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천국 코하비닷컴
https://cohabe.com/sisa/286766

박그네정권에서의 역대급 개씹창타령

 

교과서에 없어도 교사가 수업시간에 대충설명가능하다고 하는 씹탱새끼들 ㅋㅋ

누구나 다 알고있는 내용이라서 삭제, 18년 장기독재한 민주주의 대한민국에 박정희는 왜 넣어?ㅋㅋ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박정희 정권과 관련된 내용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기존 검정교과서 6종 가운데 5종에 공히 실려 있던 5.16 쿠데타 당시 군복과 썬글라스 차림의

박정희 사진은 국정교과서에서 사라졌다.

박정희의 사진은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과 나란히 있는 한 장 뿐이다.

군사쿠데타의 주역보다는 경제발전을 주도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다.

 

 

 또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해당 분야 전문가가 참여했다는

교육부 설명과는 달리 뉴라이트(개독) 성향의 학자들이 7명이나 집필진에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현대사 집필진 가운데 김명섭 교수와 나종남 교수,세계사를 맡은

이주영 교수는 뉴라이트 인사들이 중심인 현대사학회 회원이다.

현대사를 집필한 최대권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11월 한 신문 칼럼에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5.16 쿠데타를 군사혁명으로 표현한 바 있다.

또 정경희 영산대 교수는 기존 검정교과서가 이승만 대통령을 폄훼하고

북한 교과서를 베꼈다고 주장했던 인사이고,손승철 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교학사 교과서 필진이었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최순실 게이트 직후인 지난달

‘박근혜 대통령님을 위해 기도하자’는 글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일본 관동군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령한 뒤

이듬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황제다.

 

일제는 총독을 파견했던 조선이나 대만과 달리 중국에는 중국인으로

'얼굴마담'을 내세웠다.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친일파로 볼 것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수석 졸업한 박정희는 1942년 일본 육사에 편입-졸업 후

44년 황군(皇軍)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니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다.

 

박정희의 혈서 "일본에 '견마(犬馬)의 충성' 다하겠다"

더구나 박정희는 연령 초과로 군관학교 시험에서 탈락하자,

혈서와 함께 입학허가를 호소하는 편지를 지원서류에 동봉해 제출하는 등

입학허가를 얻어내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공개된 이 '혈서 편지'

지금도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관돼 있는데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을 위해 굳건히 결심합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과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당시 군관학교 입학 자격이 16~19세였던 것에 비추어 23살이었던

박정희가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견마의 충성 혈서' 덕분이었다.

 

그리고 어렵게 입학허가를 얻은 박정희는 일본의 기대에 부응해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해 일본 육사에 3학년으로 편입해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황군 소위로 임관해 군복을 입고 금의환향하게 된 것이다.

여제자 이순희씨는 당시의 광경을 이렇게 증언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을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중략)…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와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박 선생님을 교사 시절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정운현,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황군 장교 박정희의 일본 군복 '코스프레'

 

군국주의 황군 장교로서 박정희의 성취와 향수를 드러낸 또 다른 코드는

뜻밖에도 일본 군복에 대한 '코스프레'다.

 

다음은 1973년 박정희의 특명을 받아 이른바 윤필용 사건의 수사를 담당했던

강창성(육사 8기) 전 보안사령관의 1991년 회고다.

 

"계엄선포(1971년 10월 17일) 한 달 전쯤인가.

박 대통령이 나를 불러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 장화에 점퍼 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류순열, 39쪽에서 재인용)

 

일국의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침략군 군대에 몸담았던 시절의 복장까지 갖춰 입고

'좋았던 그 시절'을 회상한다는 것은 일반 상식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박정희가 가끔 일본군 장교복 코스프레를 즐겼고, 또 그럴 때면 항상 기분이 좋았다는 것은

그가 '뼛속까지 황군 장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박정희가 선우휘 주필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 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댓글
  • 댓글이 없습니다. 처음으로 댓글을 남겨보세요!

(sYHR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