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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화 [벌새]를 보고.. 그 때의 은희, 그 때의 나, 그 때의 우리들...(스포 포함)
'김보라' 감독의 장편데뷔작이자 독립영화인
[벌새 (House of Hummingbird)]를
감독과 이동진 평론가의 대담 형식 라이브톡으로 보았습니다.
베를린 영화제를 포함한
각종 영화제 25관왕의 실적을 올린데다
국내외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화제의 중심에 선
이 영화의 공식 개봉을 기다릴 만한 인내심이
제겐 없었네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성수대교가 붕괴된
1994년의 대치동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삼아
은희(박지후)라는 15세 중2 소녀의
아픔과 상실과 치유와 성장을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고 섬세한 화법으로 그려낸
이 경이로운 영화는
가슴에 먹물이 번지는 듯한 감동으로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 모두를 위로합니다.
이게 무려 데뷔작이라니 믿어지지가 않더군요.
영화를 보자마자 리뷰를 쓰는 일은
한편으로 쉽고 한편으로 어렵습니다.
기억의 상실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선 좋고
영화의 감흥과 여운을
온전히 즐길 수 없다는 점에선 나쁜데,
그 장단점을 떠나
무조건 당장 쓰고 싶다는 욕구가 저를 움직이네요.
김보라 감독의 육성까지 옮겨야 하겠기에
글이 매우 길어질 것 같습니다.
휴대폰 자판 위 손이 떨리네요.
일년에 두세 번만 찾아오는 벅찬 떨림입니다.
영화팬들이라면 누구나 스스로에게
인생의 3대 영화를 자문자답한 적이 있을 겁니다.
저에겐,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마스터](2012),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2018)가 그것들입니다.
혹시 공통점을 눈치채셨는지...
시대의 공기 속 한 인간의 역사를 그린 영화들이죠.
갑자기 이 영화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벌새] 속에도 시대의 공기가 담기기 때문입니다.
은희라는 여학생을 둘러싼 관계에서 시작된,
소소하고 작아보이던 영화는
시대의 아픔을 바라보고 느끼게 하는 이야기로 점점 더 커지다가
끝내 성별과 나이를 초월하고 25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의 우리 모두를 위무하는 보편성을 획득하죠.
이 영화는 그 무서운 힘을 가집니다.
오프닝부터 압도적이죠.
대치동의 낡은 복도식 아파트에서
층수를 오인해 다른 집 문을 두드리다
응답이 없는 집을 향해 악을 쓰는 은희.
자신의 오인을 깨닫고 한 층을 더 올라가면
엄마(이승연)는 무심히 문을 열어주고
은희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집으로 들어섭니다.
카메라가 줌아웃하며
성냥갑과 다를 게 없는 우리들의 주거공간을 건조하게 비춥니다.
후술할 엔딩이 한 번에 결정된 것임에 반해
여러 시도 끝에 선택된 오프닝이라고 감독은 말하더군요.
버려짐에 대한 막연한 근원적 불안,
엄마와의 설명할 수 없는 거리감...
그 집엔 떡집을 운영하는,
아들을 편애하며 춤바람까지 난 전형적 가부장인 아빠(정인기),
일탈을 일삼는 고등학생 언니(박수연),
공부는 잘하지만 은희에게 폭력을 서슴지 않는
한 살 터울의 오빠(손상연)가 있습니다.
아빠에게 대들던 은희의 뺨을 갈기는 오빠.
그 순간 아빠는 자신이 있는 데서 감히
동생을 때린 점에 대해 나무랄 뿐입니다.
가장 흥미로운 건 엄마인데
영화에서 흔히 그려지던 모성과 거리가 있습니다.
일터에선 남편을 돕고 집에선 삼남매를 건사하는 그녀는
피로와 우울과 체념에 찌들어있고
엄마의 피로, 우울, 체념은
고스란히 은희에게 전염돼
은희의 자존감을 낮추고 또 낮춥니다.
엄마는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지 않죠.
삶의 탈출구를 잃은 채 가족들 모르게
내면의 소용돌이에 엄마는 홀로 맞섭니다.
학교도 다를 건 없습니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삶을 살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선생의 교육이 오프닝을 이어받죠.
날라리를 색출하기 위해
종이에 날라리 두 명을 적어내라는 명령은
교육의 무자비한 야만성을 드러내는데,
동급생 지완(정윤서)과 사귀는 은희는
당당히(?) 그 날라리에 선정되죠.
거의 유일한 친구 지숙(박서윤)은
결정적 순간에 은희를 배신하고
성정체성으로 혼란을 겪는 후배 유리(설혜인)는
은희를 헷갈리게 만듭니다.
지완도 유리도 다른 여학생에게 눈을 돌리죠.
지완의 엄마에게 은희는 방앗간집 딸일 뿐이고
유리에게는 한 학기 열정의 상대일 뿐입니다.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은희를 중심으로 방사선의 형태로 전개되는
관계와 관계는 하나하나 균열을 일으키며
붕괴 직전의 위기에 놓이지만,
절망을 체득한 은희는
수동적 저항이나 침묵의 분노에만 머물죠.
그랬던 은희를 영지(김새벽)가 구원합니다.
서울대를 휴학 중이고 운동권에 몸을 담고 있으며
한문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영지.
가르치기 전에 먼저 관찰하고
묻기 전에 먼저 들으며
즉답보다는 스스로의 깨우침을 유도하는 영지.
첫 수업은 명심보감의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相識滿天下 知心能機人).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상체를 숙여 학생들에게 인사하고
존대말로 수업을 하며
우롱차를 끓여 은희를 위로하는 영지.
그녀에게 은희는 모든 마음을 내어 줍니다.
은희에게 영지라는 존재는 선생 이외에도
엄마이자 언니이자 친구의 의미였겠죠.
영지 역시 은희를 통해 자신의 삶을 봅니다.
언젠가부터 귀 밑에 느껴지던 조그만 혹이
방치해서는 안되는 것임이 밝혀지자
결국 은희는 수술을 받고 입원을 합니다.
아빠가 알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고
같은 병실의 환우들이 관심을 표하며
영지 선생님이 예고없이 찾아오는 병원이
은희에겐 차라리 집보다 더 낫습니다.
병원에서 육체의 병 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 조금은 치유된 줄 느꼈지만
영지가 말도 없이 사라졌음을 알고
은희는 다시 좌절합니다.
그리고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무너집니다.
은희의 모든 관계가 붕괴됐듯...
압축고도성장 속에 애써 외면했던 성장의 그늘이
그 민낯과 치부를 드러내고
누군가는 가족을, 친구를, 선후배를,
사랑하는 이들을 잃습니다.
공부를 못했기에 성수대교를 건너
강북의 학교로 등하교를 해야 하는 언니를
은희가 미친 듯이 찾습니다.
다행히 무사한 언니와 함께 하는 식사의 자리,
오빠는 참았던 눈물을 쏟습니다.
그러나 그 불행은 언니 대신.........
'박지후' 배우...
오디션을 통해 김보라 감독이 직접 뽑았다죠.
대사의 미세한 행간을 읽어내는 현명함,
현장의 분위기와 타인의 기분을 감지하는 센스,
그러나 무엇보다
배역을 맡고 싶은 욕구를
솔직하고 투명하게 전달하는 힘에 끌렸답니다.
천재라는 단어의 인플레이션 때문인지
이 세상엔 천재들이 넘쳐나지만
제가 목격한 건 진짜 천재였습니다.
경이롭고 경이로우며 또 경이롭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곧 영화입니다.
'김새벽' 배우...
대한민국 여배우들 중 그녀보다 더
쓸쓸하고 외롭게 보이는 배우를 알지 못합니다.
무심한 듯 다정하게 차가운 듯 따뜻하게
한 소녀를 구원하는 역할을 완벽히 소화하네요.
'마티아 스턴이샤'가 맡은 음악들이 참 좋더군요.
대중가요들도 세 곡이 절묘하게 쓰입니다.
'사랑은 유리같은 것', '칵테일 사랑', '여러분'.
참고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린 시점은
노래방에서 은희가
'사랑은 유리같은 것'을 부를 때부터인데,
그 이후로는 온 몸에 스며들었습니다.
왜 그리 눈물이 흘렀을까요...
스크린 속의 은희가 과거의 내 자신으로,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서서
끝없는 불안과 외로움으로 아프고 또 아팠던,
우리들 모두의
한 때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었겠죠.
감독의 자전적 경험에서 태동된 이 영화에서
감독이 가장 신경썼던 부분은
나르시시즘과 자기연민을 소거함으로써
이야기의 보편성을 얻는 작업이었다고 합니다.
언니와 언니의 남자친구와 함께
저녁에 찾아간 한강변...
허리가 끊어진 다리 앞에 은희가 섭니다.
그 다리 뒤엔 다음 해 무너진 어느 건물이,
그 다리 아래엔 5년 전 가라앉은 어느 배가
아스라히 겹쳐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눈을 감고 묵념을 하는 은희의 뺨에도
보석같은 눈물이 흐릅니다.
영지 선생님에게 보냈던 편지에서 은희가 물었죠.
내 삶도 언젠가 빛날 수 있냐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함부로 토해내지도 못한 채
속으로 삭이고 또 삭였던 아픔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눈물로 흘러내렸기에
이제 은희는 끊어진 듯 했던 인생의 다리를 건너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몸을 가졌지만
1초에 구십 번씩 날갯짓을 하면서
또 다른 꽃의 꿀을 찾는 벌새처럼...
씩씩하게 감자전을 먹는 은희를
엄마도 믿음 가득한 미소로 지켜봅니다.
물론, 관계들은 여전히 실패할 수 있고
실망과 좌절은 수시로 삶에 침범할 것이며
또 다른 다리가 또 무너질 지도 모르죠.
그래도 이제 은희에겐 영지의 답이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상영관을 많이 잡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성취일 지는 모르겠지만
제겐, 벌새들의 그 힘겹고 수고로운 날갯짓이
너무도 고맙고 가치있게 느껴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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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알아가는 열병을 가장 심하게 앓은 시기를 보낸 소녀의 일기장을 읽어가는 영화라는 말로 저는 정리를 해두었습니다. '일기장'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고 이것만은 고수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각종 기자나 평론가들의 평이나 배급사 쪽에서 정했을 홍보 카피에서 모두 '보편성'을 많이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가장 세찬 동력은 1994년이라는 시간의, 비인간성이 넘쳐 흐르는 대치동이라는 공간의, 그리고 그 곳에서 삶을 보낸 중학생 소녀였을 김보라 감독의 '특수성'일 수밖에 없다고 보였거든요.
아, 음악감독의 이름은 '마티야 스트르니사(Matija Strnisa)'라고 표기하는 모양입니다. 적어도 포털에는 그렇게 등재되어 있네요.
[리플수정]EastWall// 이번에도 Eastwall님과는 생각이 다르네요. 물론, 영화 속 은희의 경험을 추동한 건 김보라라는 한 감독의 특수한 경험이겠죠. 그러나 은희의 그 일기같은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험을 거의 모든 우리들은 공유하기에 '보편성'이란 단어를 비평과 홍보문구의 키워드로 선택한 건 좋은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강북에서 학교를 다녔던 남학생이었던 전 왜 은희가 옛날의 저처럼 느껴졌는지... 음악감독 이름은 네이버 참조했는데 오타 수정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요즘 일에 바빠서 영화를 자주 못챙겨 봤는데 이 영화는 꼭봐야겠네요.
C-kay// 네 바쁘시더라도 꼭 보셨음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별 네 개 반 주었답니다. 넘넘넘넘넘 좋더군요.
'세상을 알아가는 열병을 가장 심하게 앓은 시기를 보낸 소녀의 일기장을 읽어가는 영화라는 말로 저는 정리를 해두었습니다'
라는 평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 사람의 일기장은 타인이 보아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행간과 여백이 존재하는 법이지요. 이 영화를 보는 제 마음도 그랬습니다. 쉽게 알아챌 수 없는 여백이 많은 영화였기에 '보편성' 보단 '특수성'이란 단어가 더 어울리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부족한 탓이겠지만, 개인의 일기가 시대의 기록으로 질소 포장된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라이브톡...을 별로 안좋아하는데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고 오랜만에 봤습니다.
영화도 톡도 좋았어요.
글 잘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추 후정독
혹시 나중에 시간 되시면 영화 우리집 후기도 부탁드립니다
차우찬찬찬// 쉽게 알아챌 수 없는 행간과 여백...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는데요... 댓글 감사드립니다
flythew// 계절적으로도 참 좋은 영화였네요. 마지막 더위, 무탈하고 보람되게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김일균세법// 늦어도 일주일 안에 [우리집] 리뷰 약속드리겠습니다.
혁명전야님이 이렇게 칭찬하시는 영화라니
꼭 볼게요~
추천 감사합니다.
調律// 자신있게 추천드립니다. 영화 즐감하시고 리뷰 다시 읽어주십시오.
그 당시 회사로 출근하는 코스가 영동대교와 성수대교중 하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거래처로 바로 갔다가 뉴스를 보고 제가 거래처로 간것을 몰랐던 회사사람들이 제게 계속 삐삐를 쳐서 당황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_-;;;
좋은 글과 영화소개 늘 감사드립니다.
암너바디// 아이고 그런 사연이 있으셨네요... 이런저런 국가적 사건사고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개인들의 삶, 그 속에서의 절망과 희망...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답니다. 의미있게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스포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