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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조선이 털린 이유


5만와대서 20만 예측 못했다고요?
아닙니다. 20만 아니 100만이 와도 막을 병력이 있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해군 전력 규모는 병력 수만 1만 4천에 달했고
거기엔 아무리 적게 잡아도 판옥선 수십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이 신나게 증명했듯이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상대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그 20만을 들고 오던 건 비무장 수송선.
이순신은 워낙에 먼치킨이이긴 하지만 그냥 거기 있던 장수가 평범함 급만 됬어도 
가서 대포로 쏴재끼면 15만은 부산 앞바다에 수장됫을 껍니다.
조선 조정도 당연히 이정도면 일본군이 얼마가 오든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경상 우수사의 장군은 바로 그 유명한 원균.
20만을 달고 오는 수송선 편대 규모에 겁먹은 원균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간 다음, 그 판옥선과 협선 포착선 80척을 모조리 자침시켜 버립니다.
그 다음 군영에 불을 지른 다음 혼자 도망가버립니다.
(이게 어느정도 규모냐면 한산도 대첩시 이순신이 보유한 병력이 96척이었습니다. 이순신 최전성기 병력과 맞먹는 규모죠.경상우수영은 일본 왜구의 침입이 많던 곳이고 일본이 쳐들어온다면 경상우수영이 제 1 방어선이기 때문에 최우선 병력 및 함선 보급 대상이었습니다.)

그냥 경상 우수사에 이순신이, 전라도에 원균이 있어서 바꼈다면
임진왜란은 그냥 임진년에 일어난 작은 소요 정도로 끝났을 껍니다
뛰어난 정찰 능력으로 왜선 수십척을 파악한 이순신은
일본군이 육지에 상륙하기도 전에 다 가라않아 버리거나 도망갔을테니까요.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군의 배를 보고 겁에질려 3척을 남기고 80여척의 배를 자침시킨후 군대를 해산하였다. 그리고 자신또한 도망가려고 하자 부하 이영남이 말리며 "군인의 임무는 이기든 지든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키는데에 있습니다. 당장에 적의 수에 당황하여 나머지 부대마저 해산하여 도망친다면 상감께서는 필히 이에대해 문책하실께 분명합니다. 청하건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게 최선책 일듯합니다." (징비록上-류성룡)"




댓글
  • 콜로수스 2017/04/05 21:40

    역사 게시판에 가정은 참 싫어 하는데,
    이 글은 맞는 글이라고 느껴져서 반박을 못하겟음.
    그리고.. 난 지금도 원균을 싫어함. 아마도 원균의 환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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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ndagun 2017/04/05 22:15

    임진왜란 선무 일등공신 3명이 있죠. 이순신, 권율, 그리고 원균이죠.ㅎㅎ
    그리고 카더라에 의하면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일등공신으로 명하기 싫었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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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츠카 2017/04/05 23:20

    원균의 병크로 큰 피해를 줄 기회를 날려먹은건 맞죠. 다만 당시는 현대처럼 전투함과 수송함의 전투력 차이가 극단적으로 벌어지진 않아(대포의 성능이 그렇게 뛰어나진 않습니다.) 전멸까진 아니었을겁니다.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왜군이 겁먹고 건너오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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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monade 2017/04/06 00:10

    어찌되었던 상륙은 막지 못하지요, 적을 발견하고 요격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부족한데다 적의 수는 너무나 많고, 일개 수사가 무단으로 병력을 움직일수는 없으니 상부에 요청을 넣어야 하는데 요원하게도 한번에 통과된다 할지라도 오고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적의 상륙을 막을수 있을리가 없지요,
    물론 조선의 수군 교리나 당시의 기술력상 화약 병기의 일제 투사로 해전이 끝나지도 않고, 그럴수도 없는것과는 별개로 애시당초 중국도 그러하고 조선도 그러하지만 대 왜구 전술은 육지에서의 결전입니다, 앞서 언급한 저러한 문제 덕분에 해상에서 적을 발견하고 요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배비 역시 육지에서의 결전을 주 전장으로 잡고 진행된바 있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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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eterbug 2017/04/06 00:37

    하..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당시 조선조정에서는 수군을 믿은게 아니라 육군을 믿었습니다. 전시에 한 전투에 4~5만은 정예군으로 거뜬이 보낼수 있다고 착각했구요.
    원균도 자침을시키고 지상군합류가 가당타고 생각할정도니까요
    조정에서도 서인계 동인계 둘다 전쟁날걸알았습니다.
    단지 왜놈들이 쳐들어와야 3만4만정도로 생각한거고 1차만 12만이 쳐들어올지도 몰랐던거죠 한마디로 대외능력무능
    거기에 이미 지방군제는 방군수포제때문에 온갖 비리와 군인이 아닌군인들로 넘쳐났고 싸우기 힘든수준이었죠 오죽했으면 신립이 배수진쳤을까요
    자국 병력의 파악조차 제대로 안되어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제승방략체계가 실전에서 제대로 병크터트리면서 경상도 충청도 각개로 한방에 뚫리고 한양까지 보름만에 올라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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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뮤다 2017/04/06 10:31

    지극히 결과론적인 이야기입니다. 현실은 게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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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지에사는어부 2017/04/06 11:36

    조선수군도 함포전으로 전략을 짠것은 이순신장군이지 원래부터 함포전을 주 전략으로 한것은 아닌듯 합니다. 주로 해상 육박전을 구사한 전쟁을 기본으로 하지 않았나 합니다. 물론 이 이유로 이순신장군이 소수로 다수를 깨는것이 가능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경상좌수영이나 우수영에서 초반 변변한 전투를 못한 이유도 해상육박전을 가정한 전투에 쪽수로 밀리니 전투 없이 패퇴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전에 경상좌수영과 부산진성(자성대)를 탐방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경상도지역의 경사우도병영성(진주성)과 경상좌도병영성(울산), 경상감영을 두루 탐방했죠. 임란초기 경상좌수영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의 대선단에 교전없이 배를 자침시키고 육상에서 대응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1일차에 별다른 교전없이 자성대 인근에 대기하던 왜군은 2일차 바로 부산진성을 공격합니다. 하루를 못버티고 점령당하게 되죠.
    자성대 인근의 모성(본래 부산진성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흔적이 없음)도 그 규모가 그리 크지 못했던듯 싶습니다. 자성대의 규모를 보건데 수천명의 병력이 주둔할만 하지 못합니다. 즉 대규모 정규전을 할만한 준비가 별로 없었던듯 싶어요.
    조선시대 읍성이나 산성들을 다녀보면 규모가 의외로 작습니다. 백제시대의 왕성들(풍납토성, 몽촌토성, 공산성, 부여나성)과 비교해도 작습니다. 그나마 규모가 큰것들은 서울에 있는 한양도성과 남한산성 임란이후 건설된 화성 정도입니다.
    노략질을 하기위해 소수병력(많이야 수천)의 침략에 대비한 규모로 보면 맞다고 생각될 정도의 크기들이었습니다. 물론 주둔군의 수가 적은것도 그 이유였을것입니다. 창원에 있던 경상우병영은 임란초기 녹았기때문에 그 흔적이 없고, 후에 들어선 진주성내의 우병영이나 울산의 좌병영을 가보아도 그 규모가 둘레 3~4km정도로 읍성의 기능과 겸했다 해도 규모가 적었습니다.
    3~4만이 왔다해도 초반의 패퇴는 마찬가지로 생각됩니다. 물론 영남내에서 끝이 났겠지만 경상남도의 유린은 막지 못했을거라 생각됩니다.
    한반도의 서북지역은 가보질 못해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남한내의 조선시대 군사시설들은 다녀보면 규모면에서 대규모 전쟁을 하기위해 존재했다기 보다는 지역행정에 더 알맞게 만들어졌습니다. 인구가 적은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중시되지 못한 이유 같아요.
    통영에 있는 경상우수영의 경우 임란이후 삼도수군통제영이 옮겨가게 되면서 새로이 만들어져 규모가 많이 커졌는데도 둘레길이가 다른 수영성에 비해 큰것이지 대규모 정규전을 할 만큼 큰것이 아니었습니다.
    첨언하여 임진왜란당시 일본군이 만들어놓은 왜성들을 가보면 그네들의 축성술은 딱 전쟁하기 좋은 건물의 배치와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울산왜성과 자성대 두곳만 탐방해 보았는데, 수천의 군사로는 공략이 힘들듯 했습니다. 실제로도 조선군과 명군은 공성전으로 깨버린 경우보다 포위하여 고사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는데요. 그에비해 우리나라 성들은 공략부위가 많았습니다. 그저 행정구역을 표시하는 정도로 돌벽을 둘러 놓았다는 느낌이 많았습니다. 현이나 군의 작은 읍성은 차치하고라도 중요도시인 부나 목(감영이나 병영이 자리잡은 도시)을 가보면 그 규모가 현재의 시각으로 봤을때 위태롭습니다. 당시엔 좀 나았으려나 모르지만 전국시대를 거친 왜의 입장에선 참 허술하게 보였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훈련부족과 정비부족이 더해져 초반 속수무책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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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법산 2017/04/06 13:58

    이순신이니까 다해주실 거야...
    현실은 게임이 아닙니다..
    이순신의 전술을 보면 철저히 첩보를 통해 이길 수 있는 장소와 상황을 골라 싸웠습니다.
    유일하게 예외인 게 명량인데 그것도 갑작스러운 전투가 아닌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한 뒤에 적을 불러들여 싸운 것에 가깝죠.
    물론 이순신이 경상우수사에 있었다면 상황이 조금은 더 나았을 수는 있었지만 상륙 자체를 막는 건 불가능해요.
    이순신이 해전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건 적이 대적을 해줬기 때문인데, 초창기 왜적의 목표는 조선군의 격퇴가 아닌 조선 상륙이었습니다.
    상륙을 목표로 하는 적을 제대로 준비도 안 된 배 수십척으로 격파하는 건 아무리 이순신이어도 가능한 부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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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석관 2017/04/06 15:41

    이순신이 경상좌수사였다면,
    전라좌수영처럼  함선과 병을 훈련시키면서 준비를 했을거라고 가정하는게 맞겠죠.
    그리고 왜군의 함선이  수효가 많지만  이순신은  적절한 전략으로  전력을 보존하면서  유인타격을 반복하다가
    전라좌우수영과  연결하면서   판옥선 전력을 모두 동원하여 대응했다면
    일본해군으로서는 초기부터 절망적 상황이 됐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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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림클럽 2017/04/06 17:39

    짧은 역사적 지식으로 말씀드리자면 아무래도 상륙을 원천봉쇄하지는 못했을것 같고 당시에 군역제도가 문란하여 잘 훈련된 정규군 비율이 적었고 제승방략(?)제도로 중간 방어선 구축이 되어있지 않아 주요 거점 외에는 거의 빈 공터 수준이었다고 하네요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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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T노마드 2017/04/07 09:23

    원균 자침크리가 피해를 키운건 사실이라고 봐야죠.
    병크가 직접적인 살상규모가 없었을수도 있었다 한들,
    후에 전쟁에서 큰 피해로 이어졌잖아요.
    임진왜란은 어찌됬든 피해자로써 수치스런 역사로 남겨졌고.
    쳐들어오기전에 기선제압이라는 것도 상당히
    무시못하는 건데 그것마저도 못하게 무너뜨리고 아군 사기까지 꺾어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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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려가셨죠 2017/04/07 17:14


    그리고 400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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