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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영화 [로제타]를 보고.. 죽고 싶다는 말보다 더 절망적인 건 살고 싶다는 말 (스포 포함)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형제 감독의
[로제타(Rosetta)]를 다시 보았습니다.
정확히 20년 전인 199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며
국내에서는 얼마 전인 5월 23일,
20년 만에 공식으로 첫 개봉되었죠.
타이틀롤을 맡은 '에밀리 드켄'은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했구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개봉에 맞추어
상영을 결정한 측면을 부정하기 힘든데,
두 영화를 나란히 비교해보는 것도 의미심장할 것 같습니다.
[프로메제](1994), [아들](2002), [더 차일드](2005),
[로나의 침묵](2008), [자전거를 탄 소년](2011),
[내일을 위한 시간](2014), [언노운 걸](2016)...
다르덴 형제의 눈부신 필모그래피입니다.
'켄 로치' 감독과 함께
유럽 자본주의 사회의 그늘진 이면과
사회의 주류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정직한 카메라로 묵묵히 조명해 온,
개인적으로 너무도 존경하는 감독입니다.
[아들], [자전거를 탄 소년]만큼이나 훌륭하네요.
알콜중독자인 엄마와 함께
캠핑촌 안 허름하고 열악한 컨테이너박스에서 사는,
열 여덟 살 소녀 로제타의 소망은
떳떳한 일자리를 갖고 친구를 만들며
엄마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꿈은
쉽게 허락되지 못합니다.
수습기간이 끝나자마자 해고를 당한 로제타가
그 결정을 번복시키기 위하여 악을 쓰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러닝타임 내내 카메라는
핸드헬드 기법으로 그녀를 따라다니며
그녀의 어깨와 등을 포착하죠.
차들이 달리는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하는 모습,
숲으로 들어가면서 신발을 장화로 바꿔 신는 모습은
롱테이크 기법으로 반복적으로 보여지구요.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고,
남들이 버린 옷을 수선해 번 돈으로 연명하고,
항상 바쁜 듯 급한 걸음으로 이동하고,
몸을 팔아 술을 얻으면서도 치료받기를 거부하는
엄마로 인해 억장이 무너지며,
구직의 실패가 일상화된 소녀의 삶...
인물에 초근접한 상태로 흔들리는 화면은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멀미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멀미와도 같은 현기증을 경험하면서
관객들은 머지않아 로제타의 삶에 동행을 하는,
더 나아가 로제타의 고통을 스스로 체험하는,
몰입의 상태로 들어서게 됩니다.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언제나 그랬듯
선악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경계합니다.
인물들에게 함부로 개입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사실주의적인 기법으로
인물들이 직면한 삶의 현실을 정직하게 보여줄 뿐.
이 영화에서 무산계급은 서로가 충돌합니다.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누군가의 일자리를 빼앗아야 하는,
이른바 제로섬게임의 굴레에서 그들은 이전투구합니다.
힘들게 얻은 직장에서
우연히 알게 된 친구 리케(파브리지오 롱기온).
그는 진심을 담아 로제타에게 마음을 열지만
로제타에게 그는 일자리의 경쟁자일 뿐이죠.
이 영화가 위대한 이유는,
현실 고발의 주제에 두 청춘의 러브스토리를
절묘하게 연결시키기 때문입니다.
로제타는 분명, 사랑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갈망은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합니다.
그 갈등은 로제타의 복통으로 표현되죠.
잠재된 여성성은 이렇게 성장통을 앓습니다.
또한 그 갈등은
리케가 물에 빠진 순간 정점에 이릅니다.
살려달라 애원하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리케를
로제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시 방관합니다.
그리곤 끝내 리케의 비리를 사장에게 밀고함으로써
리케의 일자리를 차지합니다.
자신을 집요하게 쫓는 리케를 애써 외면하지만,
리케 대신 푸드트럭에서 와플을 파는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번집니다.
가슴 깊은 곳에 번지는 더 깊은 죄책감과 함께...
"네 이름은 로제타. 내 이름은 로제타.
넌 일자리가 생겼어. 난 일자리가 생겼어.
넌 친구도 생겼어. 난 친구도 생겼어.
넌 평범한 삶을 살 거야. 난 평범한 삶을 살 거야.
넌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거야.
난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거야."
리케의 집에서 모처럼 편안한 잠자리에 누워,
로제타가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외우던 문구는
씻을 수 없는 죄책감과 함께 효력을 상실합니다.
영화의 엔딩...
가출한 후 돌아온 엄마를 침대에 눕히고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일을 그만두겠다고 통보한 후,
최후의 만찬으로 달걀 하나를 삶아먹은 로제타는
가스를 틀어놓은 채 죽음에 임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스스로 내리는 형벌인 듯.
불행처럼, 다행처럼 가스는 바닥이 나고
관리인에게 돈을 지불한 로제타는
무거운 가스통을 힘겹게 운반합니다.
때마침, 기적처럼, 구원처럼 등장하는 리케.
로제타의 두 눈에서 참회처럼 눈물이 쏟아집니다.
바닥에 쓰러져 울고있는 그녀를
리케가 조심스레 일으켜 세웁니다...
사랑과 우정과 연대를 향한 간절한 손으로...
영화 [기생충] 리뷰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영화로써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것은
감독의 오판이자 오만일 수 있습니다.
다만, 위대한 영화는
문제의 본질을 인식하게 하고
그 해법을 찾기 위한 각성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라고.
1998년 당시 벨기에의 청년실업률은 54%였답니다.
이 영화가 상영된 후 벨기에에서는
'로제타플랜'의 움직임이 시작되었죠.
그리고 마침내 '로제타법'이 제정됩니다.
50인 이상의 사업장에서 청소년고용 3% 준수를 의무화하는.
이 법은 또한 십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각종 안전장치를 확보하고 있답니다.
위대한 영화는 이렇게 세상을 각성시킵니다.
위대한 관객은 이렇게 영화의 외침에 응답합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지 20년이 흘렀습니다.
이 곳은 바다 건너 대한민국이구요.
그러나 시공간을 초월한 이 영화는
지금의 우리 사회를 각성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이동은' 감독의 수작 [당신의 부탁]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죽고 싶다는 말보다 더 절망적인 건 살고 싶다는 말"...
밀가루 포대보다, 가스통보다 더 무거운
삶의 무게를 어깨와 등에 짊어진 채
진흙탕으로 빠져드는 발을 장화로 이겨내며
살고 싶다고 외치는, 그저 평범함을 원하는,
우리의 로제타들, 우리의 리케들...
이제 우리가 쓰러져 울고있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 때입니다...
연대의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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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전야 | 2019/06/04 03:41 | 2893
로제타의 마지막 눈물은 참회가 아니라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비참함이죠..
[리플수정]Llewyn// 글쎄요... 로제타가 과연 진정으로 죽고 싶었을까요? 리뷰의 제목으로 썼듯 그녀는 너무도 살고 싶었을 겁니다. 사람답게 자존감을 지키며. 그랬던 그녀를 자살의 결심으로 이끈 가장 큰 원인은 죄책감이구요. 그런데 때마침 리케가 찾아와 절망으로 오열하는 자신을 용서하듯 일으켜 세운거구요. 참회와 용서, 그것이 연대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임을 미약하게나마 암시하는 감독의 의도라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너무나 잘 읽었습니다. 하.. 그런데 저는 두 번은 못보겠어요. 모르겠네요 시간이 지났으니 지금 보면 좀 무덤덤하게 봏 수 있을런지요^^;
제이슨본// 다르덴 형제 감독은 두 번 이상 관람하는데 용기와 각오가 필요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다르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외면하지 않을 때 세상은 조금 더 좋은 쪽으로 바뀔 것 같습니다. 불법적인 경로로 보았던 영화를 깨끗한 화질로 보니,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은 후 다시 본 이 영화는 과거의 영화보다 훨씬 더 좋았답니다.
혁명전야// 참회의 눈물이라는 건 미안함의 눈물이라는 건데 전혀 그런 감정선이 아니죠. 연출적으로도 그 장면에서 남자가 도착과 동시에 빙빙 돌면서 오토바이 소리를 시끄럽게 울어댑니다. 날은 춥고 가스통은 무겁고 생계 때문에 자기가 버린 친구는 자신을 괴롭히듯 빙빙 돌고있고 로제타가 눈물이 터질 수 밖에 없게 만들어요.
마지막 순간 로제타를 일으켜 주는 장면은 희망이 되는 엔딩이 맞지만 그 감정선이 참회와는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Llewyn// 로제타가 느끼는 죄책감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로 보입니다. 리케 오토바이의 굉음은 그 죄책감을 환기시키는 수단이구요. 엔딩에서의 로제타의 눈물에 참회가 섞여있지 않다면, 리케의 손길에 용서와 이해가 섞여있지 않다면, 엔딩을 희망으로 해석할 근거가 없겠죠.
Llewyn// 게다가 로제타에게 죄책감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친구를 배신하면서까지 힘들게 얻은 일자리를 스스로 그만둘 이유는 없었을 것이구요. 암튼 좋은 의견 댓글로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와~~~스포만 빼고 일단 다 읽었습니다!!
마지막의 로제타법까지 제정되었다니..영화의 힘이란..진짜 위대한거 같아요
99년도에 제작한 영화를 지금 상영했다라는 말씀에 진짜 넘 놀라웠고요
기생충과 비교해서 보면 좋다라는 말씀과..소외된 사람들에 아픔과 고통을 담았다라는 말씀에
혹시 오래된 영화니 네이버n스토어에 있지않을까 해서 검새해보니 다행스럽게도 있더라구요
바로 구매했습니다...
혹시나 그 전에 영화관에서 개봉도 하나 했더니 제가 간간이 이용하는 독립영화관 비슷한 곳에서 하고있더라구요...
혁명전야님께서 추천해 주셔서 넘 깊은 감동으로 본 자전거 탄 소년...
이것만큼이나 깊은 여운에 빠져들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다 감상하고 두근거리는 맘으로 스포 읽어야 될거 같습니다!!!!
99년 제작에 지금 개봉....하..진짜 다시 생각해도 넘 놀라워요...
암튼 매번 좋은 영화 추천...진심으로 감사드려요!!!
ps : 당신의 부탁 몇달전에 봤어요..!!! 이동은 감독의 환절기도 봤고요..^^
환절기도 궁금해진다라는 혁명전야님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나고요..역시 진짜 좋더라구요..
당신의 부탁도 곧 스포까지 읽을려고요...한번 미뤄지면 계속 어떻게 미뤄지는..이 나쁜 습관...^^
임수정 이상하게 변했다 이젠 늙었다 이래도...영화 보니 역시 배우는 배우구나 했어요..
다르젠 형제 감독의 첫 황금종려상 작품 맞죠? 여우주연상도 함께 수상했고.
이 영화로 인해 벨기에 정부가 로제타 플랜이라는 청년정책을 시행했다고 하는데 영화 하나로 바꿀 수 있는 세상은 결코 아니니..
20여년이 지난 지금의 청년들은 과연 로제타와 많이 다를까 생각해 보네요. 청년들 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들이. 다들 힘들테니.
찾아보니 이 감독들은 심사위원상을 제외한 모든 상을 수상한 진정한 칸의 사랑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안녕요정// 자탄소보다 관람의 고통이 조금 더 큰 작품이랍니다. 저도 영화관에서 본게 아니라 iptv로 보았어요. 2000원 주고.^^;; 저는 아직 환절기를 못보고 있네요. 말은 먼저 해놓고... 기생충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영화의 의미가 좀 더 특별할 것 같네요. 의미있는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리버피닉스// 맞습니다. 첫 황금종려상 수상작이죠. 이 영화로 인해 제정된 로제타법이 실제 그 당시 청년들에게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것 같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한, 모범적인 케이스로 뽑는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구요. 안보셨다면 꼭 보셨음 좋겠습니다.
로제타 보고 왔습니다.
윗분 말씀대로 두번 보긴 힘든 영화네요 ㅠ
그럼에도 감사인사와 우울해하지 마시라고 혁명전야님이 사랑하는 그 배우의 짤 하나 올리고 갑니다.
다르덴의 최고이자 최악의 영화
몇년전에 본거 같은데 마지막에 남우가 오토바이 부릉부릉 씬 있나요? 평론글에서 부릉부릉이 희망을 노래한다던데 뭔말인가 싶었는데 ㅋ
갓 20살때 충격준 영화가 레퀴엠이랑 로제타...이영화땜에 다른덴형제영화들 다 챙겨는 보고있는데 개봉했다니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