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라는 작물에 대해서 알 사람들은 알겠지만 원애 이 벼라는 작물이 열대나 아열대 기후에 가장 최적화 된 작물이라는 건 잘 알 거임.
괜히 베트남에서 이모작, 삼모작으로 벼농사를 짓는 게 아니니까. 실제로 한반도의 기후는 벼농사에 최적화 된 기후는 아니었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릿고개'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이, 벼농사를 1년에 1모작 밖에 할 수 없었거든. 그런데
그 1년에 한 번 밖에 못 짓는 벼농사가 흉년이 들어서 실패하면 그대로 굶을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환곡 제도가 나온 거임.
간도에 넘어가서 이주하고 정착하기 시작한 조선인들은 바로 이 벼농사 짓기에 도전했는데 그곳에 이미 살고있던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을
비웃었는데, 간도 지역은 실제로 가을만 되도 굉장히 추워지고 여름이 짧기 때문에 벼농사를 지어봤자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
실제로 몇년간 조선인들이 간도 지역에서 벼농사를 번번히 실패하는 등, 여러번의 시행 착오를 겪었는데 그 특유의 악바리 같은 근성으로
어떻게든 벼농사를 성공시키니까 이를 쭉 지켜봐오던 그곳의 중국인들은 "과연 조선인들은 독종들이다."라고 혀를 내둘렀다고 함.
밀이나 보리가 잘 자라는 기후일 수 밖에 없는 곳에서 벼농사를 성공 시켰으니. 사진에 나오는 지역이 바로 그 간도 지역임.
말 그대로 조선인들이 벼 재배의 북방 한계선을 더 끌어올린 것이나 마찬가지니 대단한 거지.
그리고 그 간도 조선인들은 조선족으로 중국과 하나가 되었지
아쉽게도 현재 최대의 농업지대가 되서 짱.깨좋은일만 되어버림
탄수화물 중독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보고있나요 성모형
근성은 그리 멀리있지 않았습니다
저거 다 개간해서 똥땅을 쓸만한 땅으로 만든거임 미쳤음
그리고 그 간도 조선인들은 조선족으로 중국과 하나가 되었지
간도에서 독립운동 하다가 해방때 내려온 사람들도 많어..
근데 이제 그 조선족들 생산가능인구 태반이 다시 한국으로 와서 일하는 판국이라..
아... 여행가보면 분위기가 좀 달라.
초반에 온 사람들은 연변쪽. 거긴 사람들 성향이 한국과 비슷한데 스스로 한국동포라고 생각해. 한국역사와 한국어를 공부 꼭 함. 혼인도 한국사람끼리 많이하고. 가면 간판도 한국말. 그들이 성공해서 왔음.
그러자 한국어도 잘 못하고, 역사도 관심없없던 뿅뿅들이 돈에 환장해서, 나도 한국피가! 난 한국말 좀 하는 뿅뿅니 한국인! 해서 들어온게 조선족 이야. 이들은 연변동포랑은 달라.
우리나라 초기에 연변에서 왔어요~ 이게 많았었는데, 돈벌고 성공해서 가고, 제2진이 조선족 이라는 중국인으로 와서는 깽판많이 침. 난 중국인! 그러는 애들
용정이랑 일송정 해란강 가면 간도의 동포들을 만나고, 대림역에 가면 조선족 뿅뿅들을 만난다.
이렇게 하나 알아갑니당
추천받앙
저거 다 개간해서 똥땅을 쓸만한 땅으로 만든거임 미쳤음
보고있나요 성모형
근성은 그리 멀리있지 않았습니다
탄수화물 중독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밀도 탄수화물인데
같은 탄수화물이긴 한데, 밀은 보관을 하고 가공을 하고 하는 것이 쌀 보다 더 노동력이 필요함. 그에 비해서 쌀은 밀에 비해서 더 영양가가 있고 맛이 좋음. 그리고 즉석에서 가공하기가 쉬움.
단, 쌀이 밀에 비해서 키우기 쉽다는 것은 결코 아니고, 수확량도 밀이 더 많았음. 그럼에도 밀에 비해서 쌀이 훨씬 더 맛 좋았기에 쌀을 제배하는 것을 멈추지 않음. 당시의 밀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고, 쌀은 귀했지만, 밥을 짓기만해도 먹을만 했음.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쌀이 더 많을 걸? 문제는 노동력도 더 많이 들어가서 그렇지.
아시아 단위면적당 인구수가 많은 이유라고 들었어
아님. 그건 개량이 된 후고. 실제로는 밀이 대량으로 제배하기 쉬웠고. 쌀은 제배하는데 엄청나게 물이 들고 영분을 많이 빨아먹기 때문에 재배를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음.(시대적인 배경을 생각해 보셈.) 재배법이 어느정도 정착이 된 다음에야 쌀 생산율이 늘어남.
'단위면적당'
네...알못이라 죄송합니다
안깝칠께요
밀은 결정적으로 같은 땅에 계속 못지어서 그런거 아닌가?
쌀은 온도와 물만 있으면 같은 땅에 몇천년도 계속 짓지만
밀은 이년 짓고 일년 쉬고 해야되자나
단위면적당? 그 당시 배경은 생각을 해야지. 밀은 손쉽게 대량재배가 되고, 벼는 단위면적당 더 많은 쌀을 낸다고해도, 소량으로 밖에 재배를 못했음.
맞음. 그런 것도 분명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분명 생각 됨.
ㅇㅇ
동아시아 몬순대라고 하는 여름에 비가 많이 오는 기후덕에 쌀농사가 발달할수 있어서 그런거
그리고 비가 많이오는건 태평양 인도양과 히말라야 산맥덕분이고
ㄹㅇ 그래봐야 이젠 걍 중국인들
어케 한거야;;; 품종을 개량했나?
일단 심어서 살아남은놈들만 계속 심고 심고하다보면 냉해에강한품종만 살아남는거아닐까?
모종 어릴때 얼어죽는다고 집안에서 키워다 여름되면 옮겨심고 그랬다더라
지금은 비닐하우스에서 키우고 옮기겠네
품종개량도 있고 '건앙' 이라고 해서 밭모를 따뜻한 실내에서 키운 다음에 나중에 기온 올라가면 모내기해서 키워서 수확.
중국인: 여기선 쌀 잘 안자람 밀이나 보리 키워드셈
조선인: ㅈ까 쌀!
중국인: 허 ㅅㅂ 결국 해서 처먹네 독종놈들
아쉽게도 현재 최대의 농업지대가 되서 짱.깨좋은일만 되어버림
ㅡㅡㅡㅡㅡㅡㅡ
이젠 아예 비행기로 농약 뿌리더라고
밥을 먹겠다는 열정이...
저 짓거리를 중앙아시아 가서도 반복해서, 그 똥땅에서도 벼가 자란다.
근데 한반도가 쌀농사에 적합하지않다는건 좀 애매한게 실제 조선 초나 중기때 기준으로 수확량이 인구수 n분의1하면 반찬없어도 쌀만으로도 배터지게먹을 정도였다고함 괜히 한국인들이 옛날부터 푸드파이터 민족으로 불린게아닌듯
뭐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니까. 이모작~삼모작이 가능하다는 건 단순히 산술적으로 계산해봐도 일모작과 비교해서 1년 쌀 생산량이 2~3배라는 건데 당연히 2~3배 생산량이 더 나오는 쪽이 쌀농사에 좀 더 적합하겠지.
이모작 삼모작 했으면 기근없이 인구수 배로 늘어났을듯
쌀 키웠으면 감사해야 하는데
독종이라고 하는 거 보면 중국 애들 심성나오네
옛날엔 저 아래 회수가 쌀농사 밀농사 분계였다고 하니 어마어마한거지
귤이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그 회수임
간도 조선족 = 본토에서 범죄 저지르고 도망간 범죄자들의 후손
당시엔 다양한 사람 많았을텐데
독립운동가도 있어.
맘에 안든다고 비방하는 유언비어퍼뜨리는 수준이
왜놈들하고 비슷하다
딱 혐오웹 표본ㅋㅋ
그리고 강철의 인간백정 때문에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이 방풍림 만들어가며
벼농사 북방한계 신기록을 갱신하지.
홍범도 장군을 필두로 한 조선인들이 소련에 의한 중앙 아시아 강제 이주 때문에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했는데 거기에서도 벼농사를 성공 시켰다잖어.
나 초딩때 본 교과서에서는
저때 중국인들이 자기들은 못하는 논농사를 하는 조선인들을 시기해서
논을 망치려 하다보니 불침번 서는 일도 있었다고 하더라.
그리고 원주민들은 먹을줄 몰랐던 고사리 같은 야채도 먹는법을 알려줘서 도와줬다 하고
왜 보리나 밀을 기르지 않고...
단위면적당 칼로리가 높대도 홈그라운드 이점이 클텐데
예로부터 한국인은 밥심으로 살았거든!
논 농사는 첫 준비가 힘들지
그 후부터는 노동력이 급감하거든.
국사시간에도 배우잖아. 거의 1/5 수준으로 떨어진다고
가성비가 높아서
스탈린 때문에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고려인들도 그 땅에서 쌀을 키워냈다는데 참 안타깝더라.
보릿고개는 그냥 평소에 쌀이 너무 풍족해서 다른 나라의 4~5배로 먹는 데 익숙해져서 그래요.
국경을 넘어서 온 이방인에게 땅을 내어준 중국인들도 대단한데?
아마 공짜로 준건 아니고 황무지 개간하면
일부를 보상으로 준다는 식이었을걸?
봉금지라 애초에 중국인들은 만주에 정착하는게 불법이었음. 조선인들이 나 외국인인데~? 글구 조청국경도 애매한데 청나라땅이라는 증거 제시점 ㅋㄷㅋㄷ ㅁㄹ~ 시전한거...
그당시는 만주가 꼭 중국땅이라는 의식 자체가 희미했을걸?
땅도 존나 쓸데없는 황무지이기도 했고
국경이 요새 인식처럼 선 개념이 된 건 근대이후 인구수 증가와 국가간 교역 덕분임.
저 시대엔 국경이란 국가간 점이지대로 어디까진 분명히 A국이고 어디서부턴 분명히 B국인데 중간은 뭐라 말하기 애매한 그런 지대였던지라 국경지역 사는 사람에겐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이다라는 국적 아이덴터티가 희박했음.
조선 이전만 해도 한강 이북에서 벼농사 하기는 힘들었는데
세종때 북방개척? 그거 하면서 거기 사람들 자립시킨다고
온갖 고생 다 했다더라.
그땐 남쪽에서도 논농사는 함부로 못하는거였으니
당연 북방에선 밭농사로 해야했고
벼가 얼어죽기 전에 빠르게 심어야 해서
소로 농사지어야 했는데 그 소도 기후적응 하느라 힘들었대.
근성의 쌀농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