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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거짓은 참된 고통을 위하여!

[ 오빠! 우리 집 초인종에 누가 낙서해놨어! ]

핸드폰 너머 아내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어디서 도시괴담 같은 걸 들었겠지.
범죄를 저지를 목적으로, 초인종 주변에 대상의 정보를 체크해놓는다는 도시괴담.

" 어~어 괜찮아. 그거 아무것도 아니니까 너무 걱정 하지 마. 무서우면 오빠 갈 때까지 문단속 잘하고 있어~ "
[ 으..알았어 무서우니까 일찍 와! ]
" 어~ "

아내가 공포에 떠는 것도 이해가 갔다. 얼핏 보면 정말로 그럴듯한 괴담이니까.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글쎄?
범행을 위한 표식이 초인종 옆일 리가 없지 않은가? 어디에든 숨겨둘 수 있는 표식을, 대놓고 초인종 옆에 새겨둘 이유가 없다.

나는 일찍 퇴근해서 겁 많은 아내를 골려줄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실제로, 초인종 옆의 '표식'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 ... "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왜? 어떻게? 이게 어째서 여기에? 누가? 

[ A11 P1 0 ]

누가 '내 표식'을 알고 있는 걸까?

A11 - P1 - 0.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빈집.

그것은 10년 전-, 내가 빈집털이를 위해 쓰던 표식이었다.

.
.
.

초인종 옆은 아니었다. 내가 그 표식을 숨겨둔 곳은 시각의 사각지대, 숨겨진 위치였다.

그것을 쓰기 위해 나는 '전단지'알바를 했었다. 현관문에 전단지를 붙일 때는 의심받지 않고 표식을 새길 수 있었다.
표식을 새기는 방식은 간단했다. 빈집으로 의심이 가는 집의 벨을 누르는 것이다.

' 띵동- '

[ 누구세요? ]
" 예~ 이번에 저희가 치킨집을 오픈했는데요~ "
[ 네네- 수고하세요- (뚝!) ]

누군가 받으면 이렇게 꽝이다. 하지만 받지 않으면? 다음날 같은 시간대에 가서 다시 한번 벨을 누른다. 또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평일에 4일 이상 같은 시간에 집을 비운다면? 직업이든 취미생활이든, 고정적인 스케줄이 있다고 보면 된다.

전단지 알바를 하며, 한 동네에서 벨을 누를 수 있는 집은 수십 개. 그 중 '당첨'된 집은 다음 날도 다시 벨을 누른다. 4회 이상의 빈집이 확인된 집에는 '표식'이 남겨지게 된다.
표식은 어떻게 새기는가?
현관문의 아래에 눈에 띄지 않는 투명 테이프를 얇게 붙여놓으면, 이 문이 '언제 다시 열리는지' 확인할 수 있다.
오후 2시에 빈집이던 집에 테이프를 붙여놓고, 1시간 뒤에 체크하러 온다. 테이프가 무사하다면 다시 1시간 뒤에 체크하러 온다. 또 무사하다면 1시간.. 다시 1시간... 
이 작업은 동네를 돌며 후보군의 모든 집에 행해지고, 며칠 간의 반복을 통해 빅데이터가 모이면 어느 집이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확실히 빈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상이 나 혼자서 생각해낸 빈집털이의 방식이었고, 나는 잡히지 않았으니 누구도 몰라야 할 방법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표식이 우리 집에? 누가? 어떻게? 하필 나에게 일부러?
장난이 아니라는 건 표식의 정확성이 말해줬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라면, 아내가 요리학원을 다니느라 집을 비우는 시간이 아닌가? 
나는 뒷목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 오빠 봐봐! 맞지? 이거 이상하지? "
" 어? 어어... "

아내의 질문에, 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 계획대로 아내를 안심시키고 도시괴담일 뿐이라 말할 수 없었다.

" 일단은... 지워두자. 찜찜하네. "

나는 표식을 빡빡 지웠다. 그때도 내 머리는 이 상황을 필사적으로 이해하려 애썼고, 그 표정이 아내에게 불안감을 심어준 듯했다.

" 오, 오빠..이거 무서운 거야?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
" 응? 아.. 아니야, 별거 아니야 그냥 애들이 장난한 거겠지. 인터넷에는 이런 거 다 도시괴담이라고 하더라~ "
" 그래...? "
" 불안하면 집에 들어가 있어. 오빠는 다른 집도 이런 표시 있나 보고 올게. "
" 알았어. "

그래, 내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다른 집에도 같은 표식이 남겨져 있겠지.
나는 주변 집을 모두 돌았다. 초인종 옆이 아닌, 시야의 사각지대도 꼼꼼히 확인했다.

" ... "

아무 데도 없었다. 유일하게 우리 집 초인종에만 표식이 남겨져 있었다.
우연일까? 우연이 'A11 P1 0' 일 수가 있을까...? 
그럴 리가 없지. 이건 명백히 나를 노린 표식이다. 왜? 복수? 누가? 어떻게 알고? 
나는 평생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고, 게다가 10년 전에 이미 손을 씻었다. 아내를 만난 뒤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단 말이다.

마음이 불안했다. 아내가 내 과거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사랑하는 아내에게 내 추했던 과거를 들키게 된다면, 나는 견딜 수 없다. 상상만으로도 차갑게 소름이 돋는다.

며칠은 편안히 잠들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 오빠! 또야! 또 있어! "
" ... "

[ A11 - P2 - 0 ]

보란 듯이 초인종 옆에 새겨졌다. 아내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 오빠...나 무서워. 뭐야 이거? "

나는 침착하게 아내를 달랬다.

" 괜찮아. 그냥 동네 애들이 장난한 거야. "
" 어? "
" 어제 보니까, 동네 다른 집에도 있더라고. 동네에 꼬마 누구가 장난 한 것 같다던데? "
" 정말? 에이씨! "

내 말에 아내는 조금 안심한 듯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목적이 있다. 명백하게 목적이 있는 행위다. 뭘까? 누가 나를 알고, 또 무슨 목적으로 이런 메모를 남긴 걸까?
경고? 복수? 범행예고? 부정적인 단어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럴 순 없었다. 이제야 겨우 평범한 삶을 이루어냈는데! 쓰레기 같은 인생에서 벗어났는데!

나는 집 앞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기로 했다.

.
.
.

" 빌어먹을! "

어떻게? 나만 알고 있는 감시카메라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지? 
프로의 솜씨다. 그는 10년 전의 나처럼 감시카메라를 피할 능력이 있었고, 동네 사람 누구에게 물어도 인상을 남기지 않을 능력이 있었다.

" 오빠..벌써 며칠째야 이거? 나 무서워.. "
" 으음... "

아내에게 더는 동네 꼬마의 짓이라고 속일 수 없었다. 명백히 이상한 장난이었다.
안 그래도 겁이 많던 아내는 호신용품을 잔뜩 사들였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보름 동안이나 낙서가 지속되자, 아내는 아예 요리학원도 끊고선 집에 틀어박히기로 했다. 아내가 요리학원을 갔다 온 그 짧은 사이에 낙서가 새겨졌기 때문이다.
내가 퇴근할 때까지 아내는 문을 걸어 잠그고 집에만 있기로 했다.
그리고 최대한 일찍 퇴근한 나는,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 A9 - P6 - G1 ]

" ... "

실제로 내가 빈집털이를 할 때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표식이다. 하지만, 알고는 있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여자 1명.

몸이 떨렸다. 공포심이었다.
누군지도 모를 범인은, 아내가 요리학원을 그만둔 첫날에 표식을 바꿨다. 4일간의 확인 절차를 걸치지 않고도 '확신'하고 새겼다. 우리 집 사정을 꿰뚫고 있다. 어떻게? 누가?

" ...아! 여자 한 명...! "

이런 멍청한! 왜 몰랐을까! 그거...! 그것밖에 없지 않은가?!

떠올라 버렸다. 내가 10년 전에 손을 씻게 된 그 사건이, 떠올라 버렸다. 온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내가 빈집인 줄 알고 들어갔던 집에서, 살인을 저질렀던 그 날처럼-

.
.
.

여자 한 명이 있었다. 아무도 없어야 할 빈집에, 여자 한 명이 있었다.

[ 사, 살려주세요...! ]

그녀는 내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나는 당황했다. 이 동네에서 연쇄적으로 빈집을 털고 있는 상황에, 얼굴이 노출되어 버렸다.
내 머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맹렬히 돌아갔지만, 내 몸은 일단 그녀를 제압하기 위해 다가갔다.

[ 오, 오지 마세요...! 이러지 마세요...! 살려주세요...! ]

겁에 질린 그녀는 울며불며 뒤로 물러나, 베란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나는 간단히 문을 열었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 꺄아아악-! ]
[ 조, 조용히 못 해?! ]

나는 비명을 지르려는 그녀의 입을 억지로 틀어막았지만, 비명은 새어나갔다. 

[ 꺄아악-! 꺄아아악-!! ]

나는 머리가 하얗게 세, 그녀의 비명이 새지 않게 하는 것밖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몸부림이 격해질수록, 핏줄 돋은 내 손도 거칠어졌다. 작은 소리라도 새어나갈까 봐, 주변에 들릴까 봐, 정신없이 그녀의 머리를 압박했다.
내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 하아...하아... ]

그녀는 죽어 있었다.
나는 도망쳤다. 정신없이 현관문 밖으로 도망쳤다가-, 급히 되돌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흔적을 지웠다. 숨을 헐떡이며 모든 흔적을 지웠다. 

이제야 생각해보니, 그때 지우지 못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현관문 구석에 작게 새겨두었던, 내 '표식'.
매번 범행이 끝나면 지우고 떠났었지만, 그날만큼은 그것을 생각할 경황이 없었다.
그것이다. 그날 내가 남겼던 작은 흔적이, 10년이 지나 내 초인종 옆의 흔적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왜? 어째서? 

고작 문밖에 새겨진 표식 하나가지고 나를 찾아낼 수 있었을까? 연관 지을 수 있을까? 그것 하나로 모든 것을 추리해 낼 수 있을까?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럼 왜 10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무슨 목적으로?

" ... "

10년 뒤.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10년. 무엇을 위해? 복수?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복수...?

" !! "

내 아내를 노리는 것인가?!

그것밖에 없다! 이 표식을 새긴 사람이, 그 사건의 관계자라면 그것밖에 없다!
10년을 기다린 이유! 나를 죽이는 복수가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복수!!

" 미, 미친...! "

나는 미친 듯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었다! 손이 떨렸다!

" 혜화야-! 혜화야-!! "

빌어먹게도 들어가지 않는 열쇠 구멍을 긁어내듯이 맞춰 끼워-, 급히 돌렸다!

" 혜화야! 혜화야!! "

황급히 달려 들어간 그곳에-

" 응? 오빠 왜 그래? "
" 아...! "

아내는 무사했다. 안심하는 마음보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떻게 지키지? 아내를 어떻게 지키지?
아내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하지? 내가 이제 복수를 당할 테니, 당신이 몸을 사려야 한다고? 왜 복수를 당하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당신을 죽이는 게 복수라고??

"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왜 그래? "
" ...아, 아니야. 아니- 저녁에 외식이나 하자고.. "
" ?? " 

아내만은 안된다. 내 모든 걸 잃어도, 내 아내만은 안된다.

살인을 저지르고 폐인처럼 살던 나를 구원해준 내 아내 홍혜화.. 그녀는 내 전부다.
고아에 직업도 없던 나를 끝까지 믿어주었다. 나 같은 쓰레기도 인간으로 만들어주었고,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주었다.
남의 돈에 손 한 번 대지 않고, 성실히 일해서 겨우 결혼자금을 마련했다. 겨우 집을 구하고, 겨우 결혼을 허락받았다.
드디어 나도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는데! 
왜 이런 일이!!

" ... "

알고 있다. 내가 그랬었으니까.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행복을 내가 부쉈었으니까. 
두렵다. 아내를 잃을까 봐 두려워 미칠 것 같다. 그의 복수는 벌써 이루어지고 있었다.

.
.
.

언제까지고 일을 하지 않고 아내 곁에 붙어있을 순 없었다.
창문부터 문까지 온갖 보안장치로 도배했다. 아내에게는 집안 곳곳에 배치된 호신용품 사용법을 철저하게 가르치고, 거실에는 스마트 캠도 달았다. 근무 시간에도 틈틈이 아내의 모습을 관찰하고 대화했다.

초인종 옆에는 내 핸드폰 번호를 적어 놓았다. 그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빌었다. 그리고, 빌었다. 제발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
.
.

[ 송정동 ]

세 글자. 단 세 글자의 문자에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10년 전, 내가 그녀를 죽였던 그 동네였다.
내 모든 예상이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목적도 예상대로 일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

[ ... ]

" 여보세요...? 여보세요..? "

[ ...잘 사네. ]

" ! "

나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 자,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일부러...아니아니! 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저희 아내만은 살려주세요!! 예?! 제 아내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

[ ... ]

내 사과에도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말했다.

[ ...그래? 그럼 한 번 목숨을 걸어 봐. 소화전 안에 음료수가 하나 있을 거야. 독이 들었지. 네가 그것을 먹고 죽으면...네 아내는 살려주겠어. ]

" ...! "

이미 끊어진 수화기를 귀에서 내릴 수 없었다. 죽음. 죽음.. 
머리가 복잡했다.

아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
.
.

결국, 생각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아내가 받게 될 슬픔과 충격을 달랠 수 없으리라.

' 철커덩-! '

그의 말대로, 소화전 안에 병 음료가 들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집어 드는 손이 떨렸다.

" 하아... "

생각이 많아지면 힘들어진다. 나도 힘들고, 아내도 힘들어진다. 
나는 뚜껑을 돌리고, 단번에 병을 들이켰다!

' 꿀꺽 꿀꺽 꿀꺽 꿀꺽-. . . '

눈을 질끈 감고 예민한 목 넘김을 느꼈다. 뜨거울까? 폐가 조여올까? 신물이 역류할까?

" 크, 하아-. . . " 

바닥에 주저앉아, 마지막으로 아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 혜화야... "

나는 절로 눈이 감겼다.

'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

" ?! "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 여보세요..? "

[ ... ]

" ...저는 먹었습니다. 약속을 지켰으니까, 아내만은-. . . "

[ 다행이다. ]

" 네? "

[ 다행이다. 목숨을 걸 만큼 그 여자가 소중하구나. 다행이야. 이젠, 마음 놓고 복수를 할 수 있겠어 ]

" 뭐?? 뭐..! 뭣! 당신 무슨 소리야! 이! "

[ 기다려. 너도 내 심정을 느끼게 될 테니. ]

" 이, 이봐요! 이-! "

전화가 끊기며, 내 머리속 사고도 끊겼다.
무슨 소리지? 마음 놓았다는 게 뭐야? 복수를 한다는 게 뭐야? 나는 독약을 먹었잖아? 왜 그래? 약속은? 무슨 소리야? 안돼! 안 된다고! 그러지 마! 왜! 왜왜왜!!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미친 듯이 집으로 달렸다!

문을 쾅쾅! 두드리고, 열쇠를 꺼냈다! 

" 혜화야! 혜화야!! "
[ 어~ 오빠? ]

아! 무사하다! 나는 얼른 열쇠를 끼워 넣었-

?! 

.
.
.

" 으... "

무슨...무슨... 무슨 일이...어..

아-!!

" 혜, 혜화야!! "

나는 벌떡 일어났다!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옥상이었다!
빌어먹을! 약을 탔구나! 독약이 아니었다고!

나는 당장 계단을 내달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불안감에 터질 것만 같았다. 

" 혜화야-!! "

안돼! 현관문이 열려 있다! 열려있다!!
나는 곧장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디야? 어디지?! 혜화야 어디야?! 

" ! "

베란다...! 베란다! 베란다!!
나는 황금히 베란다 커튼을 젖혔다!

" ... "

아...아...아아....아아아아...

" 으아아아아아아아------------!! "

.
.
.
.
.
.

사내는 폐인이 되어 있었다.
매일 술에 절어 있었다.

매일 울고, 소리치고, 때려 부수고, 증오하고, 후회하고, 자책하고, 원망했다.
한계에 달한 폐인 생활을 이어가던 사내는, 베란다로 나갔다. 

아내가 죽었던 자리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사내는 난간 위로 올라섰다.

" 미안해... "

그것이 사내가 남긴 유언이었다.

.
.
.

" 아아아아아아-! "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사내는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놀라 커진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가 있는 곳은 병원 같아 보이는 방의 침대 위였다. 
사내의 손이 머리를 더듬었지만, 상처가 없었다. 분명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진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 뭐, 뭐야? "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사내의 눈이 흔들릴 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기분이 어때? "

양복 차림의 남자가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 난 알지 그 기분. 네놈 덕분에 말이야. "
" ?! "
" 송정동. 네가 죽였잖아? "
" 아...! "

사내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 이제 알겠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심정을 말이야. "
" 으...으...? 이, 이...! "

당황하던 사내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 네가 혜화를...! 네가...! 이 새끼야-!! "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들려는 사내! 
한데-,

" ?! "

' 쿠당탕! '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사내의 몸은 너무나 허약해,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 크..크윽...?! "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 왜?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날렵하게 이집 저집 빈집털이하던 시절 같지 않냐고. "
" 너, 너 이 새끼!! "

남자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입이 벌어졌다.

" 아... 너무 행복해.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몰라. 너에게 완벽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내가 겪었던 고통을, 너에게 똑같이 전해주고 싶어서! "

남자의 말에 사내는 눈시울이 붉어져 악을 썼다!

" 왜!! 왜 혜화야!! 나를 죽여야지, 왜 혜화를 죽였어 이 새끼야!! "

남자는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크게 웃다가, 물었다.

" 혜화가 누군데? "
" 뭐 이 새끼야?! "
" 아니아니, 잘 생각해 봐. 홍혜화가 누군데? "
" 뭐라는 거야 이 새끼야!! "

남자가 차갑게 정색하며 물었다.

" 홍혜화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 "
" ?! "

남자의 말에 사내의 동공이 흔들렸다! 

" 무, 무슨...! "
" 기억나냐고. 안 나지? 불과 며칠 전에 죽은 와이프인데...얼굴이 기억 안 나지? 그렇게 사랑한 사람인데, 전혀 기억 안 나잖아? 안 그래? "
" 뭐...뭐...! 무... "

사내는 무어라 반박하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남자는 정말로 즐거운 듯, 너무나 즐거워 소름이 돋을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 정말로 너 같은 쓰레기를 사랑해줄 여자가 이 세상에 있을 거라 생각했어? 너 같은 살인마 쓰레기를 믿고, 보듬어주고, 구원해줄 그런 여자가 있을 거라 생각했냐고. "
" 뭐...? "

남자는 눈을 번뜩이며 사내의 귓가에 다가가 말했다.

" 홍혜화는 가상현실로 만들어 낸 가짜야. "
" ?! "
" 너에게 똑같은 고통을 주기 위해서, 내가 만든 가짜라고. "
" 아, 아니야..아니야...! "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부들부들 떠는 사내!
남자는 그 귓가에 똑똑히 들려주었다.

"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정신 차리고 착하게 산다.. 번듯한 직업도 구하고, 집도 구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산다-.. 너 같은 쓰레기에게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어? "
" 아..아아... "

사내는 충격에 할 말을 잃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아내의 얼굴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는 만족스럽게 물었다.

" 어때? 내 복수가? 많이 괴로웠어? 자살을 하고 싶을 만큼, 그렇게나 괴로웠어? "
" 으..으으...! "

부들부들 떠는 사내의 얼굴을 보며, 남자는 돌아섰다.

" 재밌어! 너무 재밌어! 기대해! 한 번 더 겪게 해줄 테니까! "
" 아, 안돼...! 안돼! "

남자는 웃으며 방을 나갔다-

.
.
.
.
.
.

침대에 묶여있는 사내의 눈은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지금도,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고통이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가상현실이란 걸 알고도 그랬다.
그런데 그것을 또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소중해지고, 행복해지는 과정을 다시 겪고.. 그것을 모두 잃는 경험을 다시 겪어야 한다고? 
너무나 두려웠다.

" 혜화야... "

사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가상 인물이란 걸 알아도,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얼굴도 전혀 떠오르지 않지만, 홍혜화란 이름 석 자 만으로도 이렇게 눈물이 흘렀다.

이런 사랑을 겪어보고 나니까, 평범한 가정의 행복을 겪어보고 나니까, 사내는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질러 왔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빈집털이범으로 그동안 저질렀던 죄들을 후회했다.
왜 자신은 빈집털이 따위를 했을까? 남의 가정의 평범한 행복들을 그렇게 짓밟아 왔을까? 
거기다가 살인까지...!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모든 죄를 씻어내고 싶었다. 
송정동에서의 그날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내 손으로 죽였던 그녀를, 그 남자에게 되돌려주고 싶었다.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 그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 .

" ...?! "

울먹이던 사내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갔다. 천천히, 조금씩, 굳어갔다.

" ... "

어떤 사실, 어떤 사실에 사내의 눈동자가 떨렸다!


" 기억이 나지 않아... 내가 죽인 그 여자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아...! "

마치, 홍혜화의 얼굴처럼.

.
.
.

" 난 죽이지 않았어! 난 죽이지 않았다고-!! "

침대에 묶인 사내는,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온몸으로 악을 쓰며 발악했다!
그러자 곧, 문이 열리며 '남자'가 나타났다.

" 이, 이 새끼!! 너 이 새끼-!! "

남자는 사내에게로 다가가 내려다보았다.

" ... "
" 네가 조작했지?! 내 기억을 조작했어!! 이 씹새! 나를 살인범으로 만들어서 복수니 뭐니 떠들어대고!! "

남자는 나른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 아- 이런이런. 재밌었는데. 쩝... "
" 야 이 씨뱔새끼야-!!@#^@#^! "

남자는 발광하는 사내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 아쉽네요. 눈치챌 줄이야.. 당신은 '폐기'해야겠군요. "
" 이...! 이 씨뱔새끼야-!! "

발버둥 치는 사내를 내려다보며, 남자는 주사기를 꺼냈다.
무심한 얼굴로, 사내의 목에 주사기를 주입하는 남자-

" 이, 이 씨뱔-!! "
" 편안히 잠드시길! 이번엔 정말로 독약이랍니다? 하하하. "

사내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경직된 근육의 핏줄이 돋아났다!

" 너...! 너...이 씹새...! 너 이이익...! 이 새...끼! "

이를 악만 사내의 붉게 충혈된 눈이! 부들부들 억울하게 부릅뜬 그 눈이! 남자를 노려보며 색을 잃어갔다-

" ... "

사내는 죽었다. 죽어서도 억울함에 눈을 감지 못할 얼굴로-

.
.
.
.
.
.


[ 저기...이해가 안 가네요. ]

[ 무엇이 말입니까? ]

[ 첫 번째 복수는 알겠습니다... 똑같은 고통을 느끼게 하는 거요. 그런데, 어차피 마지막에 죽이실 거였는데... 어째서 그의 기억을 지우신 거죠? 자기가 죽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시다니...? ]

[ 완벽한 복수를 위해서입니다. ]

[ 네? ]

[ '자신은 아무런 죄도 없는데, 지금 억울하게 고통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죽는 게 억울해서 미칠 것 같다!' ...그런 심정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

[ 아...! ]

[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편안한 안식을 맞이한다? 절대 허락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고통을...! 1초의 틈도 없이, 고통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제 복수입니다. ]

댓글
  • 복날은간다 2017/02/11 02:14

    어때요? 이번은 좀 이해하기가 괜찮나요?;
    제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제 머릿속에서만 혼자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지도 않고 당연히 이해가 되는 부분으로 넘길 때가 많거든요; 이야기를 한번에 써서 그런가;;
    이번에는 그래도 다 쓰고 난 뒤에 다시 두 번 세 번 읽었네요; 괜찮기를 바라며~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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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동뮤직션 2017/02/11 02:15

    우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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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구공사 2017/02/11 02:47

    진짜 재밌네요 진짜 와 전혀 예상을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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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변인 2017/02/11 02:53

    개소름.....ㄷㄷㄷ
    몸이 떨릴 정도의 소름이 ㄷ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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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마인 2017/02/11 02:55

    언제나 그랬듯 최고입니다. 복날님 글 보는 맛에 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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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lanistar 2017/02/11 02:56

    회상에다가 액자식 구성까지..!
    자유로운 시점이동에 정말 감복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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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쿵코앜우쾅 2017/02/11 03:05

    ㅋㅋ이해 안된다는 덧글이 많이 신경쓰이셨나봐요 이번글은 아주 명쾌하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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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놉맨 2017/02/11 03:13

    와.. 이번편 저릿저릿 하네요. 너무 슬픕니다.. 저렇게 복수하면서 과연 저 남자는 통쾌했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이번 편도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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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ipHop 2017/02/11 03:22

    현실에선 언제쯤 저런 VR을 경험 할 수 있을지... 저런 스토리 만들어서 가상에서 저도 한 번 죽어보고 싶네요. 죽음이 어떤건지 무서우면서도 기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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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una 2017/02/11 05:32

    항상 재밌게 보고있지만 오늘 글은 정말 재밌네요~ 수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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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집중독 2017/02/11 06:09

    웹툰 죽음에 대하여가 생각나요!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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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들린검사 2017/02/11 07:41

    역시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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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잡팅 2017/02/11 08:45

    하아.. 출근길에 보는데 소름이돋으면서 숨이턱막히네요ㄷㄷㄷ  진짜 복날님글은 읽으면읽을수록 대단해지시는거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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