 그는 사태를 대충 무마하기 위해 현지에서 협상을 벌이는 동시에, "만약 영국군을 공격하는 민병이 있으면, 그 민병에게 "600만 달러의 배상금을 물리겠다." 며 협박했습니다. 
 600만 달러면 지금의 가치로도 한화 68억. 1800년대 중반의 가난한 중국 시골의 농민은 태어나서 죽을떄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100년 넘게 평생을 거쳐 일만 하다 죽어도 절대로 갚을 수 없는 돈입니다. 아니, 본인은 둘째치고 자기 자식들에서 손자들에까지 영원토록 지옥같은 나락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정도의 금액입니다. 이 협박에 민병들도 움찔하며 결국 포위를 중단했고, 영국군은 구사일생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영국은 기왕 시작한 싸움 여기서 협상하고 끝낼 생각이 없었기에, 협상에 동의한 현지 지휘관을 해임하고 새로운 지휘관을 파견해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즉 포위를 푼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닝보(寧波)를 지키던 장군 여보운(余步云)은 적이 도달하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습니다. 그 외의 몇차례에 걸친 전투는 한줄로 요약할 수 있는데, 영국군이 공격하면, 청군은 도망쳤고, 청군이 공격하면, 영국군이 격퇴 했습니다. 청군은 공격하는 영국군보다 오히려 숫자가 적거나, 혹은 숫자가 더 많은 경우에는 병사 태반이 아편중독자라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습니다. 아니, 지휘관들도 아편 중독자였을 정도니..
  그렇게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영국군은 진강에 도달했습니다. 진강은 장강과 남북의 운하를 모두 제압할 수 있는 요지로, 그 전략적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곳입니다. 이를 공격하는 영국군의 병력은 7천여명이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지구 반바퀴를 돌아 강을 타고 중국의 심장부로 침입하는 영국군의 숫자가 7천여명인데 비해, 자국 영토의 요지에서 이를 방어하는 청나라 정부의 병력이 주방기병 1,200명, 청주병 200명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10배가 넘는 숫자의 병력으로 결사항전해서 싸워도 모자랄 판에 숫자마저 적으니 당연히 제대로 싸울 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다만, 이 진강을 지키던 주방만주기병 부도통(副都統) 해령(海齡)은 무언가 약간 광기가 들린 사람마냥 일반 시민까지 강제로 가담시켜 싸운 끝에 아편전쟁 동안 벌어진 싸움 중에서는 그나마 영국군이 "아, 싸움 같은 싸움 좀 잠깐 했다." 라고 할 정도의 고전을 강요하긴 했습니다. 물론 결과는 당연히 대패였고, 해령은 자살했습니다.
  진강을 함락한 영국군이 남경 근처에 도달하자, 이미 경제적 파탄 상태인데 자국 내에서 치뤄지는 전쟁도 감당할 수 없을만큼 쪼들렸던 청나라는 결국 백기를 내걸었습니다. 이렇게 아편전쟁은 종결 됩니다.
 1차 아프간 전쟁 당시 영국군은 전비로 1500만 파운드를 사용했고, 버마 전쟁에서는 500만 ~ 1300만 파운드에 이르는 전쟁 비용을 냈습니다.
그렇다면 청나라와의 아편전쟁에 사용된 금액은? 2000만? 아니면 좀 낮게 잡아서 1000만? 설마 500만?
 다 아닙니다. 영국이 아편전쟁을 하며 사용했던 비용은 고작 150만 파운드. 최대치도 250만 파운드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고로 영국이 마오리족을 상대할때 쓴 군자금이 300만 파운드 입니다. 즉, 인구 4억의 제국 청나라는, 영국군에게 있어 '마오리족만도 못한 난이도'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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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이건 너무나 소리지만, 청나라가 그 정도로 무력한 나라는 아닙니다. 그 정도 덩치와 체급을 가진 나라가 그토록 무기력하기가 오히려 더 힘들겁니다. 불과 몇십년 뒤의 청불전쟁에서 청나라는 비록 해전에서는 전력상 열세를 배겨내지 못하고 패배했지만, 육상전에서는 놀랍게도 프랑스를 상대로 분전을 거듭하여 상대를 심하게 곤혹스럽게 했고, 중국에게 계속해서 패배를 당한 여파로 프랑스의 페리 내각이 총사퇴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즉,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는 분명 그 급벽하는 19세기에 조차도 최후의 저항 정도는 해볼 저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지만, "지도층, 중앙 조정의 무능"은 그 모든걸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앞서말한 청불전쟁도 막상 그렇게 간만에 잘싸우고는, 중앙에서 협상을 개판으로 하여 실질적인 이득이 전무했으니... 

 간단하게 비유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분명 당시의 청나라, 중국은 컴퓨터로 따지면 낡은 하드웨어의 구시대 모델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성능으로 치자면야 매끈한 신종 모델에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굴리는 사람이 알뜰히 굴리면 어찌어찌 고전게임과 기본적인 웹서핑을 돌릴 수준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다루는 유저가 컴퓨터 관리는 전혀 할줄 모르는 개판이라, 덕지덕지 악성코드와 랜섬웨어가 설치게 만들어 정말 완전히 손도 쓰지 못하는 폐기물로 만들고, "x바 킹오파도 안되는 쓰레기 똥컴이네!" 하는 상황입니다. 물론 컴퓨터 성능이 노후되긴 했지만, 그걸 개판으로 굴린 유저의 잘못도 큰데, 워낙 컴퓨터가 똥컴이라는데 집중되다 보니 유저의 막장스런 관리는 잘 집중이 안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월한 서구문명이 낡은 동아시아 문명을 집어삼킨 역사의 필연적 흐름."으로 이해되어 아편전쟁 시기 청나라 지도부 및 지휘관들이 보여준 무능과 작태는 "어쩔 수 없이 결국 패배할 운명이었던 사람들" 정도로 이해되어 그다지 포커스가 집중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들이야 말로 당대 청나라 엘리트의 전쟁에 대한 역량과 대응은 '끔찍하다' 는 말로도 표현 하기 어려울 수 있을것 같습니다.
 4억 인구의 제국을 가지고, 뉴질랜드 마오리족만도 못하게 싸우다니?

결과적으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 지도자 중 하나로 불러도 무방한 업적(?)을 남긴 도광제. 뉴질랜드 마오리족 추장이 그보다는 더 잘 싸웠다.....
댓글
  • 미도반 2017/08/14 13:18

    29척으로 2척을 못이겼다는 전설의 중국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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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olbase 2017/08/14 13:18

    수뇌부의 하드트롤링으로 더 말아잡순 전쟁..
    냉정히 말해서 화력차이 때문에라도 청이 이길 가능성은 높진 않았겠다만 너무 어이없이 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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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놔드리겠쑤 2017/08/14 13:19

    잠자는 돼지로 인정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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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unyan828 2017/08/14 13:19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명언이 떠오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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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밥천국 2017/08/14 13:20

    중국인들에게는 저승사자이지만 거문도 살던 조선인들에겐 한없이 친절했던 상냥한 레드코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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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간에함정 2017/08/14 13:21

    영국은 발전된 형태의 총 갖고 싸우는데 청나라의 팔기군은 19세기까지도 말타고 활 쏘는... 싸움이 될수가 없죠. 군기도 엉망이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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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즐겜네이터 2017/08/14 13:22

    서양과의 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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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리쏭 2017/08/14 13:23

    결국 망할 나라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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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S반다인 2017/08/14 13:23

    근데.. 중국은 꼭 아편전쟁 때만 저런 건 아니죠...
    청나라와 산해관에서 싸울 때에도...
    요나라, 금나라와 싸울 때에도...
    나라가 망조가 들면...
    뭐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많이 벌어지죠......
    소위 문명국이라고 하는 나라도..
    2차대전 프랑스도 한타 싸움에 발리고..
    소련도 개털리고...
    뭐.. 그런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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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민관 2017/08/14 13:23

    지도자가 유능하면 이길수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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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S반다인 2017/08/14 13:25

    그리고 당시 청나라 군대의 경우
    영국과 싸우지 않고
    청나라 국민을 약탈하는게 더 남는 장사였죠...ㅋㅋㅋㅋ
    한마디로 개판이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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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S반다인 2017/08/14 13:28

    그리고 마오리족의 경우는 거의 수백년 동안 내부에서 쌈질만 해대던 민족이라서...
    청보다 나았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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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BJ]Abyss 2017/08/14 13:31

    그 악성코드 잔뜩 깔린 와중에 임칙서같이 강직하고 나름 유능한 사람이 있었던 게 나름 에러라면 에러... 그조차도 충분히 부패했다면 영국 상인들하고 이미 사바사바 해서 별 일 일어나지 않았을..... ㄲㄲㄲ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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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년탐정단 2017/08/14 13:33

    선추천 후정독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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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갓유라 2017/08/14 13:36

    [DBJ]Abyss// 저 와중에 임칙서 같이 강직하고 유능한 인물이 나온게 더 놀랍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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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요뜨 2017/08/14 17:04

    청불전쟁은 의외로 잘싸웠다는게 함정인듯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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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카이로 2017/08/14 17:33

    신불해님 역사글, 항상 흥미롭게 잘 읽고있습니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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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uceppe 2017/08/14 17:33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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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oung026 2017/08/14 17:56

    기관총의 등장 이전까지는 구식 군대라도 물량이 월등하다면 충분히 신식 군대와 싸울 수 있었습니다. 기술과 화력보다 훈련도와 기강이 더 큰 문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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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자리방어율 2017/08/14 18:19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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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S반다인 2017/08/14 18:26

    갓유라// 예전 신불해님이 쓴 글이었나.. 거기 보면 임칙서는 드물게 국제법에도 능통했다라고 나오더군요..
    그런 이유로 아편을 몰수할 수 있었다고...
    어차피 영국에서 공식적으로 아편을 팔게 하지 못했을테니.. 밀수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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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엔느 2017/08/14 19:15

    그런데 청나라 병력 동원이 제대로 안된것 같은데 무슨 사정이 있나요? 인구도 많은데다 청나라 홈인데도 병력도 제대로 동원 안된것 같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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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今春花如雪 2017/08/14 19:19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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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웅의우승 2017/08/14 20:19

    중국의 이 아편전쟁을 보니 우리나라의 병인양요와 참 비교됩니다. 둘다 낙후했고 무기는 이미 수백년전에 뒤떨어졌지만 그럼에도 조선군이 프랑스군과 맞서 끈질기게 싸웠고 결국 프랑스군이 돌아가게 했죠 ... 결론은 지도부가 어찌할 지 단호히 대처하고 맞서느냐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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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텔레리 2017/08/14 21:01

    대운하만 봉쇄해도 청은 언제든 협상장으로 끌려 나올 수 밖에 없는 입장인데 해상에서 압도적인 전력차이가 있는 데다 아바나도 떨어트린 영군이 청의 중세식 요새들을 못 떨어트리리도 없고 영국의 대운하 봉쇄를 막긴 어렵죠.
    이건 19세기가 아니라 18세기도 마찬가지고 지도자의 유능이든 청군이 정예든 아니든 차이가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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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펜질한심 2017/08/14 21:22

    이런 나라한테 도게자하고 식민 통치 받은 나라가 있다면서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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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불해 2017/08/14 21:46

    텔레리/
    처음 영국군이 수도 코앞에서 물러났을 당시에 도광제가 판단을 잘했다면 홍콩 할양에서 일이 끝났을 겁니다.
    당시 영국군이 주산, 홍콩 두 곳에 눈독을 들이다 조사 결과 주산열도가 가치가 없어서 '주산은 반환하고 점령한 지역에서도 철수할테니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자' 고 제안했고, 현장에서 협상하던 청나라쪽의 대표 기선(琦善) 역시 중국 정부의 묵인으로 포르투갈이 비공식적으로 머물고 있던 마카오의 예를 들어 할양에 동의하는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광제는 현실감각을 잃고 단순한 분노로 '분노하여 머리칼이 곤두섰' 다는 표현을 쓰면서 협상을 거부했고 바로 전쟁이 재개 되었는데, 전쟁이 재개되었을때 바로 공격을 당한 정원(靖遠) 포대의 청군 수비병력은 '200명' 이 고작이었습니다. 앞서 영국군이 수도 코앞에 오자 놀라 협상을 하면서 병력을 치워버렸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영토 할양이 불가능하는게 정치적 현실이었다면, 그럼 전쟁 준비라도 잘해야 할텐데...
    아무런 준비도 대책도 없이 그저 그때그때 감정과 여론에 따라 싸워야할때 협상하고, 협상해야 할때 싸웠으니 전쟁 지도층의 무능을 지적하지 않을수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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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텔레리 2017/08/14 22:16

    신불해// 지도자의 유능이든 무능이든 전쟁준비가 잘 되었든 안 되었든 전쟁의 패배 자체는 확정적이었다는겁니다. 18세기 강건성세에 붙었다고 해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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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땅보탬 2017/08/14 22:57

    그게 실력입니다..
    망하는 나라들은 그런 모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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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불해 2017/08/14 23:38

    18세기 강건성세 시기에 전쟁이 벌어졌어도 패배했을지, 반대로 19세기 청나라가 전쟁 대비를 완벽하게 잘했고 훌륭한 지휘를 하면 영국을 이겼을지, 그런 일엔 전 할말이 없고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 가지고 뭐라고 제가 뭐라고 단언할 수 있는것도 아니구요.
    다만 말할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부분은 실제 과정에서 벌어진 문제점에 대한 부분이지요. 영국이 무조건 청나라를 이기는지 혹은 질 수도 있었는지에 대해선 사실 별로 관심도 없고 본문에서 말할려고 했던 주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영국이 청나라를 '쉽게' 그것도 '너무나도 쉽게' 이겼다는 부분입니다. 어느정도냐면, 아프간전쟁에 비하면 '조금의 과장없이' 100배는 더 쉽게 이겼고 마오리족 상대하는것보다도 쉽게 이겼다는 점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결국 패배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면죄부를 주거나 그냥 넘어가기에는, 끔찍할 정도의 무능이라고 밖에는 할수 없습니다. '질 수 밖에 없는 전쟁' 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느냐' 가 또 다르고, 그런 과정을 겪어 나오는 결과는 또 다르니 그런 과정을 살펴보는게 의미가 없을 순 없겠죠.
    불과 40년 뒤의 청불전쟁에선 청나라가 예상보다도 훨씬 잘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아편전쟁처럼 역시 지배층의 대책없는 태도로 인해 어이없는 조약을 맺어 전투의 유리함을 외교적으로 모조리 상실해버렸고, 그런 어처구니 없고 무능한 대응에 '무언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는 신지식인들이 속속 등장했으니(가령 청불전쟁이 자신에게 있어 큰 의미가 있었다는 쑨원처럼), '건강하고 원활하게
    전성기의 청이라도 졌을것' 이라고 과정을 뺴고 보는것도 문제가 있을것 같습니다. '무능한 지도층이, 무능하게 졌기에' 이후 점점 문제가 커진 셈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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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텔레리 2017/08/14 23:45

    신불해// 아프간 전하고는 상황 자체가 다르죠. 아프간은 아예 카불까지 진격해 정권을 갈아치우고 종속국으로 만들려고 벌인 것이고 아편전쟁은 청을 협상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아프간전이 아편전쟁과 같은 목적이었으면 전쟁을 3년씩 끌 것도 없이 카불을 점령한 당해에 전쟁은 끝났을 것입니다. 서로 목적도 또한 해군을 이용해 대운하로 쉽게 접근 가능했던 청과 달리 아프간 산악지대로의 진격을 비교하며 과장 없이 100배는 더 쉬웠다고 하면 안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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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텔레리 2017/08/14 23:50

    마오리 전쟁도 마찬가지고요. 전쟁의 목적이 적을 협상장으로 이끄느냐 아님 완전한 제압을 원하냐에 따라 전쟁기간도 마찬가지로 전비도 당연히 달리질 수 밖에 없는 건데 단순 전비로 비교하면서 100배는 못 싸웠느니 마오리족 추장보다 못 싸웠느니 단순 비교하면서 과장하여 글을 쓰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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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텔레리 2017/08/14 23:53

    신불해// 그리고 전쟁의 승패여부는 이 글을 읽고 청이 제대로 준비했으면 충분히 이길 수도 있었다는 댓글들을 보고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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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보운영 2017/08/15 01:06

    그때는 제갈공명처럼 적벽대전가능하지않았나요 영국군 유인하고 살수대첩처럼 절벽에서 돈던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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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캐미치해로 2017/08/15 01:40

    그 유명한 서태후가 청왕조 멸망의 큰 역할을 했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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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iking 2017/08/15 02:45

    군자금에 쓰여야할돈이 서태후의 흥청망청 사치비용에 쓰일정도로 부패했던 당시청나라.. 제 1,2차 아편전쟁에서 개박살나고 그뒤 청일전생서도 힘한번 못써보고 대패한건 어찌보면 당연한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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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ersonar 2017/08/15 03:43

    중간의 내용이 좀 사실과 다른것 같습니다 광저우에서 주민들을 괴롭히던 영국군은 소수부대 였습니다 총독은 본진부대에서 협박을 하자 어쩔수 없이 그런 명령을 내린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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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m 2017/08/15 10:08

    서태후 집권은 1.2차 아편전쟁 이후의 일입니다.서태후의 이화원 문제는 청일전쟁때 벌어진 벙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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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똑딱안치홍 2017/08/15 10:23

    [리플수정]서태후는 도광제의 아들 함풍제의 마누라인데 아편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없음. 서태후가 정권을 잡은건 도광제의 손자 동치제 즉위 이후부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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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불해 2017/08/15 10:44

    텔리리/
    달아주신 의견 잘 봤습니다. 말하신 부분은 맞는 말씀이고 공감하는 이야기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과 핀트가 좀 다른듯 싶은게,
    영국군은 전쟁을 통해 협상을 원한 전략이 있었다면, 반대로 청나라가 전쟁 중에 보여준 모습은 무엇을 위한것이었나 싶은 부분입니다. 말하신 대로 영국군이 배를 타고 올라가 베이징 코앞인 천진까지 쭉쭉올라가서 협상이 벌어졌는데, 그때는 전쟁이 끝난 시점도 아니고 이미 중간 부분에 이뤄진 일이었고, 이 과정에서 코앞에서 적을 보자 그때의 갑작스런 분위기에 휩쓸려 화친을 서둘러 맺으면서 현장의 병력을 철수시키고 방비를 허술히 했는데, 그나마 그 협상 조차도 '오랑캐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겠다' 며 영어를 할 줄 아는 포붕(鮑鵬)이라는 중개업자에게 맡기는 등 무성의하기 짝이 없었고,
    방금전의 호들갑으로 인해 이미 수비 병력을 감축하고 현지의 유능한 지휘관을 파면했으면서도 적이 광동에 내려가 보이지 않자 또다시 감정적인 태도로 전쟁을 감행, 이후에는 단순히 영국군이 베이징 코앞까지 오는 무력시위가 아니라 진강함락- 사실상 난징이 함락되는 사태까지 겪었지요.
    광저우, 난징 함락등의 등의 일은 영국군이 청나라 조정을 압박해 협상장으로 끌고와 1차 협상을 하고 난 이후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협상을 제대로 하는것도 아니고, 전쟁을 제대로 하는것도 아닙니다. 질 수 밖에 없는 전쟁이라면 협상을 제대로 할 수도 있었고, '주산 홍콩 할양' 등의 조건이 걸린 협상에 도저히 동의할수가 없었다면 더 제대로 준비할 수도 있었던 겁니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그런 부분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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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리는페드로 2017/08/15 11:20

    혹시 예전에 대동법과 김육에 관해서도 써주신 분 아니신가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계속해서 읽고싶은 글입니다. 자주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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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bqq 2017/08/15 11:25

    항상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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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ixxon 2017/08/15 11:38

    Mlb 공식 역사 선생님으로 모셔야 할 듯.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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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ygoyang 2017/08/15 12:01

    재미있게 읽고 추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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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버모어 2017/08/15 12:23

    너무 좋은 글입니다.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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