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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다 사람 사는 곳이다.

" 두석규 님! 여깁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순백색 의복의 '천사'가 노인을 맞이해왔다. 
노인은 주변을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함께 문을 통과한 이 많은 사람 중에 굳이 자신만을 찍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 드디어 오셨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두석규 씨가 어서 죽기를 바랐을 정도입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하하하. "
" ... "

시답잖은 말을 한 천사는 따로 난 통로로 노인을 안내했다.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죽고 나면 다 평등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죽음 뒤의 평온을 기대했던 그에게는 천사의 특별대우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일생을 바쁘게 살아온 그는 지금, 휴식이 간절했다.

" 그런데 왜 저를...? "
" 국가 하나를 운영하시는 분이신데! 기다릴 수밖에 없지요. "
" ... "

인상을 찌푸린 노인은 통로로 들어서며, 제발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길 바랐다.
잘 차려진 복도를 걷던 노인은 문득, 물었다.

" 천국이 원래 이런 곳입니까? " 
" 어떤 곳을 상상하셨습니까? "
" 아... 솔직히 말하자면, 항상 맑은 하늘과 선선한 바람, 맑은 샘물이 흐르는 그런... "

천사는 애매하게 웃었다.

" 하하 대충은 맞겠지만...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습니다. "
" ! ... "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그 말은 노인에게 충격적이었다. 
생각해보니 맞다. 천국에 가는 것은 사람이니, 그곳은 사람 사는 곳이다. 천국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구나!
노인의 표정이 약간 실망스러워졌다.

" 그래도, 상상하신 것과 비슷하긴 할 겁니다. "

천사는 통로의 문 하나를 열어 재꼈다. 
문 너머로 뻥 뚫린 맑은 하늘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노인은 "오!" 자기도 모르게 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끝없이 펼쳐진 탁 트인 대지에는 푸른 잔디와 꽃밭, 과실수들이 넘쳐났고, 맑은 물줄기가 흐르는 강물이 시작과 끝을 모르게 뻗어 있었다. 시야가 멀리 선명했고, 바람은 선선했다. 
노인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 훌륭하군요. "
" 예. 아름다운 곳이지요. "

천사는 노인을 다시 통로로 데리고 나왔다. 둘은 조금 더 걷다가 새로운 문을 열었다.
문 너머를 확인한 노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모두 똑같은 방향으로 손을 뻗어가며 구호를 외쳐대고 있었다. 노인은 너무나 익숙한 그 모습에 설마 했다.

" 저들은...? "
" 예. 시위대입니다. "
" 허? "

천국에 시위대라니? 노인은 황당했지만, 천사의 얼굴은 진지했다.

" 천국의 현대화를 요구하는 이들입니다. 모두 근래에 죽은 자들이지요.. "
" 천국의 현대화...? "

노인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에 눈썹을 꿈틀했다.

" 천국은 자연적이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지만, 근래에 죽은 사람들이 그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
" ? "
" 간단히 말해서, 저들은 현대문명을 원하는 것이지요. 영화나 음악, 전자기기들 같은... "
" 그건 좀... "

노인의 얼굴은 부정적이었지만, 천사는 손을 내저었다.

" 아니요. 꼭 필요한 일입니다. 21세기를 살던 사람들이 죽어서 천국에 왔는데, 그곳이 수백 년 전 세상이라면 적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침대에서 자던 사람이 갑자기 짚 바닥 위에서 자야 하는데 말입니다. "
" 흠.. 딴은 그렇군요. "

노인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현대 생활에 익숙하던 사람들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 떨어진다면, 불편하긴 하겠지.

" 그래서 사람들이 저렇게 시위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

천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 현대화에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아주 오래전에 죽은 이들이지요. "
" 아아... "

생전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노인은, 돌아가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변화를 바라지 않는 보수적인 기존 세력들과 신흥 유입 세력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구나.

"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지요. 그들에게는 천국이나 기존에 살았던 세상이나 문화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요. 만약 'TV'라는 걸 본다면 까무러칠 양반들이니... "
" 그렇겠군요. "
" 그래서 저들은 타협안을 내놓았습니다. 천국 전체를 바꾸는 게 아니라, 일부씩 공간을 나눠서 변화시키기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일부가 변하면 결국 전체가 물들어버린다고... "
" 흠... "

노인은 천사의 표정을 살피며, 그는 변화를 바라는 편이라는 걸 파악했다. 하지만 노인의 눈에는 누구 한쪽이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천국이 원래 그랬다면, 그냥 두는 게 답이 아니겠느냔 생각이었다.
하지만 천사의 말을 들어보면, 또 상황은 달랐다.

" 사실, 신께서도 일부 천국의 현대화를 허락하셨었습니다. 타당한 의견이라면서요. 그런데 현대화 시행 직전에, 변화를 바라지 않는 이들이 시위에 나서며 반대하는 바람에... 현재까지도 현대화가 미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현대화 찬성 시위와 반대 시위가 팽팽히 맞서며 경쟁중인 실정이지요. "
" 아아... "

지상과 너무나 익숙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노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죽음 뒤에는 편안한 안식을 기대했는데, 결국 다 사람 사는 곳이라니..
천사는 문을 닫고 다시 노인을 통로로 안내했다. 

" 사실, 현재는 변화를 바라지 않는 시위대의 세력이 조금 더 큽니다. 그래서 변화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데... 하지만, 살기 좋은 천국을 만들기 위해선 꼭 현대화가 필요합니다. 새로 들어올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
" ... "

노인은 굳이 의견을 섞지 않고, 무표정하게 걸었다. 자신은 엮이고 싶지 않은 복잡한 문제였다.
천사는 다음 문을 열었다. 

" 여긴? "
" 두석규 님이 앞으로 지내게 되실 '집'입니다. "
" 으음... "

노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건 집이라기보다는 '굴'에 가깝지 않은가? 
확실히 천사의 말대로, 현재의 천국은 너무 자연 친화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다.

" 나쁘지 않군요. 사색하기에 좋아 보입니다. "
" ... "

노인은 집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긴장된 일상에 시달려왔던 그는, 죽음 뒤의 평온이 간절했다.
특별히 안내하는 천사의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선을 확실히 그었다.

"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

톤이 낮아진 천사는 문을 닫고 다음으로 안내했다.
노인은 최대한 무표정을 가장했다. 
한데 다음 문이 열렸을 때, 노인의 얼굴이 환하게 급반전했다.

" 여보...?! "
" 당신! 오셨군요! "

10년 전에 먼저 간 노인의 아내가 방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손을 맞잡는 두 사람. 서로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게다가,

" 석규야! "
" 아, 아버지! 어머니!! "

돌아가신 부모님들도 그를 환하게 맞이해주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 너 인마! 나 기억 안 나? 자식이 혼자 늙어가지고! "
" 나, 남우? 김남우냐?? "

[ 멍! 멍멍!! ]
" 흰둥아?! "

어릴 적 전쟁에서 잃은 친구부터, 가슴 팍으로 뛰어들어오는 애완견까지! 그리워하던 모든 이들이 방에 모여서 그를 환영해주고 있었다.
노인은 밀려오는 반가움과 감동에 눈물을 흘리며 웃음 지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이들과 회포를 푸는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그 한참 중에 천사가 끼어들었다.

" 보고 싶으실 것 같아 제가 일부러 모셨습니다. "

노인이 천사를 돌아보자, 가까운 부모님들이 얼른 말했다.

" 그래! 천사님께서 네가 올 것 같다면서 우리를 데려와 주셨다! "
" 석규 네가 큰일을 한다며? 자랑스러운 우리 아들! "
" 아아... "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은, 천사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나 마나 이들은 모두 현대화에 찬성하는 중일 테고, 자신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연출이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기꺼웠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꿈에 그리는 순간이었다.

다시 한참의 이야기를 나눈 뒤에, 천사가 노인을 이끌었다.

" 흠흠! 그럼, 얘기는 나중에 더 나누시고, 일단 좀...  "
" 그래그래! 석규야! 천사님 이야기 잘 듣고 오너라! "
" 예~예 어머니! "

노인은 그리운 이들에게 환하게 인사하며 방을 나섰다. 다시 복도를 걸으면서도 얼굴에서 감격이 사라지지 않았다.
천사는 빙긋 웃으며,

" 앞으로도 시간은 많습니다. 저분들의 소재는 제가 다 파악하고 있으니까요. "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노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지금, 귀찮음을 무릅쓸 각오까지도 하고 있었다. 반가운 이들을 만나게 해준 천사에게 호감이 올라 있었고, 지인들도 지금의 천국을 불편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천사가 자신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든 웬만하면 들어줄 생각이었다. 시위대 참여를 늘리기 위한 얼굴마담 역할을 하는 것이든, 그들을 지휘하는 지도자 역할이든, 뭐든 간에.

" 이제 거의 다 왔군요. "

천사는 가까워진 통로의 끝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인이 천사를 따라 걷는 사이 어느새 통로의 끝에 도착한 것이었다.
통로의 끝에는 문도 없이, 너머로 새하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앞에 도착한 천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 두석규 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

노인은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는 겁니까? "

천사는 손으로 통로 너머를 가리키며, 노인의 예상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 저곳은 지상으로 가는 길입니다. "
" ?? "
" 저곳으로 가시면, 다시 살아나실 수 있으십니다. "
" 그게 무슨?? "
" 저희가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

천사는 노인에게 부탁할 내용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은 노인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 그래서 저를 기다렸던 것입니까? "
" 예. 두석규 님의 도움이 있어야지만, 천국의 현대화가 가능해질 겁니다. "
" 허! "

헛웃음을 터트린 노인은, 차가운 눈으로 물었다.

" 제가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

그 질문에 천사는 한 마디로 대답했다.

" 천국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 
" ... "

고민하던 노인은, 그리운 이들을 떠올리며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 당신이 천사가 맞습니까? "
" ... "

천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석규도 굳이 대답을 듣지 않고, 통로 밖으로 몸을 던졌다.

.
.
.
.
.


자리를 털고 일어난 국가 원수 두석규는, 곧바로 군 통제실로 향했다.
그는 곧바로 명령했다.

" 적국의 수도로 핵폭탄을 발사하라! 최대한 사람이 많이 모인 그곳으로...! 지금 천국에는 현대인들이 많이 필요하다! "
댓글
  • 복날은간다 2017/04/23 23:10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를 시도하다가, 쓰는 저도 헷갈려서 손놓고...;
    쉬는 기분으로 단순한 이야기 한 번 올려봅니다~ 흐하하하;
    항상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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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닉넴이음성 2017/04/23 23:22

    참신하네요 ㅋ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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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코중인오덕 2017/04/23 23:35

    두석규씨는 과연 다시 천국으로 갈수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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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널어쩌면좋니 2017/04/23 23:45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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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타는싸릿골 2017/04/24 00:23

    오 토해쪙!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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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까 2017/04/24 00:26

    세상에 이번 편은 정말 한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네요;; 매번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ㅠㅠ 하루의 낙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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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aucaria 2017/04/24 00:33

    신인의 등장인가요 ㅋㅋ 앞으로 두석규씨는 또 얼마나 고통받을지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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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토끼 2017/04/24 00:58

    우와! 결말너무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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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붙여놔 2017/04/24 01:03

    개인적으로는 복날님 글중에서도 특히 충격적일 정도로 신선하네요
    그나저나 오래 살수록 천국 가면 늙어진다니 평생 동안동안 젊음젊음 거리다 저리 죽으면 엄청 쇼크일 듯 해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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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생기면다오빠 2017/04/24 01:12

    헉 항상 생각지도 못한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서 충격을 금치못하겠어요. ㄷㄷ 항상 잘 읽고있습니다
    신선한 충격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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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ABE 2017/04/24 05:09

    한석규 + 한석규 = 두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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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rmione 2017/04/24 06:43

    잘 읽었습니다...!
    이번 글이야말로 머리를 한 대 맞은듯한 충격이 느껴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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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닉넴진짜대충 2017/04/24 18:07

    예전에 읽었던 만화책인 간츠가 떠오르네요 ㅎㅎ 에피소드중에 최대한 많은사람들을 간츠로 보내기위해 살육을 하던 주인공이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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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긴ㅈ으디 2017/04/27 15:37

    마지막에 소름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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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햄슽어 2017/04/28 02:50

    김남우는 또..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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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지개솔로처 2017/04/28 03:06

    두석규씨가 천국에 갔을때 그리운 사람들과 애완견하고까지 재회하는 장면에 꽂혀버렸어요 ㅠㅠ 죽음뒤에 모두와 함께 만나서 살수있다는게 확실히 보장된다면, 지금 겪고있는 모든 슬픈일들을 좌절하지 않고 넘길수도 있을거 같아요... (이야기 주제와 맞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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