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천국 코하비닷컴
https://cohabe.com/sisa/257011

문화[재업]얼마 전 '알쓸신잡'을 보고 생각난 박경리선생과 이모님에 대한 추억

* 한 번 올렸던 글인데 새벽반에 올리고 싶어서 재업합니다.



몇년 전에 귀천하신 이모님이 박경리선생, 천경자화백과 가까운 사이셨어요.

어머니쪽으로 촌수 계산도 어려울 정도로 먼 친척, 아마 법적으로는 남이라고 해야 맞을 사이죠.

1920년대 생이신데 그 시절 태생으로는 흔하지 않은 많이 배우고 세련된 이모님이셨죠.

부친 작고하시고 이모님의 어머님이 신촌에서 하숙을 치면서 외동딸을 숙명여고-이화여대 이렇게 공부를 시키셨는데

그 시절 연대생이던 이모부가 일본 유학 떠나시면서 나 돌아올 때까지 결혼 안했으면 나랑 결혼하는 겁니다..를 시전하시고

돌아오셔서 변호사 되시고 결혼하신 경우.

그래서 그 시절 인텔리답게 일어 완전 능통에 영문과 출신이라 영어도 상당히 잘하시던 이모님.

제가 본 그 세대 여성 중에 가장 아름답고 세련된 분이셨어요.




제가 국민학교 다닐 당시에 티비에서 드라마로 '토지'를 방영했었습니다.

너무나 재밌게 본 저는 이모님댁 서재에서 박경리선생님의 걸작 '토지'를 탐독했었죠.

당시 이모님은 돈암동 거주, 박경리선생은 정릉4동에 거주.

친분의 유래는 못 들었으나 박경리선생이 종종 이모님댁에 오셔서 차를 드실 정도의 사이였습니다.

그 때 이모님이 내 먼 친척뻘 조카가 국민학생인데 당신책을 그렇게 좋아한다고 하셨더니 무려 박경리선생님이 제가 이모님댁 서재에서 읽던 책에 사인을 남겨주시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이모님이 저에게 당시 3부까지 나왔던 '토지'-바로 박경리선생님이 저를 위해 사인을 해주신 책을 몽땅 저에게 주셨습니다.

지금도 부모님 댁에 고이 모셔놓은 제 보물단지입니다.

어찌나 여러번 읽었던지 책 상태가 안 좋은데, 당시 너무 가난해서 새로 한질 사서 읽고 그 책을 잘 보관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입죠.

이모 말씀으로는 박경리선생이 항상 사위인 김지하시인과 그 아내인 딸 걱정을 많이 하곤 하셨었다고 해요.




천경자화백의 경우는 개인사로 홍대교수를 그만두고 나서 생계를 위해 70년대에 돈암동 이모님댁 근처에서 화실을 열고 미술지도를 하며 생활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 예술에 조예가 깊던 이모님은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선생님 도와드린다고 천화백 그림을 정말 많이도 구입하여 소장하셨었어요.

그래서 이모님 댁에 가서 저는 어린 나이에 천경자화백 그림 정말 많이도 봤었습니다.

워낙에 예술을 사랑했던 이모님은 친구 남편이던 장욱진화백의 그림도 역시 친구를 도와주기 위해 역시 다수 구입하여 소장하셨기에 저는 또 역시 어린 나이에 장욱진화백의 그림도 참 많이도 봤었네요.

이모님 방에서 보물처럼 구경하던 대원군의 난초며 추사의 글씨며가 종종 생각이 납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이 자녀들이 다 자라 어린 저를 예뻐해주신 덕에 이모님 따라 화랑이며 골동품상 다니며 가난한 제 집안 형편과는 무관하게 감수성형성기에 고급예술을 정말 많이 접했었습니다.

거기에 이모님댁 그 넓은 2층 서재에서 맘껏 책을 보게 해주셨고 종종 책을 많이도 주셨었습니다.

그리고 이모님에게 듣던 그 식민지시대의 이야기며 여러 명사들 이야기가 정말 재미나서 자라면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기도 했었죠.

어린시절의 독서이력 덕에 국문학과 졸업하고 비록 꿈꾸던 작가는 못 되었지만 문학을 가르치며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것에는 이모님의 지분이 매우 크다고 늘 생각합니다.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이 먼 친척이었으나 거리낌없이 사랑해주시고 소중하고 빛나는 체험을 많이도 하게 해주신 이모님이 저 세상에서도 좋아하시는 책 많이 읽으시고 아름다운 그림 많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나 언젠가 제가 소설을 쓰는 날이 온다면 이모님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댓글
  • 트라부세 2017/06/09 03:12

    국민학생이 토지를 탐독하시다니...

    (w7JzWM)

  • 베레타 2017/06/09 03:14

    트라부세// 당시에 활자중독증 수준이기도 했고, 책보다 재미난 게 별로 없던 시절이기도 했어요.
    덕분에 저는 지금도 세로쓰기책이나 가로쓰기책이나 읽는 속도가 비슷합니다.ㅎㅎ

    (w7JzWM)

  • 트라부세 2017/06/09 03:17

    저는 어린시절에 책보다도 신문을 더 좋아했어요.
    집에서 조간신문을 여섯 개인가 일곱 개인가 받아봤는데 (엄마가 그 때문에 잔소리를 자주...)
    볕 좋은 마루에서 아빠랑 나랑 각자 신문 한 부씩을 펼쳐놓고 보고 있고
    여동생이 마루를 엉금엉금 기어다니고
    엄마가 옆에서 아빠 군복을 다리미질 하던 모습이 제 기억에 남은 가장 행복한 순간입져.
    그때 읽은 기사나 논설이 살면서 참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w7JzWM)

  • 베레타 2017/06/09 03:19

    트라부세// 저는 국민학교 다닐 때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 봐오시면 간혹 신문지로 싸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걸 다 펴서 기사는 물론이고 광고나 상하단의 날짜까지 다 읽고 그것마저 떨어져서 활자공급이 중단되면 전화번호부를 읽었답니다.
    그 결과 김이박씨가 정말 많다는 것과 대부분의 전화소유명의자는 남성이란 것을 발견했었죠.ㅋㅋ

    (w7JzWM)

  • 트라부세 2017/06/09 03:20

    졌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병에 붙은 라벨의 깨알같은 글자까지 다 읽었지만 전화번호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You Win!!

    (w7JzWM)

  • 베레타 2017/06/09 03:22

    트라부세// 하여간 그 지독했던 활자중독증은 저에게 초고도근시와 국어국문학과 학사학위와 먹고살 재주를 남겼습니다. ㅋㅋ
    인기없는 글에서 놀아주셔서 감사.

    (w7JzWM)

  • 트라부세 2017/06/09 03:24

    그 수많은 논설은 저에게 법학과 학사학위를 줬네요.
    사람들이 이런 글은 안읽고 말야.
    에잉.
    쯧쯧

    (w7JzWM)

  • 나는나대로 2017/06/09 08:04

    뭔가 한줄한줄 아껴가며 읽게 되는 글이네요. 베레타님의 소중한 추억 한장을 들춰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w7JzWM)

  • 에시드 2017/06/09 08:23

    아침부터 안 좋은 소식이나 글들이 습관처럼 다가왔는데, 좋은 이야기 들려주신 베레타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정도의 차이는 심히 낮겠지만 저도 어렸을 때 온집안의 책을 모조리 탐독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백과사전은 다르고 닳도록 의미도 모른 채 무한반복했었습니다.
    왜였는지는 기억이 오롯하게 나진 않지만 아마도 그냥 그 자체가 제일 재미있던 놀이였던 거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렸을 때 환경이라든지 뭔가 멘토를 할 만한 존재는 참으로 삶에 있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에게는 6살 연상의 누이, 베라타님께는 이모님이란 존재처럼 말이죠.
    요즘 아이를 키우면서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자식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 까. 답은 도리도리 ㅠㅠ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뭔가를 하려 하면 이것 또한 아이의 자유의지를 조정하려는 나의 욕심이지 않을까.
    정답은 없겠지요.
    삼천포로 빠졌네요 ㅎㅎ. 미소를 가득하게 하는 글 감사드리구요.
    좋은 하루 시작되시길 바랍니다.

    (w7JzWM)

  • 이면수 2017/06/09 08:34

    좋은글 보고 갑니다

    (w7JzWM)

  • 게으른카페 2017/06/09 08:35

    우리나라 아이들 어려서 너무 건조하게 자라는데....
    베레타님 유년기 처럼 감성의 세계를 깨우쳐 줄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국립박물관 등에 아이들 단체로 데려오시는 안내인분들 많지만 어찌 그리 사무적이고 건조하게 설명끝나면 넘어가는 일들을 반복하는지...
    아이들이 거기 왔던 기억이나 있을런지 모르겠더군요.
    이모님같은 분들이 이제라도 많아지시면 우리 사회가 엄청나게 풍성해질 겁니다.

    (w7JzWM)

  • soulseek 2017/06/09 08:40

    이 누님 수업 들어보고 싶네요.ㅋ

    (w7JzWM)

  • 노멀한녀석 2017/06/09 08:44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

    (w7JzWM)

  • globality 2017/06/09 08:58

    좋은 글 추천 드립니다

    (w7JzWM)

  • skyline 2017/06/09 09:49

    분위기깨는 속물같은 이야기지만 천경자, 장욱진 선생의 작품들을 아직까지 소장하고 계시다면 그 가치가 어마어마하겠네요. 각 열점씩만 가지고 있다쳐도 몇십억은 될듯...

    (w7JzWM)

  • Vajra 2017/06/09 09:57

    굉장히 멋진 어린시절을 보내셨네요 ㅎㅎ

    (w7JzWM)

  • papillon 2017/06/09 10:28

    저도 나름 한 활자중독하는데 전화번호부에서 고개를 떨구게 되네요.
    저희집은 다들 독서를 좋아하는데 집안분위기자체는 독서금지에 가까워서...... 책은 다 여기저기서 빌려봤네요. 책을 맘껏 읽을수 있는 환경 부럽네요

    (w7JzWM)

  • 허프랜드 2017/06/09 11:36

    아..베레타님의 LG트윈스 관련 한게 글에서 느껴지던 문학적 소양이 다 이유가 있었군요...ㅎ우야뜬 LG 화이팅입니다.ㅎㅎ

    (w7JzWM)

  • 독불군 2017/06/09 12:35

    전화번호부라니 ...

    (w7JzWM)

  • 3M야옹이 2017/06/09 12:56

    헐..중간에 장욱진 천경자 화백 그림을 많이 모으셨다니..ㄷㄷㄷㄷㄷㄷ

    (w7JzWM)

  • 강동구유지 2017/06/09 13:22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w7JzWM)

  • adldul 2017/06/09 13:55

    에세이 읽은 기분이에요
    글을 잘 쓰셔서~~~~~
    저도 참고로 천경자 화백 좋아합니닷^^

    (w7JzWM)

  • 샤키레또 2017/06/09 14:17

    베레타님 올려주시는 지난 이야기들...새벽의 담백함이 더해지는 글들 참 좋아합니다~

    (w7JzWM)

  • 트라부세 2017/06/09 14:38

    앗 이 글이 담장을 넘다니.
    조회수 폭망이라서 베레타님이랑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 건데.

    (w7JzWM)

  • 베레타 2017/06/09 14:51

    트라부세// 그러게 말입니다. ㅎㅎ 민망하네요.

    (w7JzWM)

  • 프라이빗 2017/06/09 16:34

    돈암동.정릉4동...다 잘 아는 지명들이네요.
    저도 70년대에 삼성 출판사에서 출판된 토지 1부
    무려 세로쓰기 2단으로 되어 있는 책 소장했더랬는데..
    지긍은 어디에 있는지ㅠㅠ
    여류문화인들 이야기 재밌게 읽었습니다.

    (w7JzWM)

  • 프라이빗 2017/06/09 16:38

    트라부세님 댓글 읽으니..
    읽을게 신문 밖에 없던 시절이 떠 오르네요.
    그 시절 신문 읽었기에 글 쓰는 재주는 없지만
    한자 읽는 것은 터득할 수 있었어요.
    어른 돼어 한자 읽을 수 있는게 세법 읽는데
    정말 크게 돼었죠..아울러 일본여행 다니는데도요ㅋ

    (w7JzWM)

  • 베레타 2017/06/09 19:34

    프라이빗// 제가 갖고있는 책도 님과 같습니다.
    세로쓰기에 2단인쇄.
    댓글만 봐도 반갑습니다.

    (w7JzWM)

  • remember 2017/06/09 19:43

    ㅋ ㅑ. 너무 좋은 글인데요. 저도 작가를 꿈꾸다가 결국엔 포기해서인지 ㅠㅠ 감정이입이 너무 심하게 되는군요. 언니 이 포스팅 정말 고마워요. ㅎ

    (w7JzWM)

  • 돌베개 2017/06/09 19:59

    딴 건 그렇다치고...
    천경자화백 그림을 많이 소장하셨다니... 그 경제적 가치가... 엄청나실 듯...

    (w7JzWM)

  • hoppang 2017/06/09 23:2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소중한 기억 나누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w7JzWM)

  • 무미니 2017/06/10 00:12

    소중한 추억 감사히 읽었습니다^^ 토지는 나남에서 세트로 나왔을때 광고보고 충동적으로 구입했는데
    아버지랑 함께 읽으면서 잘샀다고 뿌듯해한 기억이 나네요.

    (w7JzWM)

  • 해피한인생 2017/06/10 00:18

    저도 어렸을때는 전화번호부도 재미있게 봤었네요.^^

    (w7JzWM)

  • guitarplayer 2017/06/10 01:03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하네요...역시 글 잘 쓰시는 분들은 다르네요...잘 보았습니다...

    (w7JzWM)

  • 기아눈팅팬 2017/06/10 01:54

    어릴때 백과사전 완독한 정도인데
    활자중독이라고 말한 제가 부끄럽네요

    (w7JzWM)

  • 백작크리스 2017/06/10 02:27

    유쾌한 이야기 잘 봤습니다. 이모님 참 좋으셨던 분인듯해요.

    (w7JzWM)

  • 지금이니 2017/06/10 04:49

    베레타님 글이 정말 예쁘시네요 저도 어른들 옛날이야기 듣기를 참 좋아해서 그림을 잘그렸다면 그 풍경을 그려봤을텐데.. 글을 잘썼으면 그시대를 배경으로 소설을 써봤을텐데 같은 생각 많이 하곤했었습니다
    나중에 꼭 베레타님이 소설쓰시는 날이 와서 소설로 읽어보고 싶네요

    (w7JzWM)

  • promiseU 2017/06/10 05:56

    토지 참 좋아했는데 글감사합니다 드릴께 추천뿐‥

    (w7JzWM)

(w7JzW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